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새벽 별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Dec 05, 2022 05:30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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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호세아 6:1-3, 에베소서 5:8-14, 마태복음 2:1-10

설교문

작년 이맘때의 일입니다. 어느 큰 사거리를 지나는데 한 대형건물에 이런 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가슴에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참 좋은 말이어서 즉시 메모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가슴에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제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20여 년 전 성지순례를 할 때, 유대광야에서 일행이 잠시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불빛이라곤 하나 없는 캄캄한 광야에서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을 보았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고단한 몸을 잠시 모래밭 위에 누이고 별을 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생각났습니다. 제 인생에도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매 순간 길을 찾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늘 넓고 쉬운 길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속에 섞여 함께 걸으면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길을 걸으면서도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젊은 윤동주 시인도 <길>에서 이렇게 길 잃는 자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잃어버렸습니다. /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1941.9.31.)

길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혼미한 시대입니다. 길이 없는 시대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늘을 보면 됩니다. 암흑같이 캄캄한 세상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밤하늘에 총총히 박히 별들을 보면 됩니다. 고단한 역사, 갈 길이 없던 이 민족에게 그래서 별을 보고 그리워하는 시인들이 유독 많았나 봅니다. 우리 문학에서 '별의 시인'으로 알려진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하나는 윤동주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선입니다.

갈 길 잃은 민족의 운명을 슬퍼하던 윤동주는 밤하늘을 별을 '그리움'으로 평생 바라보며 그리워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시 <별 헤는 밤>에서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와 같은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던 시인은,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 내 이름자를 써보고, /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랬나요.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자기]의 별에도 봄이 오면... [자기]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라며 시인은 봄을, 민족 독립의 봄을 그리워했습니다. 그에게 별은 그리움이고 희망입니다.

윤동주와 함께 '별의 시인'이라 불리는 이성선은 마음결이 순해서 작은 일에도 곧잘 상처받는 영혼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늘 글썽한 눈매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선량한 눈빛으로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별을 우러르며 살았던 시인은, 지상의 일보다는 하늘의 일을 늘 염두에 두면서 산 시인입니다. 그에게 별은 거의 종교적이고, 이 땅의 아픔을 위로하는 하늘의 위로와 같은 것입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다 /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 별아, 어찌하랴. /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이성선, <별을 보며>).

너무 가난하여, 너무 고통스러워 흔들리며 쓰러져도 밤하늘의 별은 늘 그 자리에 눈물처럼 빛납니다. 너무도 마음결이 순한 시인은 그 별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아 혹시라도 별들이 더럽혀지지나 않을까 걱정합니다. 마음이 이렇게 깨끗할 수도 있나요. 밤하늘의 별쯤 쳐다보는 건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는 우리네 마음을 부끄럽게 합니다. 하지만 이 힘들고 어지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비추는 그 황홀한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도대체 인간은 이 땅을 무슨 힘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시인은 지금 자신의 고향 강원도 고성군의 옛 집터에 시비 하나로 서 있습니다. 시비 역시 시인을 닮아 맑고, 훤하고, 깨끗합니다.

구약성서의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몰락할 무렵(BC 721)까지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멸망한 민족 앞에서 그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세아 6:1-2) 첫째 날엔 우리를 치셨으나 둘째 날에는 살리시고 셋째 날에는 일으키시리라는, 그렇게 여호와의 치유와 회복이 빠를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 6:3)

"여호와를 알자" 했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 했습니다. 그는 어떤 분이십니까? 여호와는 "새벽 빛 같이 어김없이" 나타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오래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면 그 비가 온 땅을 적시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새벽 빛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둠이 가장 깊었을 때 터져 나오는 그 빛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라고 노래한 시편 46편 기자는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편 46:1, 5)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슬피 울던 여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일도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누가 24:22, 마태 28:1) 일어난 일입니다. 새벽은 모든 시간의 시작입니다. 새벽 빛은 모든 빛 중의 빛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빛으로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요일 1: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빛으로 표현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첫째 날에 만드신 것도 빛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세기 1:3) 빛과 존재가 하나입니다. 빛이 없을 때 세상은 혼돈이었으나 빛이 있으니 질서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빛을 생명의 원천으로 묘사합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편 36:9) 성서는 또 빛을 구원과 행복으로도 묘사합니다. 이사야는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이사야 60:19-20)이라며 패망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행복을 예언했습니다.

신약에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시는 빛으로 묘사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한 1:9)라고 하면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 1:4) 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세상을 비추는 생명의 빛으로 소개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 8:12)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한 12:46)

그렇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분이 내 안의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 5:14)라고 선포합니다. 주님만이 아니라 나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16)라고 명합니다. 누가는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누가 11:35)라고 성찰을 명합니다. 바울도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권면하면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베소서 5:8-9)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의 세력을 주의하라고 경고하면서(고린도후서 11:14), 빛이신 하나님께서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실]"(고린도전서 4:5) 때까지, 우리는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고]"(로마서 13:13) 선한 싸움을 싸우자고 권면합니다. 보십시오. 성서는 이렇게 온통 빛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생명의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신 참 빛이십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 1:5)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한 1:11)라고 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환영하지 못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오한은 그것보다 더 무서운 진실을 말해줍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요한 3:19)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의 부끄러운 행위가 드러날까 무서워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한다]"(요한 3:20) 했습니다. 어떻게 어둠이 빛에 저항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빛을 막아서면 그림자가 생깁니다. 진리와 생명의 빛이 왔는데 등 돌리고 막아서면 내 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 어둠이 드러날까 두려워 사람들은 빛을 향해 돌아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합니다. 무서운 자기 최면이고 기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색채는 빛의 고통이라는 괴테의 성찰은 참 맞습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색채는 빛의 고통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산과 바다가 산과 바다의 색깔을 내는 것은 빛의 고통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꽃과 노을이 꽃과 노을의 색깔을 내는 것은 빛의 고통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빛깔이 그저 빛에 의해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운 색채를 내기 위해 빛이 고통스러웠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지구의 모든 아름다운 풍경은 빛이 빨, 주, 노, 초, 파, 남, 보로 찢기는 고통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서산마루에 해가 지는 장엄한 광경을 볼 때마다 넋을 잃곤 하는데, 그 찬란한 노을빛이 빛의 고통이었다니요! 이 세상 만물이 빛의 고통이 없으면 제 색깔을 낼 수 없다는 괴테의 이야기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비추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러나 그 빛은 멀찍이서 홀로 빛나는 빛이 아닙니다. 그 빛은 우리의 고통과 함께하는 빛입니다.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는 빛입니다. 빛이신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습니다]."(이사야 53:4) 빛이신 하나님은 빛의 고통으로 만물을 아름답게 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빛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 빛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한 악마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 사용해왔던 도구를 팔려고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도구의 종류는 참 다양했습니다. 악마가 사용하는 도구답게 흉측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열된 도구들 한쪽에 값을 매기지 않은 작은 쐐기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건 뭐죠? 왜 값을 매기지 않았나요?' 물건을 사러 온 다른 악마가 궁금해 물었습니다. '응, 그건 절망이라는 도구인데, 파는 게 아니야. 난 저걸로 틈을 벌려 강하다고 하는 어떤 사람도 쓰러뜨리지. 그래서 다른 건 다 팔아도 저것만은 안 팔아.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거거든.' 그렇습니다. 절망은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내 마음의 틈새에다가 절망이라는 이름의 쐐기를 박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는 정치범으로 옥에 갇혀 27년이나 보내야 했습니다. 그가 독방에 갇힌 지 4년째 되던 해에 그는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이듬해에는 큰아들을 자동차 사고로 잃었습니다. 아내와 딸은 흑인 거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 조치되었습니다. 둘째 딸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가족이 고통 받는다고 생각될 때마다 그의 절망감은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감옥에 있은 지 14년째 되던 해에 맏딸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손녀가 곧 태어나니 그 아기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감옥으로 편지를 보낸 맏딸은 손녀의 이름을 지었느냐고 만델라에게 물었습니다. 만델라는 작은 쪽지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그 쪽지를 조심스럽게 펼쳐보다가 딸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쪽지에 적힌 손녀의 이름은 바로 '희망'이었습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가장 어두울 때 하나님은 우리를 비추십니다. 새벽 빛 같이 비추십니다.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이 없다]" 했습니다. 인생길은 가도 가도 모래뿐인 광야 길과 같고 또 거센 풍랑 몰아치는 어두운 바다의 항해 길과도 같습니다. "광야 마른 바람 헐떡이며 달려들고 / 휘도는 물고기 떼에 일렁이는 파도 / 그 넘실거리는 바다 위를 걸어서 / 우리 곁으로 오시는 주님"은 "인생 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이 / 기준 삼아 바라볼 별이 되시고 / 펼쳐 세워 의지할 돛" (김안식, <온몸 고백>)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이상한 별을 보고 길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으나 그 별을 따라나섰습니다. 성서는 그 별을 '그의 별'이라고 했습니다. 아기 예수의 별입니다. 베들레헴의 별입니다. 헤롯을 만난 박사들은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니 다시 그 별을 따라가다가 아기 예수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자 그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태 2:10) 했습니다. 그의 별이 그가 계신 곳으로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아기의 이름이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사야 9:6)이라고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자는 동안에 평화의 왕이 세상에 탄생했습니다. 그때 그 새벽 별이 홀로 밤새껏 이루어진 하나님의 그 위대한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았습니다. 온 세상은 캄캄하게 어두웠으나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분의 빛이 캄캄한 온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이 묻혔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빛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죄악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모릅니다. 빛이 어둠이 비치되 깨닫지 못합니다. 그가 이 땅에 왔으나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한 1:12)라고 선포합니다. 이 죄악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주 오심을 모르나 주님을 영접하는 여러분 마음속에 오늘 생명의 빛이신 주님이 오십니다.

20여 년 전 성지순례 길에서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광활한 유대광야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인간의 불빛이라곤 하나 없는 암흑 속에서 제 위로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가슴에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말이 맞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찬송가(88장) 가사처럼,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입니다. 가슴에 이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절대로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기 때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번, "눈을 높이 들어"(이사야 40:26) 저 별을 바라보십시오. "인류의 소망과 기쁨의 원천, 그리고 내 생명의 힘의 근원"(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이신 저 새벽 별을 바라보십시오. 동방의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한 그의 별이 오늘도 여러분을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겁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린도후서 4:6)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빛을 마음에 간직한 분들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빛의 자녀들'처럼 사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십시오. 그리고 새벽을 깨우십시오. 다윗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편 57:8) 했습니다. 새벽은 동트기 전, 만물이 깨어나기 전의 시간입니다. 새벽 빛은 인간의 문명의 빛을 넘어서 하나님의 빛, 창조의 빛입니다. 빛의 자녀이신 여러분, 첫새벽, 곧 신(新)새벽을 깨우며 "빛의 길을 가는"(찬송가 98장)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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