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마태 6:25-34)
우리 한국 국민들은 지난해 1987년 11월 이래 IMF체제 하에 살게 되었다. 이른바 국제금융위기라는 것이 터지자 국민들은 처음에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몇일이 지나자 국민들은 분노했다. “당국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나서 국민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이제 살기 힘들게 되었구나?” 그리고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좌절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이제는 좌절상태에서 새로운 출구들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든지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야지. 그러면 앞으로 몇 년 안에 다시 정상적 삶을 살게 되겠지.”
이러한 충격, 분노, 허탈감, 불안과 두려움에서 오는 좌절감 등 일련의 심리적 감정의 흐름이 파도처럼 전 국민의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다. 어떤 언론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가리켜 6.25와 광주사태 이후 처음 겪는 국민적 충격파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그동안 절제하지 못하고 자만하던 국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렸다고도 했다. 이 말들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IMF 즉 국제통화기금 체제 하에 산다는 것은 매우 치욕스럽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제통화기금 체제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1944년 미국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에서 열린 서방 강대국 대표들은 오랜 논란 끝에 국제통화기금이라는 기구를 탄생시켰다. 1929년의 자본주의의 실패의 재발을 피하고 다가오는 세계의 몰락을 눈앞에 두고 그들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체제를 모색했다. 당시 영국대표로 참석했던 경제학자 케인스는 가능한 한 세계의 균형발전을 목표로 하고 세계중앙은행과 초국가적 세계화폐를 만들어서 국가간 무역불균형을 시정함으로써 가난한 나라들을 지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과다한 무역흑자를 내는 나라들은 과다한 적자를 내는 나라들의 상품을 의무적으로 사주도록 법제화 하려 시도했다. 또 그는 과다한 무역흑자를 내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벌과금(1-2%)을 물려서 빈곤한 나라들을 지원하려 했었다.
그러나 케인스의 꿈은 무참히 파괴되었다. 당시 세계금보유의 80%이상을 통제하고 있던 미국은 케인스의 제안을 거부하고 소위 미국 재무방관 화이트 플랜을 관철시켰다. 그래서 세계중앙은행 대신 미국의 주도 하에 국제통화기금이 탄생하고, 초국가적 세계화폐 대신 달러가 세계화폐가 되었다. 무역수지불균형의 시정대안은 완전히 철폐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국은 국제통화기금이란 기구를 완전히 장악했다. 가장 많은 출자 지분(20%)을 가진 미국은 25%의 의결권을 장악함으로써 85%의 찬성으로만 표결되는 IMF의 의결권을 독점적으로 장악했다.
이 때부터 미국의 독점적 금권지배(Plutokratie)가 시작된 것이다. 1971/2년에 와서 국제통화기금은 약간의 제도적 수정을 가했다. (그것은 수지균형이 깨졌을 경우 - 현재 우리나라와 같이 - 임시자금을 지원하는 것과 함께 고정 환율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IMF는 균형이 깨어진 나라들에 자금지원을 통해서 해당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고정 환율제도는 해당 나라의 금리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한마디로 IMF는 통화수단 즉 달러를 통해서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체제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한 나라들의 개별 은행들이나 기업들이 빌린 외채를 강제로(때로는 무력으로) 환수하기 위한 부유한 강대국들의 연합군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이 걸머지고 있는 1500억 달러의 부채 전부가 국가가 보증한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MF는 개별은행이나 기업들의 부채를 전체 국민들에게 들씌우는 현대판 금융식민통치 기구라 할 것이다. 부채를 갚지 못해 파산하거나 거부하는 나라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이른바 G7이라고 하는 국가군이 창설되어 있으며 이들은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마저 갖추고 있다.
우리는 지금 바야흐로 세계적 금권지배 체제 하에 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통계에 의하면 지난 1987년 이래 “산업자본”이 벌어들인 이익보다 “금융자본”이 벌어들인 이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세계적 금융 자본가들이 돈 놀이판으로 변질되어 그들은 부채를 걸머진 가난한 나라들에서 엄청난 이자를 챙긴다. 부자나라들은 매년 1200억 달라 이상을 가난한 나라들에서 이자로 받아가고 있다. 우리는 금년도 이자만 120억 달러를 물어야 한다. 이것은 가난한 나라들 전체가 지불하는 이자의 10%에 해당된다. 지금 가난한 국가들이 부유한 국가들에 경제 원조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미국의 경제적 호황은 바로 이런 모순과 결합되어 있다.
소로스 등 세계적 거부들의 돈놀이를 지원하고 보호해 주는 국제적 장치가 바로 국제통화기금이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만몬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세속화된 세계에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정치가나 군인들이 아니라 돈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과거에 힘 있는 사람은 정치가, 군인들, 기업가였으나 지금은 금융자본 즉 달러 가진 사람들이다. 대통령을 뽑는 것도 사람들이다. 국회의원이 되는 것도 돈 가진 사람이나 그들의 지원을 받는 사람이다. 심지어 시의원도 돈 없으면 될 수 없다. 아니 교회에서 장로가 되는 것도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된다.
오늘날도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날 세계를 통치하는 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맘몬인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 즉 맘몬이다. 만일 세계를 하나님이 통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맹목적 신앙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오늘날 세계를 통치하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이다. 그것은 성직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한국 아니 미국의 대교회 성직자들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 때마다 재물의 축복을 강조하고 돈의 축복을 기원한다. 왜냐하면 내부분의 신도들은 물질, 즉 맘몬의 축복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설교하지만 실은 맘몬의 논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맘몬에 대한 왜곡된 해석은 이미 신약성서에서도 발견된다. 신약성서에 보면 “맘몬”이라는 이름이 세 번 나온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한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6:24). 여기서는 하나님과 맘몬은 대립적인 것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은 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즉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을 택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친 로마적이고 보다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자였던 누가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는 주제를 놓고 정교한 신학적 수정을 가하고 있다. 그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누가 16장) 마태의 양자택일적 결단을 교묘하게 해석하여 하나님도 맘몬도 섬길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그는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눅 16:9). 그리고 그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못하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도 말한다. 누가는 로마라는 세계국가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재물관을 극단적 양자택일 보다는 실용적 양자택이로 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재물은 불의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는 지혜를 가지라고 한다.
한국교회도 그 동안 마태복음의 맘몬관을 떠나 누가복음의 맘몬관 즉 실용주의적 현실주의 노선을 걸어왔다. 이것은 사실상 자본주의 세계에 있는 교회들의 맘몬관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선교론으로 교묘히 위장된 미국 산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다. 그것이 곧 “적극적 사고”, “하면 된다.”라고 하는 불신앙의 논리의 배경이다. 그것은 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는 인본주의적 이데올로기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에 의지하는 자기신앙 즉 불신앙이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세계통치가 아니라 맘몬의 세계통치를 용인하고 있다. 아니 맘몬을 오히려 찬양하고 있다. 교회는 맘몬의 세계통치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찬양하고 있다. 그것을 물질의 축복, 하나님의 축복으로 왜곡해서 설교한다. 목사들과 사제들은 설교의 단락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맘몬의 축복을 반복한다.
서구의 보수적 신학자들은 유물론(즉 물질, 맘몬)을 숭배하는 공산주의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면 이 세상에는 갈등과 불안, 공포와 두려움이 없는 지상천국이 올 것이라고 선전했었다. 그런데 1990년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 사상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공산주의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더욱더 맘몬에 매어 달리고 있지 않는가? 사라진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야 말로 맘몬의 논리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는 체제가 아닌가?
이러한 맘몬을 숭배하는 자본주의는 어떤 체제인가? 여기서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인간의 공동체성을 등한시 한다. 여기서는 개인의 능력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연대성을 거부한다. 여기서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인간의 무한한 탐욕을 허용한다. 여기서는 개인의 성과에 의한 분배를 정의라 부르면서 인간들 사이에서 무한경쟁을 부추긴다. 개인들의 무한한 자유, 열려진 능력 앞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탐욕과 무한경쟁의 희생자로 남는다. 인간의 연대성과 공동체성은 철저하게 깨어진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한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일까? 그들은 다양한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들이 있다. 그들은 항상 불안하고 두렵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공동체성과 연대성을 상실한 탐욕과 무한경쟁의 사회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쟁에서 실패할까 불안하고 두렵다. 일찍이 영국의 정치철학의 아버지인 토머스 홉스는 동터오는 자본주의 사회를 전망하면서 그의 책 “레비아단”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늑대다” 이런 인간의 상태를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이다.” 세속화와 더불어 시작된 이런 부르주아 사회의 인간들은 늑대와 같은 인간들이 되며 그들은 이 세상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만들 것이다. 이런 늑대들은 상대에 대해서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2000여 년 전 나사렛 출신의 목수 예수도 불안 하고 두려워하는 인간 실존을 누구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간파했었다. 그는 인간 불안의 가장 깊은 근원지를 파악했던 사람이다. 불안은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인간의 내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간존재를 좌지우지하는 맘몬의 지배위협에서 온다는 것을 그는 포착했었다. 그는 오늘 성서본문 바로 앞에서 하나님과 맘몬(인간의 지배와 돈) 사이에서 제자들의 결단을 촉구한다. 이 말씀 앞에서 제자들은 불안했다. 사실상 하나님과 맘몬 앞에서의 양자택일은 불안한 일이다. 맘몬이 지배하는 탐욕과 경쟁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예수 앞에서 제자들을 불안했다. 예수가 말하는 공중에 새처럼 산다. 심지도, 거두지도, 저장하지도 않는 삶이란 불안하다. 예수가 지시하는 들의 백합처럼 산다.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불안한 삶이 아닌가?
당시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그러면 예수는 환상적 이상주의자였는가? 실직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실직의 위협 하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걱정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연대성도 공동체성도 없는 탐용과 경쟁만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는 그런 말 하는 사람을 제정신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는 환상적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가장 근거 있는 현실주의자다. 그는 앞서 말한 사제들 같이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신앙적 현실주의자다. 그의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처한 제자들에게 예수는 먼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라는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타의 모든 것들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신앙적 현실주의자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의란 어떤 것일까? 저는 오랜 동안의 성서연구 결과 하나님의 의를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우리가 먼저 구할 하나님의 의는 바로 믿음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대명제 즉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설파했다. 당시 가톨릭 신학의 대가인 아퀴나스의 토머스는 말하기를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공로가 합해져서 가능하다“라는 전제를 제시하여 이른바 가톨릭을 업적주의로 이끌어 갔었다. 그러한 공로주의는 마침내 돈을 통한 면죄부라는 잘못된 교리까지를 생산했다. 그러나 루터는 공로, 즉 공적이나 업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 즉 믿음으로만 이라는 논제로 가톨릭교회와 대결했다.
이러한 루터의 논제를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업적주의 즉 자본주의 논리를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루터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즉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업적사회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맘몬사회에서는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 즉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회경제적으로 말하면 믿음 즉 인간 상호간의 신뢰에 기초한 연대성을 통해서만 인간들은 개인구원뿐만 아니라 사회구원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인간 사이의 신뢰만이 인간들 사이에 탐욕과 경쟁으로 생기는 불안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믿음의 반대말은 탈연대성이며 이것이 인간들 사이에 불신과 불안을 낳는다.
그래서 이 신앙적 현실주의자 예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막 9:24). 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믿는 자는 복을 받는다.”(눅 1:45). “믿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눅 8:12). 요약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인간들 사이에 믿음, 즉 연대성이 형성된다면 무슨 문제라도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 노사정 위원회에서 사용자들과 노동자들이 믿음 위에서 연대성(고통분담)을 확보하자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믿음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성을 구축하는데 있다.
이러한 신앙의 해석노선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온다.”(롬 3: 22).
둘째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의의 대전제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연대성을 통해서 인간들 사이의 불안을 몰아낸다면 사랑은 인간들 사이에 공동체성을 구축함으로써 인간들 사이의 두려움을 추방한다. 성서에 보면 사랑만이 인간들 사이의 탐욕과 경쟁을 멈추게 하고 그들 사이의 불안과 두려움을 추방한다. 요한 1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요한 1서 4,18).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불안이다. 따라서 사랑만이 불안을 몰아낼 수 있다.
사랑을 사회학적으로 이해하자면 인간들 사이의 공동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나 사랑은 심정윤리가 말하듯이 인간들의 심리적 동기들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동정이나 연민 같은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의의 대전제로서 사랑은 사회에서 탐욕과 경쟁을 멈추게 하는 제도적 장치, 인간들 특히 약자들을 돕는 법적 장치들을 구체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을 공동체화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든 서구의 기독교 선진국들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원초적 불안에 시달리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실주의자 예수가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의 추구”이다. 이러한 사랑의 법적 제도적 장치에서 서로 돕는 형식을 예수는 “네 오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네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마 6:3)라고 말한다. 자선을 베풀면서 위선자들처럼 과시하거나 나팔을 불지 말라는 것이다. 떠들썩한 이웃돕기 운동에 나팔을 불며 참여하는 일이나 국난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에 얼굴을 내밀고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현실주의자 예수가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 “하나님의 의”의 대전제로서 믿음과 사랑을 통한 연대성과 공동체성이 회복할 때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우리의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의를 먼저 추구할 때 먹고, 마시고, 입는 등의 여타의 문제들은 해결된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먼저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의 의가 먼저다. 예수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1998년 2월 8일 연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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