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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4 09:38
한 달란트를 가진 자
글쓴이 : 손규태
 
“또 하늘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그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나아와서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태25:14-20)
 
한국 사람들의 허풍과 허세는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허풍과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듯하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는 이런 말도 한다. 즉 “집에 금송아지 없는 사람 어디 있나?” 나는 1960년대 초에 군대에 갔다 왔지만 군대에 가면 정말 가관이 어머니들만 모여 있다. 제각기 자기 집에는 금송아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 할아버지는 과거에 진사를 지냈다든지 혹은 자기 삼촌은 시골서 면장을 한다든지 하고 자랑을 하다. 또 자기 집에는 토지가 몇 만평 있다든지 또는 자기 형님은 고시에 합격해서 판사될 준비를 하고 있다든지 하면서 집안 자랑을 한다. 자기 집안을 자랑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한 내용들을 후에 알고 보면 대개는 허풍이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70년대 말부터 독일에서 공부를 했다. 자연히 교회에서나 기타 장소들에서 거기에 와서 일하는 광부들과 만나게 된다. 그들도 하나같이 “자기 집에는 금송아지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한다. 전라도 정읍출신의 최씨라고 하는 광부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자주 초청한 사람인데 그 집에 가면 우리는 지긋지긋하게 그 금송아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돌아오면서 속으로 “그렇게 많은 금송아지를 집에 가지고 있다면 왜 독일에 와서 광부 노릇을 하는가?”하고 속으로 대뇌이곤 했다.

그는 허풍만 센 것이 아니라 허세도 대단했다. 자기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그는 한 60평 되는 아파트에다가 고급승용차인 벤츠 승용차 500을 타고 다닌다. 그의 꿈은 야무져서 자기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며 정읍에 가서 국회의원에 출마할 것이라고 자기의 결의를 말하고 다녔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최의원”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는 한국에서 국회의원 같은 저명인사가 독일에 오면 어떻게든지 그 사람과 접촉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병가를 얻어서 한국에서 온 저명인사를 자기 벤cm에다 태우고 이리 저리 관광을 시켜준다. 그러자니 돈이 많이 든다. 간호원인 아내와 열심히 벌어도 늘 궁색을 면하지 못한다.

1989년도 제가 돌아오던 해에 그도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읍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읍에는 그 사람의 출마를 위한 조건들은 전혀 없었다. 그는 이 일 저 일을 다 시도하다가 마지막에는 택시 운전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그는 다시 독일로 되돌아가서 전에 하던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제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 가운데 비단 이 최씨만이 허풍과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허풍을 떨고 또 허세를 부린다. 허풍이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실상 보다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여 믿음성이 적은 언동”이라고 했다. 그리고 허세는 “실상이 없는 기세”라고 적고 있다. 허풍은 실속이 없는 말이니까 별로 크게 해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인격적 신뢰성을 의심하게 하는 행태다. 그러나 허세는 실속 없는 행동이어서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크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별로 돈도 벌지 못하는 사람이 허세를 부리면서 비싼 술값을 혼자 낸다든지 또는 분수에 맞지 않게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서 곤궁에 처하게 된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이러한 허풍을 떨고 허세를 부리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고유의 유교적 체면문화에서 온 것이라고 보인다. 옛날 선비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건너고 쫄쫄 굶으면서도 밖에서 친구를 만날 때면 체면 때문에 이밥에 고기를 먹은 듯이 이빨을 쑤시고 헛 드럼을 하면서 허세를 부렸다고 한다. 이러한 유교적 체면 문화가 우리 생활 전반에 침투해 있어서 결국 모든 것을 실속 위주로 하지 않고 적당히 남의 눈에만 만족을 주는 겉치레 문화가 발달했다. 모든 것이 겉치레다. 작년과 금년에 일어난 모든 대형 사고들도 깊이 들여다보면 이러한 체면문화, 즉 겉치레 문화의 결과였다고 보인다. 이러한 겉치레 문화는 결국 사람들을 불성실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허세를 위해서는 부정도 마다하지 않는 왜곡된 삶을 살게 된다. 88년에 올림픽을 하고 2002년에 월드 컵 대회를 유치하려고 하는 것도 다른 이유도 있지만 상당 부분 이런 허세에 기초한 체면문화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점심을 굶은 국민학교 아이들이 수만 명이나 있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운동경기를 하는 것은 순전히 체면문화와 연관된 것이라고 보인다. 수많은 노인들이 몇 푼 안 되는 정부지원을 받으면서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데 왜 이런 허세들을 부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체면문화가 중요시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큰 것, 거대한 것이다. 63빌딩 지어 놓고는 아시아에서 최고라고 자랑한다. 즉 큰 것은 가치가 있고 적은 것은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윤리적 측정의 기초가 되어서 큰 것은 좋은 것이고 적은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은 뭔가 수퍼 모델을 모집하면서 다리가 긴 사람들은 좋은 것이고 짧은 사람은 별 볼일 없다는 문화가 지배한다. 그래서 짧은 다리를 가진 젊은이들은 자신을 비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가게도 큰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거리로만 사람들이 모여든다. 광명시에 큰 백화점이 들어서면 수백 개의 구멍가게들은 문을 닫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큰 것과 경쟁을 할 수가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남의 큰 교회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지만 적은 교회들은 파리 날리기 십상이다. 큰 교회에 다녀야 구원도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요즘은 대형 약국들이 들어서서 수많은 소형 약국들을 잡아먹는다고 어제 MBC 피디 수첩에서 보도했다.

구약성서에 보면 어린 소년 다윗이 적은 돌멩이를 가지고 골리앗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블레셋 장군을 죽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은 적은 나라였고 또 약한 나라였다. 그러나 그들은 큰 나라 혹은 강한 나라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적은 것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큰 것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허세를 부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다윗이 승리하는 곳이라곤 없다. 모든 곳에서 골리앗들이 이깁니다. 국제관계에서도 그렇고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오늘 성경 말씀에도 보면 주인에게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해서 열 달란트를 만들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열심히 장사해서 네 달란트를 만들었다. 주인은 그들을 불러 놓고 “착하고 신실한 종아”하고 칭찬을 했다. 그리고 한 달란트 가진 사람과 셈을 한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본이 적었든지 아니면 그가 말한 대로 주인의 성품 때문이든지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화를 내면서 그 돈을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도록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있는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 마저 빼앗은 것이다.

그러면 성서도 큰 것만을 가치 있고 좋은 것으로 보는 것일까? 또 성서도 적게 가진 자들의 것을 빼앗아서 많이 가진 자들에게 주도록 하는 것일까요? 성서는 부자들을 위한 책이고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부자들에게 부가 집중하는 것을 용납하셨는가? 한마디로 성서는 자본주의를 위한 책일까?
 
그러나 예수는 같은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형제자매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했다. 예수님에게서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 곧 자기에게 한 것과 같은 것은 지극히 적은 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큰 것, 위대한 것을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역사를 보면 위대한 물건들을 만든 것은 다 제왕들의 몫이었습니다. 만일 그와 같은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면 그의 제자들은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이다. 피라미드와 같은 위대한 건축물을 만든 사람은 바로 왕들이었다. 그러나 그 일들로 인해서 수많은 애굽의 노예들과 평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 갔다. 이렇게 볼 때도 큰 것 위대한 것이 아름답다거나 가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큰 것과 위대한 것은 적은 사람들의 엄청난 희생 위에 세워진 것들일 뿐이다.

전후에 일본인들을 강하게 만들고 경제적으로 부흥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큰 것에 관심해서가 아니라 적은 것들에 대한 그들에 관심에서 되어진 일이었다. 대만인들도 그렇다. 그들은 세계에 대기업들과 경쟁할 생각하지 않고 중소기업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최고의 품질을 만들어 냈다. 한마디로 적은 것에 충성한 일본인들은 큰 나라를 만들었고 중소기업에 충실했던 대만인들 역시 안정적 경제운영을 하고 있다. 컴퓨터 칩만 보더라도 적은 것을 잘 만들 때만 성공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을 책망하고 그가 가진 것마저도 빼았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했을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이 달란트 비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열개 혹은 두개 혹은 한 개의 달란트를 받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 달란트를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한 개의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열심히 노력했으면 2개 아니 10개의 달란트를 벌어들였을 수도 있다. 때로는 수고한 보람도 없이 한 달란트가 다 없어지고 말았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나도 성장한 자식들을 가진 아버지로서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내 놓는 자식보다는 열심히 노력하다가 다 날려버린 자식을 더 사랑했을 것이다.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랕트 가진 자식에게 주기보다는 열 달란트 가진 자식의 것 일부 혹은 다섯 달란트를 취해서 아무 것도 없는 자식에게 주어서 다시 한 번 시도하게 해 볼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재능)가 적다고 해서 땅에 묻어두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식 보다 적은 달란트를 가지고서라도 모험을 하다가 실패한 자식을 저는 더욱 사랑할 것이다.

예수께서 관심하시는 것은 여기서도 보면 적은 것입니다. 적은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하면 성공할 수 있고 또 실패하더라도 다른 가능성이 주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적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해서 적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분명한 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여러분! 앞으로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지혜를 말하자 항다. 그것은 곧 적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적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면 점점 보다 큰일들이 마껴지고 마지막에는 정말 위대한 일을 하게 된다. 큰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도 체면과 허세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 백발백중 실패한다. 그것도 허풍과 헤세를 위해서 시도한다면 그것은 불문가지 이다. 적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했으니 내가 많은 일을 제게 맡기겠다. 와서 같이 기쁨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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