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마태복음 5:38-4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38-48)
저는 1986년 11월 5일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 마터혼(Matthorn)이라고 하는 제가 보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쩨르마트(Zermatt)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12월 18-19일자로 신학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마지막 구두시험 날짜를 받아 놓고 그것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친구가 들어 닥쳤다. 그 친구의 두 번째 아들이 대학입학 시험에 두 번이나 실패를 하고 세 번째 도전하기 직전에 그만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거쳤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켜서 일단 생명을 구해 놓고는 견디기 힘든 심정이 달래기 위해서 훌쩍 우리 집을 찾아왔다.
나도 구두시험 날짜를 잡아 놓고 읽어야 할 책들도 많아서 초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그 친구의 아픈 심정을 달래기 위해서 같이 며칠간 여행길에 올랐다. 우선 스위스의 제네바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고 나서 그 친구는 무작정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돌아다니자고 떼를 쓴다. 그러나 스페인으로 들어가자면 프랑스 국경을 넘어가야 하고 또 그렇게 하자면 프랑스 입국 비자를 받아야 했다. 제네바에서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가니 비자 신청을 하면 하루 뒤에 와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서 다시 제네바에서 다시 하루를 보내기 보다는 좀 더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하고 나는 차를 몰고 늘 그림에서만 보던 이 마터혼을 찾아 나선 것이다. 오후 늦게 그 곳에 도착해서 아랫마을 제르마트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에 산악기차를 타고 등반하기로 했다.
그 다음날 아침 각기 100프랑씩의 비싼 돈을 내고 기차를 타니 사람들은 20.30명 정도밖에 없었다. 기차는 오르고 또 올라서 11시가 되어서 겨우 마트혼의 바로 발밑까지 올라갔는데 거기서 보아도 산은 아직 1000메타는 더 높아 보였다. 그 자태와 웅장함은 가히 비할 데가 없었다. 3000미터 이상의 눈 덮인 산들의 파노라마가 장관을 이룬 가운데 유독 이 산 마터혼 만은 정말 높고도 강력한 위용을 드러내고 서 있다. 자주 구름 속에 가리지만 그날따라 날씨가 좋아서 그 주봉을 잘 관찰할 수가 있었다. 히말라야는 너무 높고 험해서 사람들이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고 캐나다의 매킨리는 무덤덤하게 높기만 하다. 일본의 후지 산은 주변에 산들의 파노라마도 없이 좀 독야청청한데가 있지만 마터혼은 수많은 연봉들 사이에 마치 도끼날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하기만 그 아름다움이 장관이었다. 저는 산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산은 바로 이 마터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 21째 되는 주일이다. 오늘의 설교를 위해서 제시된 성경말씀들은 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온전성에 관한 것이다. 우선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논제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세리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인사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20절 같은 산상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의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크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리스도인 됨의 자세를 우리에게 분명히 해 주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 말씀의 결론이 제시하고 있는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세리나 인사하는 자에게 인사로 대할 수 있는 이방인과 다를 뿐만 아니라 구약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낳은 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의들 “눈은 눈으로 그리고 이는 이로 갚는다.”고 하는 공평의 정의 전통적 정의 개념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한다. 성서는 여기서 여섯 개의 논제와 반제들을 제시하지만 이것을 요약해 보면 하나의 논제에 대해서 다른 하나의 반제가 제시된 것이다. 즉 “눈은 눈으로 그리고 이는 이로”라고 하는 구약의 논제에 대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린 위해서 기도하라”는 반제로 답하고 있다.
이런 예들이 존재하는가?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삶의 자세를 적어도 두 사람에게서 경험했습니다.
하나는 공산주의자인 소련의 수상이었던 고르바초프다. 그는 1985년 집권하고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라고 하는 두개의 개념을 통해서 당시까지의 동서냉전이라고 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정치적 현실을 깨뜨리고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열어 놓은 인물이다. 당시 그의 정적이었던 장로교 기독교인이었던 미국 대통령 레이건이 원수사랑과 박해자를 위한 기도를 실천에 옮긴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무신론자였던 고르바초프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던 것이다. 얄타로 시작된 동서냉전체제가 드디어 몰타회담으로 끝났던 것이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주장하고 예언했던 대로 동서냉전은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무저갱으로부터 기어 나온 두 짐승 즉 악의 화신들의 권력투쟁이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 그 어떤 것이 선하고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실은 악의 화신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했듯이 자기가 선택한 유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 무신론자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실천해 가신 것이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매주일 외워대는 미국의 레이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도 보지 않고 러시아의 낡아빠지고 썩은 정교회에 대해서 오히려 적대감을 가졌던 고르바초프라고 하는 공산당원을 통해서 산상설교의 말씀, 즉 원수사랑 즉 화해의 말씀이 실천되이다. 놀라운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저는 지난 달 20-22일까지 일본 동경의 도산소 아카데미 수양관에서 열린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제3차 동경회의에 주제 강연을 위해서 참석했다. 저는 남북의 기독교 대표들과 해외에서 온 참석자들 앞에서 남북통일을 위한 전제로서 그리스도인들과 공산주의자들, 자본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한 민족으로서 자기들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함께 사는 방안에 대해서 강연했다. 나의 출발점은 간단하다. 첫째는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원수사랑이라고 하는 성서적 전통과 둘째로는 다양한 신앙고백들을 인정한 종교개혁 전통이요, 마지막으로는 다양한 사상을 용납하는 기본적 민주주의 전통에 따라서 우리는 생각과 신앙 그리고 정치체제를 달리 하면서도 얼마든지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은 어떤 단일 사상, 단일 이데올로기 또는 어떤 단일청치체제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 제도, 이념을 가진 이들이 같이 살아가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같은 사상을 가지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도 할 있다. 같은 이데올로기 가진 사람과만 인사하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있다. 같은 정치체제를 가진 사람과 정당을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은 세리도 할 수 있고 이방인들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는 구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의요, 예수 당시 배타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다.
그런데 거기에 참석하러 온 북쪽의 대표자들 가운데 고기준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강연을 했다. 그들은 초지일관 북한에서 주장하는 대로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국가 보안법 등을 철폐하고 민족대단결을 통해서 고려연방제에 의한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측했던 그대로였고 또 그들은 다른 말을 할 처지에 있지도 못했다. 그들 가운데는 국가에 파견한 두 사람의 지도원 동무가 동행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많은 토론을 주고 받았다. 그 중에서 인상에 남는 것은 한국 장로교회 보수적인 고려파에서 온 대표가 왜 북한교회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있느냐? 김일성에게 그 주체사상을 버리게 하라 그렇게 하면 당장 통일 될 것이 아니가? 라고 물었다. 이때 고기준 목사는 대답하기를 ”왜 그 사람을 중요하다고 자기들이 신봉하고 있는 것을 억지로 버리라고 하느냐? 당신 보고 예수님 버리라고 하면 버리겠느냐? 통일이란 주체사상이나 예수님을 버리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 그대로 두고서 같이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원수사랑을 말하지 않았는가? 김일성도 남한의 그리스도인들 보고 예수님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도 목사님들을 존경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대해서 남한에서 온 목사님들 약 70명가량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고르바초프와 북한이라고 하는 기독교가 형편없이 위축된 사회에서 온 사람 고기준 목사를 통해서 오히려 예수의 산상설교의 정신이 더 잘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선교의 기적을 자랑하고 1천만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큰 교회 짓고 열심히 선교하고 기도하는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북한 사람들보다 더 나온 것이 무엇인가? 남한의 목사들은 많은 교인들을 전도해서 많은 헌금을 모아서 큰 교회 짓고 쫗은 자동차 타고 다니는 것을 성공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또 지도급 목사들은 교회정치에 눈이 어두워서 총회본부들은 온갖 권모와 술수의 온상으로 삼고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않는가? 좀더 경건을 자랑하는 성령파 종말론파들의 마지막 귀결은 이장림인가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난 휴거소동과 같은 사람들의 손가락질 당하는 사건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대부분의 중산층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연대를 상실한 전형적 부르주아 그리스도인들의 면모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서민층에 속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순복음적 기복신앙에 매달려서 자기들도 중산층 되게 해달라고 통성으로 기도하지 않는가?
지금은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인, 새로운 겨레의 출현이 있어야 할 때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이러한 새 겨레와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출현은 산상설교의 말씀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결론이다. 그래서 톨스토이도 복음 중에 복음, 성서 중에 성서는 바로 산상설교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일생 동안 그 말씀을 일고 실천하도록 노력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정도의 세리와 같은 처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만 인사하는 이방인의 수준에 머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약성서의 율법적 의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고 하는 이른바 보복의 의를 실천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에 머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 생활에 있어서 교회에 출석하는 일에 있어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 보다 앞서야 한다. 우리는 헌금을 드려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 쓰다 남은 돈을 적당히 헌금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계획을 세우고 조금 힘들다 할 정도로 헌금을 하되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봉사하는 데 있어서도 남보다 한 걸음 앞서야 한다. 시간을 내는데도 남보다 좀더 시간을 드려야 한다. 일찍 가면 손해라고 생각하지만 그 손해 보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산상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심 없는 헌신성이다. 즉 인간이 대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상을 주실 수 있는 공간 즉 사심 없는 헌신성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