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면,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엄청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태 7:24-29)
우리는 새롭게 1994년을 마지 했다. 금년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빈다. 제가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을 간구하는 것은 단순히 새 해의 인사로서 뿐만 아니라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94년은 국내적으로 볼 때나 세계적인 지평에서 볼 때나 모든 면에서 불확실성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당의장 이래 시작된 새로운 세계 질서 개편 작업이 금년에는 거의 마무리 될 것으로 생각된다. 1950년대부터 미국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동서간의 냉전 체제는 사라졌다. 즉 자본주의 불럭과 사회주의 불럭으로 세계를 양분해서 서로 적대시하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투쟁은 일단 소련의 해체와 동구의 붕괴로 일단락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미국을 주축으로 한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 질서 개편과정에서 등장한 몇 가지 결과들이 오늘날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지역의 새로운 불럭화 현상이다. 이미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지금 세계는 동서 냉전 시대의 양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발전하고 있다. 그 다극 체제 가운데서 가장 앞서고 강력한 것이 유럽공동체의 개편과 강화이다. 유럽은 그 동안 동서 냉전 체제 가운데서 비교적 독자적 노선을 걸으려고 했으나 1990년 독일 통일을 통해서 유럽의 분단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유럽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들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서 화폐에서부터 무역 및 통행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통일을 급속히 추진해 나가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국제 질서 개편 과정에서 작은 국가로 형성되어 있는 유럽의 이익을 보장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럭화 현상은 나프타라고 하는 북미 자유무역 지대의 창설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유럽의 통합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캐나다와 멕시코를 묶는 자유무역 지대를 창설한 것이다. 이들 세 나라 사이의 무역에서는 관세나 기타의 규제들을 완전히 철폐하고 자유로이 상거래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 여타 지역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자는 것이다.
이런 불럭화는 얼마 전에 미국에서 열렸던 아펰회의, 즉 아시아 태평양 자유무역 지대라는 기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고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강대국들을 포함시켜서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불럭을 형성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여기에 참여하여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선전되고 있지만 아펙 회의는 나프타와 더불어 미국의 경제패권주의를 도와서 유럽과 대결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제 불럭화 움직임은 미국을 배제하고 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자는 제안도 있지만 한국이 반대해서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둘째 이러한 새로운 세계 질서 개평과정에서 불럭화 현상과 병행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에 기초한 지역분쟁입니다. 구소련과 과거의 동구권에서는 사회주의라고 하는 공통의 분모가 사라진 이후에 극심한 민족분쟁에 휘말리고 있다. 소연방은 거의 해체되고 그 안에 많은 나라들이 민족단위로 탄생했으며 지금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고 몇몇 나라들이 연합을 구성하고 있지만 민족간의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체코는 평화롭게 두 나라로 갈라졌지만 유고를 구성하고 있는 세 민족은 지금까지도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과거 식민지 역사를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도 민족 내지는 종족 분단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 유럽에 의해서 식민지화되었고 그들에 의해서 국경이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채 독립한 아프리카인들은 필연적으로 종족 내지는 민족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티오피아와 소말라아 및 남미비아 등을 들 수가 있다.
셋째로 이러한 새로운 세계 질서 개편 과정에서 등장한 또 하나의 특성은 자유무역주의에 기초한 선진 강대국들의 세계 지배입니다. 동서 냉전이 끝장나고 이제는 남북(가진 나라와 같지 못한 나라들 사이)의 열전이 시작된 것이다. 동서의 정치적 이념 전쟁에서 이제는 남북 혹은 불럭 사이의 경제 내지는 무역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타결은 이러한 전쟁에서의 강대국 특히 미국과 유우럽의 나라들이 승리를 거둔 싸움이었습니다.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지만 강대국들의 새로운 세계 지배는 명약관화한 것이다.
이러한 지역의 불럭화 현상, 민족주의 그리고 자유무역주의에 기초한 무제약적 강대국 지배 구도가 오늘날 우리 나라와 같은 약소국가들의 미래를 더욱더 불확실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이러한 새로운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등장하고 있는 세 가지 현상들이 세계질서를 보다 평화롭고 정의롭게 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다. 특별히 불럭화 현상과 자유무역주의에 기초한 강대국들의 횡포가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 지배를 가져올 것이 확실하다. 우리가 그동안 신 식민지적 지배에 관해서 많은 것을 논의했지만 우루과이 라운드는 이러한 신식민지정책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잇을 것이다. 16세기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와 19세기의 원자재와 상품시장 확보를 위한 식민지 시대를 거쳐서 이제는 상업내지는 무역식민지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부는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제대로 협상도 해보지 못하고 백기를 들고 말았다. 쌀과 농산물 수입개방이 그 대표적 인 예다. 그리고 나서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이미 기차는 지나갔다.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떠들면서 신경제 정책이라는 것을 들고 나온다. 이 신경제라는 것도 국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하면서 대기업을 더욱더 육성해 주고 있어서 앞으로 부의 편중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명분으로 더욱 옥죄일 것이다. 따라서 민중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전망되고 있다.
저는 이렇게 분석해 볼 때 새로운 세계 질서는 잘못된 방향으로 그 기초가 놓여지고 있다고 보여 진다. 우선 불럭화와 자유무역주의에 의한 선진국들의 횡포는 점차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질서는 평화롭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질서의 기초가 이렇게 잘못 놓여진다면 앞으로 새로운 불의들이 등장하고 이것을 필연적으로 갈등과 분쟁으로 발전할 것이다.
오늘 예수께서는 산상설교를 마감하는 결론부에서 두 가지 기초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반석이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짓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래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비가 오고 태풍이 불어 닥칠 때 나타나는 두 집의 결과는 자명하다. 즉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든든히 서 있을 수 있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모래와 함께 무너지고 떠내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운명도 그가 어떤 기초 위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결판이 난다는 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
저는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부하는 일에서나 직업 활동에 있어서나 또는 기업이나 나라를 경영하는 일에 있어서나 그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초보다는 그 위에 짖는 집의 장식에만 몰두한다는 인상이다. 적은 구멍가게에 가든지 혹은 큰 전자 상가에 가든지 파는 물건에 대한 성능과 구조들에 대해서 물어 보면 그 기초부터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특히 여성의 경우 직업의식이 없는 것이 큰 문제이지만 남자들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전문성 즉 하는 일에 대한 기초가 잡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책임성도 없고 모든 일을 적당히 해 나가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런 현상은 신앙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일단 기독교인 되었으면 성서와 기독교가 가르치는 기초는 확실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전문가는 성직자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적당히 교회나 다니면 된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런 신앙생활의 기초를 중요시하지 않으니까 적당히 다니다 기분이 나쁘거나 부담이 생기면 교회를 떠나 버리고 만다. 이 점에 있어서 일본의 기독교인들의 철저성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들은 성서와 기독교역사에 탐구심도 강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책임감과 의무감도 철저하다.
그러면 이러한 기초 즉 확실한 기초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첫째 예수께서는 자기의 말을 듣는 데서 그 확실한 기초가 생긴다고 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38-42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는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경청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삶 전반에서 확실한 기초를 잡아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아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삶의 기초를 제대로 놓을 수가 없다. 듣지 않으면 파악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으면 자기의 지식이 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은 독일에서 학교교육을 받았다. 학부형회의가 있어서 몇 차례 학교에 가 보았는데 거기서는 선생들이 공부 못하는 아이를 가리켜 머리가 나쁜 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집중을 못하는 아이 즉 선생님의 가르치는 내용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즉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아이들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지식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 차원에서도 인간과 인간관계를 바로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듣지 않는 사람은 따라서 삶의 기초를 형성할 수 없다. 듣고 학습하는 데서 지식의 기초가 생기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데서 도덕적 기초가 생긴다. 이 모든 것들이 합해져서 우리의 삶의 진정한 기초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 또 남의 문제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은 “좋은 것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번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과 관련해서 그의 집권의 기초가 상당히 파괴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농민들과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가가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통치기반을 상실한다. 박정희로부터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통치 기반이 허약했던 것은 그들이 국민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민정부를 표방하는 김영삼 정부도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벌써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통치기반을 확실히 상실해 가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의 말씀을 달 들어야 한다. 다른 여러 가지 분주한 일들이 우리 삶을 휘감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는 이런 말음을 듣는 시간인 예배와 성경연구 c등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권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해서 자연 계시로 말씀하시는 것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음으로는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서 삶의 확고한 기초를 쌓아가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말음을 듣는 것이 뭔가를 행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명상적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주여, 주여 하는 명상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했다. 이 점에서 말씀을 듣고 명상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죽음 믿음이라 했다. 따라서 말씀을 듣는 믿음과 말씀을 행하는 믿음이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28-31절에 보면 두 이들을 가진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 그는 가겠다고 대답하고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둘째아들에게도 말하자 그는 거절했다가 회개하고 포도밭에 가서 일을 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겠다고 말했지만 듣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자세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한 삶의 기초를 생각한다면 말을 듣고 동시에 행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듣고 행하는 것을 우리는 청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듣고 행하는 청종의 생활이 바로 우리의 삶의 확고한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생활은 거짓된 믿음이고 동시에 듣지 않고 행하기만 하는 것은 방향을 상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1994년을 불확실성 가운데 마지하고 있다. 지역 분쟁은 가속화될 것이고 민족주의는 더욱 극성을 부릴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으로 전망된다. 강대국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 온갖 압력을 다 행사할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기초를 확고한 데 두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 삶들을 설계하고 새로이 시작하는데 있어서 불확실한 기초에 서서 모험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금년 한 해 더욱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뜻을 청종하면서 살아가자. 우리의 삶의 기초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어떤 난관에서도 흔들림 없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