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이사야 49:1-4)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같은 말씀을 다시 하시면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가까이 왔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왔다."
(마태 26:36-46).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저명한 구약학 교수인 클라우스 베스트만( Klaus Westermann)은 그의 책 “천년과 하루”에서 예언자들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 20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할 것이 있다. 역사상 그렇게 자주 새롭게 발견되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이 성서에 존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개개 예언자들은 그들이 속한 시대에서나 그들의 행태로 인해서 이방인처럼 살았고 따라서 예언서들도 자신들 안에 그런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예언서들은 때때로 잊혀진 채 침잠 되어 있다가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강한 언어로 말하다가 오랫동안 침묵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 곡해되어서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없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20세기 중반을 사는 우리들은 이들에 대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 시대에는 예언자들과는 정말 거리가 먼 인간들이 성공한 자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들은 기능적 인간을 말하는데 이는 바로 좋건 나쁘건 기계시대에 적응하는 인간,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인간, 거기에 자기를 연결시키면서 기능하는 기술적 인간을 말한다. 이렇게 기계에 적응하는 것은 피했어야 할 일도 피할 일도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생기는 고통들은 점차 사라져야 했다. 진공소제기를 쓰는 가정주부가 ”빗자루를 든 처녀“(이것은 루터가 그의 설교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변화된 노동의 세계를 전적으로 긍정하는 바로 거기에서 성서의 한 부분, 예언자들과 그들의 활동을 기록한 예언서들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스피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예언자들은 어떤 도구, 하나님의 도구 같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이들을 밀착시켰고 상호 결합시켜 주어서 모든 제도들이나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제한들이나 관습들을 뛰어 넘어가듯이 예언자들은 본질상 인간의 본래적 존재를 파헤치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렇게 갑자기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왕과 백성들 앞에 나타난다. 예언자들은 특별한 수준에서 최고의 속박과 동시에 최고의 자유의 통일성, 그들이 등장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을 드러내는 통일성을 소유하고 있다. 예언자들과 예언의 내용들은 결코 분류되거나 체계화시키거나 편입시키거나 평가하거나 규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렇지만 이들은 속박,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속박이 존속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예언자들이 기능적 인간들과는 극단적 대립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들의 삶과 위탁 등 모든 것에서 가장 인격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들이다. 그러나 대체로 심판 대신 심판의 사자들을 보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말해준다. 예언자들 자신들은 그들의 등장에서나 말에서나 사랑과 진노라는 끊을 수 없는 대립 관계와 상호관계를 스스로 체현하고 또 가져온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향한 고발의 대리인들이고 상실된 자들에 대한 사랑의 운반자들이다. 이들의 열정적 호소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거기에서도 예언자들은 그들 개개인에게서 예언이라는 전체 드라마가 외침과 외침 사이, 즉 그들이 경청해야 할 외침과 그들이 전하는 외침 사이에서 연출되는 극단적 의미에서 하나의 극중 인물이다. 그들은 어떤 교리나 체계나 기본 명제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고 그들이 받은 것, 오직 그것만을 전하도록 지시받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일련의 예언자들, 이스라엘 왕조사와 병행해서 첫 왕과 나란히 시작되어서 마지막 왕과 나란히 마감되는 예언자들의 등장이다. 이들은 단독자였고 또 단독자로 머물렀다. 많은 예언자들이 전혀 독자적으로 활동했고 또 많은 예언자들이 자기 주변에 적은 수의 사람들만을 가지고 있었다. 대중을 움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 개개인과 그들이 상대하도록 보냄을 받은 백성들 사이의 갈등 또한 격렬했다. 이 백성은 기초를 상실한 채 점점 미끄러져 내려앉고 벌어진 균열 속으로 침잠해서 결국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두 파멸되어 심연으로 가라앉을 위험에 처한 산봉우리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산사태 한가운데 예언자들이 서 있다. 첫 균열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몰락해 버리는 단계에까지 예언자들은 차례로 등장한다. 이들은 이러한 나락에서 헤어날 수 없고 또 헤어나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같이 미끄러져 들어가고 함께 파멸을 겪는다. 비록 그들이 기초에 발판을 두고 있는 유일한 존재들일망정, 그들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은 산사태를 막아내지도 못했고 그들은 우리의 척도로 계산해보면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 그들은 와서 부르짖었고 그들의 부르짖음은 메아리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는 다음 사람이 온다. 그때도 달라진 것이라곤 없다. 이렇게 200년의 세월이 흘렀고 거기에다 예언자들의 전 역사까지 가산하면 400년이 흐른다. 이 예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한 예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헛수고만 하였다. 공연히 힘만 빼었다”(이사야 49;4)
이러한 200년 혹은 400년의 예언자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안에 놓여 있다. 거듭거듭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말하고 경고하고 수난을 당하고 회의에 빠지고 침묵해 버린 이 모든 것은 인간적 측면에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반복되는 예언자들의 등장, 전체 백성을 진정한 회개로 이끌지도 못하는 이러한 그들의 등장은 전혀 무의미한 것 같다. 이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무력함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숙명을 말하는 것인가? 그 비밀은 무엇인가? 이러한 예언자들의 현실은 인간들에게 통용되는 척도들이나 범주들로서는 잴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앞서 일을 시작했던 선배의 자리에서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고 따라서 그들은 늘 처음 그 자리에서 일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공연히 헛수고만 하고 힘만 빼었다”고.
그러나 정말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러한 비기능적 인간들이며 하나님의 사자들인 예언자들의 노고들은 정말 헛수고 한 것으로 끝나고 말았는가? 그들의 노력들은 붕괴되는 산사태를 전혀 막아내지 못한 것이었기에 무의미하게 애만 쓴 것이었던가? 사실상 우리의 기능적인 성과주의적 판단에서 평가한다면 그들은 공연히 헛된 노력을 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뿌리는 기능적 성과나 세상적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비록 늘 새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그들이 좌절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역사의 몰락 앞에서 아무런 성과가 전망되지 않는 상태에서 뭔가 그것을 막아 보려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이 예언자들의 등장의 신비요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래서 유대국가가 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황에서 한 예언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내 입으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않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지는 않는다.”(사 55:11).
이러한 처절한 절망 가운데서도 뭔가 새로운 것, 뭔가 의로운 것, 즉 하나님의 명령을 들고 처음부터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삶이요 그들의 운명이었다.
오늘 신약성서의 본문은 예수의 마지막 시간, 즉 수난사에서 그가 경험했던 일단의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그는 처절한 시간에 마지막으로 대화의 상대로 하나님 아버지를 택했다. 예수께서는 세 번에 걸쳐서 이 감당하기 힘든 잔을 옮겨줄 것을 하나님에게 간구했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의 저명한 작가 엔도 슈샤꼬의 ‘하나님의 침묵’을 연상하게 된다. 일본의 천주교인들이 그렇게 끔찍한 박해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서 처절하게 하나님에게 간구하고 호소했지만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것을 그는 “침묵”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형상화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 한가운데서도 무수히 억울한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다.
옛날이야기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무런 죄도 없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죽어 간 인혁당 사람들이 처형당할 때 그 가족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울부짖었지만 하나님은 끝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광주에서 민주화와 정의를 외치면서 군사독재자 전두환에게 항거하던 사람들이 무참히 당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오늘날에 와서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와 중형들이 선고되었지만 사람들은 정의가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다. 한총련 사태가 일어나고 무고한 학생들이 “폭도”로 매도되면서 처참하게 끌려가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서 예수는 홀로 하나님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을 때 그의 제자들의 행태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첫 번째 담판을 하고 그들에게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두 번째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깨어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간청했다. 세 번째 왔을 때도 제자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자 그는 ”자고 쉬라“고 말했다. 인자가 이제 잡혀갈 시간이 다 되었으나 깨어서 노력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아니 예수는 그의 마지막 시간을 하나님의 깊은 침묵과 제자들의 깊은 수면 사이에서 홀로 마지하기로 결심했는지 모른다. 그는 그의 노력을 헛된 것으로 체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모든 제자들이 숙면하는 가운데 그는 십자가로 나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의 마지막 길, 십자가의 길을 몇몇 여인들이 동행했지만 그들 역시 무력한 존재들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침묵과 인간들의 무력함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고 말았다.
그러면 예언자들이나 예수와 같은 전혀 기능적이지 못한 인간의 삶과 투쟁의 신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앞서도 말한바 있지만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실패한 일들을 새롭게 반복해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런 실패한 일을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로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거듭해서 등장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뿌리요 그 뿌리의 결실이 예수 그리스도다. 교회사는 이 실패한 사업을 또 시도해 보려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했다는 이야기이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교회를 제국교회로 통합시켜서 완전 장악했다. 대부분의 교회들과 그 지도자들은 히틀러를 메시야로 숭앙하고 열광했다. 이러한 히틀러의 횡포에 굴복하지 않은 500여명의 목사들은 바르멘에 있는 교회에서 저들만의 총회를 가지고 “고백교회”를 설립했다. 고백교회란 히들러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고백한다는 의미에서 부쳐진 이름이다. 이 총회에서 이른바 “바르멘 신학선언”이라는 것이 선포되었는데 거기에는 히틀러의 반신적이고 반인간적인 것들이 날카롭게 지적되어 있다. 이 바르멘 신학선언은 칼 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와 루터교의 아스무센(Asmussen)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초안을 잡아오기로 했다. 이들은 바젤로부터 기차를 타고 북부에 있는 바르멘으로 가던 중 프랑크푸르트 역 앞에 있는 바젤러 호프(Basler Hof)라는 호텔에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루터파 목사인 아스무센은 피곤하다고 자기 방으로 가서 잠을 잦다. 늦은 저녁 바르트는 진한 커피 한 잔과 궐연 한 개를 피워 물고 이 신학선언을 단숨에 써 내려 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총회에 부쳐져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후일 바르트이 전기를 쓴 한 목사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려운 고통의 시간에 장로교회 목사는 깨어서 성명서를 썼고 루터파 목사는 피곤해서 잠을 잦다”라고.
우리는 그 동안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교회의 모색을 놓고 많은 생각을 했고 또 힘든 씨름을 해 오고 있다. 새로운 시작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고 있다. 이 일의 의미와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답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또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지도 못하고 있다.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시행착오와 거기에서 오는 좌절감도 없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불완전하고 미래도 확실히 보장되어 있지 못한 힘든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공연히 헛된 수고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침묵이 두렵기도 하다. 사람들의 무관심에 짜증도 난다. 그러면 모든 것을 그만 두고 다시 이전 식으로 예배나 보면 될 것이 아닌가! 남들이 하는 것처럼 그냥 그럭저럭 살면 될 것이 아닌가? 무엇을 얻자고 이렇게 힘든 노력을 교회가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실 분들도 많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언자들의 뿌리를 보거나 그 결실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보거나 거기에는 깊은 회의와 함께 보다 깊은 희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아니 그리스도인이란 이러한 깊은 절망과 회의 그리고 거기에서 울어 나오는 밝은 미래의 희망 사이에서 애쓰는 존재하고 생각한다. 절망도 회의도 그리고 미래도 희망도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세 번이나 그 앞에서 희망을 가지려고 했다. 제자들의 깊은 숙면 속에서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회의와 미래 가운데 살았고 절망과 희망 한가운데서 늘 새롭게 시작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아니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 아니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려고 한다. 이 일을 하는 것은 그 밖에 다른 뜻이 없다. 여기에 직접 종사하는 분들이나 이 일을 돕는 분들이나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하시기를 바란다.
1996.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