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마태복음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3)
오늘 본문은 산상설교 가운데 처음 나오는 8복에 관한 부분이다. 오늘 저는 여덟 가지 복의 구체적 내용 가운데 들어가기 전에 성서가 말하고 있는 복 혹은 축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특히 개신교회들 가운데 다수의 교파들에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복 혹은 축복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서는 이 축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 축복이라고 하는 주제가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사일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들, 즉 족장들의 이야기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이라고는 개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구약성서의 족장사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축복은 우리 시대의 표현으로 하자면 뭔가 “성공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성공이라는 개념은 오늘날도 쉽게 파악될 수 없는 뭔가 신비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같은 형제라 해도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혹은 유사한 조건에서 출발한다 해도 사업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 또 똑같은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일정한 직업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하는 사림도 있다. 따라서 축복받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성공의 배후에는 뭔가 인간으로서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굉장한 노력을 해도 실패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우연히 어떤 친절한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음으로써 성공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영역을 우리는 축복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살아갔던 구약성서의 족장 시대에는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3중의 생산능력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것은 자궁의 출산 능력, 가축의 생식력, 그리고 토지의 출산력이 그것들이다. 신명기 7장 13절에 보면 구약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축복을 잘 요약해서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고 복음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라.” 여기서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족장들의 이야기들에서 세 가지 단면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축복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에게서는 자식들의 축복이 문제가 된다. 모리아 산에서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까지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여 축복하기를 아브라함의 자녀를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창 22,:17; 32:13). 그리고 야곱의 이야기에서는 가축들의 축복이 약속된다. 라반이라는 삼촌 집에 거처하며 살던 야곱은 삼촌의 가축들을 번성하여 떼를 이루게 했을 뿐만 아니라 라반이 준 가축들을 더욱 번성하게 한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창 30:30등). 그리고 요셉에게서는 곡식의 축복이 주어졌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은 출세의 가도를 달려 이집트 왕 바로의 총애로 총리대신이 된다. 그리고 그는 7년간의 풍년에 거두어들인 곡식으로 다가올 7년간의 흉년을 대비하는 놀라운 통치술을 발휘한다.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창 41:51).
이렇게 구약성서의 족장역사에서는 축복으로 시작되어서(창 12장) 모든 12지파에 대한 축복으로 끝난다(49). 이렇게 볼 때 구약성서의 중요한 주제는 역시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시편 1편에 나와 있는바와 같이 이러한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성서는 축복을 단순히 이러한 물질적 부 즉 물적 성공과만 결부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서가 말하는 축복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 성서가 축복을 말할 때 관심하고 있는 것은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그럴만한 자질을 가졌다거나 또 그들은 선해서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두고 보더라도 그는 위기에 처했을 때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사람이다. 또 야곱은 온갖 기만을 통해서 형님인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갈취했고 또 피신해 있던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온갖 권모와 술수를 쓴 사람이다. 요셉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형제들 사이에서 군림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다. 이렇게 받은 축복은 꼭 받은 사람들에게 평안한 생활만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가로챈 축복으로 인해서 온갖 고초를 당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야곱은 형님인 에서의 축복을 다 가로챘지만 형의 분노를 피해서 떠돌이가 되었으며 라반이라는 삼촌의 집에서도 푸대접을 받아 결국 집으로 되돌아 올 때 형에게 큰절을 하고 마음에 없는 말까지 하는 처절한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꼭 모범적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악에서나 선에서나 본보기는 인간의 아니다. 그들을 선이나 악의 표본으로 생각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떼 성서에 나오는 축복받은 인물들과 관련해서 고려해야 할 것은 그들이 이러한 축복을 얻기 위한 투쟁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는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들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 말이다. 형에게서 모든 축복을 가로채고 또 삼촌에게서 모든 축복을 가로챘으며 따라서 12명의 아들과 많은 가축을 거느리고 또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야곱은 결국 흉년이 들어서 이집트에 내려가서 출세한 아들 요셉을 찾아가 거기에 거처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자식의 주선으로 이집트 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나이를 묻는 이집트 왕 바로에게 이렇게 답한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여기에서 온갖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챘고 그것을 누렸던 사람 야곱의 마지막 결론은 “인생은 나그네 길이었고 그 길에서 보낸 시간은 험악한 세월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서 말하는 축복이란 우리들의 삶 즉 자본주의적 삶의 척도로 잴 것은 아니다. 또 성서의 축복은 모범적 인간, 아니 선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축복받은 사람의 삶은 물질적인 면에서 부유하고 넉넉한 것만도 아니다. 아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나그네 신세가 되기도 하고 그 축복을 가로챈 사람의 종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감히 말한다만 구약성서가 말하는 축복은 꼭 좋은 것이라고도 나쁜 것만 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구약성서에서 축복과 관련해서 문제되는 것은 결국 인간들의 축복을 얻기 위한 투쟁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권적으로 행동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축복의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권의 문제이다.
인간의 축복과 관련해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역사창조에 같이 참여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창조에 인간이 동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축복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고 나서 그의 형편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은 솔로몬처럼 부귀영화화를 누릴 수도 있고 바울처럼 온갖 고통과 박해를 당할 수도 있다.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은 축복받은 사람이고 박해를 받아 십자가에 거꾸로 처형당한 베드로는 축복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다같이 축복을 누린 사람들이다. 그것은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방랑자가 되어 고통을 당할 때 축복을 빼앗긴 형 에서는 아버지 집에서 편안히 지낸 것을 봐도 알 수가 있다. 여기에서 축복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축복은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일이지 인간의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성서 본문에 보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이 팔복에 나오는 첫 구절은 성서해석의 역사에서나 교회사에서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다양하게 해석하다 보니 여러 가지 오해도 많이 생겼다. 그러면 가난한 자 혹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고 그는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진정으로 무엇일까?
그리스 말에는 “가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 두개가 있다. 첫째는 penes라는 말인데 그것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는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겨우 의식주를 마련할 정도이니까 가난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말 “가난하다”라는 헬라어는 ptochos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좀더 포괄적이어서 물질생활에서 가난할 뿐만 아니라 세력이나 영향력이 없고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시편에 보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7). 말하자면 곤고와 환란 가운데 살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가난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가난한 자란 바로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어서 뭔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사람을 복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구약에서 살펴본 복 받은 자들은 온갖 영화와 시련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영광을 가졌었다. 그러면 오늘 예수께서 말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의 축복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영국의 성서학자 바클레이 같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는 것을 두 가지 관점에서 증명하려고 했다. 첫째 이 가난한 자는 물질적 결여로 고생하고 수치를 당하고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하나님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복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와 관련해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신뢰를 두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가 세상에서 의존했던 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고 하는 인식을 갖게 되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물질적 가난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복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물질이 많은 것 자체가 축복이 아닌 것처럼 물질이 전무한 것도 축복이 아니다. 물질이 많아서 매일 같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바로 축복이 아니듯이 물질이 부족해서 빈민굴 생활을 하게 되는 것도 축복은 아니다. 아마 이러한 처절한 가난은 극복되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고 복음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면 “마음이 가난한 자의 축복“을 생각해 보게 된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독일어로는 geistlich arm이라고 했다. geistlich라는 말은 독일어의 geistig과는 다른 후자는 정신적, 지성적, 마음의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뭔가 정신적 세계나 마음의 상태에서의 가난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나 정치가들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 ”나는 마음을 비웠다“고 할 때는 아마도 geistig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마음을 말하는 독일어 geistlich는 대체로 종교적으로라는 뜻을 가진다. 예를 들자면 geistliche Güter라고 하면 종교재산을 말하고 geistliche Orden이라고 하면 종교승단을 말하고 geistliche Musik이라고 하면 종교음악을 말한다. 그리고 geistliche Vorbehalt라고 하면 종교적 특권을 말한다. 이 말은 또한 명사화해서 Geistliche라고 하면 성직자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영이 가난하다“ 는 말은 종교적으로 가난하다고 직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종교적으로 가난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가진 말일까? 종교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마도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거나 혹은 신앙심이 부족한 것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앙이 많은 사람 혹은 신앙심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종교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종교심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러한 단서의 뒷받침될만한 증거를 몇 군데서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팔복에 나오는 인간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있다.”(마태 5:6절) 는 구절이다. 여기에 보면 8복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뭔가 결여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의에 굶주린 자나 마음이 가난한 자 곧 신앙에 굶주린 자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해 지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자족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여를 지닌 사람들이 그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것은 그 부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의 자족한 심리상태에 있는 것이다.
또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죄인의 기도가 바로 종교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자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따로 버티고 서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간사하나이다.”하고 자기의 자족함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그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분지 일을 드리나이다.”하고 자기자랑을 한다. 그러나 세리는 한편 구석에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저는 조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도 이런 두 사람의 행태를 보시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은 바로 종교적으로 자족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가난했던 죄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종교적 율례나 계명을 잘 지키는 자족한 종교인 아니라 늘 부족한 마음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며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소유이다. 바리새인들 같이 종교적으로 자작하여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늘 겸손한 마음으로 뭔가 새로운 것, 뭔가 의로운 것, 뭔가 미래적인 것을 찾아서 끝임 없이 추구하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으리라”(마태 11:12)고 했다. 물질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자족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나 마음으로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미래를 추구하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다.
1997년 2월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