교계/교회

[설교] "깨어 있으라"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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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0:6-9, 데살로니가전서 5:1-6, 마가복음 13:35-37

설교문

우리는 태양의 주기에 따라 '양력'(陽曆)을, 혹은 달의 주기에 따라 '음력'(陰曆)을 씁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끄시는 구원의 역사(役事)를 따라 '교회력'(敎會曆)을 씁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待臨節, Advent)을 시작으로 '성탄절'(聖誕節, Christmas), '주현절'(主顯節, Epiphany), '사순절'(四旬節, Lent), '부활절'(復活節, Easter), '성령강림절'(聖靈降臨節, Pentecost), 그리고 '창조절'(創造節, Season of Creation)로 이어져 끝납니다.

대림절의 시작인 오늘을 우리는 '영원주일'로 지키려 합니다. 독일의 루터교회에 영원주일을 지키는 전통이 있습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가까이에 묘지를 조성했는데,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죽은 자들의 부활이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원주일은 세상을 떠난 성도와 가족을 추모하는 한편, 자신에게도 찾아올 죽음과 이후에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그려보는 시간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히브리서 9:27)이지만,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 앞에서 영원을 바라봅니다. '시간 안'에서 '시간 밖'을 바라봅니다. 인간의 시간은 '시간 안'에 있어 유한(有限)이고 필멸(必滅)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시간 밖'에 있으니 무한(無限)이고 영원(永遠)입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다른 교파나 종파와 비교해 의례(儀禮)가 소홀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개신교인 중에는 장례식에서 고인(故人)을 떠올리며 우는 사람을 훈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국에 가셨는데 왜 우냐'라며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인 양 바라봅니다. 위로의 말이라며 내뱉은 말들이 때론 비수(匕首)가 되지요. 살다 보면 때론 바른말이 더 상처가 되곤 합니다. 물론 죽음은 천국 문을 통과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남은 자의 슬픔과 아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상실(喪失)을 충분히 애도(哀悼)할 수 있게 지켜줘야 합니다. 슬픔을 슬퍼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릴 때 같이 울어야 합니다. 슬픔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안고 가야 할 경험입니다. 슬픔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돌봐야 할 경험입니다. 슬픔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보듬는 것입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너무 슬픈 슬픔이어서 남몰래 오열(嗚咽)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느 시인은 우리나라 교과서에 눈물이 없다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참매미는 6년간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다가 성충이 되어 탈피를 거쳐 약 14일을 생존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글 안에는 매미가 그 긴 6년의 세월 동안 깊은 어둠 속에서 기다린 긴 기다림이라든지 죽음으로부터의 공포, 희망에 대한 설렘, 그리고 기다림에 대한 눈물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물엔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슬픔은 슬픔으로 씻어내야 합니다. 상심은 상심으로 위로해야 합니다. 슬픔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큰 아픔의 늪으로 깊이 빠집니다. 오히려 슬픔에 녹아들어 내가 더 큰 슬픔이 될 때 슬픔에서 회복됩니다. 사실 슬픔 가득한 세상에 '가장 슬픈 슬픔'이 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의 예루살렘 성이 전쟁으로 파멸할 것을 보시고 우셨고(누가복음 19:41),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잃어버린 마리아가 그 발 앞에 엎드려 울 때 마음이 비통하여 우셨습니다.(요한복음 11:35)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슬픔 속에 들어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슬픔이 되신 분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시고 그 아픔에서 건지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5)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사망'(死亡)이라고 말하지만, 성서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형제[자매]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3-14) 했습니다. 신약성서 27권 중에서 가장 오래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이 한 말입니다. 바울은 또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라고 말하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린도전서 15:51-54)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께서도 한 관리가 찾아와 자기의 딸이 죽었다며 살려주시기를 간청할 때 그 아이가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9:24, 마가 5:39, 누가 8:52). 잔다는 건 깨어날 아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에게 부활의 새 아침이 기다리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부활신앙이 위대한 것은 그가 부활을 먼 미래의 일로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날마다 죽고 다시 살아 새로운 존재가 되는 오늘의 과정으로 이해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한 바울은 이어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라고 선언합니다. 날마다 죽는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죽음을 잠으로 이해한 바울은 필시 잠을 죽음으로도 이해한 것 같습니다. "내가 누워 곤하게 잠 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편 3:5, 새번역)라고 한 시편 기자는 노래했습니다. 한국의 어느 시인은 이것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 / 오늘도 하루 / 잘 살고 죽습니다 / 내일 아침 잊지 말고 / 깨워주십시오."(나태주, <잠들기 전 기도> 잠을 죽음으로 이해한 시인은 다음 날 아침 다시 일어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의 자고 깨어남이, 그리고 살고 죽음이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음을 깨달으니 그의 입에서는 또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 하루 / 주신 목숨 / 감사히 살았나이다 // 내일도 하루 / 주실 목숨 / 감사히 살게 해주소서."(나태주, <오늘 하루>) 인간은 인생의 3분의 1을 잡니다. 날마다 자고 깹니다. 그 반복되는 일상을 부활의 신앙으로 성찰한 겁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매일 죽고 다시 살아나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다른 시인이 이 신앙의 신비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매일 밤, 잠드는 시간을 / 죽음에 드는 것 같게 하소서 / 하루 한 번씩 / 어김없이 잠드는 것과 같이 / 내 안에 자라는 / 나쁜 습관, 나쁜 마음도 / 하루 한 가지씩 죽게 하소서."(최옥, <마르타는 오늘도 죽습니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라고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은 말했습니다. "죽음은 무한한 경험의 세계 /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 삶의 다른 일들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죽음이 사망(死亡), 곧 '죽어서 망함'이 아니라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어느 신학자는 "죽음은 존재의 다른 형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관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한 공간 안에 있어야만 관계가 되는 건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존재와만 관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 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8) 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하듯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존재와도 관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욱 깊고 심오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눈으로 볼 수 없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존재의 다른 형태로 더욱 깊은 관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으면 죽음은 존재가 사멸하는 허무의 세계가 아니라 존재가 서로 다른 형태로 영원한 관계를 시작하는 관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로마서 14:9)가 되신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은 산 자만의 주님이 아닙니다. 그분 안에 잠자는 자들의 주님도 되십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매리 프라이(Mary Frye, 1905~2004)는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라는 유명한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던 겁니다. 지금까지 이 노래는 미국 원주민들에게서 구전(口傳)되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경건한 크리스천인 매리 프라이의 시라는 설이 더 유력합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 나는 천 갈래 만 갈래로 부는 바람이며 /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 말없이 날아오르는 새들이고 /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오늘은 영원주일이자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영원주일은 인생의 죽음 앞에 영원을 바라보는 시간이고, 대림절은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묘하게 끝과 시작이 하나로 만나는 주일입니다. 이는 참으로 '복음의 역설'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이사야 40장에는 고통스러운 노역(勞役)의 시대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는 선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은 '위로'의 메시지로 시작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 왜 위로합니까?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기]"(2절) 때문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5절)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가 여호와께 묻습니다.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6절)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6, 8절) 도대체 무엇이 위로의 말씀입니까? 우리의 인생이 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마르는 풀과 같다는 깨우침이 무슨 위로가 됩니까?

위로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8절)입니다. 모든 인생은 유한합니다.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불멸의 사랑입니다. 사망의 권세 깨치고 부활한 승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위로는 바로 이 사랑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인데 그 뜻은 '출현', '도래', 혹은 '등장'입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게 "Advent"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신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게 "Advent"입니다. '영원'이 '시간'을 찾아오십니다. '무한'이 '유한'을 품으십니다. '사랑'이 '죽음'을 삼키십니다. 하늘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그 보좌를 버리시고 자신을 낮춰 끝까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빌립보서 2:5-8)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 '임마누엘'(God-with-us)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사랑이 예(여기로) 오십니다." 불멸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이 오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요한1서 2:25)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받는 위로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시작할 희망의 근거입니다.

사실 교회에 여러 해 다니면 대림절이니, 그리스도가 오신다니 하는 소리에 익숙해져 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새 신자들은 보라색 배너와 대림절 화환을 보면서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이것들도 단순한 절기의 장식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잠자는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웁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잠들지 않았으나 영적으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아니, 현대인들은 각종 카페인 음료로 육신이 깨어 있으려 노력하지만 정작 영적으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이럴 때 오늘 읽은 '마가복음의 알람'이 필요합니다. 새벽에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며 단잠을 깨우듯이 작은 묵시록(黙示錄)이라 불리는 마가복음 13장의 시끄러운 알람이 필요합니다.

'평화의 마음'이라는 이름의 예루살렘 성이 전쟁과 폭력으로 멸망할 것을 보고 우신 예수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환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8절) 그때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9, 12절) 그리고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14, 19절) 이 환난은 무시무시한 우주적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4-25절)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26절)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28-29절)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니... 주의 하라 깨어 있으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32-36절)

대림절 첫째 주일, 곧 교회가 성탄절 이야기를 시작하는 때에 이런 본문을 택한 걸 이상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하고 캐럴을 틀어놓고 아이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시즌에 느닷없이 종말과 대재앙을 이야기하니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혹 이렇게 두렵게 보이는 대림절은 건너뛰고 곧바로 즐거운 분위기의 성탄절로 가면 안 될까요? 하지만 마가는 이런 때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단지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만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마가와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누가도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돌며 또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면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누가 21:27) 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다시 오실 이 주님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누가 21:28)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누가 21:31)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십니다. 이것이 대림절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깨어 있어 이 기쁨을 준비하기 바라십니다.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릴 때 가장 중요한 건 깨어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누가 21:34)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우리만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함께 깨어 일어나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3-14) 했습니다. 그 때에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리도전서 15:53)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당당한 개선가(凱旋歌)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사랑의 우주적 승리입니다.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이 노래한 것처럼, "짧은 한잠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리니, / 더 이상 죽음은 없다.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존 돈,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 Death, Be Not Proud>)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하나님 품에 떠나보내고 이 땅에 남겨진 이들을 위로하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곧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과 우리가 다시 만날 그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고]...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권면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15:2, 6-8, 11-13)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대림절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기다리며, 이 땅에서의 이별을 너무 아파하지 말고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히브리서 9:27)이지만,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 앞에서 영원을 바라봅니다. '시간 안'에서 '시간 밖'을 바라봅니다. 시간의 끝에서 시간의 시작을 바라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편 62:1) 했습니다. 나는 오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나의 구원과 생명과 기쁨과 참 평화가 오직 그에게서 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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