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지식과 사랑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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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잠언 15장, 고린도전서 8장, 누가복음 11:52 -

고린도(Corinth)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항구도시입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 사이의 무역 중심지였던 이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이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다양한 종교가 유입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는 많은 신전(神殿)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여신이라는 아프로디테 신전 외에도 아폴로 신전 그리고 치유의 신이라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등이 있었습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천 명의 신전 창기(temple prostitute)가 있었습니다. 발굴을 해보니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제사를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목욕탕, 극장, 체육관, 도서관, 정원 등을 갖춘, 오늘날 헬스 리조트와 유사한 복합 시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거대한 향락과 우상의 도시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큰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방 신전에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신학적 논쟁이 일어난 겁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에서 팔려고 내놓은 음식의 상당수는 이방 종교의 제의(祭儀)를 거치고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거의 이런 제사에 바쳐졌던 고기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일반적인 도살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 신전에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물론 접촉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전도로 신앙을 갖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이교도 친척과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나 삶의 일부와 같았던 여러 제의와의 결별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신전에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분쟁이 일어나 교회가 깨질 위기가 발생한 겁니다.

신전에 바쳐진 제물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지식이 있는 자'라 부르며 이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 주장은 오늘의 신약 서신 본문인 고린도전서 8장 4~7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어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세상에 있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남들은 하느님도 많고 주님도 많아서 소위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이고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4-7절, 공동번역) 이 지식은 흠잡을 데가 없는 지식입니다. 바로 이 지식이 호세아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세아 4:1)일 겁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사야 11:9)일 겁니다. 호세아는 "이 지식이 없으므로 [내 백성이] 망하는도다"(호세아 4:6)라고 한탄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에 이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사야 11:9)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에 동의한 후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교우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는 그것이 참말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에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합니다."(고린도전서 8:7, 공동번역) 그러면서 '지식이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상상해보라 합니다. "지식이 있다는 여러분이 우상의 사당에 앉아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는 양심에 꺼리면서도 용기를 얻어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여러분의 그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8:10-11a, 공동번역) 무슨 말입니까? 지금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직 충분하지 않은 이들을 주의하여 살피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자매]를 위해 위해서도 죽으[셨기]"(고린도전서 8:11, 공동번역)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까지 강하게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자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8:12, 공동번역)

이제 바울의 논지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먹을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우상은 목석(木石)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신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거룩한 지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입니다."(고린도전서 8:1, 공동번역) 그리고 비판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8:2, 공동번역) 바울은 지식 자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지식이 교만에 이르는 걸 경계합니다. 그런 지식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 지식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런 지식은 어떤 지식입니까? 사랑이 없는 지식입니다. 사랑이 결여된 지식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지 않는 지식입니다. 연약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지식입니다. 이런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닙니다. 이런 지식은 한 가지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반쪽짜리 지식입니다. 이런 지식이 바로 교만에 이르게 하는 지식입니다. '교만'은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계속 고린도 교인들을 비판하는 어휘입니다. 이런 지식은 반드시 누구에겐가 상처를 주고 또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를 분열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참된 지식이 있습니다. 그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대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이 동반된 지식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그 연민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는]" 지식입니다. 즉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또]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린도전서 13:1-2)는 것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가지고 바울이 소위 지식이 있다는 강한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린도전서 8:9) 바울은 '자유'라는 말을 썼습니다. 여기서 '자유'라는 말은 '권위' 혹은 '권리'로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권위가, 권리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권리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린도전서 6:12a, 현대인의 성경)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으나]... [그] 자유를 남용하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갈라디아서 5:13,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연약한 형제자매를 위해 자기의 자유를 유보할 줄 아는 자유입니다. 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연대가 있어야 합니다. 각자의 권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하나됨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이 생각에 투철했는가는 이 이야기의 끝을 어떤 말로 끝내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단호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자매]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고린도전서 8:13, 새번역) 바울은 자신의 결심을 '영원히'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종교적 소신을 위해 평생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다. 그가 이렇게 결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연약한 형제자매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곧 자기 자유의 포기가 연약한 형제와 자매를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은 기꺼이, 영원히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진정한 자유의 선언입니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린도전서 10:23)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식을 내세우는 자입니까, 덕을 세우는 자입니까? 내가 가진 지식은 교만과 우월감에 이르게 하는 지식입니까, 아니면 서로의 연약함을 보살피고 모든 이를 품어서 하나 되게 하는 큰 지식입니까? 어느 날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통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분노에 찬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누가복음 11:46, 52) 차갑게 식은 지식으로 자신은 손끝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는 지식은 천국 문을 막아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고 아무도 들어가게 하지 못하는 지식입니다. 사랑의 덕을 세우지 않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닙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짧은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 이전이고 죽음 이후이며 천지창조의 근원이고 땅의 해석자."(Love - is anterior to Life - / Posterior - to Death - / Initial of Creation, and / The Exponent of Earth -.) 시인 우주를 흔드는 거대한 사랑의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알파와 오메가요, 생명과 죽음을 관통하는 힘이며, 천지창조의 시작이고,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의미인 사랑의 에너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동차 한 대, 공장 하나 움직이는 에너지는 끔찍이 여깁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 만물을 주관하는 사랑이라는 에너지는 하찮게 여기며 살아갈까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요한1서 4:10)이라고 성서가 말합니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처럼 눈부시고 아름다운 정의가 또 어디 있을까요.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인데, 성서는 그 사랑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1서 4:7-8)라고 이어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안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사랑에서 나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고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만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평생 나무를 사랑하며 나무와 함께 살아온 '나무의사' 우종영 선생에 의하면, 빈틈없이 나무로 꽉 찬 숲은 좋은 숲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숲은 희망이 없는 숲이라고 말합니다. 빽빽한 나무로 인해 햇볕이 바닥까지 닿지 않으니 어린 생명이 싹을 틔울 재간이 없습니다. 어린나무와 풀꽃,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작은 곤충들이 살아갈 공간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빈틈없는 숲은 겉으론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희망이 없는 땅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나무가 수명을 다하거나 예기치 않은 재해로 쓰러지는 자리에 틈이 생깁니다. 빈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뜻한 햇볕이 들고, 햇볕을 받은 땅에는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뒤섞이며 새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양분이 축적됩니다. 그래서 숲의 틈은 희망의 공간이 됩니다.

"모든 것에 틈이 있고, 틈이 있기에 빛이 그 틈 사이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 레너드 코언의 노래 Anthem 중에서.) 하나님의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진 틈은 상처이지만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틈은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틈이 없는 지식, 빈 공간이 없는 지식, 사랑의 빛이 한 줄기도 통과할 수 없는 꽉 막힌 지식은 자기도 천국 문에 못 들어가도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 지식이 됩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언젠가 기도 후에, "주님은 내가 전에 없었던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셨다 하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네가 좀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사실 바울은 자랑거리가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 3:5-6)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중 어떤 것도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빌립보서 3:7-8)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곧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빌립보서 3:9)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바보였습니다. 아니 바보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스스로 바보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다른 모든 지식은 해로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로 십자가 위에서 모든 불신과 의혹과 저주와 사망을 불태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지식을 오물로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바보라는 소리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셈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예수 바보' 같은 사람들이 될 수는 없을까요. 재빠르고 이기적인 셈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한 바보가 될 수는 없을까요. 윤동주의 절친 문익환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좀 바보스러워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늙어서는 안됩니다. / 언제까지라도 젊어야 합니다. / 싱싱하게 젊으면서도 깊어야 합니다. / 바다만큼 되기야 어찌 바라겠습니까마는 / 두세 키 정도 우물은 되어야 합니다. / 어찌 사랑뿐이겠습니까 / 마소의 타는 목까지 축여주는 시원한 물이 / 흥건히 솟아나는 우물은 되어야 합니다. / 탁 트인 지평선으로 가슴 열리는 / 벌판은 못 돼도 널찍한 뜨락쯤은 되어야 합니다. / 오가는 길손들 지친 몸 쉬어갈 / 나무 그늘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 덥석 잡아주는 손과 손의 따뜻한 온기야 하느님의 뛰는 가슴이지요 / 물을 떠다 발을 씻어주는 / 마음이야 하느님의 눈물이지요 / 냉수 한 그릇에 오가는 인정이야 / 살맛 없는 세상 맛내는 양념이지요 / 그러나 저러나 좀 바보스러워야 합니다 / 받는 것보다야 주는 일이 즐거우려면 / 좀 바보스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 바보스런 하느님의 바보들이여."(문익환, <하느님의 바보들이여>)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꽃이 아름다운 건 내 맘속에 꽃이 있을 때라고 합니다. 꽃은 꽃이라서 아름다운 게 아니라 내 마음에 꽃이 있을 때 꽃이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내 앞에 있는 소중한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관심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바로 옆에서 죽어 나가도 모른다고 하지요. 심지어 그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한답니다.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닙니다. 안 보인다고 다 보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으로 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관심의 문제입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어떤 존재에 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 존재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가까이, 한 공간에 있으나 혹 내 안에 사랑이 없어, 관심이 없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르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한번 돌아보십시오.

성경 말씀에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5:17) 했습니다. 오늘 설날을 맞아 여전히 혼자 외롭게 밥을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분이 가족과 함께, 친지와 함께 풍성한 밥상 앞에 앉아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가족과 함께 있더라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더라도 정서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면 차라리 홀로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워집니다. 내 안에 꽃이 없으면 내 앞의 꽃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내 안에 사랑과 관심이 없으면 내 앞의 가까운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할 때 순식간에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하지요. 내 안에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분비된다고 하지요. 오늘 여러분 안에 그 사랑의 에너지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고린도전서 13:7) 하는 그 사랑이라는 힘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마이클 잭슨의 노래 "Heal the World"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한 가사입니다. 이 노래는 우리가 어떻게 나와 내 자녀들을 위해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There's a place in your heart / And I know that it is love"로 시작되는 부분부터 우리말로 옮겨봅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한 자리가 있잖아요. / 나는 알아요, 그곳이 사랑의 자리라는 걸 / 그곳은 내일보다 더 밝은 곳이 될 수 있습니다 / 만일 당신 정말로 노력한다면 / 더는 울 필요가 없을 거예요 / 그곳에서 / 당신은 아무 상처나 슬픔도 느끼지 않을 거예요 / 바로 그곳에 이르는 길이 있지요 / 그건 살아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 당신의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보세요 / 당신의 마음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세요 / [그렇게] 세상을 치유하세요 / [그렇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요 / 당신과 나를 위해 /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 (There's a place in your heart / And I know that it is love / And this place could be / Much brighter than tomorrow / And if you really try / You'll find there's no need to cry / In this place / You feel there's no hurt or sorrow / There are ways to get there / If you care enough for the living / Make a little space / Make a better place / Heal the world / Make it a better place / For you and for me / And the entire human race.)

그렇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세상의 중심이 내 안에서 바깥으로 이동하여 내 마음이 점차 커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특성은 나의 경계를 넘어 너에게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걸 사랑하게 됩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초라한 헛간, 그리고 희미한 등불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결국, 세상 만물을 '나와 당신'이 아니라 '나의 당신'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초월하는 거대하고 신비한 에너지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나]"(고린도전서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베드로후서 1:4)인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자매] 우애를, 형제[자매]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베드로후서 1:5-7) 했습니다. 모든 것의 최종은 사랑입니다. 또 성경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로새서 3:12-14)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묶어 완전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3:1-2)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새해에도 이 사랑 안에서 강건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질]"(요한1서 4:12)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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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