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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4 04:28
새로운 언약
글쓴이 : 손규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었어도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은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라”(렘 31:31-3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3-34).
 
 
오늘로 향린교회 45주년 기념하는 예배에 와서 설교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저는 설교를 자주 하지 않습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볼라치면 더욱 설교가 하기 실어질 뿐만 아니라 교회에 나가는 것조차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지난 10여 년 전부터 사람들은 개신교인들을 보고 이렇게 말한답니다. “저 사람은 교회 다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저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데도 괜찮은 편이다.” 이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이지만 정신적으로 아직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 특히 대교회에 다니면서 목사들이 설교 중간 중간에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하고 말할 때 가장 “유치찬란한“ 목소리로 ”아멘“하고 외쳐대는 여신도들 치고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판단력에 있어서 건전한 사람들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서강대학교의 신학교수인 정양모 신부는 ”공동선“이란 잡지(저는 한국의 유일하게 건강한 기독교잡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3월 호에서 한국개신교(가톨릭을 포함해서)의 설교자들(특히 기독교 TV에 나와서 설교하는 자들)의 설교와 행태와 거기에 반응하는 신도들을 가리켜 ”유치 찬란한 바보들의 행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정양모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치고 정신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저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데도 괜찮다.” 이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은 교회에 다니지만 심리적으로 아직 건전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저는 개신교인들 가운데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사려 깊은 사람들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일수록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불안합니다. 믿음이 정말 좋다는 사람들은 허리띠를 매고 전차에 오르거나 서울역 광장에 나타나서 “예수 천당, 불신지옥”하면서 전도랍시고 합니다. 이런 전도행태를 보고 예수 믿기로 결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인간은 그를 전도한 사람보다도 더 심각한 정신병 증세에 걸린 사람일 것입니다.

“저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데도 괜찮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은 교회에 다니지만 물질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경동시장에 온갖 부정과 협잡으로 한약 장사하던 큰 교회 장로는 몇 년 전 그 아들에 의해서 구타당하고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 아들놈은 정말 패륜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일학교에 충실히 다니고 세례 받고 예배에 잘 참석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장로라는 그의 아버지의 온갖 비리를 다 보고 자랐습니다. 그가 장로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이중적이고 위선에 찬 인간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 대학의 촉망되는 젊은 교수였고 또 겉으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도 재산 문제로 자기 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서울의 법원 건물들이 모여 있는 근처에 분홍색 칠한 백화점이 붕괴되어 500명 이상이 급사했습니다. 그 백화점을 운영하면서 치부를 위해서 온갖 부정과 부패를 자행하던 사람도 교회 장로인 개신교인이었습니다. 대통령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서 공직에서 온갖 모략과 중상은 말할 것도 없고 북풍공작을 성서인물의 이름을 따서 “아말렉 작전”이라고 했던 권영해 국방장관이란 자도 대교회의 신실한 장로였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줄줄이 감옥에 간 그의 부하들도 다 개신교인입니다. 김영삼 정부 때 비리로 감옥에 간 사람들 가운데 85% 교회의 장로들이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요새 목사들은 어떻습니까? 한국을 대표한다는 감리교단의 김홍도라는 목사가 목사들의 부조리와 모순된 삶을 가장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자기가 돈 내고 케이블 TV에 나와서 설교하는 목사들을 봅니다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들과 예수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예수라는 말을 입에 올리고 또 그의 말씀인 복음서들을 읽고 해설하는데 제가 배운 바로는 그들은 예수의 말씀과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특히 김홍도는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그 사람은 목사는커녕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정신상태가 지극히 의심되는 인간입니다. 그는 그의 신도들에게 고발당해서 지금은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금전적으로나 여성문제로 잘못한 것이 다 들어나 있는데도 뻔뻔스럽게 강단에 서서 큰 소리를 칩니다. 그는 영국의 감리교 신학자 바클레이의 말을 빌어서 말하자면 “참회”는 물론 “후회”라는 개념도 모르는 인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범죄하고는 참회하지 않고 대체로 후회를 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는 후회조차도 모르는 인간입니다. 그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돈을 받고 그 사람을 두둔하는 교회의 성직자들, 특히 KNCC의 총무를 비롯해서 그 사건을 기독교 탄압으로 규정하려는 정신 빠진 교회지도자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더욱 실망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케이블 TV에 나와서 돈 내고 설교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정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돈 잘 벌어서 잘 살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한국의 개신교가 이렇게 된 원인을 설명하자면 길어지기 때문에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미국의 왜곡된 자본주의와 맘몬주의와 결탁한 “하면 된다.”는 철학에 기초한 교회성장론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 이론의 대표적 인물이 로버트 쉴러 타입의 목사들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맘몬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 돈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잘 믿어야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이 복음 받는다고 했는데 그들은 부자가 복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돈벌기를 바라는 사람들, 맘몬에 굴복한 사람들이 다수 그런 교회들로 모여듭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우니라.”(누가 16:8)고 한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개신교인들을 가리켜 “저 사람은 교회에 다녀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지경에 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한국개신교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도 “신뢰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개신교는 믿을 수 없는 정신병적 인간들의 집단으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것을 풍자하기 위해서 몇 년 전 “할렐루야”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습니다. 그 위기는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만해도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박해받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개신교, 그것도 KNCC를 찾아와 보호를 청했고 지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재작년 서울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했을 때 그들은 여기 가까이 있는 명동성당과 조계사로 가서 피난처를 구했습니다. 장로대통령 시절 지금의 한나라 당인가 딴 나라 당인가 하는 당이 1987년 성탄절 다음날 새벽에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키자 노동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파업으로 대응했고 정부는 손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피난처와 지원처를 찾은 곳은 단 한군데 명동성당이었습니다. 그들이 명동성당으로 들어오자 내 아는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사건으로 100명의 신자를 얻게 되었다.” 카톨릭 신자가 그 후에 100만 명 늘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적어도 노동자들과 국민들로부터 커다란 신뢰성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도 침범할 수 없는 인권의 보호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개신교에서는 그런 지리적 보호처나 지원처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보호처나 지원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그런 장소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들은 향린교회를 찾아오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 교회에는 그들을 맞아주고 보호해주면 지원해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향린교회로는 올 수 없습니다. 여기는 물리적으로 그와 같은 성역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또 경찰도 개신교의 성전들은 마음대로 유린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개신교회가 그 “신뢰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앞으로 영원히 신뢰성을 얻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IMF식으로 말한다면 한국개신교회는 전혀 투자할 수 없는 신뢰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더 이상 개신교회를 찾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한국개신교의 현실과 그 신뢰성 위기를 말하는 것은 저희 향린교회에 대한 저의 신뢰성과 희망 때문입니다. 저는 홍근수목사님의 설교부탁을 받고 “향린 40년”이란 책의 앞부분을 상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이 교회를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과 희망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오늘날의 향린교회의 사회적 위상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향린교회의 미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오늘 향린교회가 45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저는 여기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물어야 할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신학적으로 명쾌하게 해명되어 있지는 않지만(그것이 유감입니다) 향린 40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창립자의 한 사람이었고 신학적으로 이 교회를 지도했던 안병무 선생님의 생각에 특히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저명한 성서학자 Loisy의 말에서 가장 분명한 대답으로 정식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했는데 교회가 탄생했다.”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 곧 향린교회의 출발점이요 목표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명제는 안병무선생님이 명시적으로 제시했고, 향린교회가 묵시적으로 동의했던 명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향린교회가 설립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 나라도 아니고 그 나라의 대변자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모든 것이 주체며 교회는 그 일의 봉사자일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개신교회 아니 전 세계 교회의 위기는 이러한 분명한 명제를 망각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향린 40년에도 당시의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을 똑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벌인 ‘신앙운동’의 밑바닥에는 ‘민족의 고난’으로서의 6.25전쟁 체험과 그 ‘고난’ 가운데서 전적으로 무능했던 교회의 체험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향린 40년 34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해야 한다는 책임성에서 이탈하고 스스로 어떤 자기 완결적 집단으로 전락할 때 거기에 위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 45년 동안의 향린교회의 정체성의; 문제는 전적으로 이러한 신학적 문제 즉 교회가 하나님 나라운동의 기수가 되느냐 아니면 교회가 그 자체로서 자기 완결적 집단으로 머무느냐 하는 것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향린에서 이 운동에 동참했다고 떠나간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은 자세히 보면 교회를 자기 완결적 집단으로 만들고 거기에 안주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몇 년 전 향린교회를 이탈하여 새로운 교회를 만든 사람들이 바로 교회를 위한 교회를 바라는 안주하는 신자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안보적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동안의 한국사회 특히 자본주의적 체제 안에서 오늘날 아직도 하나님 나라운동을 위해서 향린교회를 구성하고 이끌어가고 힘든 투쟁을 계속해 오는 신자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저는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온갖 구실을 대면서 향린교회를 떠나갔습니까? 심지어는 신앙의 이름으로 아니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은 향린을  떠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문에 명시되어 있듯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일”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교회는 절대로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향린교회를 창립했던 분들은 “교회건설”이 아니라 “신앙운동” 즉 “하나님 나라운동”을 목표로 했던 것입니다(40년 38면).

이러한 하나님 나라운동의 정신으로 창립된 향린교회는 네 가지 행동요강 즉 프로그램을 가지고 운영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1) 공동체 생활, 2)입체적 교회 3) 평신도 교회 4) 독립 교회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45년을 회고해 볼 때 이러한 네 가지 프로그램은 외형적으로 볼 때는 거의 실종된 것처럼 보입니다. 생활공동체는 해체되어 예배공동체로 남았습니다. 입체적 선교전략(이른바 missio Dei)은 아직도 그런 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독립교회의 의지도 기장에 가담함으로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의 변화과정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향린교회의 초기 강령들은 모두 실종되었으며 따라서 이 교회도 다른 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단 말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향린교회는 이웃에 있는 영락교회와도 다르며, 기장의 일반교회들과도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는 현 실태에서도 그렇고 미래를 한한 희망의 차원에서도 다릅니다. 또한 향린교회는 여기에 속한 평신도들도 다르고 성직자들도 다른 교회의 성직자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오늘날의 불의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실을 고려하고 또 오늘날의 개신교의 왜곡된 현실들을 바라보면서 향린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결단내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향린교회는 옛 언약들, 즉 처음 출발하던 때의 프로그램들을 회상하면서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날의 향린교회는 옛 언약들을 기초로 해서 오늘날까지 어려운 시련의 길들을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이제 새로운 언약을 맺으려 할 때 옛 언약들(네 개의 강령들)의 파기 내지는 불철저한 수행에 대한 성찰과 참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자체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현실, 교회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참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이러한 참회와 성찰로부터 향린교회가 앞장서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새로운 언약을 맺는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은 이러한 새로운 언약의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3).  이 새로운 언약이란 바로 하나님의 법도 즉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속 , 말하자면 우리의 살과 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법도를 갖고 산다는 것은 신약성서적으로 말하자면 성만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살과 피를 받음으로써 나의 것이 되고 내가 또한 그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성례전적 관계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1장의 성만찬의 제정말씀에서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의 잔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례전적 새로운 언약은 그리스도와의 자기동일성 즉 그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자신의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성례전적 공동체, 즉 향린교회가 처음 출발할 때의 “생활 공동체”를 복원하는 작업이 향린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예배공동체가 아닙니다. 예배공동체와 생활공동체가 결합된 것이 초대교회(사도행전)의 교회상이고 또 미래의 교회상입니다. 그것은 중세적 수도원과 같이 그리고 초기 향린의 공동체와 같은 좁은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지향하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생활공동체를 향린교회가 우선 회복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네가지 강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강령이 이 생활공동체인데 그것이 실패하면 다른 것들도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예배공동체와 생활공동체를 결합시키는 모델을 개발해 낼 때 그것이 21세기의 교회상 아니 미래의 교회상이 탄생할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2천년전 예수가 기대했던 교회상이기도 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와 결합되는 교회상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구체안을 여기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향린이 이 일에 착수한다면 여기에 동참할 의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모든 갓을 같이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변모될 때 거기에서부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기 시작할 때 세상도 나눔으로 가득 찬 생활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 아니 세계의 현실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불안합니까? 그것은 나눔, 성례전적 나눔을 기초로 한 공동체가 아니라, 자본주의라고 하는 탐욕으로 가득 찬 시장인간으로 화한 맘몬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적으로 단자화된 인간들로 구성된 지극히 불안정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IMF는 구세주가 아닙니다. 맘몬의 논리에 기초한 세계파괴의 집단일 뿐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예배공동체라고 하는 지극히 추상적 세계에 머물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 즉 모든 하나님의 창조를 같이 나누는 삶의 공동체 즉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공동체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저는 향린교회의 출발점이었고 목표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께서는 오늘 신약성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들은 너희에게 덤으로 주시리라.” 우리 교회는 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아니 향린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1998년 5월 17일 향린교회 창립 45주년 기념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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