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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3 16:18
예수 수난의 의미
글쓴이 : 손규태

설교본문: 마가복음 15:33-41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푹 적셔서 갈대에 꿰어, 그에게 마시게 하며 말하기를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두고 봅시다" 하였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고 살로메도 있었다.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마가복음 15:33-41)
오늘은 6주간 동안 계속되는 수난주간 마지막 주일이다. 이번 주 금요일은 성금요일로 예수께서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사람들의 온갖 모욕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신 날이 이 주간에 들어 있다. 따라서 금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그의 고난과 죽음을 명상하고 또한 우리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의 문제를 같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옛 그리스의 비극들이나 또는 유명한 문학작품들도 인간의 고난의 문제, 특히 고난의 기원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보면 고난은 지배자와 갖게 되는 숙명적인 갈등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작가들은 이러한 숙명적 갈등을 뭔가 신에 의한 장난으로 보았다. 따라서 고난이란 그것을 피할 수 없는 뭔가 신적인 운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내용들을 우리는 쉐익스피어의 비극들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는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갈등들을 여러 측면에서 실감 있게 묘사하다. 이러한 갈등의 불가피성을 뭔가 인간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성서에도 인간고의 근원은 뭔가 신적인 간섭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구약의 욥기는 말하고 있다. 인간고라고 하는 것은 뭔가 축복이라는 개념과 같이 인간이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이 욥의 가르침이다.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고난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선한 사람은 잘되고 악한 사람은 망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고난이 갖는 신비가 있고 또한 구원하는 힘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 특히 예수의 수난사를 다루고 있는 복음서들은 바로 이 점을 보다 선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예수의 고난의 길은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되어 있었고 또 고난을 통해서 그는 메시야로서 구원의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신비로운 의미다.
인간고의 문제를 가장 실감 있고 심각하게 다룬 것은 역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 이것이야말로 예수에게서는 가장 고통스런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의 시간을 예견하고 세 번에 걸쳐서 제자들 앞에서 수난 예고를 하고 있다(8,31-38; 9,30-32; 10,32-34). 이 수난 예고의 말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매우 특이한 공통점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들에 의해서 버림받는다는 의식이다. 말하자면 예수는 모든 인간들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하는 점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이렇게 보면 예수의 수난은 십자가에 달리는 신체적 고통도 문제가 되지만 보다 더 심각한 괴로움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와서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던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버림받음이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고난이고 그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버림받음의 결과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런 경험은 오늘날에도 세속적인 차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는 일이라든지 또는 정치적으로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사람이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목숨을 끊는 것 또는 당대의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이 대중의 인기를 상실하고는 폐인으로 전락하는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이와 유사한 범주에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버림받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된다.
독일 말에 버림받는다는 독일 말은 Verlassen이란 동사다. 이 말은 참으로 신비한 단어다. 왜냐하면 이 단어를 기초로 하여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내용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즉 Verlassenheit란 말은 버림, 고독, 방기 등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같은 어근에서 나온 Verlässlichkeit란 말은 신빙성, 신뢰성, 의지함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단어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버림받음이란 말과 신뢰성 혹은 의지함이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인간관계에서 믿고 의지함이 없이는 버림받음이나 방기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버림받는다는 것은 신뢰성에 대한 배반과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상대에 대한 신뢰가 크면 클 수록 그에게서 받는 배신감도 클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수난 예고들에서 가장 핵심적 내용이 되는 것은 그가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래서 사랑했던 유대 백성들이 그를 버릴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는다.”(8:31). 세 번째 수난설화에서는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처형을 당할 것이다.”(10:32)라고 했다. 그를 박해할 사람들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동참할 것을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로 말하자면 실상 아브라함의 후예들로서 구원사의 주류를 이룬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사의 본류에서 이탈했을 뿐만 아니라 구원역사를 이끌어가던 메시아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구원사의 주류에 섰던 사람들이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준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전 세계를 대변했던 로마제국의 통치자 빌라도가 그를 전 인류를 대리해서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했다. 빌라도는 단순히 로마의 한 관리로서가 아니라 전 인류의 대표로서 예수의 처형에 가담했던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 빌라도에 의한 예수의 고난을 고백하는 것은 그가 가지는 인류의 보편성 때문이다. 빌라도가 예수의 수난사에 참여한 것은 모든 인류가 예수 죽이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배자로서 전 세계를 대표하여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은 수난사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임에 참여한 것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그리고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만이 아닌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에서 이방인 통치자는 예수의 무죄함을 알고 그를 석방하려고 했지만 다수의 군중들이 바라바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친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화되지 못한 다수의 민중들의 잘못된 행태를 보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분명하게 예수의 수난에 동참자들 가운데는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민중들도 동참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불트만(Bultmann)은 그의 양식사적 해석에서 이들 민중들의 참여를 가리켜 예수가 “만민을 위해서” 수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고 만일 그들이 예수 죽이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구원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한다. 어쨌든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행태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저들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니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한다.”
그런데 더욱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대제사장, 서기관들 그리고 로마의 통치자와 민중들뿐만 아니라 수난설화에 나타난 제자들의 행태라고 할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앞에 두고 비장한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면서 자기의 수난을 세 차례나 예고하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은가 하는 것을 논쟁을 벌이고 있다(9:33-37). 그리고 마지막 수난 예고를 하고 났을 때에도 제자들 가운데 세베대의 아들들은 감투싸움에 정신이 없었다. 누가 좌의정이 되고 누가 우의정이 될 것인가에 온 정신이 쏠려 있다. 그들은 모든 가업을 버리기까지 하고 3년이란 긴 세월을 스승을 모시고 다녔지만 예수가 왜 오셨고 또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수제자라고 자칭하는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에게 말하고 있다. 그 수난의 길을 피해서 안정되게 살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커다란 유혹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그를 꾸짖는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마치 예수를 위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예수를 배신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가 걸어가야 할 수난의 길을 회피하는 것이다.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 고난이 아니라 부요함, 역사의 고난의 현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놓고 예수를 모시는 길이 바로 베드로의 길이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대교회들이다. 한국 교회가 지난 30년 동안 좀더 수난의 길에 동참했더라면 우리의 현실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난 50년 동안 좀더 진지하게 예수의 고난의 동참했더라면 남북문제도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베드로처럼 수난의 길에 직면해서 예수로 하여금 그 길을 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작 예수께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게 되자 대부분의 제자들은 도망쳤다. 어떤 제자는 이름은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알몸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그리고 수제자를 자칭하던 베드로도 대제사장 집 어린 하녀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그를 부인했다. 예수께서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각기 자기의 십자가를 자고 그를 따를 것을 바라셨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기는커녕 도망치기에 정신없었고 부인하기에 정신이 없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깊은 배신감과 함께 버림받은 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깊은 신뢰성 뒤에 오는 그러한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던 베드로도 예수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가운데 가롯인 유다는 그를 배반하는데 앞장섰다. 사실 이렇게 구원역사는 엄격한 의미에서 배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의 직제자들의 행태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2000년의 교회사는 실상 이러한 제자들의 무지와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들도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행태를 반복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단적인 신흥종교들의 복음의 왜곡은 말할 것도 없고 개신교의 중요 교파들 안에서 교회지도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온갖 교권주의, 이권주의등은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감투싸움에 혈안이 되어 있고 이권 찾아다니기에 정신이 없다. 교회 일치 운동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어떻게 하면 기독교 방송국 사장 자리를 차지할까? 어떻게 하면 KNCC 총무 자리를 차지할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각 교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원용목사가 몇 년 전에 이런 말을 했다. “40대의 목사의 최고 소원은 노회장 되는 것이요 50대 목사의 최고 소원은 총회장 되는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원리에서 보듯이 이런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하고 있으니 교회는 그 정신적이고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즘 한국교회 안에서는 교회지도자의 자질론이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당시의 이러한 교회를 가리켜 경건의 모양만 있고 그 능력은 상실하고 있다고 비판했다(딤후 3:4).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그 능력이 벗는 것이 한국 교회의 실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본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러한 변치 않는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간의 한계성이 바로 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죄성은 가정에서의 부부간의 신뢰에 대한 배반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 사회 생활하는 데서 인간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배반하는데 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국제 관계에서 국가간의 신뢰를 상실하고 전쟁으로 나아가는 데서도 나타난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은 인간을 버리시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비해서 인간들은 언제든지 서로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데 이것이 죄다.
요즘은 부부가 이혼을 할 때 자식을 서로 맡지 않으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고아 아닌 고아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들로부터 버림받은 자녀들은 일생을 좌절감과 불안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버림받은 노인들도 마지막 여생을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쉽게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이 버림받는 것에 인간고의 신비와 깊이가 있다. 따라서 인간고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버림받음 아니 자기의 제자들로부터 까지 버림을 받는 것에서 예수는 인간고의 심연을 친히 경험했다.
그러나 예수가 경험했던 가장 큰 수난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것이었다. 자기를 보내고 구원사업을 하도록 위탁을 주었던 하나님이 정작 마지막 순간에 골고다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골고다에서 고난의 잔을 파하게 해달라고 피와 땀을 흘리며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예수가 스스로 당신의 뜻대로 하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울부짖었을 때에도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엔도 슈샤꼬의 “침묵”에서도 일본의 천주교인들이 박해의 이슬로 사라져 가면 신음할 때도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니 히틀러의 나치 수용소에서 죽어 가는 600만의 유대인들의 비명에도 그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미군의 핵폭탄에 비명을 지르고 죽어 가는 일본인들 그리고 한국인들의 최후의 부르짖음에도 그는 침묵하고 있다. 월남전에서 미군들이 뿌린 고엽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도 그는 침묵했다.
실상 인간의 고통에서 하나님은 침묵할 뿐이다. 아니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바로 그때가 인간에게는 고통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이 하나님이 인간을 버린 시간, 아니 하나님의 부재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수난의 시간이다. 예수께서는 아무런 약속도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못한 채 고통의 죽음을 당했다. 하나님은 3일 후에 있을 부활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고통 가운데 죽음이라는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아니 그 고통이 너무나 처절했기에 죽음은 그에게 구원이었는지도 모른다. 난치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는 유일한 구원의 길은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마저도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의 구약의 말씀이 이러한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조금은 밝혀 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실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였다.“ 이 구약성서 이사야의 증언이다. 이러한 천덕꾸러기 예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심지어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수난이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는 이러한 수난을 당하면서도 털 깍는 자 앞에 선 양과 같이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인간들의 아우성 속에서도 침묵을 지켰고 베드로의 심문에서도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수난에서 하나님도 침묵했고 그 아들도 침묵했다. 이 침묵은 그렇게도 사랑했던 모든 인류로부터 버림받는 너무나 억울하고 괴로운 죽음에 직면한 아버지와 아들의 침묵이었다. 이 고통에서부터 구원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 고통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는 침묵에서 진정한 구원은 시작된다. 버림받은 끔찍한 고통,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의 상징인 십자가의 고통에서 부활의 구원이 동터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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