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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4 04:07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
글쓴이 : 손규태

설교본문: 마태복음 7: 15-20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로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7:15-20)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라고 하는 선지자는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간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약 40여 년 동안 예언활동을 했는데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로서 남 왕국 유다의 몰락, 예루살렘의 파괴, 다윗 가문의 종말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그에게 주어졌었다. 그는 결국은 파멸로 끝장날 수밖에 없는 유다왕국의 마지막 길들을 패역한 왕들 아래서 신음하는 백성들과 동행했고 마침내는 바빌로니아에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이 기간동안 다섯 명의 왕을 격어야 했다. 요시야를 제외하고는 여호야킴 및 여호야긴 왕을 거쳐서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이르기 까지 그를 괴롭히지 않은 왕이 없다. 여호야킴 왕은 그의 책을 불살랐고 시드기야 왕은 그를 감옥에 처넣었다.
그를 괴롭힌 것은 이런 통치자들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우둔함이 그를 괴롭게 했다 아무리 참된 것을 말해도 그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고집스럽게 자기들의 길을 갔다. “유다인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며 너희의 마음의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끌 수 없다”고 그는 예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치고 죽이려고 달려들기까지 했다
그를 괴롭힌 것은 백성들의 무관심과 우둔함 그리고 난폭함만은 아니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 가운데 하나는 종교지도자들 즉 제사장들과 거짓 예언자들의 농간이었다. 유다의 멸망이 목전에 임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멀쩡한 거짓을 말한다.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이하).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았다고 자칭하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마저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거짓된 행위를 자유자재로 행하는 데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견딜 수 없는 비애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예언자로 부름 받은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게 만든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예fp미야 15장 15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만군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위탁을 받아 기쁨으로 그 일을 하였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온갖 박해요 조롱이며 외톨이로 고독하게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고통은 끝날 날이 없고 상처는 점점 심해져서 낫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은 원일입니까? 주께서는 물이 마르다가 흐르고 흐르다가 마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도랑 같은 존재이다.”(15:18).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하나님의 뜻마저도 판단할 수가 없다고 예레미야는 항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2이사야의 탄식을 연상한다.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는 알은체도 않으신다.”(사40:27).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의 한 일을 회고하고 이렇게 탄식한다. “나는 헛되이  수고만 하였다. 공연히 힘만 빼었다.“( 사 49,4). 그의 길은 고달픔 뿐이었다.
소명기사에서 그를 태속에서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해서 열방의 선지자로 세워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전혀 감지할 수가 없었다. 말씀을 입에 두어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그로 하여금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아무리 외쳐도 왕들은 그를 박해만 하고 백성들은 귀머거리가 되어 오히려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리하여 그에게는 하나님마저도 믿을 수 없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와 함께 탄식 속에 빠져들곤 했다 이것이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자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저도 설교자로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와 같은 회의에 빠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는 서독에서 7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적어도 400번 이상 설교를 했다 설교를 하면서 늘 이런 상념을 가지곤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했으면 뭔가 평신도들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겠지! 그리나 평신도들 사이에서 아무런 삶의 변화를 발견하지 못할 때 그리고 어리석은 일들이 생길 때는 우선 스스로 자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뭔가 아직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인격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나의 인격적 결함과 직결되지 않는 뭔가 그 분의 능력이 아닐까! 내 사상과 내 능력을 의지하고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면서 저는 사람들은 변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자책의 늪을 헤치고 새로운 용기와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런 신념이 저로 하여금 다시금 교회라고 하는 많은 문제를 가진 기관을 포기하지 않게 했다 그리고 이것이 저를 단순한 먹고 살기 위한 성직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러면서 저는 지금도 직업적 성직자가 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제가 특정한 기성교회에 가서 목회하거나 목회 동역자가 되지 않고 새 이 교회를 같이 봉사하는 것도 이런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다. 성직자가 단순히 직업인으로 전락하는 것만큼 본인에게는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에는 직업적 성직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련의 조직화된 성전을 중심으로 하고 움직였던 제사장들과 오늘 예레미야와 대결했던 거짓 예언자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직업적인 성직자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 읽은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말씀도 바로 이러한 우리의 고민들을 반영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전달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예수 시대에도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이 문제가 되었다. 직업적인 종교인들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미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사람들과 허위로 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 말을 하는 예언자들에게 보다는 거짓을 말하는 예언자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판을 말하는 예언자들 보다 평화를 말하는 예언자, 정의를 말하는 예언자보다는 축복을 말하는 예언자, 갈등과 진리를 말하는 예언자보다는 화해와 타협을 말하는 예언자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죄악을 책망하는 예언자들 보다는 은혜만을 말하는 예언자들을 좋아한다. 이러한 오늘날 자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 사회의 기독교를 가리켜서 본회퍼라고 하는 신학자는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왜곡된 기독교라고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값싼 은혜를 대량으로 공급하고 성장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비판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그 능력은 부인하는 교회”(딤후 3:5)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을 다음과 같이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지만 노략질하는 늑대와 같다. 우리는 그들의 열매를 통해서 그 정체를 알 수 있는데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이 아무리 좋은 것을 말하지만 그 결과는 아무런 결실도 가져 올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나무라야 좋은 과일을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좋은 열매를 산출할 수 있는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행위에 앞서서 선한 존재로 변화를 입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선한 나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기의 존재와 행위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적 교훈에도 언행일치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것은 말한 것과 행동하는 것이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자기분열증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 즉 성숙한 인간을 말한다. 어린이들을 보면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도 저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이 미성년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인간은 점점 성숙해지면서 언행이 일치해 가기 시작한다. 책임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물론 이러한 언행일치가 일생동안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정신적인 미성숙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정박아들을 관찰하면 그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말과 행위를 통합할 수 있는 지적 감정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박약아가 아니면서도 이러한 존재와 행위, 언행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미성숙 상태로 머무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 즉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은 자기의 존재와 말과 행위를 통합시키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거짓 예언자들과 관련해서 더욱더 문제 삼은 것은 그런 능력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고의적으로 말과 행동을 유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와 행위를 고의적으로 이간시키는 대표적인 인물들을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봤다. 그들은 니름대로 가장 종교적인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모범적 유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 정원에 나오는 박하 풀들의 11조까지 드리는 율법의 철저한 수호자였다(마태 23장). 그들은 나무랄 데 없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열된 인간이었다. 즉 그들의 존재와 행위 사이에는 분열이 있다. 그들은 남 앞에서 자랑하기 위해서 금식하는 행위, 타인들 앞에서 보이려고 하는 큰소리로 기도하는 행위, 남 앞에서 과도하게 자랑하는 자선 행위들을 예수께서는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런 제반 행위들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태에서는 자아와 행위가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분열은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과도 분열되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웃과도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정한 의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또한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자기의 존재와 행위를 고의로 이간시키는 것이다. 거짓 예언자들은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백성들의 갈채를 얻기 위해서 다가오는 멸망을 뻔히 바라보면서도 “평화다. 평화다”하고 거짓을 예언했다.(렘 13:13) 그렇게 함으로써 왕들과 국민들로 하여금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의 발전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아니 왕이 두려워서 교회는 할 말을 다 하지 못했다.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와 유고 등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위정자들은 종교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멸시했다. 진정으로 정권 잡은 자들이 두려워하는 종교인들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도 그들은 마음대로 횡포를 부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교회는 그동안 이중적 분열증적 그리스도인들만 양산했다. 축복만 바라고 현신은 기피하는 그리스도인들, 부요한 것은 바라면서 손해 보는 것은 회피하는 그리스도인들, 말하자면 부활의 영광은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면서도 십자가의 수난을 회피하는 이기적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했다. 그래서 조금만 자기에게 손해가 돌아와도 피해 달아난다. 조금만 갈등이 주어져도 견디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삶의 확실한 기초 즉 좋은 나무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 첫째 이유 과거 동서냉전의 이념적 갈등의 시대에 언어가 과도하게 이데올로기화되었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언어들이 왜곡되게 사용된 것이 바로 언어의 이데올로기화라고 할 수 있다. 동서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이러한 이데올로기화된 언어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남북문제에 관한 한 구시대의 왜곡되고 이데올로기화된 언어가 여전히 남아 있다. 남북의 창이니 통일전망대니 하는 TV 프로그람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정부의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핵문제에 대한 정책부재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다음으로는 언어가 자본주의적 상업 사회에서 과도하게 프로파간다화 되었다. 우리는 매일 같이 TV와 언론매체들을 통해서 홍수같이 쏟아지는 광고 속에 살고 있다. 그 광고의 언어와 그 물건의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을 수 없이 경험했다. 이러한 과도한 광고들은 언어가 가진 본래의 힘 즉 진리의 힘을 상실하고 있어서 점점 공허해 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물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행위를 꼭 일치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사고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정치선전을 보거나 상업광고를 보거나 거기에 사용된 언어와 실체 사이의 거리가 하도 멀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존재와 언어를 일치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지난 시절 정치가들의 언어와 그들의 실체 사이의 괴리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마저도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한 예레미야의 항의는 무슨 뜻을 내포한 것일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간상 그리스도인상은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특수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어떤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단순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와 행위를 일치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저는 생각한다. 이것이 성육신의 진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 말하자면 말이 행위가 되고 또 그 반대로 행위가 말 그대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인 말하자면 성육신적 인간이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좋은 나무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는 인간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모습과 행위를 그대로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말이 행동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삶이요 그것을 따라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 때 우리는 참된 자아가 될 뿐만 아니라 권위 있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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