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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4 09:43
그리스도교의 전진과 후퇴: 천로역정의 삶
글쓴이 : 손규태
 

“ 교우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사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행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갈라디아서 6:1-10)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요 문학자인 James는 “순례자들 혹은 그리스도들의 후퇴”(Pilgrim's Regress)란 책을 써서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John Bunyun의 “순례자들 혹은 성도들의 전진”(Pilgrim's Progress)에 대비되는 책을 통해서 믿음에서 자기안주 내지는 후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실란하게 비판하고 있다. (Pilgrim's Progress를 天路歷程이라고 한자번역을 채택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당시 순례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인나 삶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후퇴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Pilgrim's Regress란 책은 19세기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교회들과 대륙의 개신교들이 처했던 신앙적 자기안주와 제도적 고착화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책이다. 그는 당시의 교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대륙의 개신교는 출애굽을 했지만 신 광야에 도달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나서 “이집트의 노예 살이 시절에 배불리 먹던 고기와 빵”을 그리워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나 식량을 얻지 못하면 그 지도자인 모세에게 원망을 했다.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고 온갖 난관들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이 때마다 그 백성들을 오히려 되돌아가서 노예생활을 하는 것이 더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대륙의 개신교는 과거의 가톨릭의 성직주의와 교권주의를 그리워 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다시 그들의 전통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독일의 루터교회가 그랬고 화란의 개혁교회가 사실상 그랬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재세례파 숙청에 골몰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새로운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뭰스트의 재세례파들을 라인 강에 집어넣어 무수히 학살했다. 화란에서는 자기들의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도르트렉히트 공의회를 열고 수구적인 예정론자인 고마루스파는 개혁파인 아르메니스 주의자들을 제거했다.
둘째는 영국의 성공회와 대륙의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그 원초적인 정신과 거리가 멀어지자 교권과 금권에 눈이 어두워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교회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애굽의 추적과 광야생활 가운데서 가난하고 굶주릴 때는 혁명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일단 어느 정도 안정을 얻게 된 후에는 그들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기들을 인도할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의 배를 불리는 맘몬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즉 그들을 인도해 낸 신은 정신의 하나님 야훼가 아니고 물질의 신인 금송아지라는 것이다. 세상을 움직여 가는 이는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야훼 하나님이 아니고 황금 송아지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James는 당시 19세기의 이러한 기독교를 가리켜서 성도들의 전진(Pilgrim's Progress)이 아니라 성도들의 후퇴(Pilgrim's Regress)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또한 “악마의 편지”(Screwtaper's Letter)를 통해서 이러한 기독교회의 후퇴의 원인을 한편으로는 세속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등장과 연관시켜서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분석했던 대로 기독교의 후퇴가 세속주의와 마르크주의에 기인하는 가를 우리는 새삼 심각하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자기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많은 신자들을 통해서 달성된 “복음의 전진” 혹은 “복음의 진보”(progress of Gospel)를 말했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들의 믿음과 삶을 통한 복음전파의 전진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본회퍼 식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서의 형성의 삶(Gestaltung der Christen) 즉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습(Gestalt)이 이루어진다는 것(gestalten)이다. 그러면 도대체 성도들의 전진 혹은 복음의 진보란 어떤 것일까? 그리고 한국에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복음의 진보 즉 성도들의 진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복음의 진전이 아니라 후퇴 즉 성도들의 후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복음의 전진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동안 70. 80년대에 들어 와서 교회의 성장론에 따라서 어떤 양적 성장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풍조가 우리 교단에도 만연하게 되었다. 우선 교회들을 많이 세워야 한다고 해서 소위 3000교회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다른 교단들이 5천 내지 1만 교회 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편승해서 시작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은 많은 부작용도 가져왔다. 대형교회를 세우고 신자의 숫자를 늘리는 일에 교회마다 골몰했다. 목사는 커다란 외제차를 타고 토요일은 싸우나가 달린 호텔에 들어가서 설교준비를 하고 몇 천 만원 정도는 마음대로 판공비로 쓰고 자선기금도 넉넉하게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성공한 목사로 알려졌다. 늘어나는 헌금을 통해서 러시아나 아프리카 선교를 하는 교회는 성공한 교회로 되어 있다. 그러자니 자연히 교인쟁탈전과 같은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추태를 보다 못한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점잖은 가톨릭교회나 불교로 몰려갔다.
저는 지난 12월 28일 기장 총회 해외선교 위원회가 주관하는 한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서울의 한 고급호텔 중국식당에서 모인 이 회의는 기장에 와서 수고하는 캐나다와 독일 등지의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대접하는 자리였다. 거기에 참석한 기장의 지도급의 목사들은 식사를 마친 다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그런데 주빈격인 총회장목사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예장이나 다른 큰 교단들은 돈이 많이 있어서 해외 선교 등 거대한 선교사업들을 많이 벌리고 있지만 기장은 가난해서 그런 일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급 호텔에서 잘 먹이고 나서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자꾸 하니까 한국 사람으로서 저는 매우 민망했다.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에게 큼직한 선물들이 돌려졌다. 모임이 끝나고 나서 나오는 길에 옛날부터 친하게 지내던 선교사 한 분이 내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그리고 사도 바울도 돈 없이 선교했습니다.” 저는 이 선교사의 말이 늘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기장 교회도 복음의 전진의 일환으로 그 동안 3000교회운동이라는 것을 전개했다. 이렇게 선교하고 교회를 확장하는 일을 구지 반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바울이 말했던 “복음의 진보“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씬 광야에서 다시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되돌아가자고 아우성치는 성도의 후퇴는 아닌가? 아니 또 기장의 출발정신을 망각한 채 금송아지야 말로 우리를 인도해낸 신이라고 외치는 성도들의 후퇴는 아닌가? 한국교회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기장 마저도 지금 출애굽이 아니라 귀애굽의 목소리가 높다. 그리고 우리를 인도할 신은 광야의 신인 야외가 아니라 도시의 금송아지 신인 맘몬이라는 주장이 지배하고 있다. 서구의 선교가 19세기 제국주의와 결탁될 때 James는 Pilgrim's Regress를 기록했지만 지금 기독교는 동구사회주의가 몰락하자 자본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가 자본주의와 맘몬의 시녀가 된 것은 아닌가?
여호수아가 이집트에서 섬겼던 신을 버리고 야훼를 섬길 것에 대한 결단을 촉구했듯이(여호수아 24장) 우리는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할 때에 도달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자본의 신과 대결했듯이 우리는 바알 신과 대결해서 이겨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과 맘몬은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셨듯이 우리는 이 양자 사이에서 결단 할 때에 도달했다. 이 양자택일에서 유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와 아니오가 있을 뿐이다.
새로운 교회,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려는 교회로 출발한 우리에게도 똑같은 유혹과 시련들이 없지 않다. 그것은 바로 옛 신앙 혹은 습성 즉 이집트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유혹이 그것이다. 사실상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은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뭔가 창조적인 것을 행한다는 것은 모험이 따르는 것이다. 뭔가 의식성을 가진 것을 추진하는 것은 속된 말로 생기는 것 없이 고생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새롭고 창조적이고 의식성을 가진 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때로는 커다란 위험을 부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뭔가 얻어지는 것은 없고 상실감만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새로운 구속사업을 시작하실 때 종교적 유혹, 철학적 유혹 그리고 정치적 유혹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마태복음 4장 유혹기사). 예수께서는 인간적으로 볼 때 짧은 생애였지만 제자들과 더불어 수많은 비애와 회의를 물리치면서 구속사업을 감당했다. 제자들은 귀가 있어 말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짓만을 한다. 베드로 같은 만용의 사나이에서부터 도마 같은 회의주의자 그리고 유다와 같은 이기적인 동기를 숨긴 제자들도 있었다. 복음서는 곳곳에 제자들의 무지동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예수는 마침내 십자가를 지는 일까지 감당해야 했을 때 그 잔을 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하면 이 잔을 나에게서 옮겨 주소서”라고 했다. 구원사업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달아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로기의 예언자 제2이사야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우매함에 그는 질력이 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외쳐도 우이독경처럼 전혀 먹혀 들어가는 것 같지 않자 이사야는 낙심한 나머지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헛수고만 하였구나. 공연히 애만 썻구나!“(사49:4). 정말 우리는 헛수고만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이사야의 탄식은 사실은 모든 복음 전파자들의 운명을 말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기에 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는 원천이 존재했다. 이사야는 그러나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야훼만은 나를 바로 알아주시고 나의 야훼만은 나의 품 싹을 갚아 주신다네.”(사 49:5). 아무도 몰라주어도 야훼만은 알아주시고 상을 주신다는 확신이 그를 다시 고난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예수께서도 “고통의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말은 그 다음에 나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이 아니다. 내 주장이 아니다. 당신의 뜻이다. 이것이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다.
우리는 새 해를 마지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말씀이다. 특히 “낙심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믿는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9-10절).
작년 한해는 낙심할 일들이 많았다. 남북관계도 잘 되어 갈 것 같았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이 경색되었다. 팀스피리트와 같은 군사훈련이나 핵사찰 소동 등이 그 주된 원인이다. 작년에는 낙심할 일이 많았다. 정보사 땅 사기사건을 통해서 부정과 부조리가 얼마나 만연한가를 알고 전율했다. 작년에는 낙심할 일이 많았다. 문익환목사님이 다시 감옥에 가시고 나오시지 못했다. 작년에는 낙심할 일이 많았다. 그렇게도 갈망하던 정권교체의 꿈은 깨어지고 군부정권의 서자정권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작년에는 낙심할 일이 많았다. 1만개 이상의 적은 기업들이 몰려드는 외국자본과 상품 앞에서 도산하고 말았다.
이런 많은 낙담되는 일들을 남겨둔 채 우리는 다시 새 해를 맞이한다. 이런 낙담되는 일들로 인해서 우리는 좌절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힘과 용기를 내야 한다. 우리는 큰일이나 적은 일이나 꾸준히 선한 일을 해야 한다. 가정의 일들로부터 시작해서 교회를 섬기는 일도 더욱 열심히 해야 하겠다. 자녀들을 사랑하는 일도 더욱 열심히 해야 하겠다. 시작한 녹색가게도 더욱 열심히 발전시켜야 하겠다.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자기의 의무에도 충실해야 할 것이다. 사업에도 더욱 성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웃봉사에 더욱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때가 되면 거둘 수 있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약속이다.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은 Pilgrim's Regress가 아니라 Pilgrim's Progress가 될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서로 짐을 져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룹시다.” 금년 한해는 더욱더 전진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199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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