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활절이다. 부활절은 인간의 깊은 절망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 절망의 가장 깊은 뿌리는 인간 죽는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 이전에도 일생 동안 수 없이 절망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치유 불가능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먼저 절망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되면 절망한다. 사업에 실패해서 삶의 근거를 상실하면 절망한다. 믿었던 사람이 기만할 때 우리는 절망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배반할 때도 우리는 절망한다. 이러한 깊은 절망 가운데서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아니 사람은 실제로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다. 사업에 실패하고 빗더미에 올라앉은 가장이 죽음을 택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절망의 깊은 뿌리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통해서 이러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엘케골은 절망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그러나 희망은 다르다. 희망은 인간이 살 수 있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아니 살아야 한다는 당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 生命은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망을 가져야 하고 살아간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도 희망을 가져본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다시 희망을 가지고 고된 인생을 살아간다. 배반을 당하고도 살아간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망이라는 죽음의 병에 걸릴 수도 있지만 희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엠마오를 향해서 가고 있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인간의 절망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들은 사흘 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인해서 슬픔에 차서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은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서 사물에 대한 판단력마저도 상실한 것 같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그렇게 큰 희망을 두었던 일이 이렇게도 허무하게 끝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인가? 실망한 제자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절망 가운데 빠진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사람이기를 기대했었다”(누가 24,21). 다윗과 솔로몬 이래로 오랫동안 어둠의 길을 헤매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등 800여년이 넘은 식민지라고 하는 어둠의 그늘의 길을 걷던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의 새로운 등불이었다. 일단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사람으로 기대되었다.
예수는 이러한 처참한 현실 가운데서도 여타의 이스라엘 지도자들과는 달랐다. 그들의 지도자인 헤롯은 자신의 통치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로마 황제의 수양아들이 된 매국노 되었다. 헤롯은 백성의 현실문제에는 관심 없고 자기의 권력 안보에만 관심 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낡은 율법 전통에 매어 달려서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여념이 없었다. 엣세네파들은 죄많고 복잡한 사바세계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면서 초월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젤롯 당들이 무장봉기를 시도해 보지만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서는 아무런 일도 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다.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으로 그의 능력을 보여주었었다(20). 예수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는 말하는 데 있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능력이 있었다.. 그는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하나님께서는 만민을 사랑하시고 따라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즉 정의만이 이스라엘의 살 길이라고 했다. 또 그는 섬김의 원리에 의해서 살아갈 것을 호소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그는 행동에 있어서도 권위가 있었다. 그는 병든 자들을 고쳐주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무지한 자들을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셨다. 그는 성전을 장사수단으로 삼은 자들을 추방하고 종교를 본래의 위치로 되돌리려 했다.
그는 분명 이전의 제사장들과도 달랐고 이전의 예언자들과도 달랐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보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었다. 그는 일차적으로는 유대의 율법의 수호자들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고발을 당해서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로마 총독의 재판을 통해 사형언도를 받는다. 그리고 로마 병정들에 의해서 처형을 당한다. 그러나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과정에서 무지한 민중들도 예수 사형에 동참했다. 사수를 받은 민중들은 바라바를 살리라고 하고 예수를 사형에 처하라고 소리친다. 따라서 민중들도 예수처형에 동참했다. 또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는 순간 그곳에 와있던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따라서 그는 여성들 외에는 어떤 변호자도 없이 외롭게 죽음과 맞대결해야 했다. 체포될 때 제자들은 알몸으로 도망쳤고, 재판받을 때 부인을 당했고, 처형을 당할 때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그 자리에 없었다. 예수는 이렇게 만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만인의 구속자라고 말한다(Bultmann).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사흘째 되는 날 실망한 두 제자가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은 예수 사건의 허무함을 말하면서 길을 가고 있다. 역사란 그런 것이 아니냐 하고 체념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는 너무나 이상주의자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는 너무 현실을 모르는 나이브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너무나 많은 이상주의자들의 패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이상주의자들은 현실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나이브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실주의자들은 미래를 미워하지만 이상주의자들은 너무나 나이브하게 현재를 미워한다(Moltmann).
그러나 이상주의자들은 다시 나타나고 현실과 씨름하다가 적은 성과를 올리고는 죽어간다. 이러한 일련의 이상주의자들의 출현과 그들의 좌절의 역사가 이스라엘의 역사다 아니 온 인류의 역사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의 전형이다. 그들은 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와 사랑을 외치고 죽어간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나는 헛수만 하였다. 공연히 힘만 쏟았다”(사 49:4)고 탄식했다. 그러나 또 다른 선지자가 온다. 그들도 헛된 것 같은 수고를 하고 죽어간다. 그러면 또 다른 예언자가 온다.
이들은 무익한 수고로 끝난 것을 알면서도 왜 또 새로 시작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다. 하나님만이 이런 이상주의자들, 예언자들을 보낸다. 예수도 이러한 예언자들 가운데 서 계시다.
이러한 실망에 차 엠마오를 향해 길을 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낯선 사람이 동행하고 있다. 그는 왜 그들이 슬퍼하는 가를 물었다. 그들은 좀 신경질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오면서 사흘 전에 일어난 사건 즉 예수가 처형당한 사건을 알지 못하는가 하고 그들은 되ane는다. 이야기는 진행되어 어떤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시체는 보지 못하고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났다고 하는 말만 듣고 왔음을 전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서 확인해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두 제자와 동행하는 예수 사이에서 비교적 긴 대화가 진행되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모세 및 예언자들을 통해서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엠마오 상의 두 제자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후에 무덤을 방문했던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들과 동행하면서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 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오늘 성서는 그들을 가리켜 “더디 믿는 자들“(25절)이라고 했다. 그들은 엠마오에 도착할 때가지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또 부활사건도 믿지 않았다.
엠마오에 도착하자 예수는 더 길을 가시려고 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동행하던 예수를 모셔드려 같이 유숙할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이미 날이 저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떡을 가지고 축사를 하고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순간 그들은 동행자가 예수인 것을 깨닫게 된다. 깨달아 아는 순간 예수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때서야 제자들은 동행한 분이 부활한 예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을 풍어 해석해 줄 때 마음이 뜨거웠었다.”(32절)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허급지급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사도들이 모여 있었다. 베드로도 예수를 만났다고 전한다. 그러자 자신들도 예수를 만났던 것을 전한다.
이렇게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절망했던 제자들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새롭게 하나님 나라 일을 시작하게 했다. 그들은 그의 정신 즉 그의 영에 따라 살아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엠마오 도상의 설화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예수의 길 즉 구속사의 길에는 절망과 희망이 늘 교차된다는 것이다. 구속사의 대장정이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만 봐도 그렇다. 외적으로는 이집트라고 하는 도저히 대항하여 이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악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 이집트를 떠났어도 사막과 홍해라고 하는 자연적 장애도 가로놓여 있다. 에돔을 비롯한 나라들의 방해가 뒤따른다. 물이 부족하고 식량도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뿐만 아니라 내적 장애들도 있다. 출애굽 정신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집단도 등장한다. 이집트의 고기 가마에 연연 해 하는 노예근성도 지배한다. 그러나 이런 난관을 돌파할 때 비로소 가나안이라고 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의 길 즉 구속사의 길에는 죽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의 죽음의 길 즉 십자가의 길에 선 그의 제자들에게는 십자가의 길이 요청된다. “너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다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아니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십자가 사건이 없이 부활사건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지 십자군의 길이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나아갔을 때 여기에 동참한 제자들은 없었다. 예수가 곤경에 처하자 제자들은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만난 제자들은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서 예수의 길을 갔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도 순교를 당함으로써 예루살렘 원교회의 창설자가 되었다. 베드로도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기독교는 아니 인류의 역사는 이런 자기 희생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간다.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가 체포되는 현장에서 도망친 제자는 영영히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 고난에 동참하는 것,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며 이것이 부활신앙의 출발점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 교회는 새로운 사업으로 인해서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 원인은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 밖에도 있다. 밖의 원인을 찾자면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장소선택을 잘못한 것이고 두 번째는 불경기를 맞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적 요인은 우리들 자신들이 너무나 아마추어였다. 경험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동시에 내적 요인으로 들 수 있은 것은 인력수급에 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가장 큰 내적 요인을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성의 불철저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동안 새로운 공동체 모색을 위해서 많이 연구하고 기도하였지만 우리들 자신이 철저하게 무장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성의 필수조건이라고 하는 신앙적 삶도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이상하고 있는 목표에 대한 신념도 부족하고 의견통일도 되어 있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 사이에 언어도 다르고 대화소통도 되지 않는 현실이다. 나는 몇일간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언어의 혼란을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처럼 동행하는 예수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고 그가 말씀해 주는 성서의 말씀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여성들이 말하고 있는 천사의 부활증언도, 제자들의 확인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엠마오로 가려는 것은 아닌가? 어려움에 처하자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일을 시작했다가 성공이건 실패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도중하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하는 사도 바울의 책망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이기고 오늘 부활하셨다. 그의 가신 길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말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는 또 말한다. “우리가 (부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믿으랴?” 그는 또 말한다. “우리가 마땅히 빌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또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라”(롬 8장). 우리는 이제 절망의 엠마오의 길에서 뒤돌아 다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루살렘으로 가자.
1997.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