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 앞에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요한복음 8:31-38)
지난 금요일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지 꼭 일년이 되는 날이다. 소위 문민정부로서의 김영삼정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공직자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등과 같은 뭔가 개혁적인 일도 했지만 그러나 그의 개혁은 뭔가 즉흥적이고 부분적이고 일방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사실상 개혁이 사정차원에 머물고 법이나 제도적인 개혁 말하자면 보다 철저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개혁의 대상이 되는 민자당을 배경으로 하고 정권을 획득했고 또 지금도 그것을 바탕으로 하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딜레마와 한계는 처음부터 분명했다. 개혁의 대상자들과 더불어 개혁을 해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고 그의 개혁의 한계였다. 아마도 이 한계는 그가 집권하는 동안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그에게 정권을 위탁한 우리들 모두의 불행이기도 하다.
나는 이 정권에 대한 어떤 정치적 경제적 평가를 할 생각은 없다. 단지 이 정권이 만들어내고 있는 몇 가지 표제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김영삼 정부는 자기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한다. 또 자기들이 통치해 가는 나라를 신학국이라고 한다. 이 신학국의 경제적 기초를 그들은 신경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신경제를 살려 나가는 길은 국제경쟁력을 길러가눋 데서 가능하다고 한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제화에 걸맞은 삶의 스타일을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선전적 개념들이 지난 일년 동안 김영삼정부가 만들어낸 통치철학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수식어들이다. 약삭빠른 언론들은 이러한 선전적 통치개념들이 생산될 때마다 그것을 미친 듯이 나발을 불어댔다. 이렇게 볼 때 김영삼 정부는 사실상 역대군사정권들 보다 짧은 기간에 더 많은 통치를 위한 선전적 수식어들을 양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민정부와 역대군사정권과의 차별성들은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청와대 앞길의 개방, 인왕산등산로의 개방, 삼청동근처의 안가들의 철거등과 같은 뭔가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그 차별성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최근에는 그것들이 가지는 효력도 사라지자 서울대학교 졸업식에 김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으로 또 한번 문민성의 상징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이런 상징적 행태를 통해서 문민성이 그 정통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자들의 상징조작은 과거의 정권들에서 신물 나게 보아왔다. 계몽되고 의식화된 국민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이런 전근대적인 상징조작으로서 국민들을 통치해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신학국이라는 개념과 신경제의 발상이다. 모르긴 하지만 신학국이라는 딱지를 가장 충실하게 달고 다니는 이들은 아마 택시운전사들 뿐일 것이다. 몇몇 대통령 주변에 있는 정치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만들어낸 이 개념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불분명할 분만 아니라 그들이 상정하는 구한국이라는 군사독재정권들과의 차별화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회정치적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한국의 군사정권의 창설자의 하수인격인 김종필 같은 사람이 집권민자당의 중심인물로 있는데 어떻게 신한국이란 개념이 그 효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이와 연관해서 사용되는 신경제라는 것은 더욱 문제가 많은 개념이다. 신경제란 경제적 기본 틀을 무역에 두고 있고 따라서 국제관계에서 경쟁 가능한 경제적 기초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그 구상은 사실상 과거의 군사정권들의 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면 구경제이지 왜 신경제인가? 그런데 과거의 경제적 기본 틀이 다르기 때문에 신경제가 아니다. 신경제라는 이름을 붓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무역입국을 위해서는 국제경쟁력을 길러야 하고 그것을 맡아서 할 주동세력들은 대기업들이며 그들을 세제, 금융, 기술등을 통해서 최대한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이전 정권들에서 가하고 있던 온갖 규제들을 풀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생산성은 높여야하고 노동운동은 자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경제를 살리는 길은 경제적 약자들의 희생을 통해서 강자들이 국제사회에 나가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리다.
이렇게 하는 것이 김영삼 정부가 지난 일년 동안 주장해 온 진리들이다. 적은 자들이 고통을 전담하는 것이 오늘날의 신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적은 자들의 고통전담은 공공요금들의 인상과 그 동안의 치솟은 물가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말 문민정부, 신한국, 신경제, 국제경쟁력 등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개념들이 참된 것인가, 옳은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요한복음 18장 28-38절에 보면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발하는 유대인들과 빌라도 그리고 예수라고 하는 피고소인 사이에는 엄청난 지적 논리적 혼란이 내재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광기에 찬 적대감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들도 왜 예수를 고발하는 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예수가 고발당할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로마인, 즉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 사이의 종교적 갈등에서 생기는 문제에 깊은 관심도 없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한다. 이런 비정상적인 재판관계에서도 예수는 뭔가 참된 것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그가 유대의 왕인가 혹은 유대가 그가 통치할 나라인가?”하고 정치적 관심에서 던진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자기는 그런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증언하러 왔다고 말한다. 이 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것은 매우 피상적인 물음이었고 따라서 예수의 대답을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분명하다. 정치가들은 진리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선전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문민정부, 신학국, 신경제 등의 말들은 진리가 아니라 선전일 뿐이다. 프로파간다라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리의 세계가 아니라 온갖 종류의 정치적 상업적 프로파간다의 세계에 살고 있습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은 실상 사실과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는 극도로 정치적 선전, 상업적 선전에 오염되어 버렸다. 그래서 백화점들의 선전들을 보면 “신상품”이라고 물건들을 내놓지만 그것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포장을 달리해서 내놓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학국이라는 구호도 백화점의 신상품이라고 하는 구호와 같이 선전물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진리와 선전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중요한 것인 이것이다. 요즘의 신흥종교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것도 그 신도들이 진리와 선전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온 결과다. 사람들은 진리를 말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교묘하게 진리를 위장한 선전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벗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매스컴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선전들에 귀가 익숙한 이들이 종교적 선전에도 물밀듯이 밀려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선전성에 대해서 교회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의 깊은 뿌리는 맘몬의 논리를 통해서 지배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에 있다. 하나님과 맘몬은 같이 섬길 수 없다.
그러면 베드로가 질문했던 진리란 무엇인가? 그리스인들은 오래 전부터 진리를 탐구해 왔다. 그들에 따르면 진리란 뭔가 불변하는 것이다. 뭔가 고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확신 같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광물의 세계에서도 금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불변하는 것은 고귀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불변하는 신념의 인간을 높이 평가했다. 또 수학이나 기하학 등에서 어떤 불변의 법칙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진리라고 했다.
그러면 예수가 말하는 진리는 어떤 것인가? 그는 수학적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는 또한 어떤 심리학적 확신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어떤 불변성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진리는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사물의 불변성도 로마인들이 생각했던 선전으로서의 진리도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진리란 이렇다. 본문을 보면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적어도 세 가지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말씀에 머물고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말씀에 머문다거나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빛 되신 하나님의 현실 즉 계시의 현실에 동참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요한은 1장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게시의 현실에 동참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둠의 현실을 떠나는 것이고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이며 그것을 싸워서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 빛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어둠의 현실 즉 고정화의 현실이나 선전의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즉 로고스 안에 머문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의식화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선전의 배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하다(롬 12:1-2).
둘째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새로운 현실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달성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뭔가 기존적인 것, 현존하는 것, 고정된 것들에 대해서 깊은 의심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른바 의심의 해석학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남녀간의 성 분업은 당연한 것으로 거의 진리로까지 생각되어 왔다. 여기에 대해서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회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불변하는 것이 진리다고 말하는 정통주의자들, 기득권자들, 부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변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불변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바로 치하에서 노예상태를 깨뜨리고 이집트를 떠나는 것이 진리다. 이집트인들의 고기 가마에 배부르게 앉아 먹고사는 노예가 진리가 아니라 굶주림이 가득 차 있는 광야로 나아가는 것이 진리다. 사도 바울 처럼 유대교의 율법의 화석화된 조문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앞에 거꾸러져서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 진리다. 안식일에 굶주린 제자들이 허기진 배를 안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밀 이삭을 따먹고 건강하게 율법을 어기는 것이 진리다. 앞을 향해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진리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말씀에 머무는 것” 즉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진리를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자유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기득권을 가지고 구원을 독점하던 상황 즉 노예적 상황에서부터 그들을 해방시킨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구원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예수님은 나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살과 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구원을 기득권화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루터가 가장 적절하게 정의하고 있듯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는 철저하게 결별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종노릇하는 것이다. 이러한 악한 지배세력에 대해서는 철전한 항거와 투쟁을 말하고 동시에 약자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자기헌신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명상가들이 생각했던 대로 이 세상을 떠나 초연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본회퍼의 옥중서신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저항과 복종”을 말한다. 본회퍼는 히틀러의 독재에 항거함으로써 그리고 고난당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헌신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는 죽기까지 그 자유를 향유했다.
다시 한번 이방인의 통치자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진리란 무엇인가?”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고정화개념을 깨는 것이고 또 로마인들의 정치적 선전을 폭로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의 고정화 개념들과 함께 현 집권 세력들의 정치적 선전이다. 이것들은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역사경륜을 억압하는 세력들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권력자들의 선전적 어휘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알 수 있고 또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에 동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다. 아브라함의 운동, 모세의 출애굽, 예언자들의 사회적 메시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행위다.
1994.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