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성탄절 설교] 임마누엘의 현현, 나사렛 예수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마태복음서 1장 16-25절

설교문

[성탄절 이야기]

오늘은 성탄절이자 송년 주일입니다. 올해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聖誕節)이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는 주일(主日)이어서 여느 해와 달리 더 뜻깊게 다가옵니다. 우리나라는 성탄절이 공휴일이고, 내년부터는 성탄절도 대체 공휴일로 지정되어 평일에 하루를 더 쉬게 되지만, 성탄절이 공휴일이 아닌 나라도 많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오만, 아랍에미리트 같은 무슬림 국가들도 그러하지만 중국과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도, 동아시아의 일본과 대만도 그러합니다.

한편 세계 자원의 70%를 소비하는 미국에선 11월 셋째주인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사이 4주 동안, 한 해에 팔리는 모든 상품의 40%가 팔린다고 합니다. 10월의 할로윈 데이로부터 시작되는 축제 분위기는 연말로 갈수록 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 추수감사일 다음 날)의 행사들로 이어져 성탄절이 되면 홀리데이 시즌의 절정을 맞이하게 되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크리스마스는 상품 판매와 소비를 부추기는 하나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크리스마스 때 가장 인기가 높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입은 빨간 옷은 1930년대 코카콜라 선전에 등장하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원래 주후 3세기경 소아시아 지방 비라의 대 주교였던 성 니콜라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상투스 니콜라우스입니다. 그는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푼 사람이었고, 사후에는 아이들과 항해자들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이 전설이 노르만족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졌고, 12세기 초부터 프랑스의 수녀들에 의해 니콜라스 축일 전날인 12월 5일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이런 풍습으로 성 니콜라우스의 미담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니콜라우스를 산 니콜라우스라고 불렀는데, 17세기경에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이 니콜라우스를 산테 클라스라고 불러 자선을 베푸는 사람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이 발음이 영어가 되었고, 19세기에 크리스마스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오늘날의 산타클로스가 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성인 니콜라우스가 코카콜라의 판매 촉진을 위해 이용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일본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먹는 전통음식으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 매우 선호되는데, 이건 1970년에 일본에 처음 문을 연 KFC 1호점의 점장이었던 오오카와 다케시다라는 사람의 거짓말 때문이었습니다. 1970년 일본 KFC 매장 1호점이 오픈한 후, 이 매장은 영업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당시 일본인에게 KFC 자체가 생소했고, 사람들은 "빨간색과 흰색 줄무니의 지붕과 영어간판을 내건 가게"가 "제과점인지, 이발소인지" 헷갈려 했습니다. 그런데 매장 근처에 위치한 한 그리스도교계 유치원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치킨을 주문하면서 다케시다에게 산타 분장을 하고 와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산타옷을 입고 치킨을 나눠준 이 파티가 대성공이었고, 연이어 다른 유치원에서도 다케시다에게 "산타클로스 복장과 치킨"을 주문하게 됩니다. 이후 다케시다는 아예 매장 앞에 세워놓은 커널 샌더스 모형에도 산타옷을 입히고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치킨을 먹는다"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일본 NHK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서양에서는 프라이드 치킨을 먹는 것이 정말 크리스마스의 일반적인 관습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렇다"라고 거짓말을 했고, 이 방송으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크리스마스 전통 음식이 프라이드 치킨이 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오늘날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이용되고 있지만 4세기 이전에는 전혀 없던 절기였습니다. 로마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시고,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 동방 박사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신 것들을 모두 함께 기념하여 1월 6일을 "주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신 날"이라 하여 주현절로 지켰고, 이날에 예수님의 탄생도 함께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353∼354년경 교황 리베리어스가 1월 6일을 주현절 혹은 세례절로,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의 날로 공식 발표하여 로마에서 이를 지키기 시작한 후 동방교회에서도 이에 동조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것에 대해 오래도록 반대했는데, 결국은 받아들입니다.

성서에 근거해서 보면 사실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는데, 겨울에는 우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서대로 하려면 11월 이전에 성탄절이 있어야 하고, 여러 학자들이 초봄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12월 25일이 성탄절이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은 로마의 태양신 탄생 축제를 대체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에는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Dies Natalis Solis Invicti)을 기념하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동지 축제와 비슷합니다. 동지는 밤이 가장 깁니다. 동지가 지나면 이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지요. 어둔 밤, 흑암의 세력에 갇혀 있던 빛이 어둠에 정복당하지 않고 장엄하게 떠오르고 더 길어지는 절기를 축하하는 것이지요. 이런 전통은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전 세계 어디에나 있고, 로마는 바로 이날을 태양의 탄생일로 삼고 고대 페르시아로부터 내려오는 태양신 미트라에게 헌정하는 날로 삼았는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태양보다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신 절기로 바꾼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년 돌아오는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성탄절이라는 말의 한자어는 거룩한 탄생을 기억하는 절기라는 말이고,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christ)를 위한 미사(mass)', 즉 '그리스도를 위한 예배'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크리스마스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경배와 예배가 되고 있는지요? 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를 드리며, 그분의 탄생을 축하해야 하는 것일까요? 또 예수의 탄생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족보가 말한다]

오늘 우리는 함께 모여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기대, 오랜 세월 기다려온 인내의 시간과 구원을 향한 갈망이 녹아 있습니다. 즉 예수의 탄생은 단순히 한 개인이나 그의 가족의 행사로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원전이나 기원후를 나타내는 영어로 B.C.(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와 라틴어로 A.D.(Anno Domini, 'in the year of the Lord', 주님의 해로부터)를 쓰듯이 예수의 탄생은 역사를 변혁하는 전환점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을 소개하려고 마음먹은 마태복음서 저자는 예수 탄생에 앞서서 족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족보를 내세우며 자신의 뿌리가 양반임을 증명하려 하지만. 마태복음서가 족보를 쓰는 것은 예수 개인이 뼈대 있는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서가 족보 특별히 다윗과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 족보를 가지고 예수를 소개하는 첫머리로 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의 역사를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심과 동시에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받아서 복의 근원이 될 것임을 약속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농경문화로부터 시작된 고대 우르 제국의 지배 질서에 맞서 야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길로 모험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는 땅의 질서에 안주하여 지배계급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가능성의 하늘에 자신을 내맡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 불립니다.

사무엘하 7장 11-1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부르시고, 다윗을 통해 세운 하나님 백성의 나라가 영원히 이어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압제 밑에서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 저자는 족보를 나열하면서 숫자를 세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열네 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바벨론 포로시기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14라는 숫자는 달이 차고 기우는 숫자인데,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 시대가 되었을 때가 보름달이었다면 이제 바벨론 포로는 그믐달이고, 다시 보름달이 되어야 하는데 누가 보름달의 역할을 할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14라는 숫자는 바로 다윗이라는 이름의 글자를 숫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의 연장인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마태복음서 저자는 계속 14를 강조하고, 다윗을 강조합니다. 족보에서 다윗에게만 왕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도 그 이유이고, 헬라어 원어로 보면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는 첫 구절도 다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족보에서는 다윗만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 200년 동안 유대를 다스린 왕들은 다윗 혈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당시의 왕 헤롯은 왕가의 피를 물려받지도 않았고, 온전한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가 중동 지역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해 세워놓은 군대 사령관이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다윗과 같은 진정한 왕이 되어, 종살이에서 건져 내고, 자기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국가를 세울 수 있을까요? 마태는 그 일을 이루실 분이 바로 예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대는 바벨론 포로기로부터 이어지는 암흑의 시대이지만, 달이 차오르듯 이제 곧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은 왕을 세우셔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의 족보를 썼던 것입니다.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들들로 계속 이어갑니다. 그런데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이르면 요셉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16절을 보실까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16절은 이전의 족보가 보여준 가계를 이어가는 방식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낳았다고 하지 않고, 요셉 앞에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말을 붙인 뒤 이어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사라지고 남성 계보가 아닌 마리아를 갑자기 전면에 내세웁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취하시는 분으로 태어나지만, 그는 인간의 족보에서 나오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신 분이 아님을 말하려고 합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다는 기대를 반영하여 족보를 사용하면서도, 가부장적 힘의 질서를 반영하는 남성들의 족보에는 균열을 내고, 곳곳에 여성들을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등장하는 여성이 모두 평범하지 않습니다. 다말은 생명과 자신의 가업을 이어가기 위해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대를 이었으며, 라합은 기생이었고, 룻은 바로 이방 여자였습니다.

예수의 탄생을 준비하는 족보는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유대 족보를 잇는 인물이지만 결코 혈통주의에 매이지 않는다. 예수는 '왕'으로 일하시지만, 그의 통치는 가부장적이고 계급을 나누는 힘의 지배는 아니다. 그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인들을 동등하게 대우할 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윤리 도덕이 지닌 고정관념을 뛰어넘으신다." 족보는 말합니다. "다윗 왕을 자랑하지 말라. 그는 연약한 하나의 인간일 뿐! 그를 세우고, 또 거두어 가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남자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 자랑하며 교만치 말라. 하나님이 쓰시는 여인들을 통해 너희의 삶이 이어졌다. 우월한 혈통에 우쭐하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신 이방여자 여리고 기생 라합의 자손이다. 엘리트임을 선전하지 말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떠돌이 과부가 없었으면, 너희의 생도 없었다. 정결을 떠들지 말라. 너희는 '우리야의 아내'를 빌어 낳은 사람들이다. 인간 사이의 예를 운운치 말라. 시아버지를 꼬드긴 며느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달성하신다." 이렇게 마태가 그리는 예수의 족보는 세상의 질서와 선입관을 흔들며 이 땅에 침투해 들어오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임마누엘의 현현: 나사렛 예수]

18절부터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는데, 이 이야기의 핵심은 두 단어에 있습니다. 즉 "예수"와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이며, 오늘 본문에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여호수아의 아람어가 '예수아'이고 이것이 헬라어로 '예수'가 된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출애굽 백성을 이끌었고, 가나안 땅에 온전히 정착시킨 인물이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출애굽의 대장정,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긴 역사의 종점에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저자는 바로 예수께서 그 역할을 하실 것이며, 죄로 인해 포로가 된 바벨론 식민지 세월을 끝마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생을 생각해보고 그의 죽음을 생각해보면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독립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예수에게서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서를 쓴 사람은 예수가 누구인지 압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국가의 독립이 아니라 모든 고통을 일으키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혁명은 단순히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 마음의 혁명, 존재의 혁명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귀족적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었고,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보다 훨씬 더 나은 의로운 삶을 통해 원수까지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온전히 하나님 안에서 참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통해 임마누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로마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배했고, 삶은 팍팍했고, 믿었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을 한 번 만난 사람들은 확실한 신념 하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하고, 온갖 고통과 불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지금도 늘 전쟁의 위협과 긴장 속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욕망 추구에 매몰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외롭고 쓸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를 산출해 낸 공동체는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활동하신다. 인간에게 언약의 은혜를 베풀고, 인간의 죄악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의 목표를 위하여 신실하게 역사를 이끌어가는 하나님이 계시다."

단 한번을 만나도 평생의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 불안과 허무를 겪지 않을 수 없고, 치열한 경쟁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 몸부림치는 삶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한복판에서도 진정한 사람다움의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찍어내는 이에게도 향기를 뿜어내고 스미게 하는 향나무처럼 순전히 자신의 존재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깊이를 보여준 어떤 사람! 예수님은 스스로는 늘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그 강렬한 체험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 사람들은 그를 '임마누엘'이라 불렀고, 그를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억압하는 죄의 부자유속에서 해방을 누리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누군가와 늘 함께 해 준다는 것! 그것만큼 인생에 힘이 되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딜 가든, 어떤 상황에 있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놀라지도 마십시오. 외로워하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마십시오. 당신 곁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창조주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구원의 하나님! 우리 곁에 계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수가 되어 주시니 힘이 솟습니다. 낙심과 근심, 불만으로 기분이 엉망이 되었을 때도,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실수를 통해 성장하며, 시험과 잘못을 통해 배우며, 그릇된 행동과 쓰라린 상처 속에서도 성숙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평화가 가득합니다. 주님께서 하늘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이 땅에 사시고, 높고 위대하실 뿐만 아니라 낮고 작아지셨으니 감사합니다. 어둠 속을 뚫고 참 빛으로 우리를 찾아 주시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소망이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신 이 거룩한 날, 주님의 놀라운 은총에 감사하며 우리의 예물을 드립니다. 받아 주시옵소서. 이 예물이 생명사랑 신앙공동체를 통하여 사용될 때 주님! 그 자리에 임하시옵소서. 세계인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코로나를 극복하게 해 주시고, 만물을 품어내는 사랑과 정의를 일구시며, 새로운 지혜를 얻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삶 전체를 드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아들 예수를 보내 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과 몸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돈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합니다. 이 예물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쓰일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축도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오래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갓 태어난 기쁨과 희망을 담아 감사의 노래를 드립니다.

이제는 지난 10년의 세월을 지켜 주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이, 주님 오심을 기뻐하며 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생명 사랑 모든 믿음의 지체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는 전국의 모든 성도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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