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마태복음 7:7-12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아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태복음 7:7-12)
우리는 한 주일만 지내면 대망의 성탄절을 마지 하게 된다. 과거에는 별 감동 없이 성탄절을 마지하곤 했지만 금년도의 성탄절은 저에게는 커다란 감명을 주는 것 같다. 저는 지난 4월 병원에 입원하고 그리고 퇴원하면서부터 마지 하는 모든 절기들이 예사스럽지 않게 되었다. 다시 성탄절을 마지하고 그리고 또 신년을 마지 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저의 건강을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완치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 그리고 교회 생활을 하면서 약간의 시간을 내서 글들도 쓸 수 있으니 저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러한 어려운 경험을 하면서 저는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이 있다. 그것은 제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간구하고 의지할 분, 우리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이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따라서 간구하고 의지할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절망했을 것이다. 저의 병을 치료해 준 분은 물론 의사였지만 그러나 제가 오늘의 건강을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저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제가 의지할 수 있도록 나의 삶의 기초가 되어 주신 분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다. 저희가 간구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커다란 축복이고 은총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이고 신앙인의 자세일 것이다.
오늘 저는 강림절을 마지 해서 산상설교에 나오는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했다 그 말씀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오늘 제가 택한 말씀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구하는 자에게 허락해 주시고 찾는 자에게 발견하게 해 주시며 두드리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구약성서를 읽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간들에게 허락해 주고 있다.
우리는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전형적 모습을 창세기 22장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을 향해서 그 자식마저도 요구하시는 냉혹한 하나님이 등장한다. 즉 그는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어서 얻은 자식 이삭마저도 자기에게 제물로 바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수양제물을 허락해 주심으로써 이삭을 살렸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가리켜 여호와 이레라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산에서 허락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노예화된 희브리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해방을 허락하셨다. 그는 모세라는 지도자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강대국 애굽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적적으로 구출해 주신 것이다. 이러한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정의를 실현하라 등 율법과 예언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요구하기보다는 허락하는 분이다. 그는 아모스를 통해서 공의를 요구했고 그는 예레미야에게 참회를 요구했고 이사야를 통해서 인애를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모든 것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다. 즉 그는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공의와 사랑을 가지고 살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시던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모든 제사장의 대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골고다에서 우리의 죄를 걸머지고 지성소로 나아가셨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구하기만 하면 얻고 찾기만 하면 발견하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성탄절에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심지어는 자기의 아들까지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자비의 화신인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둘째 우리에게 아들까지 보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허락해 주시는 분이다. 그 분은 이미 창조에서 인간이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다.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구하지 않았지만 제물을 마련해 주셨다.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허락해 주시는 것은 우리들 삶의 경험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축복들은 사실상 우리가 일일이 구하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 우리는 그것을 자식들을 키우면서 뼈저리게 경험했다.
독일에 살 때 이야기입니다. 어린 미영이와 우영이를 집에다 내버려두다시피 하고 우리는 목회를 한다, 공부를 한다 하면서 그냥 돌아다녔다. 한국에 사는 부모들처럼 과외를 시킨다, 도시락을 싸 준다 하면서 그들이 편히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전혀 만들어 줄 수가 없었다. 그 때 우리의 기도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일을 하니 우리 아이들은 당신이 맡아 주십시요!” 이것은 기도라기보다는 거의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셔서 아이들은 우선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다. 자기들이 할 일들은 다 알아서 해 가지고 학교에 다녔다. 공부하란 소리 한마디 해본 일이 없지만 알아서 공부도 했다. 지금의 우리의 기도는 다만 “하나님 감사했다.”일 뿐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터득한 신앙과 지혜는 자식들은 부모가 마음대로 만들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일이 구하지 않는데도 알고 보면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구하지 않아도 허락하시고 찾지 않아도 발견하게 하시고 두드리지 않아도 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지 않고 찾지 않고 두드리지 않아도 우리를 위해서 그의 아들을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가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이다.
그 분은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을 허락하신다. 그 분은 우리가 찾는 것 이상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는 우리가 두드리기 전에 문을 열어 주신다.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부모도 아이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없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 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돌을 달래도 떡을 주시고 뱀을 달래도 생선을 주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다. 그 분은 구하고 의지할만한 분입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 구하고 그 분을 찾고 그의 문을 두드린다. 그 분은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로 맞아주시고 허락해 주실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강림절을 마지해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해야 하는가? 저는 그리스도인들은 구하는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는 자들에게라도 필요한 것을 허락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남에게 요구하는 바를 남에게 허락하라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가톨릭교회의 김수환 추기경의 제안으로 ”내 탓이요!”라는 운동이 가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위정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국민들이 잘못된 책임들을 남에게만 떠넘기는 풍토가 만연했을 때다.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공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수단 등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또 12.12사태에서 많은 군인들이 죽고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해서 정권이 탈취 당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누구도 책임을 지는 이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운동을 전개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모든 잘못된 것들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자세는 대단히 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우리도 남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다. 그래서 본문은 이것이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들이 가르치는 것을 다 종합한 것이라고 했다. 구약의 그 많은 율법 책을 다 읽을 필요 없이 그리고 구약의 그 많은 예언서들을 다 읽을 필요 없이 타인에게서 바라는바 그대로 타인에게 베풀라는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성탄절의 주님으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1993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