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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4 04: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글쓴이 : 손규태

설교본문: 마태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마태 7:13-14)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강물이 흐르듯 떠돌다 가는 것.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이것은 과거에 많이 불리던 유행가의 한 구절이다. 하인리히 하이네라고 하는 시인도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늘 저편에 별이 반짝이듯이 아는 이가 없다네. 오직 바보만이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네.” 유행가에서나 하이네의 시에서나 대단히 염세적이며 비관적으로 인생의 무상함으로 노래하고 있다. 우리의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인생이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아등바등 하고 살았나 하는 것이 후회가 될 때도 많다. 다른 한편 일생에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인데 왜 그것을 소중하게 살지 못하고 허송세월했는가 하는 회한에 빠지기도 한다. 사실상 하늘 저편에 반짝이는 별과 같이 뭔가 실체는 존재하지만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바보의 행태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생은 너무 팍팍하게 살 것도 너무 허송세월할 것도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더더군다나 취생몽사할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저는 인생은 뭔가 극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로 앞에 서게 되며 거기에서 늘 결단을 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서 우리는 늘 결단을 해야 한다. 적은 일에서나 큰일에서나 우리는 결단을 피할 수가 없다. 이런 결단을 피하고 사는 것은 짐승의 삶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인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저런 크고 적은 결단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인생이다. 신명기서에 보면 모세를 향해서 인생의 결단하는 삶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니라”(신 30:15-20).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백성들과 담판을 한다.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과 야훼 하나님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아니면 여호와를 섬기든지 너희 섬길 자를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14:15).

예수께서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인간들을 이러한 결단 앞에 세운다. 우리가 가는 삶의 길에는 편안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길이 있고 불편하고 좁아서 사람들이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은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하고 넓은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험하며 편하고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드의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편하다”라는 말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앙드레 지드라고 하는 유명한 자가도 “좁은 문”이라는 글에서 성공하는 인생의 삶의 방식으로서 좁은 문을 선택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산상설교에서 좁은 문을 택하라고 하신 진정한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말은 첫째로 오늘날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위대한 것으로 나아가는 길은 결단코 용이하지 않으며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일 것이다. 요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 좁은 문과 넓은 문 사이에서 결단해야 하는 시기에 와 있다. 그들이 공부를 잘 해서 어렵고 좁은 문을 통과한다면 그들의 미래는 보다 더 확실하게 보장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넓은 문, 편한 길을 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세속적인 의미에서도 좁은 문, 험한 길을 택하는 것은 보다 낳은 삶을 약속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좁은 관문을 통과하고 위대한 성공을 거둔 음악가들이나 체육인들의 삶의 배후에는 어려운 훈련과 노력의 시간이 있은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인생은 이렇게 노력하는 데서 그 열매를 기대할 수가 있다.

우리 개신교 특히 장로교회는 칼뱅의 전통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고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무상으로 제공되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강조해 왔다. 따라서 구원이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요 선물이라고 가르쳐 왔다. 이러한 가르침은 로마 가톨릭이 구원을 전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다고 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시정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서 구원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고다. 즉 사도행전에 나오는 시몬파와 같이 종교적인 것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는 사고를 폐지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세기 오토대제 이후 성직매매행위와 유사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인간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발상도 오늘의 본문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이러한 참회와 진지한 노력 없이 기다리는 은혜를 “값싼 은혜’라고 비판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공짜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세야말로 가장 잘못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교회가 이러한 싸구려 은혜를 남발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 일이 있다. 철저한 신앙훈련 없는 그리스도인, 교회적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적당히 구원을 획득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양산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을 택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권하시는 좁은 문은 어떤 것일까? 시험지옥에서 많은 노력을 해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는 그런 종류의 것일까?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런 성공주의적 발상에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좁은 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면 될 것이다. 머리가 좋지 못한 어린이나 학생들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저는 우리 삶에서 어떤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성과를 위한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태와 적당주의는 버려야 할 악습이다. 그렇다고 좁은 문의 논리를 성공주의와만 결합시키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한 것은 이와는 다른 뭔가 본질적인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공실패를 좌우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삶과 멸망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멸망에 이른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좁은 문을 택하는 길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저는 다른 측면들은 그만 두고라도 우리 사회에서 일반 대중들이 가고 있는 넓은 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특징으로 말할 수 있는 것, 즉 넓은 문 다시 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는 문은 소비사회다.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이 생산되고 있고 대중매체들을 통해서 폭포수같이 우리에게 선전되고 있다. 이 광고들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엄청난 힘으로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물건을 사들이고 또 사들여도 새로운 물건들과 새로운 광고의 홍수 속에서 다시금 빈곤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또 소유해야 할 것이 우리 눈앞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은 일부다 월부다 하는 교묘한 판매 수단에 걸려들어서 꼭 필요하지도 않고 소유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물건을 소유한다. 그리고 아직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내다 버린다. 이러한 과다생산과 과다소비는 원료 채취를 위해서 엄청나게 자연을 파괴해야 하며 또 소비에서 생기는 쓰레기로 인해서 온 국토가 몸살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공해가 발생한다. 자연파괴, 수질오염, 공기오염, 토질오염 등으로 인간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이 모든 것들이 대중문화가 가고 있는 넓은 문이다. 이 문을 향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달음질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좁은 문,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러한 소비사회를 극복하는 길이다. 미국과 서구 유럽은 그 동안 오랫동안 이러한 소비사회의 길을 걸었다. 대중들은 여기에 익숙해 있다. 점점 더 많은 소비재들을 요구하고 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는 남의 나라에서 원료를 착취 해다가 이들의 소비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이제는 사태가 달라졌다. 여기에서 서구의 소비사회의 멸망의 위기가 점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소비문화가 우리 사회에도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넓은 문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접은 문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우리를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전환할 것은 촉구한다(에리히 프롬). 꼭 필요한 물질만을 사용하는 금욕적 생활, 이것이 좁은 문을 들어가는 삶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와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기가 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의 길이다. 이것이 결단하면서 사는 길이다.

 1993년 10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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