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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3 16:13
예수의 눈물
글쓴이 : 손규태

설교본문: 눅 19:41-48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 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어찌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눅 19: 41-48).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감람산에 가면 조그마한 가톨릭교회가 하나 세워져 있다. 그 교회의 이름은 주님이 우신다(dominus flevit)라는 뜻을 가진 교회다. 천주교 신자들은 주님이 우신다는 이 교회를 방문하고 예수께서 가지셨던 인간다운 모습 즉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통해서 그를 더욱 가까이 느낀다고 한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들과 꼭 같은 감정과 정서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즐거우면 같이 즐거워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같이 슬퍼하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그는 초인적 인간이 아니었다. 슬픈 일이 있어도 초연한 인간도 또는 기쁜 일이 있어도 자기의 감정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냉철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저는 한국개신교인들이 슬픔을 드러내야 할 장례식 같은 곳에서 망자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하면서 명랑하고 낭랑한 소리로 찬송을 불러대는 것을 보면 뭔가 비인간적인 것을 느낀다. 그들이 말하기를 고인이 잘 믿어서 천당에 갔는데 무엇이 슬프냐?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보면 뭔가 기만적이며 뻔뻔한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상 슬퍼해야 할 장소에서 슬퍼하지 않는 것은 인간적이지도 기독교적이지도 않다. 본회퍼가 “세상적 기독교”를 말할 때는 사실상 슬픈 곳에서도 기뻐하는 척하고 진지하게 죄를 회개해야 할 곳에서도 뻔뻔스런 파렴치를 자행하던 당시의 기독교인 군상들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그 위선적 허울을 벗어버릴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정 인간다운 것이 기독교적이라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인간다운 모습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내대는 초인에게서가 아니라 오히려 슬플 때는 같이 슬퍼하고 괴로울 때는 고통의 소리를 지르는 것일 것이다. 니체 같은 이는 예수의 삶에서 뭔가 너무나 인간적이고 연약한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오히려 “초인”의 출현을 갈망했다. 그 결과는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같은 광기의 독재자들이 자신들을 초인으로 자처하고 나서서 자신들이 구원자임을 자랑했다. 세상문제란 어떤 초인적 인간에 의한 초인적 용기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사정들을 역사상 이른바 위대한 사람들의 비극이나 그들로 인한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적 고통에서 경험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셨다. 그는 초인이 아니라 약한 자로서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을 시도한다. 그는 성공자로서가 아니라 실패자로서 문제를 해결한다. 그것은 예수의 마지막 즙 십자가 사건이 입증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공생애에서 늘 자신의 약함을 거침없이 내 보이셨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야기는 제가 아는 한에서는 두 군데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번은 요한복음 11장 35절에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는데 두 누이동생들과 주변 사람들이 하도 슬퍼하니까 예수님께서도 죽은 시신 둔 곳을 찾아보고 눈물을 흘린다. 두 자매가 고백한 대로 만일 예수께서 그 곳에 계셨더라면 그들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사로는 이미 죽은지가 3일이나 되었고 그 몸에서는 악취마저 풍겨 나오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그리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과 같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예수는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그가 만일 초인이었다면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야 한다. 또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당장에 나서서 나사로를 살리셨을 것이다. 사실상 그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부터 불러냈다. 그는 이런 초인적인 일을 하실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 초인적 능력을 가진 그가 왜 우셨을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기 위해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 근처에 도착하여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는 이 성의 장래 운명을 생각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이 성의 사람들은 뭔가 자기들 나름대로는 평화를 얻고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장차 로마인들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당할 것이며 그 안에 사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처참한 죽임과 수치를 당할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티투스 황제에 의해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남아있던 용감한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마사다 요새로 가서 버텨 봤다. 그렇지만 3년 후 즉 73년에 결국은 적에게 함락당해 죽임을 당하는 수치를 면하기 위해서 모두 자살하고 말았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 그는 우선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두 자매의 오라비인 나사로라는 한 인간이 죽을 나이가 아닌데 죽은 것에 대해서 인간적 연민의 정을 가졌던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으로 슬픈 것을 슬퍼하고 기쁜 것을 기뻐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존재다. 진지해야 할 때 가장 진지한 것, 진리를 추구해야 할 때 가장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유대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운명에 대해서 슬픔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개인들이 당한 슬픔과 함께 한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처절한 숙명에 대해서 안타까워했고 또 눈물마저 흘렸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개인문제 뿐만 아니라 집단으로서 민족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그 다음으로 예루살렘의 지배자들과 백성들이 당시 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눈이 멀었다. 그들은 판단력을 상실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진정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평화 즉 민족이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문제의 내용과 그것을 실천할 시간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한마디로 지금이 어느 때인지 그리고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 순간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성서에 나와 있는 대로 ”권고 받는 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평화를 생각할 때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흔히 두 가지 오해를 하게 되어 있었다. 하나는 평화란 귀찮고 소란스러운 세상을 떠나서 고요한 명상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즉 아타락시아(ataraxia)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철학적 혹은 명상적 평화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화를 안보와 동일시하는 로마식의 평화를 생각했다. 이러한 평화개념은 군사력을 통해서 적을 압도하는데서 얻어지는 안보를 말한다. 이러한 평화개념들은 평화에 근접하는 것이면서도 평화를 가장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적 평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도피하게 만들며 로마적 평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매몰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란 어떤 것일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평화 아니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출발한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예수의 평화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요 그 반대가 반평화의 길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자기의 양식이며 따라서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예수의 평화운동은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을 일치시키는 삶 전체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요 도 내 뜻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평화 즉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일치, 하나님과 화해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평화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아니 세상의 권세들과는 불평화의 관계에 들어가고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그리스인들의 평화와 같이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도 아니고 로마인들의 평화와 같이 세상과 짝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 화해하는 삶이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진정한 뜻에 서서 국가의 장래나 민족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로마의 식민지 통치에 안주하면서 거기에서 얻어지는 기득권을 안보라고 생각했고 또 이러한 안보가 곧 자기들에게 평화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안보는 전 국민을 위한 안보나 평화가 아니라 자기들의 기득권의 유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예들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진정한 평화는 미국이나 일본 혹은 중국의 도움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라진 민족이 서로 화해하고 남북한의 모든 인민들이 같이 사는 공동안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평화의 길이다. 외세에 의지하는 한에 있어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안보도,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성서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안보는 평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평화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제자들을 향해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른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 그의 뜻과 우리의 뜻이 일치하는 행동, 여기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가 주어지는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며칠 전에 온 국민이 반대하거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고 또 민자당 안에서조차 반대하고 있는 이동통신인가를 자기의 사돈회사인 선경에게 허가해 주었다. 이 사업이 어떤 내용이이고 얼마나 화급하고 또 얼마만큼의 이익이 돌아가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결정이 노씨 집안에 대대손손 화근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그것을 통해서 얼마만큼의 이익을 얻겠지만 그는 후세에 부도덕한 지도자로 탐욕에 눈이 어두운 독재자로 기록될 것이다.  또 그의 후손은 그로 인해서 커다란 짐을 몇 대에 걸쳐 지게 될 것이다. 박정희씨 자녀들의 운명과 전두환의 가족들의 처지를 보면 자명한 일이다. 지금 국민들에게 화급한 것은 오히려 이동통신이 아니라 이동수단인 교통문제일 것이다. 가지고 다니는 전화 없어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만 매일 만원 버스와 전차에서 시달리고는 살기 힘든 것 아닐까? 그리고 가장 화급한 것은 민족의 회해요 통일일 것이다. 이런 중대한 민족적인 일들은 제쳐두고 사리와 탐욕에 휘말리면 그의 앞날에는 평화가 없다.
노태우씨가 정말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그는 권고 받는 것을 거절했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사리사욕에 사로잡혀서 모든 것이 숨기어 있다.
 그 다음으로는 예루살렘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비둘기를 사고 양을 팔며 돈을 환전해서 얻어지는 이익을 탐하는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강도란 무엇인? 도적과 달라서 사람들이 보는 데서 자기의 지위와 힘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의 물건이나 돈을 빼앗는 것 아닌가? 이들은 정치적 기득권자들과 힘을 합해서 민중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면서 그것을 마치 안보나 평화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예언자들은 죽인 자들이고 의인들을 도륙한 흉악범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채찍을 가지고 민중들과 더불어 성전을 숙청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정화한 일이다. 이들 지도자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백성의 두목들은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성전을 성전 되게 하신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한다. 만일 민중들이 예수의 주변에 없었다면 그는 벌써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기득권자들은 죽일 음모를 계속하고 있는데도 예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 나와서 민중들을 가르쳐 깨닫게 했다. 여기서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민중들의 의식변화와 참여가 없이는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중들이 예수 주변에 모여서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 두목들도 예수를 어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이념의 장벽은 문어졌다고 하지만 빈부의 장벽은 더욱 높아 가는 현실 가운데 있다.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난민이 동구에서 서독으로 작년만 해도 46만 명이 넘어 왔다. 제 독일인 친구인 크뢰거가 살고 있는 노이엔부르크(Neuenbürg)란 적은 시골 동네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70명의 아프리카 난민들이 배당되어 왔다. 동네에서는 그들에게 집을 주고 먹여 살릴 책임이 있다. 모두들 난리다. 아프리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동구에서 더 많이 온다. 그 동안 냉전시대에 사회주의만 없애면 자본주의 국가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선전했는데 막상 사회주의 국가들이 문어지니까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전부 서방 세계로 넘어온다. 과거에는 사회주의를 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사회주의 국가들을 그대로 두어서 자기들의 백성을 먹여 살리게 할 것을 공연히 붕괴시켰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사회평화가 심각하게 위협 당하고 있다. 기득권자들은 점점 더 강도의 심보를 들어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예수님과 더불어 문제의 심각성을 바로 보고 눈물을 흘릴 때다. 지금은 밤이 어둡다. 우리가 모두 바로 보지 않으면 다 쓰러질 수밖에 없는 때에 살고 있다. 교회생활도 좀더 진지하게 해야 할 때입니다. 가정생활 그리고 직장생활도 정말 깨어서 성실하게 할 때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민중들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시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을 합해서 민중들과 더불어 강도들의 소굴을 숙청하고 그리스도의 눈물을 멈출 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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