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대담

"돈 없으면 다닐 수 없다는 얘기 나오는 한국교회"

[신년 인터뷰③-下] 혜암신학연구소 김균진 소장

계묘년 새해를 맞아 한국교회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 신학 연구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혜암신학연구소 김균진 소장(연세대 명예교수)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적으로는 정체성의 위기, 외적으로는 기준점을 붕괴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으로 아포리아 상태에 빠진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묻기 위해서였다. 김 소장이 독일 방문 중이므로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다. 인터뷰 1부에서는 교회 내적인 정체성의 위기를 타파할 방법에 관해 논했다면 마지막 2부에서는 교회 외적인 도전, 즉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몰고 오는 문화적 상대주의, 허무주의 앞에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세계관, 역사관, 인간관, 가치관을 구축해 나가야 할 지를 논했다. 지면 관계상 2부를 상,하로 나눠 전재한다. 하에서는 인간관과 가치관을 다룬다. - 편집자주

- 인간관에 관하여

kimkyunjin
(Photo : ⓒ혜암신학연구소 제공)
▲김균진 혜암신학연구소 소장(연세대 명예교수)

이 세상에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인간의 문제일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세계의 모든 문제의 뿌리는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처럼 미묘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양한 관점에서 말할 수 있다.

나의 삶의 경험에 의하면, 인간이란 먼저 이기적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의 이기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먼저 죽지 않고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본능(Trieb der Selbsterhaltung)에서 온다. 땅 위의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능 가운데 가장 기본적 본능은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본능이다.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먼저 먹으려고 하는 것,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에 속한다.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본능이,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본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갓태어난 어린이가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어머니의 젖가슴이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무엇을 먹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을 기를 쓰고 돈을 얻고자 한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소유를 얻고자 한다. 돈과 소유가 없으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돈과 소유를 아무리 죄악시할지라도, 돈과 소유는 인간의 생명을 가능케 하는 기본 조건이다. 그런데 돈과 소유는 한계를 알지 못한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돈과 소유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더 많은 돈과 소유를 얻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권력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사실상 돈과 소유를 얻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에 불과하다.

또 자기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인간은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어느 가정이나, 어느 직장이나, 인간이 모여 사는 모든 것에는 자기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충돌을 일으킨다. 이것이 필자가 경험한 인간의 현실적 모습이다.

인간의 또 한 가지 욕망은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있다. 땅 위의 생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 성적 욕망을 가진 생물은 인간이다. 원숭이와 같은 몇 가지 포유류 동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물들은 후손을 종족 유지를 위한 발정기에만 섹스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은 종족 유지와 관계없이, 쾌락 자체를 목적으로 섹스를 갖고자 한다. 성적 쾌락에 대한 인간의 욕망도 한계를 알지 못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국경을 초월하기도 한다.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단지 생물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확인하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힘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서 온다고 생각된다. 쉽게 말해 인간은 섹스를 통해 자기의 불확실한 존재와 자기의 힘을 확인한다. 섹스는 인간이 자기의 존재와 힘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생명의 힘을 얻는 방법이다. 이 끝없는 욕구 때문에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섹스를 하고자 한다. 그래서 예순, 칠순 된 노인이 미성년의 손녀를 범하고, 팔순 된 노인이 젊은 윤락녀를 사는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필자가 눈으로 본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성욕도 한계를 모른다. 아무리 섹스를 많이 해도 계속 또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왜 그럴까? 단지 육체적, 생물적 욕구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힘을 계속 새롭게 보충하고자 하는 정신적, 심리적 욕구 때문이다. 정신적, 심리적 욕구가 인간의 육체적, 생물적 욕구를 유발한다. 그는 새로운 섹스 상대를 발견하여 그의 생명의 힘을 새롭게 보충하고, 자기의 유전자를 널리 뿌리고자 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이같은 밑바닥 현실을 기독교 신학은 "불경건한 것"이라고 은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도 자연의 생물과 다를 바 없다.

돈과 소유와 힘(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끝없는 성적 욕망 때문에 갖가지 죄가 생겨난다. 미움, 시기, 증오, 거짓말, 모함, 사기, 배신, 폭행, 도둑질, 뇌물, 분식회계, 공금횡령, 돈 세탁, 간음, 성폭행, 살인, 인종차별, 침략 전쟁 등, 갖가지 죄가 발생한다. 한 마디로 인간은 죄인이다!

그런데 자연의 생물들 속에도 이와 유사한 죄가 일어난다. 먹이를 얻기 위한, 또는 짝짓기 할 상대를 얻기 위한 투쟁과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의 생물들은 죄의식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연적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지으면 죄의식을 갖는다. 이것은 생물들 가운데 인간의 특이한 성향이다.

luter
(Photo : ⓒ새물결플러스)
▲김균진 박사가 쓴 '루터의 종교개혁' 겉 표지

왜 죄의식을 가질까? 죄의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이기적 본성 외에 다른 하나의 본성, 곧 도덕적 본성 내지 도덕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약한 생명을 돕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의를 행하며, 상부상조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살고, 자 하는 도덕적 본성 내지 도덕성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 속에 있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일지라도 그 속에, 비록 불완전하고 이지러진 형태의 것이긴 하지만, 의리와 사랑과 자비의 도덕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 인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다. 도덕적 본성 내지 도덕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기적 본성과 도덕성 가운데 어느 것이 인간 본래의 것인가? 그것은 도덕성이라 생각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기적 본성에 순종하여 죄를 지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죄의식을 느낀다. 그 반면 도덕성에 순종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의 기쁨과 삶의 보람을 느낀다. 누구에게서 무엇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 반면 어려운 사람에게 무엇을 줄 때, 우리는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행복감을 갖게 된다. 삶의 기쁨과 보람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육체의 건강에도 좋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결합되어 있는 전일적 존재이기 때문에, 정신이 기쁘면 육체도 기뻐하게 되고 생동하게 된다. 그래서 도덕성에 복종하며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죽지 않고 장수하기를 원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기적 본성이 아니라 도덕적 본성, 곧 도덕성이다. 그러므로 도덕성이 인간 본유의 것이라 생각된다.

장수의 비결은 무엇인가? 우선 몸에 필요한 물질이 있어야 한다. 충분히 먹고 마시며 안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옷과 주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장수하려면 의롭고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도덕성에 순종해야 한다. 자기 혼자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함께 공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기쁘고 장수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는 도덕적 존재이다! 이기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자연의 생물들 가운데에도 도덕성이 희미하게나마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의 생물들도 상부상조하며 살아간다. 코끼리는 동료가 죽으면 둘러서서 애도의 시간을 가진다. 예외는 있지만, 거의 모든 자연의 생물들도 자식의 생명을 지키고자 한다. 자식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생물들도 있다.

도대체 이 도덕성은 어디서 오는가? 조상들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럼 조상들의 조상들의 도덕성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저절로 주어진 것일까? 진화의 산물에 불과한가? 만일 진화의 산물이라면, 진화의 처음 씨앗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땅 위의 모든 생명체는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힘, 곧 그의 "숨"(ruah)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법"이 모든 생명체에 희미하게 나마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롬 7:22).

인간에게는 이기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이 함께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이 두 가지 본성의 갈등 사이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갈등 속에 있는 존재이다(롬 7:21-25 참조).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아무리 거룩한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이기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의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불교의 스님들은 물론 기독교의 성직자들, 특히 가톨릭교회의 사제들도 행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노력과 행위를 통해 완전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른바 율법을 잘 지키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롬 3:21 이하, 갈 2:16). 아무리 도덕적으로 산다 할지라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와 이 은혜를 믿는 믿음 뿐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바로 여기에 사도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의 진리가 있다. - 그럼 믿기만 하면 되는가?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불필요한가? 그렇지 않다고 바울과 루터는 가르친다. - 율법이 명령하는 도덕을 행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그 믿음은 율법의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그들은 가르친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다고 말한다(롬 7:12). "오직 믿음으로"라는 루터의 말은 가르치되, 그 뒤에 나오는 루터의 말, 곧 "참된 믿음은 율법의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다", "그것을 지키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라는 루터의 말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다 (김균진, 『루터의 종교개헉』, 새물결플러스 2018, 239 이하 참조).

- 인간의 삶의 가치에 관하여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리킨다. 이것을 우리는 "의미"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그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삶의 가치, 의미, 목적은 서로 연결된 개념들이다.

현대인은 무엇을 가장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는가? 그들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정직하게 대답해보자. 현대인에게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 그들의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은 돈이다. 돈이 그들의 하나님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속어는 돈의 위력을 나타낸다. 돈이 있으면 죄도 없어지고, 돈이 없으면 없던 죄도 생기게 되어 벌을 받게 된다.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말라고 가르치는 교회도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갖가지 헌금 내기에 바쁘다. "돈 없으면 교회에 다닐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 이것은 가톨릭교회보다 개신교회에서 훨씬 더 심한 것 같다. - 출애굽기에 나오는 금송아지 이야기는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인간의 모습을 예시한다. 모든 사람이 돈, 곧 금을 사랑한다. 성직자들도 돈을 사랑한다. 그래서 헌금 많이 내는 교인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개신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교회가 정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금송아지를 사랑하는지, 정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왜 인간은 돈을 최고의 가치, 최고의 의미로 생각하는가? 왜 돈을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여기는가? 그것은 살기 위해서이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교수도, 성직자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돈은 우리의 삶을 가능케 하는 기본 요소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타당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 수 없는 것도 인간의 삶의 현실이다. 한 달 동안 하나님 말씀 듣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먹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자녀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 그들을 교육시키고 전세금 일부라도 지원해야 한다. 돈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돈이다!

hegel
(Photo : ⓒ새물결플러스)
▲김균진 박사가 쓴 『헤겔의 역사철학』

또 인간에게는 기본적 굶주림의 해결과 생명 유지의 욕구 외에,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에도 끝이 없다. 그는 끝없이 더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더 많은 소유와 더 많은 섹스 파트너를 가질 때, 그는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돈이다. 돈이 있어야 더 좋은 자동차를 살 수 있고, 예쁜 여자를 얻을 수 있고, 첩을 거느릴 수 있다. 돈이 있어야 해외 골프 여행을 다닐 수 있고, 세계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돈이 인간의 최고 가치, 최고 의미, 최고 목적이 된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린다"고 말한다. 신학에서도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세계를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는 것은 돈이다. 돈을 얻을 수 있는 권력에의 의지가 세계를 지배하고 역사를 주관하는 것이 세계의 현실이 아닌가!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런데 돈은 마력을 가진다. 그것은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힘을 가진다. 왜 그런가? 인간의 돈 욕심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만족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수백억, 수천억을 가져도 만족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돈을 부어넣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끝없이 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축적하고자 한다. 이리하여 돈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돈을 위해 있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인간이 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이리하여 돈은 인간을 "돈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인간적인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인간으로 변질시킨다. 사회 전체를 "돈밖에 모르는 사회"로 만들어버린다.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한 "경제성장"이 국가 정책의 최고 목적이 된다. 경제성장을 이루어야 정권을 계속 쥘 수 있고, 정권을 쥐어야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다.

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권력 투쟁이 일어난다. 돈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일도 일어난다. 인간과 세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 돈 때문에 오히려 불행과 비극에 빠진다. 온 세계가 돈 때문에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생태학적 위기, "기후 재앙"에 빠진다. 바로 여기에 종이 쪽지에 불과한 돈의 무서운 마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 만들며,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역기능을 가진다.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한 끝없는 개발, 끝없는 과잉생산, 끝없는 소비, 끝없는 폐기물과 오염, 자연의 파괴가 일어난다. 이제는 인간 자신의 생명이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이것이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인간 세계의 마지막 귀결이다. 이것을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헤겔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을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어(자기비하) 이 세상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사건이 세계사에 "가장 큰 혁명적인 것"(das größte Revolutionäre)이라고 그의 "역사철학 강의" 제3권, "로마제국 시대"의 역사에서 말한다. 성육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희생하는 사건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더 많은 돈과 소유를 무한힌 쌓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낮추며, 자기를 희생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고 헤겔은 말한다. 이것이 세계사에서 "가장 큰 혁명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도 세계사에서 가장 큰 혁명적인 일이라 말할 수 있다. 세계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직하게 말해, 우리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나 돈은 우리의 생존을 가능케 하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 없는 돈", 그것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세계를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들며, 세계를 파멸로 이끌어간다. 그래서 성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며(딤전 3:3, 히 13:5),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말라고 권고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한다(딤전 6:10). 최고의 가치는 성육신한 예수,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뒤를 띠르는 데 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는(계시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가치가 아닌 것을 가치로 섬기지 말고, 참 가치를 가치로 섬기라고 하나님은 권고한다.(끝)

김진한 jhkim@veritas.kr

관련기사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