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 리뷰-②: 중세와 근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용기들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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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는 출판되었을 당시 대학의 필독서 목록에 빠짐없이 올랐고, 신학적인 대화에서는 항상 이 책의 제목이 거론되었다. - 「존재의 용기」 서문-

일상에도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불안과 절망이 없었던 시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우리 시대 현대인들이 떠안은 불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다. 그래서 다양한 '용기'의 담론들이 나온다. '세계'는 물론 '너'에 대해서도 용기가 필요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폴 틸리히의 명저 《존재의 용기》를 소개한다. 그는 현대의 초입, 절망과 상실의 시대를 살과 뼈로 겪으며, 비존재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용기를 구하고자 했다. 그가 길어올린 것이 '존재의 용기'이다.

이 책 소개는 3번에 나누어서 한다.
①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불안들을 해부해 보면
② 중세와 근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용기들의 실체
③ 의미 상실의 시대에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존재의 용기' 

<2> 중세와 근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용기들의 실체

삶의 도처에 죽음의 불안, 무의미함의 불안, 정죄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삶을 지속할 용기를 냈다. 역사 이래 역사는 끊긴 적이 없다. 틸리히는 용기를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자기 긍정"이라고 정의했다.

죽음, 절망, 죄의식의 위협 가운데서도 자기를 긍정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아", 즉 자기 자신이다. 틸리히가 말하는 자아의 자기 긍정은, 단지 윤리적 혹은 이성적 긍정이 아닌, 저 심부로부터 저 심연에까지 이르는, '존재론적인 자기 긍정'이다. 그리고 비존재의 살벌한 위협 가운데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이 용기를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라 하였다.

그런데 용기를 가지는 주체의 '자아'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자아는 세계에 속해있고,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 "자아는 자신이 세계로 삼고 있는 그 세계의 일부이고, 세계는 이러한 개별적인 자아 없이 온전한 세계가 되지 못한다." 일상 언어로 말하면, 개인은 사회에 속해있고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틸리히는 용기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사회 즉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가지는 용기이고, 다른 하나는 온전히 자기 자신에 집중하여 가지는 용기이다. 전자는 집단, 사회, 공동체와의 관계이고, 후자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다. 틸리히는 전자를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The Courage to be as part)라 하였고, 후자를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The Courage to be as oneself)라고 이름 붙였다.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 (The Courage to be as part)

역사적으로 보면 고중세인들이 가졌던 용기는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에 훨씬 가깝고, 근세부터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의 자아 주체성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후부터 보다 명확하게 확립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속한 집단 속에서 찾았다. 고대 히브리인이 '민족 밖'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던가, 중세 유럽인이 '교회 밖'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던가 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틸리히는 중세시대와 봉건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졌던 용기는 근본적으로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였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중세 유럽을 보면, 사회 전체가 하나의 전통과 제도와 신앙 아래 있는 체계였다. 여기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자아의 정체성은 예컨대 '교회-사회의 일부'로서의 자기 자신이었고, 따라서 자아의 용기는 '교회-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용기'가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개인들을 위협하는 불안의 요소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들은 "불안과 절망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제시"했다. 그것이 교회의 전통이나 권위, 성례전과 같은 예식들 등이다. 개인들은 교회의 전통과 예식에 참여하면서 정체성을 확립할 뿐만 아니라, 불안들을 해소할 수 있었다. 예배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고해 성사에 참여하면서 정죄로부터 해방되고, 성례전에 참여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로 죽음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의 폐쇄적인 하나의 세계는 내부 개혁자들에 의하여 붕괴되었다. 그곳에서 창조성을 가진 개인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개인이 없는, 오직 '조직의 일부로서의 개인'만 있는 집단은, 역사를 더 이어갈 역량이 부족했다. 틸리히는 중세 교회가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를 절충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교회는 객관적인 제도들과 의식들을 제공하여 개인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어느 정도 충족시킨다. 그러나 개개인이 신 앞에서 받는 은혜, 용서의 세계까지는 제도가 망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을 필두로 르네상스가 피어오르면서 '개인으로서의 개인' 즉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아'가 창조성을 꽃피울 수 있는 사회적 배경과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해방된' 개인들은, 그 이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자유의 광장 한복판에서 또다시 그만 집단을 찾게 되었다. 로고스를 생각하던 고대 이후로 긴 세월만에 가져보는 '조직의 한계 없는 자아 찾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현대 서구의 집단주의들 -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 등을 "신 집단주의들"이라고 칭한다.(중세 교회는 "준 집단주의"로 칭했다.)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실로 황당한 역사의 퇴보가 아닐 수 없다. 이성의 자율성을 꽃피우며 인간 개개인을 높이 긍정하고, 과학의 발전으로 전에 없는 넓은 땅과 바다로 나아갔는데, 정작 실존은 종족 중심의 집단주의에 갇혀버렸던 것이다. 틸리히는 러시아의 공산주의 국가 설립 이후 나타났던 역사의 "퇴보" 현상들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그것은 "증가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감 밑에 살고 있는 대중들이" 자기 긍정을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이 때 공산주의가 자기 긍정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새로운 용기"를 심어주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중세로부터의 해방은 근세의 자락에서 이렇게 당황스러운 결과를 맞지만, 현대로 들어와 개인주의가 발흥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가 다시 제대로 움을 틔우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는, 집단주의와는 거리가 멀기에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여지는 적을 것이다. 이 두 번째 존재의 용기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 (The Courage to be as oneself)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는 현대에 들어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는데, 틸리히는 그중에서 실존주의에 주목한다. 그는 "실존주의는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를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드러낸 표현"으로 본다. 실존주의를 한 가지 말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이 실존주의의 맥락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이 계속하여 있긴 했지만) 과거의 세계는 확실히 전체와 본질이 개인보다 앞섰다. 실존은 현실에 서 있는 개인 그 자체이며, 실존주의는 개인 그 자체를 가감 없이 보고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가 성장할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땅이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현대의 실존주의는 개인의 주체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잃어버렸다. 더 나아가 신마저도 잃어버렸다. 틸리히는 당대 현대 실존주의의 가장 최근 인물로 포이어바흐, 맑스, 니체 등을 소개한다. 포이어바흐는 "신은 투사다"라고 했다. 인간이 가진 신의 형상은 인간이 가지고 싶은 신의 형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맑스는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했다. 그에게 종교적 감정과 체험은 환각 증세 같은 것이었다. 니체는 더 나아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다. 사실 포이어바흐나 니체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말하는 신이 '창조주 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말의 여파는 컸다. 대중은 '신들'과 "신 위의 신"(God above God, 틸리히)를 구별하는 데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무책임했고,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냈다.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는, 자기자신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결국 세계와 신을 잃어버렸는데, 사실상 이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신을 자신 되게 한 "존재 자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틸리히는 포이어바흐, 맑스, 니체 등을 "19세기 혁명적 실존주의자들"이라고 칭했다. 이들이 나오게 된 역사적 맥락을 짧게 훑으면 다음과 같다. 실존주의는 원래 고대 플라톤 사상이나 고전 기독교 교리들에도 있었다. 철학이 인간이 지금은 본질 상태에서 소외되어 있지만 이데아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이나, 교회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나 현재 상태는 실존의 갈등의 지배 아래 있다고 본 것 등이 그에 속한다. 그런데 근세에 데카르트, 후설, 개신교 신학자들이 "실존주의적 관점을 상실"했다. 이 가운데 개신교 신학자들의 사례를 보면, 이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용서'의 면만을 힘주어 강조한 나머지, 인간 실존에 대한 분석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이 개혁자들을 신성화하고, 신앙 자체보다 교리에 치중하면서 극단적인 근본주의의 길을 가게 된 경우들을 발견한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개신교는...엄격하게 권위주의적이고 체제 순응적으로 굳어졌으며, 개혁의 반대세력인 로마 가톨릭의 체계와 유사한 모습을 띠었다. 두 거대한 신앙(가톨릭, 개신교) 고백적 집단 속에는 개인주의가 자리 잡지 못했다."

현대에 분명히 개인주의가 전에 없이 발흥했지만, 교회 안에서 제대로 된 개인주의가 발흥하지 못했다는 틸리히의 분석은, 19세기 혁명적 실존주의자들이 왜 교회를 공격하였는지 이해의 근거를 제공한다.

지금까지 틸리히가 분석한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를 살폈다. 그래도 인간이 결코 가볍지 않은 '죽음과 절망과 죄의식의 위협' 가운데서 어렵게 낸 존재의 용기인데, 두 용기 모두 이상적인 열매를 맺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역사가 종결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인간은 계속하여 존재의 용기를 낸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지난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용기의 형태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틸리히는 "절망의 용기"를 제안한다. 다음 편 <③ 의미 상실의 시대에 그가 제안한 "절망의 용기">에서 그 내용을 다룬다.<계속>

 

북리뷰/서평 문의  eleison2023@gmail.com 

*틸리히의 책에서 직접 인용한 어구, 문장은 큰따옴표(", ")로 표시하였음을 밝힙니다.

이민애 eleison20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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