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마태복음 6:5-1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 6:5-15)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즉 그들이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를 규정해 주고 있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소금이 가지고 있는 기능 즉 부패를 방지하고 동시에 맛을 내게 하는 기능을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금의 특성은 이런 기능들을 하되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은밀한 가운데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빛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자기를 들어내서 세상을 비취는 역할도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등불을 켜서 말 아래 감추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복음 10장에 제자파송기사에도 보면 제자들은 어둔 곳에서 속삭이듯이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지붕에 올라가서 크게 외쳐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에서는 빛과 같이 자기를 들어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소금과 같이 은밀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드러내는 것이 모두 좋은 것이 아니며 또 숨기는 것이 모두 좋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행태 가운데 드러내 놓고 해서는 안 될 덕목들 몇 가지를 다루고 있다. 이것들은 바로 구제하는 일, 기도하는 일 그리고 금식하는 일들이다. 이것들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중요하게 시행하고 있던 세 가지 덕목들인데 그리스도인들도 이것들을 실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러한 유대교적 덕목들은 기독교인들도 넘겨받아 실천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새 술은 새 부대라는 명제와 함께 유대교적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강하게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유대교의 중요한 덕목들을 그리스도인들도 넘겨받아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실천의 방식도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철저하게 실천할 것도 요구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덕목들 가운데 기도에 관한 덕목을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친히 모범까지 보여 준다.
그러나 예수께서 문제 삼은 것은 바리새인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겉으로 꾸미기 즉 외식 즉 기도의 형식성이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삶에 있어서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구제나 기도나 금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실천할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외식 즉 위선성이다. 이러한 외식 즉 위선에 찬 대표적 기도는 누가복음 10장 9절에서 14절에 나타나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자세히 그리고 잘 나타나 있다. 바리새인은 성전 한 가운데 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기도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드리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11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자기가 의로운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 앞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라는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모퉁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는 곳에 서서 하나님에게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종교행위의 개방성을 철저하게 문제 삼고 있다. 드러내 놓고 해서는 안 되는 종교 행위 예를 들면 기도하는 일과 같은 것은 들어내 놓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도는 본질상 큰 길 어귀에 서서 하거나 아니면 성전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골방과 같은 은밀한 곳에서 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친히 기도하실 일이 있으면 높은 산이나 한적한 곳에 혼자 가셔서 조용히 기도하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기도하는 근본 자세다. 그는 유대교인들이 하듯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골목 어귀나 성전의 중앙에 서서 기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 철학자 니체가 이야기했듯이 진정으로 고귀한 것은 숨겨져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고귀한 것이 자기를 너무 들어내거나 또는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 너무 자기를 들어내면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역겨운 것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금과 보석이 많다는 것을 너무 드러내거나 혹은 더러운 오물을 너무 들어내면 사람들에게 역겨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구제나 기도 아니면 금식과 같은 고귀한 신앙행위도 너무나 들어내면 위선적이 되는 것이다. 신앙행위 가운데는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이 따로 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드러내야 할 것을 묻어 둔다든지 또는 숨겨 두어야 할 것을 드러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전철이나 기차 같은 곳에서 기독교를 선전하는 행위나 서울역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불공을 드리는 것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신심에서 울어 나오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예수나 부처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아무데나 내어놓고 떠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상업화된 데서 온 것이다.
기독교 신문들을 보면 부흥사하는 이들이 자기 자랑을 하는 일정표의 광고들과 함께 자기를 들어내기 위한 온갖 종류의 선전방법들을 사용한다. 특히 정치적 권력과 결탁하거나 아니면 뭔가 상업성을 띤 행위들이 과대하게 선전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목자들이 할 일이 아니라 삭꾼들이나 하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종류의 상업적 자기과시도 문제이지만 권력 지향적 자기과시도 문제가 된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성철 스님은 1973년도 제가 찾아갔을 때 박정희가 만나자고 수차례 연락이 왔지만 그는 백련암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끝내 불자가 된 전두환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는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쏴 다니지 말고,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돌아다니는 것 그리고 말을 많이 하는 것들은 모두가 자기를 들어내려는 것이고 오늘 본문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종교행위와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 우리에게 은밀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도 이미 말씀 드렸지만 산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서 은밀하게 하나님께 기도했다. 기도라고 하는 종교적 행위는 본성상 은밀한 것이다. 괴테는 기도에서 은밀성이 깨어지는 공중기도를 듣기 싫어서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한국교회에서 애호하고 있는 통성기도는 문제성이 있는 기도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특히 위선적으로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추악한 행위다. 은밀성을 뺀 종교행위처럼 추악하고 냄새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교회당에서 헌금한 것들을 공표하는 일들은 헌금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것을 들어냄으로써 역겨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종교의 본질에서 이탈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던 위선적 기도를 금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던 수다스런 기도 즉 말을 많이 하는 기도를 금하셨다. 기도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대화라면 은밀한 것이며 동시에 간결한 것일 것이다. 하나님은 수다스런 기도에 솔깃해 하시는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기도는 하나님과 흥정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도 사람의 품성과 같아서 말을 잘하면 더 많은 것을 양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큰 소리로 그리고 수많은 말들을 하면 뭔가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모범 즉 주기도문에서 보듯이 우리의 기도는 장황할 필요가 없다. 기도에서 우리는 꼭 필요한 것만을 간략하게 간구해야 한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간구하거나 확신이 가지 않는 일들을 간구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성품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변덕스런 인간의 마음과는 다른 분이다. 마태복음 7장 9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덕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악한 사람이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에게 언제나 선한 것을 주시며 그리고 넘치게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중언부언 길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제가 학생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이 늘 대예배 기도를 하곤 했다. 저희들은 성가대 석에 앉아서 늘 그 장로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분의 기도는 정말 5대양 육대주를 다 돌아서 약 30분 정도의 긴 기도를 마감할 때는 북한에 있는 불쌍한 동포들을 구해 달라는 데서 끝이 난다. 이 때 쯤 되면 우리는 송영을 부를 준비를 한다. 한 3년 정도 그 교회에 다니다 보니 그 분의 기도의 내용을 거의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 분이 뭔가 잘못된 것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분의 기도하는 자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너무나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이어서는 안 되며 또한 간결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중기도의 경우 집에서 잘 준비해서 써가지고 와야 할 것이다. 저는 설교는 꼭 써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향해 하는 설교도 꼭 써서 준비해야 한다면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는 더욱더 정성스럽게 써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써서 준비하는 동안에 기도해야 할 내용들을 잘 점검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중언부언하지 않고 간략하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내야 할 것과 은밀하게 해야 할 것을 구별하는 일이다. 들어낼 것을 들어내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에게 향기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은밀한 것을 들어내게 되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악취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도 드러낼 곳을 들어내면 아름답게 보이지만 감추어야 할 부분을 들어내면 혐오감을 줄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들어낼 것을 들어내고 감출 것은 감추어야 한다. 특히 기도하는 일, 구제하는 일 그리고 금식하는 일과 같은 것은 은밀하게 할수록 유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본질상 은밀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