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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4 09:36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글쓴이 : 손규태
 
“사도들이 주께 말하기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니,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누가 17:5-20)
 
서양 역사의 흐름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조류가 서로 대립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또 서로 교차하면서 형성돼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은 다름 아닌 그리스 사상과 희브리 사상들이다.

첫째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고 등장한 그리스 사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성”이라고 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하고 발달한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성 특히 도구적 이성을 통해서 인간들은 과학을 발전시키고 기술의 진보를 가져 왔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삶의 방식이다. 어도 5세기말까지의 서양기독교 사는 엄격히 말해서 기독교개념들의 그리스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독교 안에서조차 그리스 문명이 지배했다.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등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의 형성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사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 다음으로는 희브리 사상이다.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척박한 땅을 중심으로 하고 등장한 희브리 사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신앙”이라고 하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확신을 바탕으로 한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막지대를 유리방황하면서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의지할 것이라고는 어떤 전능자 하나님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조건치고는 너무나 어려운 환경이 이러한 삶의 방식 즉 신앙을 만들어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헬라인들이 인간의 지혜 즉 이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면 희브리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즉 신앙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희브리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 1:7)라고 고백했다. 그들도 지식이나 지혜를 추구했지만 그것은 헬라인들처럼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지 않고 야훼를 의지하는데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문화권에서 교육을 받고 선교를 하고 이방교회를 세운바 있는 사도 바울 선생님은 고린도 전서 1장 22절에서 “유대인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다. 희브리인들은 인간이성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을 믿고 행했고 이것이 기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브리인 혹은 유대인들은 기적을 구하는 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희브리인 즉 유대인이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구하는 기적이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기적을 낳게 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희브리인들이 수천 년 동안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적어도 2천년 동안 삶의 근거요 목표로 삼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어려서부터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삶을 근거하고 살아온 힘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이 시간도 이러한 믿음에 의지해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 믿음의 역사는 어떤 것이고 또 그 본질은 어떤 것일까? 오늘은 성서에 나타난 몇 가지 정의나 예들을 통해서 믿음의 본질을 해명해 보고자 한다.

희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에 대한 정의가 잘 나와 있다. 거기에 보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라고 쓰고 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를 보니까 그 의미가 좀더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신앙은 희망하는 것이 달성될 것이라는 확신이요 보지 못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변역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뭔가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 있으면 다른 힘의 도움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 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 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모험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는 이주행위에서도 그렇고 늙은 아내에게서 자식을 얻는, 그도 믿을 수 없었던 이야기 등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어렴풋이 보여 준다고 하겠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도 일반인의 인식과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아니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역사를 되돌아보아도 이들은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통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통해서 오늘날까지도 살아가고 있다.

희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라는 것 즉 희망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불가시적인 것 즉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해서 의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은 엄격한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성경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5절에 보면 사도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고 하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라 하였을 것이요.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물론 제자들이 이러한 믿음을 더하게 해달라고 하는 상황은 그 앞의 구절들을 보면 형제간의 갈등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타인을 실족하게 하지 말 것을 엄히 경고하고 있다. 타인을 실족하게 한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물에 빠져 죽는 것 낫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형제가 잘못하고 와서 용서를 구할 때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자신에 대해서는 무한히 엄격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무한히 관용을 베풀라는 것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엄격성과 타인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자 제자들은 자기들의 능력의 한계를 고백하면서 주님에게 믿음을 더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진정으로 겨자씨만한 믿음 적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뽕나무 아니 산이라도(마태 17.20) 옮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서가 말하고 있는 믿음, 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저는 무엇보다도 믿음은 “희망하는 것의 실상”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이기도 하지만 믿음이란 것은 그 뿌리가 희망에 있다. 즉 바라는 것이 없으면 믿음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성서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이라고 히는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그는 하란이라고 하는 고향의 동네에는 자기의 삶을 실현할만한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래서 고향을 박차고 나와서 뭔가 새로운 삶을 모험해 보았다. 또 모세는 자기의 백성이 바로의 폭정 밑에서 신음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들을 해방시켜야 하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이러한 아브라함이나 모세의 희망들 즉 내면의 경험들, 즉 도저히 기존의 현실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상황들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희망을 향해서 결단을 했고 이 희망은 이루어졌다. 이것이 믿음이다. 따라서 희망이 크면 믿음도 크고 희망이 원대하면 믿음도 원대하다. 이렇게 희망이 확고하면 할수록 믿음도 확고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교회 하나 꼭 지어야 하겠다는 희망이 있으면 교회는 세워간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내가 집한칸 꼭 마련하겠다고 생각하면 집은 세워진다. 내가 뭔가를 희망하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그것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희망하는 것들의 실상이다.

성서에 보면 믿음을 통해서 질병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병든 사람 치고 그 병으로부터 치유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일수록 그럴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의지하면 치유될 수 있었다.

따라서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 주소서 할 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만 가지면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약속해 주셨다. 희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믿음이라는 것은 희망에서 출발하며 희망을 가지면 곧 그것이 곧 현실이 된다고 했다. 따라서 희망이 믿음의 출발점이고 모든 것의 시작이다. 희망이 있으면 계획을 하게 되고 계획을 하면 대개는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교회를 짓기 위한 건축헌금을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교우들이 교회를 가져야 하겠다는 희망이 간절한지를 묻고 싶다. 그 희망이 간절한 것이면 그것은 이미 실현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새로운 포부를 가지고 교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이 진정 우리 모두의 희망이고 간절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확신에 찬 것이 아니고 막연한 것이라면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마태복음 13 장 44절에 보면 천국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밭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보화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숨겨 둔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가지고 와서 그 밭은 샀다는 것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희망만을 가지고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서 사과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뉴턴이 끈질기게 기다린 결과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 노력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믿음이란 모든 것을 거는 모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 우리가 민중과 연대하는 일이 진정으로 간절한 희망에서 나온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의 행위가 진정으로 보화가 감추인 밭은 사려는 이의 심정으로 행하는 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실천하고자 하는 녹색 가게가 진정으로 우리의 희망이라면 그것은 성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보화를 차지하려는 이의 심정으로 이일을 해나가면 성공이고 모든 것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희망하고 그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라면 그것들은 이미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희망을 가지고 과거와 인습에서 탈출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의 신음에 동참하고 그들을 이끌어 내야겠다는 희망을 가짐으로써 희브리 민족의 해방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성서의 인물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해야겠다는 희망이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했으나 우리 전 인류의 구세주가 되게 했다. 믿음은 희망의 실현이요 불가시적인 것에 대한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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