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누가복음 10: 38-42
“저희가 길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행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 38-42).
오늘은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6주간 동안 계속되는 현현절 마지막 주일이다. 그리스 어로 현현절을 우리는 에피파니라고 한다. 교회력에서 이 현현절이 가지는 의미는 물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온 인류에게 나타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뜻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는데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현절의 진정한 신학적 의미를 가장 요약해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현절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현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나타남을 기념하는 절기인 동시에 인간의 모든 음모와 어두움을 드러나게 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악함이 다 은폐되고 엄폐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기도한다. 지난 6주간 동안 이러한 엄폐된 것들 가운데 드러난 것을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첫째는 한국을 두 주일 남짓하게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은 광운대학 부정입학 사건이었다. 이러한 부정 입학은 그 동안 여러 가지 방법과 경로를 통해서 여러 대학에서 자행되어 왔다. 이것은 비정상적이고 광적인 일부 학부모들의 과도한 교육열과 이것을 통해서 부족한 사립대학의 재정난을 해결하겠다는 사립대학이 몇몇 입시부로커를 통해서 매개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 많은 학부모들이 구속되고 공직에서 추방당하고 또 인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이 사건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의혹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더 많은 문제점들을 들추어내면 노태우 정권의 기저마저 흔들리게 되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수사를 종결하고 말았다. 또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을 축제분위기 가운데서 치르기 위해서 경찰이 서둘러 수사를 마무리했다.
현현절 기간 동안에 두 번째로 드러난 것은 김영삼 차기 대통령이 선거공약에서 그리고 당선 직후에 큰 소리쳤던 “개혁”이 구두선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는 아무런 개혁의 능력도 그리고 의지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두어 차례 극명하게 드러났다. 첫 번째는 그가 “신학국 건설”을 위해서 위원회를 조직한다고 큰소리치다가 내부의 압력이 거세지니까 슬거머니 집어치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몇 일전까지 부정 척결을 위해서 ”부정방지위원회“를 만든다고 매일 같이 신문에 대문짝 같이 떠들다가 그것도 그만 둔 것이다. 검찰, 감사원등 기존의 사정기관들에서 강력히 반대하고 나서니까 그는 더이상 일을 추진하지 못하고 말았다. 기득권 내지 과거의 군사정권의 하수인격인 그가 그들의 비리를 척결하고 새로운 한국을 만든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현현절 기간 동안에 드러난 마지막 사건은 북한에 대한 핵사찰 공격을 통해서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자는 국제적인 드라마다. 남한 정부는 미국과 일본을 앞장세워서 동족의 일부가 살고 있는 북한을 궁지로 몰아 넣어서 그들을 흡수통일 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 오고 있다. 제네바에 있는 국제 원자력 기구에 압력을 가해서 북한의 군사시설들을 사찰하려고 시도 할 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는 팀 스피리트와 같은 전쟁연습을 시도하면서 남북문제의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 정부의 이러한 비민주적이고 비자주적이며 타락한 양상이 지난 현현절 주간에만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장로로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 취임하고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고 있는 이 마당에 이러한 것들이 드러난다는 것은 실로 우리의 앞날을 어둡고 답답하게 만들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보“를 말했고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형성“을 그의 윤리학에서 주장한바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의 진보는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 형성은 가능한 것일까?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세워지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복음의 전보는 없는 것일까? 모르기는 모르지만 광운대학인가 광기대학인가에 자식을 보내려고 했다가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앉아 있는 수많은 학부모들 가운데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사회와 교회에서 행세깨나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광운대학 사건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독교적으로 말해서 고해성사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것이다. 고해성사는 마태 18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잘못된 것을 서로 고하고 하나님에게 사죄를 간구하던 것이 교회적으로 제도화 된 것이다. 후에는 이 권한이 주로 주교에게 귀속되었다. 카톨릭에서는 아직도 1년에 한두번씩 고해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사죄를 받는다. 개신교에서는 사죄의 권한이 사제에게 없다는 이유로 이것을 등한시했고 유우럽의 계몽주의는 이 제도를 거의 무효화시키기에 이렀다. 우리 사회에서는 유교적인 관례에 따라서 잘못된 일을 공동체적으로 책임지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군사정권 시절에 군인들의 자의적인 법집행으로 인해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지는 고해적 성격이 사라지게 되었다. 있다면 단지 “후회” 정도에 머물고 있을 뿐이며 그것도 매우 형식적이다. 재수 없어서 걸려들었다는 생각뿐이다. 잘못해도 돈과 지위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에 후회는 범죄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빠져 나오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뿐이다. 대통령부터가 약속파기를 식은 죽 먹듯 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법에 정해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거부한 것이다.
광운대학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서 드러난 또 하나의 극명한 사실은 도덕적인 것과 법적인 것이 엄청나게 뒤엉켜 있다는 것이다. 대리시험을 치러준 연세대 의대생의 아버지는 지방의 검찰청장이었다. 그는 아무런 법적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 아들이 대리시험을 쳐준 까닭에 몸담고 있던 검사직을 포기해야 했다. 물론 공직자의 윤리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성인이 되어 책임을 져야 하는 자식의 잘못으로 일생을 건 직업에서 조기 은퇴해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돈을 주어 자기 아들을 부정 입학시키려 던 다른 부모들과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그런 식이라면 만일 이 검사가 어떤 과오를 범했다면 그 아들이 연세대에 다니는 것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성인이 된 아들의 잘못은 그 아들 개인이 책임을 지면 그만이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법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이 뒤얽혀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적이지도 않은 우리가 이런 경우에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정상성을 노출하는 것뿐이다.
오늘 현현절 마지막 주일 성경 말씀은 유독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이다. 이들 두 자매의 삶 특히 예수를 맞이한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었다. 마르다는 주님이 자기 집을 방문하자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려고 했다. 즉 주님을 위해서 온갖 것을 다 바쳐서 헌신하려고 했다. 그 일로 그녀는 말할 수 없이 분주했다. 마르다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 봉사를 위해서 물질적인 헌신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바쳐야 하는 헌신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도 이런 마르다와 같이 헌신적인 교우들이 많이 있다. 아니 이런 헌신적인 교우들 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실상 주님의 몸된 교회는 유지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마르다가 많다고 해도 교회에서는 결코 과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다른 방식도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러 가지 많은 것으로 분주한 것보다도 발치에 앉아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도 주님은 칭찬하셨다. 주님을 섬기는 일 아니 인간사에는 해야할 일들이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은 많은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가리켜서 주님과의 말씀의 교제라고 했다.
그러면 그 말씀의 교제라는 것이 무엇일까? 마태복음에 보면 이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했다. 오늘 구약 성서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보다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삶은 어떤가? 마르다 처럼 너무나 많은 잡다한 일에 쫓기면서 사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모두 마르다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 공부해라, 피아노 쳐라, 미술 그려라, 발레해라. 이것 해라 저 것 해라하고 닥달하지는 않는가?
광운대학등 부정입학도 혹시 세속 사회에서의 이러한 마르다적 열성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이런 부모들의 광기가 어린이들을 얼마나 상처 주고 찌들게 만드는지를 아는가? 아이들이 그렇게 많은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만을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다 하기를 원하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노태우씨는 할 일이 없어서 매일 이런 저런 사람 불러다가 몇천만원 짜리 파티만을 열고 있다. 그는 공약실천을 검정한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어젠가는 어느 절에도 가 보았다. 은퇴하고 들어갈 곳 찾는 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이 있다.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상 필요한 것은 많은 것이 아니다. 단 한가지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써 꼭 필요한 것이란 민족의 숙원사업인 통일이다. 이러한 민족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핵사찰을 하겠다 외국군대 불러다가 동족을 향해서 군사연습을 하는 사람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를 하고 또 돈도 사람도 많아야 뭔가 된다고 주장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대교회와 거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면 낙망이라는 유혹에 무기력이라는 병에 걸린다. 이 병에 걸리는 것을 키에르케고르는 배교라고 했다. 배교란 다른 것이 아니고 자기는 무력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온갖 종류의 열등의식이 배교다.
현현절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는 은총의 날이다. 현현절은 인간의 온갖 탐욕과 죄악을 들어내는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현절은 분주한 마리아가 부정되고 주님의 듯을 경청하는 마리아가 용납되는 날이다. 현현절은 온갖 잡다한 것을 통해서 교회가 자기를 들어내는 날이 아니라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뜻을 헤아리는 날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양식으로 삼고 그의 의와 나라를 위해서 살도록 결단하는 날이다. 이 현현절을 바로 살 때 곧이어 수난절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