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특히 산상설교를 보면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해서 가장 상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유대인들과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유대인의 정체성과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산상설교에는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실존은 무엇보다도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마가복음 3장 31-36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독특한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예수는 가족이라고 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혈연관계를 부정하고 오히려 "자기 주변에 모여 않은 이들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라고 선언한다. 혈육관계를 통해서 규정되는 가족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을 그는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50절에서 말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다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브라함의 혈육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혈육으로서나 민족으로서 태어난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은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가족의 가장 중심적인 요건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상적인 것과는 다른 기준을 제시하여 규정하고 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너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지 말라. 이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은 어찌 보면 예수를 믿지 아니하던 이방인들과 같이 일생 동안 무엇을 먹을까 또 무엇을 입을까 그리고 어디에 살까 하는 것으로 정말 분주하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이른바 이방인들이라고 말한다면 로마인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삶이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아니라 이 땅의 나라와 그것의 운영을 위해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중심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그의 의의 실현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데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정체성은 어떠한가? 빌립보서 3장 17-20절에 보면 사도 바울 선생님이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 부끄러운 것으로 영광을 삼는 일, 배로서 하나님을 삼는 일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멸망에 이르는 일로 마감하는 일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신약성서의 본문 마태복음 22장 22-33절 특히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황제(가이사)의 것은 황제(가이사)에게 돌리라."는 성경구절은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정치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을 어떻게 구별해서 파악하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으로 이해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나라의 시민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숨쉬고 살아 있는 동안은 이 세상 그것도 일정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본대로 자족들과의 생활에서도 경제생활에서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과 황제의 것" 사이의 구별은 흔히 정교분리의 원칙을 제시하는 성서의 기본원리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시민으로서 가족으로서 그리고 경제적 생활인으로서 또 하나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가족을 내어버리는 것이 아니며 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경제생활과는 무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정치적 영역에서 하나의 시민으로서 책임을 벗어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가족, 경제, 정치 그리고 교회라는 제도를 제정해 주셨다고 했다. 중세기 수도사들은 가족을 버리는 것을 최대의 미덕으로 여기고 독신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가족"을 형성했다. 그들은 경제생활에서는 "기도와 노동"이라는 표제어를 통해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국가여서 정치적 영역에서는 수도사들은 특권을 누리면서 살았다. 세금도 안 내고 군대도 가지 않았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수도사로서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일까?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런 사람들은 수도자가 되기도 하다. 그러면 수도자가 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황제의 영역과는 가능한 한 멀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루터 시대에는 전쟁에 나가서 사람들을 죽이는 군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12세기 십자군 운동당시에는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생각도 있었다. 군대를 가도 교회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모든 다양한 가치들이 경쟁하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것과 황제의 것을 구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 저는 두 가지 대답이 잠정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이러한 복잡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그리스도인들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로마서 12장 2-3절에 보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분별력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우선은 하나님의 일과 황제의 일, 하나님과 자기의 일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로마와 같은 대도시, 온갖 것들이 다 모여서 사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분별력을 가지지 못하고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하시고 거룩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다 대답을 주고 있지 않다. 여러분들이 분별해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생각할 때는 그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분별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자기의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고 투신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마땅한 예배니라." 예배란 무엇인가? 독일어로 말하면 예배란 Gottesdienst 즉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봉사다. 우리의 마음만이 아니라 몸, 즉 전 인격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구약에 보면 제사에서 짐승들을 잡아서 불살라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예배였다. 이것은 생명을 드린다는 것과 함께 불사르는 일 즉 완전히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몸을 불살라 바치는 헌신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왕제의 영역에 너무나 얽매여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가? 온전한 예배의 삶,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뜻을 따라서 섬기는 삶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약속과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에게로 나아가자.

 

199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