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
작성일 : 12-11-13 15:5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 와서 쉬라
글쓴이 : 손규태
설교본문: 마태복음 11:26-30
 
 “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고자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26-30)
독일에서 목회할 때 교회에는 결혼적령기의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때를 가리지 않고 자주 결혼식이 있었고 그 때마다 나는 주례를 서 주었다. 주례를 설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젊은 부부가 이룩하는 새로운 가정이 피차 깊은 사랑과 신뢰 그리고 상호협조 가운데 잘 살아가는 것이었다. 절기 때마다 그들은 잊지 않고 우리를 방문해 준다거나 때로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찾아줄 때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특히 내가 주례했던 부부들이 아이들을 낳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찾아올 때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모든 부부들이 다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가정들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또 가정이 파괴되기도 한다. 어떤 가정들은 많은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사업상의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는다. 찾아가서 조언도 해주고 기도도 합니다만 그래도 별 효과가 없을 때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떤 가정들은 부부간에 이해부족과 성격차이로 인해서 고통을 겪고 있다. 상담도 하고 책망도 하지만 별 효과가 없을 때는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럴 때는 내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안타깝고 괴로운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모든 것을 대신해 줄 수도 없는 것이어서 늘 모든 것이 생각의 빚과 짐으로 남는다.
그럴 때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고 가장 원초적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염세철학자로서 유명하다. 그는 인생을 가리켜 고해라고 했다. 따라서 삶이란 영위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일찌감치 하직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고통만 더해간다는 것이다. 인생을 고해로 본 철학자는 쇼펜하우어가 처음 사람은 아니다. 플라톤을 비롯해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의 세계란 육신의 욕망충족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고통을 낳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인간의 육신적 욕망을 억제하고 금욕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한 빨리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했다. 이런 사상은 스토아 철학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들이 의무론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그들도 삶을 비관적 관점에서 보았다. 물론 불교를 비롯해서 인도의 철학도 사바세계 즉 고통과 괴로움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라는 것을 갈파했다.
이런 저명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들지 않아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삶이란 용이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여러 가지의 무거운 짐들을 감당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즉 인간은 요람에서 태어나서 무덤에 쉬기까지 60 혹은 90년이란 기간을 이 세상에서 지내면서 크고 적은 그리고 많고 부담스러운 짐들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생이 걸머져야 할 짐들이란 어떤 것일까?
우선 우리는 가장 자연적 욕망의 충족이라는 것에서부터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먹어야 하는 부담을 걸머지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거의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젓을 찾는 것은 인간이란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적 본능이며 이것이 충족될 때 인간은 성장하고 기뻐하고 또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정신적 신체적 조건을 갖출 수가 있다. 청소년기에는 부모님들의 책임 하에서 그들은 양육된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인간은 자기의 신체적 기본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히 먹고사는 일이 일생 그 사람의 삶의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먹고사는 일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다. 아프리카를 여행해 보면 우리는 그것을 곧 느끼게 된다. 저는 1992년에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500만의 적은 나라 베닌(Benin)을 약 10일 동안 방문한바 있다. 회의가 있는 중간 그들의 실질적인 삶을 알아보기 위해서 시골에 있는 마을들을 방문했다. 하루는 일행은 배를 타고 옛날 미국의 노예상인들이 노예를 잡아다가 가두어 두었다가 미국으로 팔아치웠다고 하는 한 해변 마을을 찾아갔다. 노예시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약 50여 호의 집들이 늪지대 위에 엉성하게 세운 기둥들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곳을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베니스라고 불렀다. 늪지대의 1메타 정도 깊은 물위에다 집들을 지어서 위생적으로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집 위에서 그냥 아래 물위로 대소변을 보았고 거기로 몰려드는 물고기들을 잡아서 먹기도 했다. 저희들은 몇몇 가정들을 방문해 보았는데 거기에는 끼니를 끌일 수 있는 냄비 한두 개와 양재기 몇 개가 전부였다. 식탁도 다른 가구도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그리고 먹을 것을 저장해 둔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아침에 카누 같은 배를 타고 나가서 물고기를 몇 마리 혹은 잘하면 몇 십 마리 잡아다가 한 시간 정도 노를 저어 육지에 도달해서 거기에서 그것들을 판다. 그것을 팔면 잘하면 밀가루 한 되 정도를 살 수 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죽을 끌리거나 아니면 수제비 같은 것을 해서 먹는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는 그 외에는 별 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저는 그곳에서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욕구를 책망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그러나 며칠 혹은 몇 달의 양식을 곡간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은 단순히 짐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짐은 역시 일용할 양식을 하나의 부담으로 그리고 무거운 짐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일용할 양식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으신 것은 그것이 더 이상 인간들 사이에서 짐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으로 저는 해석하고 싶다. 즉 일용할 양식이 인간의 무거운 짐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하는 주기도문의 뜻이라는 말이다. 우리 주변에 아직도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고 그것을 짐으로 감당하고 살아가는 무의탁 노인들, 소년소녀 가장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기도문을 할 자격을 상실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저는 생각한다. 국민소득 1만 불을 바라보는 국가에서 일용할 양식을 짐으로 걸머지고 사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수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런 원초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의 짐 외에도 많은 다른 짐들이 있다. 자녀들에 의한 짐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 혹은 노부모들에 의한 짐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가정들은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데 자녀들이 말썽을 피우는 가정들이 적지 않다. 저희 학교에는 한국의 굴지의 제지회사 회장의 아들이 입학을 했다. 막강한 재벌로서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잘 되어 간다. 이 가정에서는 다른 곳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 가정의 짐은 그 집의 장남인 우리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다. 그는 공부에는 취미가 없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부자 집이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 엄청난 투자를 했던 것 같다. 공부 잘 하는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 가정교사, 학원강사등 최선의 선생들을 초청해서 과외공부를 시켰지만 모든 것은 허사였습니다. 삼수 끝에 우리학교에 겨우 입학을 했다. 그러나 우리 학교에서도 밑바닥을 기어 다닌다. 그리고 공부는 죽어도 하기 싫어한다. 저는 부모님에게 공부는 팔자 혹은 예정된 것이어서 그 아이는 적당한 훈련을 통해서 그 회사에서 적당한 일자리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부모는 막무가내다. 어떻게든지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집의 가장 큰 짐은 그 큰 아들이었다. 지금은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만 거기서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침 텔레비젼을 보면 개개 가정이 걸머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수많은 여성들이 남편들의 악덕으로 인해서 고생을 하고 있다. 지나치게 음주벽이 있는 남편을 가진 여성들은 일생 동안 고통을 겪는다. 과도하게 도박을 하는 남편으로 인해서 가정의 파탄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많다. 괴팍한 성격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아내들도 많다. 지나치게 남자친구들과만 어울리고 가정을 등한시 하는 이들로 인해서 가정은 황무지와 같이 되어 버린 가정들도 많다.
요즘 한국 사회에는 많은 노인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일생 동안 힘들게 살아왔던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인생의 말년에 와서 무의탁으로 혹은 자식들의 박대에 견디지 못하고 홀로 살거나 양로원에 외로운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지만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고려해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노인들의 삶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자녀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도 없다. 사회가 같이 짐을 부담하게 하는 제도적 법적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못한다. 따라서 노인들의 문제도 점점 가정적 혹은 사회적 부담, 무거운 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란 이런 혹은 저런 짐들을 지고 살게 마련인가 보다. 그것이 무거운 짐일 수도 있고 좀 가벼운 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들은 모두 짐을 지는 존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무거운 짐들을 지고 살아야 할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다. 그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 같이 어떤 종류의 짐이든지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운 통찰력과 깊은 안목을 가지고 인간들의 가장 근본적 문제들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인간은 모두 무거운 짐들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사회가 불의하거나 정치가 잘 못된 나라들에서는 백성들의 짐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 비록 복지사회를 이룩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인간에게는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짐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심리적인 짐들 그리고 질병으로 인한 짐들을 지고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따라서 인간이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인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무거운 짐을 진 인간들을 예수께서는 부르신다. 그리고 편히 쉬게 해 주겠다고 하신다.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무거운 짐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인간이 자연적으로 혹은 숙명적으로 우리 삶 가운데서 저야 할 그런 종류의 지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인간이 걸머져야 할 짐들을 감당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걸머져야 할 짐들을 그는 문제 삼고 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려고 했다. 그리고 수많은 질병에 고생하는 이들을 구해 주셨다.  또 인간들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짐들도 그는 관심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착취에 열을 올리는 세리들을 책망했고 비둘기파는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추방해 버린다. 그는 로마의 지배체제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예수가 당시 생각하고 있던 무거운 짐이란 다름 아닌 종교적 짐을 말하는 것이다. 후기 유대교의 율법주의가 만들어냈던 온갖 종류의 계율들이 개인적이고 사회적 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또 하나의 가장 큰 짐으로 등장한 것을 예수는 목도했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지기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 손가락도 꼼짝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집단들은 바리새인들뿐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한 몫을 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율법과 규례들이 모든 유대인들 대중들에게 종교의 짐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종교란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주는 짐은 무거운 짐이지만 예수가 주는 짐은 가벼운 짐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주는 멍에는 불편하고 자기가 주는 멍에는 편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것은 본질상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지고 있는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을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한다. 인간들로 하여금 온갖 욕망의 충족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그 짐들을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구원의 길이다. 불교에서는 자연적 욕망으로부터 모든 다른 욕망을 끊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가 말씀하시는 가벼운 짐, 편한 멍에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욕망의 단절과 더불어 얻는 어떤 해탈을 말하는 것일까? 중세기의 수도사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등진 수도사는 아니었다. 그는 인생의 짐을 세상도피로부터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보다 적극적 방식으로 모든 일에 접근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삶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을 종교적 계율에 선행시킨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게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안식일이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짐이 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는 그것을 일부러 고의적으로 범하심으로써 그 짐으로부터 벗어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보다 제자들이 배고픈 것을 해결하는 것이 예수님에게서는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루터도 과감하게 죄를 지으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바로 종교적 계율이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을 때는 과감하게 그 계율을 깨라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인간다움(Humanity)을 상실한 종교적 계율이란 것은 단지 짐으로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은혜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함으로써 모든 짐을 가벼운 것으로 모든 멍에를 편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예를 들면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5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마 5:40-41). 속옷을 달라는 사람은 우리에게 부담이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부담이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명한 해결책은 어떻게 해서든지 전혀 주지 않는 것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거운 부담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 다음의 해결책은 달라는 대로만 주는 것일 것이다. 여기에는 가벼운 부담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속옷과 겉옷을 다 주어버리면 여기서는 부담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철저한 해결을 통해서 짐을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모든 일을 대하는 데 부담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아니 적극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인생의 짐을 벗는 길일 것이다.
신앙의 미성숙 단계에서는 종교는 짐으로 나타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율법과 규례들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종교는 가벼운 짐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 즉 인생의 본질적 문제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란 종교의 짐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나아가서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는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밀글
글쓴이 자동등록방지
좌측의 코드를 입력하세요.
 
비밀번호  
 
 
 

베리타스아카이브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136-46 한국기독교회관 1013호 Tel: 02-3673-3927 Fax: 02-6008-7568
개인정보취급방침 Copryrightⓒ 2008 THEVERITAS.co.kr All Rights Reserved. 등록번호: 서울 아00701 등록일:2008.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