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난절 세 번째 주일이다. 수난주간 6주간 동안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로서 우리가 겪어야 할 수난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사실상 수난 혹은 고행은 세계의 모든 고등종교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종교적 덕성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회교나 불교 그리고 힌두교 등 모든 세계의 고등 종교들은 종교적 실천으로서 수난 혹은 고행을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샤머니즘이나 아프리카의 하등종교들만이 수난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물질적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그것은 종교의 본질에서부터 이탈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축복만을 말하는 기독교, 그 중에서도 삼박자 축복을 주장하는 종파나 교단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에서는 크게 이탈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 본문의 말씀은 불트만에 의하면 예수의 말씀 전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전승층에 속하는 말씀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말씀은 예수의 초기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정신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미 신약성서 안에서도 전승의 층에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의 철저성이 후대에 가면서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교회의 출현과도 연관되며 또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나타난 복음으로부터의 이완현상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의 철저성은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점차 약화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청교도들의 역사에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매이 풀라우어(May Flower)라는 배를 타고 미국 땅에 도달한 청교도들 1세대들은 엄격하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들은 전 세대들과 같이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2세대들에게는 중간타협(Halfway Covenant)이라고 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용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정신을 보다 철저하게 우리에게 전해주는 대목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자기의 운명과 실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신약성서학자인 타이센(Theissen)이란 사람은 이러한 예수님의 실존적 모습을 가리켜서 “방랑하는 자의 극단주의”(Wanderradikalismus)라고 했다. 이것이 원래 예수님의 실존적 모습이었고 또 이러한 예수를 따르는 것이 그의 제자들의 진정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서 목수생활을 익히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상적인 직업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처음부터 방랑자로서의 극단적인 삶의 형태를 취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그리고 세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철저한 극단적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곧 과거의 일상적 삶과의 단절인 동시에 방랑하는 자의 극단주의가 그의 삶을 규정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삶의 진정한 모습은 땅의 짐승인 여우의 굴과 공중의 새의 둥지와 같은 일정한 보금자리마저도 포기한 삶이었던 것이다. 즉 그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이었다. 이러한 그의 삶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매일의 양식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랑성과 철저성이 결정적으로 제거된 것은 180년경 초기 가톨릭교회의 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방랑자의 극단주의가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들에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그리고 그 교회들이 주교들,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정착되어 가면서 방랑성도 사라지고 그리고 철저성도 사라진다.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삶이 교회라고 하는 정착지를 찾게 됨으로써 머리 둘 곳이 생기게 된 것이다. 방랑자의 극단주의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충성은 정착지인 교회에 대한 소속성과 거기에 대한 안정으로 대치되었다. 이 일에는 이방선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이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방교회에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결합시키는 말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바꾸어 놓는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다.
이러한 교회화 내지는 정착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3세기경 이집트 사람 안토니우스를 통해서 일어났다. 그는 오늘의 성경말씀과 특히 마태복음 19장의 부자청년의 이야기에 감동되어 정착되어 가는 제도 교회를 버리고 광야와 사막 가운데 살면서 예수의 방랑자의 극단주의를 몸소 실천하려고 했다. 그는 홀로 바위들로 둘러싸인 험한 산 위에서 철저한 금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후배 격인 파코미우스는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사는 수도원 운동을 제도화함으로써 다시금 정착된 안정된 삶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 후 8세기 등장한 베네딕트 운동이나 13세기에 등장한 프랜시스들과 도미니칸 운동들도 전부가 제도화된 수도원으로 정착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려고 했던 부자청년의 삶을 목표로 시작한 수도원들이 중세기에는 부와 안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도사들은 모든 것을 버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아시아의 해방신학’을 쓴 플로이스는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제도적 교회의 대안으로서 등장했던 수도원운동 역시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가 도미니칸 수도회를 탈출하는 것으로부터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수도원장이 되는 것은 중세기에는 부와 영예의 상징이 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예수 수도회에 속한 박홍 같은 이의 행태가 바로 수도회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그 본래의 취지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전락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현존하는 교회와 그 대안으로서의 수도원운동은 예수의 본래의 삶의 모습 즉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먼 단체가 된 것이다.
예수는 자신만이 머리 둘 곳이 없는 실존으로 산 것이 아니라 그를 다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를 다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례 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여라.“ 죽은 자를 장례 치러 주는 것은 당시의 유대적 풍속으로 말하더라도 중대한 덕목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덕목을 가는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양식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다. 그는 여기에서 종교적인 것을 도덕적인 것에 철저하게 선행시키고 있다. 종교란 윤리가 아니며 또 윤리적인 것의 일부도 아닙니다. 종교란 보다 철저한 것이고 보다 고귀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 당시의 유대의 풍속으로 말하자면 장례를 치르자면 3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3일 정도의 시간만 바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예수를 다르겠다는 것을 예수는 단호히 거절하고 있다. 죽은 자들의 일이 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가 아니 당시의 교회가 이미 장례나 치러주고 죽은 자들이나 돌보아 주는 관습의 종교로 전락한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종교들이 특히 서구의 기독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 관혼상제를 맡아 주고 거기에서 푼돈이나 받아먹고 만족해하는 사제들과 목사들의 행태가 일반적 현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죽은 자들의 장례나 치러주는 것 외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또 사회가 그것 외에 어떤 역할을 교회에서 기대하고 있는가?
예수께서 오늘날의 관혼상제에나 몰두하고 푼돈이나 얻어 쓰는 교회와 교회구성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례 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라.” 관혼상제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말이다. 모순과 억압과 갈등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개조하여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로 만들라는 것이다. 불의와 타락, 비리와 부패로 가득한 이 나라를 바꾸어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로 만들라는 것이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는 희년의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맘몬주의의 모순 가운데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장례 지내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 건설운동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종교로서 수난과 고통을 알지 못하고 적당히 종교행사에 만족하고 있는 교회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투쟁하고 싸우다가 수난을 당하라는 것이다. 수난 없는 시민 종교, 죽은 자들이나 장례지내는 무력한 종교는 그리스도가 생각했던 종교는 아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삶이 되지 않고 교회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한 한국교회는 수난절 없는 부활절만을 기다리는 이기주의자들의 종교가 된 것이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로 장례 지내게 하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의 진정한 의미는 수난을 동반하는 것과 연관된다. 왜냐하면 수난 없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은 없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이후 한국교회는 정말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일부이긴 했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수난을 겪었으나 그 후 교회는 수난 없는 시민 종교의 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대교회목사들은 국회가 주관하는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만들고 거기에서 권력자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힘 있고 돈 있는 세력가들의 친구가 되고 말았다. 선거 때만 되면 대교회의 목사들은 강자들의 정부를 두둔하고 그들의 당선을 위해서 설교한다. 이러한 수난 없는 한국교회 위기에 처했다. 이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하나님 나라선포는 사라지고 죽은 자들을 장례지내는 일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선포의 필요성이 상실된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성이 없다고 하는 이데올로기의 독성에 마취되었다는 데서 진정한 위기가 한국교회에 닥친 것이다.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한국교회의 위기이다. 사제나 장로나 집사가 권력이나 부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이미 나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선언한 그리스도의 실존과는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를 천와대로 보내자는 구호가 이미 그리스도를 배반한 구호였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방랑성과 철저성은 그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잠시 아니 몇 분 동안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하는 것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누구든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것이 머리 둘 곳이 없는 주님, 장례지내는 일을 거부하는 주님의 말씀이다. 그렇습니다. 쟁기를 일단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우리 교회는 6년 전에 출발하면서 이러한 단호한 생각을 가지고 시작했다. 우리 교회를 찾아왔던 사람들이 우리를 떠난 것은 사실상 우리가 그렇게 철저하지도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철저성 때문에 교회를 떠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출애굽 하여 가던 길을 포기하고 수없이 애굽에 두고 온 고기 가마에 대한 회상으로 유혹에 빠지곤 했다. 큰 교회 만들지 못하는 것을 한탄도 했다. 또 과거의 전통적 제도로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를 구해 주는 것은 아니다. 기왕에 쟁기를 잡고 출발했으니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뒤를 돌아보는 것, 전통적인 것에 향수를 가지는 것은 죽은 자를 장례지내는 것과 같은 것이며 부모와의 작별인사를 못내 아쉬워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쟁기를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쟁기를 잡은 사람은 오직 앞을 향해 달음질할 뿐이다. 여기에서 생기는 고통, 어려움은 예수를 믿는 자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숙명이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교회에 충성해서는 안 된다. 아니 수도원운동에 충성해서도 안 된다. 단지 하나님 나라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신학자 로이세가 말한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위해서 일했지만 생겨난 것은 교회라고 했다. 진정한 충성은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해야 할 것이다.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서 생긴 교회는 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그는 교회를 세우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참으로 선포하고 실천할 때 우리에게는 수난이 올 것이다. 교회를 선포하고 교회에 충성할 때는 수난은 절대로 오지 않았다. 그 수산은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데서 올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서 이 세상의 악과 투쟁할 때도 올 것이다.
오늘은 수난절 셋째 주일이다. 이 주간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 안에 농성하고 삶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반 그리스도적 삶의 행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참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선포할 수 있을 때 부활과 영광의 삶이 우리에게 선물로서 주어질 것이다.
1995.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