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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23 18:19
[서평] 김이곤 교수의 『죽음을 극복하는 길』에 대하여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500  
memento mori!    

제가 존경하는 김이곤 교수님의 저서『죽음을 극복하는 길』에 대한 서평을 할 자격은 부족하지만 프롤로그에 거론하신 바 “신암교회 대학생부 지도 때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던 제자 동지들”에 속한다는 것에 힘입어 그리하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합니다. 아마도 김 교수님께서는 처음 들으시는 이야기겠지만 그 때 교회에서 김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신학이 그 이후 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신학보다 저에게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기독교가 읊어주고 있는 ‘죄의 삯으로서의 죽음’이라는 황당한 명제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저항의식을 갖게 된 30여 년 전의 개인적인 체험을 계기로 죽음의 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공부하고 있는 종교철학과 신학적 인간학 분야에서 석/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도 이 문제를 계속 다루었습니다. 그러다가 수 년 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단체에서 ‘기독교의 죽음 이해’라는 주제의 강연 요청을 받고 <죽음, 죄의 대가인가, 창조의 섭리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의 손을 들어주는 내용으로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도 저는 늘 저의 저항적인 반기를 옹호해 줄 성서적인 근거를 좀 더 진하게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서신학의 연구에 대해 과문하기도 하고 또한 게으른 탓으로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고만 있던 차에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듯이 저의 스승님이신 김이곤 교수님의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순간의 짜릿한 전율이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서신학계의 작품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부제가 말하듯이 창세기가 담고 있는 고난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을 담은 책입니다. 당연히 창조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창조도 그저 시작을 위한 단순한 전제로서의 창조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구원체험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역사개입에 대해 거슬러 가면서 이르게 되는 신앙적 최종결산으로서의 창조신앙이라는 분석은 우리의 특별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과학의 법정에서 인정받아보려는 가련한 ‘창조과학’의 천박한 과학주의나 또는 이와 반대로 무책임하게 ‘신의 입자’에 떠맡기면서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원초적 물음에 대한 답을 회피하는 ‘무신론적 진화론’의 대책 없는 물질주의 모두를 무안하게 만들 수 있는 통쾌한 분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차분히 살피자면 심오한 혜안의 주옥같은 성찰들을 잘근잘근 되새길 수 있겠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인하여 제가 좀 더 집중적으로 관심하는 죽음의 문제로 뛰어들겠습니다.  

과연 죽음이라는 문제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금기의 대상이었습니다. 죽음이 없었다면 종교도 없었을 것이라는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원리를 부정할 수 없다면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일 터이나 종교 안에서 우리는 오히려 죽음을 건너뛴다면서 죽음을 잊어버렸습니다. 기껏해야 ‘죽음은 죄의 삯’이라는 폭력적 선언에 기대어 죄로부터의 구원으로 죽음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종교적 신앙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온 것이 기독교의 역사였습니다. 이러다보니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더욱이 손수 빚어 사람을 창조하신 그 섭리와 경륜이 무색할 정도로 인간의 죄가 이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는 이야기가 만고불변의 진리로 떠받들어져 왔습니다. 물론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다보니 이런 의도하지 않은 황당한 일이 벌어졌지만 이걸 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종교적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창세기 3장에 대한 바울의 해석이 죄의 ‘사회적 전염성’에 대한 경고의 뜻을 지닌 것임에도 불구하고(38, 169) ‘생물학적 유전성’으로 곡해되었음(37)을 지적하신 김 교수님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가히 종교개혁의 선언에 필적할 만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와 죽음 사이의 불가분리성이라는 기독교의 절대적인 교리를 ‘신성모독’이라 하셨으니 옛날 같았으면 서슬 퍼런 종교재판에서 극형을 면치 못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를 생물학적 유전성을 가진 원죄교리로 확대 해석한 초기 기독교의 그 해석상의 오류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볼썽사나운 실패작으로 만드는 신성모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심을 왜곡시키는 불충도 저지르는 원치 않는 불행스러운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37)

죽음을 원죄론과 연결시키는 것은 분명 해석의 오류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죄 또는 죽음의 세력을 절대화하는 것은 해석상의 중대 오류이며 신의 절대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겠다.(169)

왜 이것이 신성모독인가요? 뒤집어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만일 ‘죄의 삯으로서의 죽음’이 옳다면 “인간이 본래는 불멸의 존재였는데 죄 때문에 비로소 사멸하는 존재”(169)가 되어버리고 따라서 창조된 인간이 지은 죄가 창조자의 능력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니 신의 절대성도 손상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에 의한 죽음이 신의 창조섭리를 거스르고 창조의지를 파괴한다는 이야기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죽음이 죄에 대한 벌이거나 타락의 결과라면, 그리고 죄와 타락이 자유와 악의 오묘한 작동에 의한 것이라면, 있음과 삶을 의도한 신의 창조는 인간의 자유 앞에서 무력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아울러 신의 선하심도 악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신을 면제하고자 인간의 자유에 연관된 바로 그 악에 대해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타당한 이해를 위해서,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보다 적절한 이해를 위해서도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합니다. 이러한 피조성의 인간학에서는 죽음은 더 이상 신의 창조적 의지와 능력을 거스르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며, 선하신 창조의—슬프기는 하지만—지극히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왜 죽는가요? 책 6장에서 교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답을 끌어내셨습니다. 창세기 3:19에 대한 구조적 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은 흙으로 구성된 인간 본질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65)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러한 귀결은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61-2, 64, 168) 것임을 성서적 근거들을 들면서 상세하고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죽음은 단지 신의 명령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다.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죽는 것일 뿐이다”(68). 책의 말미에서는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은 그 원인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278)라고 부언하셨습니다. 이로써 ‘죄의 삯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지극히 종교적인 명제가 의도하지 않았을 뿐더러 의식하지 못한 채로 빠질 수밖에 없었던 신성모독이라는 자가당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드러내셨습니다. 

더욱이 틸리히의 표현을 빌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인간의 태어남과 삶, 죽음이라는 ‘운명’과 선악과에 관련된 선택이나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이 요구하는 ‘자유’ 사이의 대극적인 긴장관계가 성서가 제시하는 인간관의 기본구도라는 설명(67)도 덧붙이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렇게 대극적인 긴장관계 안에서 “‘나-너’의 복수관계적인 사랑을 통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이상적인 인간, 즉 원만한 공존의 사회적 존재”(34)가 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선택하시는 운명은 자유를 자유하게 하는 구원사건”(204)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뜻으로 새길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파하셨습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296). 과연 죽음에 대한 전통적 곡해를 바로 잡는 혁명적이고 해방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 이어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유한한 흙이고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향하여 태초의 창조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우리 모든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대속적인 사랑)이 지닌 은총 때문에 흙이 본질인 우리 몸도 다시 사는 것(몸이 부활하는 것)일 뿐이다.(169-170).

여기서 ‘대속’은 죄가를 대신 치르는 것일진대, 결국 죄에 대한 벌에 해당하는 죽음을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데 다만 대신 죽어주는 것이라면 ‘죄의 삯으로서의 죽음’이라는 바로 그 명제가 대속 신앙 안에도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더 나아가 죄와 벌 사이의 인과관계라는 조건적인 틀이 대속이라는 은총의 무조건적인 차원의 뿌리를 이루게 되니 여간 모순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대신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전체주의가 지배하던 전제군주체제에서나 있었던 일이니 시대적 배경을 덮어둘 수 없는 역사적 산물일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대속이 이렇게 된 것이야 김 교수님의 책임은 전혀 아니지만 ‘죄의 삯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재고요청은 대속에도 적용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는 물음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그저 대속의 죽음만이라기보다는 피조물의 고통과 죽음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가장 억울하며, 가장 황당하고, 가장 초라한 죽음을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살과 피로써 몸소 겪으시는 연대적인 사랑의 절정으로 보는 것이 그 뜻을 더욱 넓고 깊게 새기는 길이 아닐까요? 감히 여쭈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님의 작품을 쭉 따라서, 그리고 잘근잘근 음미하면서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바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이 주는 깨달음,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지 말라’는 뜻으로 새기겠습니다. 한 마디로 ‘까불지 말라’는 것이지요. 아울러 덧붙일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고 그 위를 밟고 있으며 그로부터 나온 것을 먹고 있는 흙, 바로 그 흙이 우리를 이루고 있고 또한 우리가 되돌아가 그리 될 것이라는 창조섭리를 소스라치게 되새기면서 새삼스레 흙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정재현·연세대 교수(종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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