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최신자료
작성일 : 11-12-17 12:00
[칼럼] 영성과 경건
글쓴이 : 최고관리자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기독교 영성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고 그것이 신자들의 생활과 행위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 경건이다. 이 영성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영성의 주요한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지난 30, 40년간의 눈부신 급성장을 반성하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성장의 동력이 되는 영성과 경건에 대한 반성이 되어야 한다.
 
1. 은혜의 영성과 경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은혜를 말하는데(고린도전서 1장 4절) 그는 분명히 그 은혜를 구약의 축복의 개념과 구별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인데 그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우리를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은혜이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사람의 영혼과 마음에 직접 와 닿아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제사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복종과 헌신을 다짐하게 되는 것이 은혜에 상응하는 경건이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이 역동적인 은혜가 사람이 만든 여러가지 교회의 제도와 의식을 통해서만 전달되거나 사람이 만든 온갖 성상 및 신성한 유물과 같은 물질의 매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달된다고 가르치고 믿었다. 즉 영적인 은혜가 유사물질적인 것으로 변장되거나 심지어는 성만찬의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 떡과 포도주로 변하여 전달된다고 믿었다.
 
이렇듯 중세교회가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를 보관하는 거룩한 창고 또는 저당소처럼 만든 것을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당으로 바꾼 것이다.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곳이 되게 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전달하는 수레처럼 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그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힘을 갖는 것이 되었다.
 
한국 개신교는 120년의 역사에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룩하였고 특히 지난 30, 40년 동안의 급성장과 양적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설교자들의 공이 컸다. 그러나 신자들의 심령과 경건의 질적 향상은 측정하기 어렵다. 그 까닭은 부흥설교자들과 기타 일반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영적 은혜를 물질적 또는 육신적, 현세적 복으로 환산하여 설교하였고, 교회당이 커지고 교인 수가 늘고 개인적, 가정적으로 얻은 온갖 물질적 및 세상적인 번영과 형통을 은혜라고 설교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큰 교회의 부흥사 격인 목사는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시집 장가 잘 가게 되고 직장에서 진급이 잘 된다고 설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구약시대의 복처럼 생각하고 잘못 설교한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성격이 대중적이어서 이러한 설교가 대중의 기호에 맞아서 교회가 성황을 이루어서 교회가 급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로써는 한국교회 신자들의 체질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2. 사랑의 영성과 경건
구약의 십계명의 요지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주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사랑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기가 친히 십자가에서 희생의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자기의 영웅적인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거나 영광을 받으려 한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세상 사랑을 보여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의 경건행위다. 예수는 우리가 예수를 본받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실천해 보이도록 사랑의 경건을 가르치신 것이다.
 
중세교회를 다시 이야기하면, 중세교회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보다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가지 행위와 길을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것은 교회와 교회의 제도 및 가르침과 모든 전통을 존중하고 사랑하여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람이 자기 육신의 욕심을 미워하여 여러가지 금욕행위를 하고 세상을 비관하도록 가르쳤다. 이런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행위이고 이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받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 목사들과 특히 부흥설교자들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가르쳤으며, 이 경건은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비롯한 여러가지 종류의 헌금과 전도, 심방에서 나타난다고 강조하였고, 집회 수를 늘려서 참석을 독려하였다. 이러한 일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집사와 권사와 장로로 추대되었고, 그들에게 ‘명예’니 ‘공로’니 하는 타이틀이 붙게 하여 교회 안에도 영달의 길이 있게 하였다. 이들이 교회성장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로 간주되고 교회마다 성장을 경쟁적으로 쟁취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하여 개교회주의와 개교단주의 성장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그리고 교회성장에 성공한 목사들에게도 명예목사니 공로목사니 하는 영광이 있었다. 또 교회성장에 성공한 목회자들과 부흥가들은 유명하게 되었고 예수님 말씀처럼 저희들이 영광을 서로 주고받으며 부유하게도 되었다. 반면 교회성장 능력이 없다고 인정받는 목사들은 작은 교회로 밀려나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전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들이 개교회적 또는 개교단적으로 자체 성장과 부흥을 꾀하는 동안 교회 밖의 일반 사회와 나라에 대한 관심은 없게 되었다. 교회 주변의 빈민들과 여러가지 사회악의 희생자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경건을 보이지 못하고 한국교회는 자기애로 한 세를 보냈다.
 
3. 평화의 영성과 경건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화이다. 유대인들은 세상이 주는 평화 곧 정치권력이나 군대의 힘이나 경제적 번영이 주는 평화와 평안을 누리지 못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도 누리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조상들이 살던 작은 땅덩어리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는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평화이다. 그리고 그 평화의 헌장 또는 모법은 예수의 산상수훈 곧 팔복인데 이 팔복은 여덟 가지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여덟 가지 마음의 모법은 너무 고차원적이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지만 마태복음 5, 6장에서 가르치는 예수의 비유와 그의 모범적인 행적은 우리가 그 법을 실천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는 그 실천행위의 정신을 요약하여 말하기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라”고 하였다.
 
한국 개신교가 그동안 개교회와 개교단의 가시적 성장과 부흥에 경쟁적으로 힘을 쏟으면서 신자들의 마음의 밭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살피지 못했다. 교회의 가시적인 급성장과 부흥에 몰두하다가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비밀에 대한 교훈을 잊어버렸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다툼과 분열이 생겨서 교계에 평화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분열이 심한 교회라는 평을 받고 있고 심지어 교회 안의 불화가 세상 나라의 법정까지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메시지가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
 
불교의 설교는 인간의 심리분석을 논하는 듯이 사람의 마음의 세계에 파고들어 각성을 권하지만 한국 개신교 목사들은 그동안 예수의 산상수훈의 평화의 설교를 못하였다. 유교는 사람의 행위의 중용을 미덕으로 가르치고 있으나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그동안 어떤 목적을 위하여 지나친 강조를 일삼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과격한 설교를 많이 했다. 그리하여 신자들의 마음에 평온이 없고 늘 초조하고 불안하게 하였다. 천주교의 미사 곧 예배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회상시키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회상케 하는 것이지만 한국 개신교의 예배에는 어떤 행사와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들이 많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경배하는 예배의 본질이 예배 자체의 목적이 아니고 어떤 수단으로 드리는 것이 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예배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싸움터로 변해버린 경우가 많아져서 바울의 말과는 다르게 하나님나라가 어지러운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그곳에는 하나님나라가 없게 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에서 평화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떠나서 다른 곳에서 평화를 찾으려 하고 있다.
 
맺는말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언제나 받으실까? 아벨의 제물과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과 제사는 물리치신 하나님의 이유가 궁금하지만 아마도 가인이 스스로 장자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장자인 자기의 제물은 으레 받으실 줄 자신만만했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계에는 각계각층에 스스로 장자면 하여 교만과 자만심을 가지고 행사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고귀한 희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사랑에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희생의 겸허와 자기비하를 통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영성의 경건을 실천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또 어떤 것을 위해서 공을 세운 교계의 사람들이 그 공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그 공과 업적을 오용, 악용, 남용하여 다른 사람과 다투고 싸워서 교회와 교계를 어지럽힌 사람들이 교회의 평화를 깨트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영성과 그것에 상응하는 경건을 회복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형상
12-01-09 10:05  삭제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비밀글
글쓴이 자동등록방지
좌측의 코드를 입력하세요.
 
비밀번호  
 
   
 

베리타스아카이브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136-46 한국기독교회관 1013호 Tel: 02-3673-3927 Fax: 02-6008-7568
개인정보취급방침 Copryrightⓒ 2008 THEVERITAS.co.kr All Rights Reserved. 등록번호: 서울 아00701 등록일:2008.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