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계시록 3:1-14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내고,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서머나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버가모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계시록 3:1-14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그의 과감한 개혁과 개방화 정책은 이제까지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이른바 동서간의 냉전 체제를 붕괴시켰다. 몰타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와 부시대통령 즉 양대 강국의 지도자들은 이제까지의 냉전은 종식되었다고 선언했다. 이 말은 동서의 이념적 대결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 대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5년 제이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롭게 형성되었던 동서간의 냉전체제가 붕괴된 것이다. 따라서 이 선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 운 시대 즉 대결이 아니라 화해의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게 했다.
그러면 1979년 당시 세계교회협의회 총무였던 필립 포터가 그의 성탄절 메시지를 통해서 말했던 것이 이루어진 것인가?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즉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사회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 불의가 아니라 정의, 전쟁이 아니라 평화, 파괴적 분열이 아니라 일치, 질병이 아니라 건강에 대한 갈망의 표현, 말하자면 어둠의 세력들에 대한 빛의 세력들의 승리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말하고 있는데 정말 새롭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 이른바 "신 국제 질서"라는 것이 평화적이고 정의로운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러한 새로운 국제질서가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얼마 전 페르시아 만에서는 전대미문의 살육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은 미국의 주도하에 세계 평화를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인 유엔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이른바 걸프전으로 알려진 이 전쟁은 이러한 새로운 국제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일어났다. 유엔은 미군이 주축이 되고 선진 공업 국가들의 재정적 지원 하에서 엄청난 살상을 감행했다. 이것이 이른바 새로운 국제질서의 서막인가? 이러한 전쟁을 통해서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것은 평화를 위한 정당한 전쟁이었는가?
둘째 새로운 국제 질서의 재편을 주도해 나가는 미국은 지금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약소국가들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 할 수 있는가? 왜 군사적 대결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삶은 더 어려워만 지는 것일까? 이러한 막대한 군사비의 지출을 중지하면 산업이 더욱 활기를 얻고 성장해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셋째 다른 한편 과거의 냉전체제 하에서는 그래도 견디어 내던 러시아가 무거운 군사적 부담에서 벗어났으면서도 왜 경제적으로 파산지경에 도달한 것일까? 러시아의 현재의 경제적 상황은 매우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소련의 위성적 지배 하에 있던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나라들은 내전의 늪에서 허덕이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우리의 농촌 현실 아니 나가서 우리나라의 경제적 현실을 파멸로까지 몰아갈지도 모르는 시장 개방과 우루과이 협상에서의 쌀 시장의 개방이 이토록 강요당하고 있는 원인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만일 쌀 시장이 개방되어서 쌀 한 가마에 3만원 하는 양질의 미국 쌀을 사서 먹게 된다면 우리의 농촌은 어떻게 되겠는가? 도시의 봉급생활자들에게는 희소식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농업은 완전히 파산하고 말 것이다.
새로운 국제 질서 형성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단지 몇 가지만을 예로 들었다. 과거의 냉전 체제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인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심각한 위기로 내닫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나라들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삶은 대단히 심각한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우리와 같이 수출에만 의지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그 파급효과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에 따르지 않고 있는 중국이나 북한의 경우도 어려움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앞으로의 사태 발전을 비관적으로 보는 인식이 점차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태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동서의 냉전 체제의 종식은 곧 남북의 열전 체제로 나가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과거의 군사적 대결의 상황이 끝나고도 아니 군사적 대결이 끝났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들이 제기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면 "냉전 체제"로부터 "공존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것은 단지 군사적 대결에서 경제적 대결로 바뀐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지금의 문제들은 과거의 군사적 대결 체제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단기적이고 잠정적인 어려움일까? 그렇기만 하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저는 우리의 현실과 세계의 실정을 바라보면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깊이 명상하게 되었다. 성서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다. 거기에는 앞뒤로 뭔가 가득 기록되어 있고 일곱 개의 도장으로 봉해졌다. 그 책 안에는 온 인류의 구원의 길이 적혀 있지만 그 봉인을 떼고 그 내용을 밝혀 줄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하늘 위에나 땅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즉 딜레마에 처한 인류의 문제를 정확히 밝혀 주거나 해결할 방안을 제시할 존재가 천상천하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인류 아니 우리 한반도의 문제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우리나라 안에도 남북의 통일 문제를 비롯해서 민주화의 문제, 그리고 주택문제와 노동문제 등 수많은 산적한 문제들이 있지만 어느 하나도 제대로 풀려 나가는 것이 없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모순들 가운데 제대로 해결된 것이 있는가? 교육 문제만 보아도 그렇다. 청소년들을 어려서부터 심각한 타격으로 몰아가는 교육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전교조가 야심 차게 뭔가를 시도해 보려고 하지만 지금 그들의 활동은 과거의 낡은 세력들에 의해서 큰 벽에 직면하고 있다.
계시록의 저자는 이러한 문제를 풀 능력이 있는 자도 또 자격이 있는 자도 발견 할 수가 없어 "크게 울었다"고 했다. 이 엄청난 모순들 앞에서 장래가 보이지 않자 그는 그만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울고 있는가? 양심적인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울고 있을 것이다.
정말 이들의 문제를 풀어 줄 사람은 하늘에도 땅에도 땅 아래도 없는 것일까? 성경에 보면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울지 마라"고 했다. 장로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전달자다. 그 장로의 말씀이 이 하나님의 지혜와 해결책이 담긴 책의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유대지파의 다윗의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분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서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받으실 분이다.” 그는 모든 역사와 인류의 문제를 풀어 갈 열쇠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 분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심 으로써 세계만방의 민족들과 언어들과 나라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에게 드리시고 대제사장으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 말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신학자 샤르댕의 말처럼 온 인류의 역사는 오메가 포인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수렴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의 군왕들이 나와서 위엄을 자랑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만민을 통일하고 통치한다는 것이다. 강림절은 이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신자들은 이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산다. 신자란 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에게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강림절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이 나라의 건설에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한 확실한 소망을 약속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으로 이 자리에 나와 주님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드리는 것이다.
강림절 첫 주일의 구약성경에 보면 그 분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 분은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다스리리라."(렘 23:5). 이 강림절의 말씀은 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통치하시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세상의 왕들이 아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가 부쉬가 되었든지 또 고르바초프가 되었든지 역사의 봉인을 떼고 그 비밀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전쟁 을 일으키고 약한 자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존재들일 뿐이다. 오직 그리스만 이 우리의 왕이다.
또 그 분은 지혜로 다스린다. 이사야 9장 6절에도 보면 이 왕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아버지라고 했다. 이 세상의 왕들이 온갖 지혜를 동원하고 또 지혜 있는 자들을 사용해서 통치하지만 그 지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에 미치지 못한다. 그 지혜란 바로 십자가의 지혜다.
십자가의 지혜란 무엇일까? 자기를 희생하는 지혜, 자기를 헌신함으로써 통치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세상 임금들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적이나 백성들을 희생시키면서 통치하는 것을 최고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정치의 대표적 인물들이 바로 군사적 힘으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란 얼마 가지 않는다. 십자가의 통치자만이 영존하며 평강에서 평강을 가져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분은 정의로 다스린다. 예레미야 23장 5절에 보면 "그는 세상에서 공의와 공평을 행할 것이라."고 했다. "불의로 집을 세우고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웃을 고용하고 그 노임을 주지 않는 자에게 화 있다"고 하신 이 강림절의 왕 되신 그리스도는 "너희가 공의와 공평을 행하면 형통하리라"고 했다(렘 2:3,13). 오늘날 이 세계가 이러한 모순 가운데 빠져드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제 질서라는 것은 이 하나님의 정의의 질서에 명백하게 반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 가운데 있다. 강림절이 무엇인가? 이는 기존하는 모든 가치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고 동시에 새로운 하나님의 정의의 질서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다. 독일의 비판철학자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기존하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불신이다. 기존하는 것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불신자들이다. 현재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포기만이 미래를 약속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세를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것"은 자기의 전존재를 포기한다는 선언이다.
이렇게 할 때 그 때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평안을 획득한다. 이렇게 할 때만 우리 역시 구원을 얻고 평안을 누릴 것이다.!
199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