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 5:17-19)
오늘은 해방절 46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일본제국주의 세력 하에서 36년 동안 신음하던 때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염원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이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나라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어느 다른 것보다도 중요한 민족적 과제였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선교 초기부터 해내외에서 일제의 강점에 맞서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어려운 싸움을 싸웠다. 이로 인해서 당한 수난들을 말로 하자면 한이 없다. 그런데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함으로써 우리는 나라의 독립과 주권을 다시 회복하기는 했지만 미소 강대국에 의해서 국토를 분단 당한 채 어느 듯 반세기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해방된 이후에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과제는 나라와 민족의 통일을 통해서 휴전상태에 있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이다. 60년대의 인권운동과 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확신은 민족의 통일이 없이는 인권도 민주화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어 현재와 같이 대치상태에 있는 한에서는 국가안보를 위해서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들이 있어서 현재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있으며 또 국가안보를 위해서 강력한 군대를 필요로 하게 됨으로써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군대 가 과도하게 힘을 갖게 되어 정치에 간여함으로써 나라의 민주적 발전을 장애한다. 작년도 우리 나라의 전체 예산 28조 가운데 8조에 가까운 돈을 국방비에 사용했다. 이것은 전체 예산에 거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재정지출지수를 100으로 할 때 국방비는 161.7로서 다른 나라에 비해서 엄청나게 과도하게 지출되고 있다. 반면에 보건, 사회개발비는 개발도상 국가들의 평균치의 3 내지 5분지 1 수준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현재와 같은 대치 상태가 계속되한 나라의 정치적 발전은 물론 사회적 발전도 기대할 수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46년 동안 나라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인들처럼 나라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헌신했으며 또 희생한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문익환 목사님을 비롯해서 이해학. 홍근수 목사님 등이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서 일하다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옥고를 치르고 있다. 이 분들의 수난과 고통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가장 고귀한 밑 걸음이 될 것을 확신해 마지않는다. 밖에 있는 우리들은 이분들과 가족들을 위로하고 돌보는 일에 우리의 열과 성의를 다함으로써 통일운동에 조금이나마 기여해야 할 것이다.
오늘 읽은 성서는 1969년 냉전 체제하에서 서독의 그리스도인들이 동독과 동구라파 사회주의권에 사는 민족들과 화해를 위해서 일하자는 목표 아래 발표한 이른바 "동방백서"(Ostdenkschrift)의 주제가 되는 성경말씀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붙잡힌 보수적인 개신교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구와 동유럽의 민족들과의 평화를 염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앞장서서 동구라파의 국민들과 화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가장 시급한 위탁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운동은 서독의 사민당이 1972년 이른바 동방정책을 수립하기 3년 전의 일로서 이 정책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들은 냉전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감히 새로운 사고를 가진 새로운 인간 즉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 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옛 사람들, 즉 옛날의 사상이나 관습 즉 율법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지향했기 때문에 옛날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를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율법과 그 관행들을 부정함으로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율법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와 그의 생각을 땅속에 묻어버리지는 못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다. 그를 통해서 새로운 사회가 시작되었고 이 사회는 새로운 인간들에 의해서 감당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다. 이 새로운 인간에게는 성서의 말씀에 따르면 두가지 위탁이 주어졌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인간은 결코 이 세상의 권세들이나 풍조들(사상들)이나 재물들과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맘몬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기 보다는 권력자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맘몬을 더욱 섬기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매력 있게 생각하는 부르주아적 그리스도교인들로 전락했다. 권력자들과 화해하는 자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다. 맘몬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자본주의 풍조(사상)를 숭배하는 이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살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세상을 오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철저한 회개 즉 과거의 것으로부터의 전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삶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회개란 우리의 삶에서 특정한 행위들을 교정하는 것보다는 삶 자체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이나 맘몬이나 사상들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 가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 즉 하나님을 섬기는 삶(Gottesdienst)을 사는 것이 바로 회개다. 이러한 삶을 우리 가운데서 살다 가신 분을 들라면 1945년 4월 9일 39세를 일기로 나치에 의해서 처형된 본회퍼 목사를 들 수 있다. 그는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히틀러와 그의 동맹 세력과는 화해할 수 없었다. 또 우리 가운데서는 현재의 군사독재 정권과 화해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나라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일하시다가 옥살이를 하고 있는 문익환 목사님, 홍근수 목사님 그리고 이해학 목사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들이다. 시급한 역사적 위탁을 향해서 몸을 내대고 헌신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들이다.
뚤 째로 성서는 또 새로운 피조물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 가운데 인간들 사이의 평화를 거져 오고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들어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을 자기의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엡 2:14).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서 북한에 있는 동포들을 향해서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했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분단 상황에서 우리는 민족의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기 보다는 엉뚱한 곳에 선교사를 보내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또 우리는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일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지 않고 뭔가 추상적인 회개를 요구했다.
그런데 민족 화해와 통일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적 과제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부터라고 생각된다. 그 후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협의회 교단이 1988년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선언을 내기에 이르렀고 북한교회와의 교류를 통해서 통일의 물꼬를 턴 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해의 위탁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 협의회는 1995년을 민족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여 북한의 교회도 이것을 받아들였으며 금년 들어 벌써 세 번째로 남북한 교회가 같은 의식문을 가지고 8.15일 직전 주일에 남한과 북한 전 지역에서 통일을 향한 공동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것은 실로 남한과 북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피조물들로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화해의 직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시간 1995년 한국의 평화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 있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생각과 실천을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해서 말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북한 민족의 미래에 대한 책임성 하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겠다. 동서독 교회는 1945년 이후 우리처럼 국토가 분단되었을 때 양독일 민족의 미래에 대한 책임성 하에서 생각하고 활동했다. 그들은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 국민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국민들이 엄청난 재앙을 겪었을 때 이것을 저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깊은 책임감을 가지고 죄책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분단된 독일의 미래와 통일을 위해서 책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들을 우선 국토와 정부는 분열되었지만 민족과 교회는 분열될 수 없다는 신념 하에 1961년 벨린 장벽이 싸이고 왕래가 지극히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9년까지 양 독일 교회는 기구적 통일을 유지했다. 그리스도안에서 교회도 민족도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산다. 국토나 정부는 분단되었지만 민족과 교회는 분단될 수 없다는 확신 하에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작년 10월 3일 양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민족들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겪지 않았다.
둘째 이데올로기적 대립에서 교회는 중립성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미소간의 냉전적 대립은 단순히 양국간의 권력투쟁으로 파악했다. 그는 이러한 대결을 계시록에 나오는 용들의 싸움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이 용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편을 들 필요가 없는 것은 이 둘이 밖으로는 평화니 자유니 정의 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권력욕에 사로잡힌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두 강대국이 대결을 지향하고 새로운 공존의 질서를 이루어 나가는 데서 확실하게 증명된 셈이다. 그들은 대결하는 데서나 공존하는 데서나 자기 이해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속담은 이들의 속성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적대상(敵對像)에 근거한 안보관에서 공동의 안보관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남한에 유리하고 북한에 불리한 것을 우리는 안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한에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되는 것을 쌍수를 들어서 환영했다. 북한의 동포는 붉은 마귀들이어서 핵무기를 통해서라도 멸절해야 한다는 아마게돈 신학에 근거해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은 시민이고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복음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전쟁광이나 군사주의자들의 사고에 근거한 것이다. 유럽의 안보체제가 발전한 이른바 “공동의 안보관“(Common security)은 성서의 말씀에 더욱 가까운 생각이라고 본다. 남한에만 유리하고 북한에는 불리한 것은 공동의 안보는 물론 일방의 안보도 될 수 없다. 또 북한에만 유리하고 남한에는 불리한 것은 공동의 안보가 될 수 없다. 남한이나 북한 모두에게 안보가 되는 것이야말로 공동안보가 되며 진정한 의미에서 안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민족 통일은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거나 또 북한이 남한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되어질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서도 함께 사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서구의 정치적 선진국들에서는 사회주의 정당과 자본주의 정당이 이념을 달리하면서도 공존하고 있으며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서로 정권을 주고받고 있다. 일본에서도 자민당과 사회당 그리고 공산당이 정치적으로 공존하면서 국민들의 복리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된 한반도에도 필연적으로 진보적인 정당과 보수적인 정당이 공존할 때만 오히려 사회가 안정되고 정당들도 건전하게 발전되는 것이다. 7.4 남북 공동선언에도 보면 이념과 사상과 체제를 초월하여 민족의 대단결로 나갈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념과 사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통일의 참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똑같은 사상과 똑같은 제도가 아니라 각기 다른 사상과 제도 하에서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주고받는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도 흡수 통합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거기에는 사회주의 정당과 자본주의 정당이 공존하는 사회로 통일된 것이다. 이들을 위해서 남북한은 모든 장애가 되는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라고 했다. 즉 상대방의 죄를 상대방에게 돌리지 않고 화목할 것을 부탁한 것에서 우리는 남북한이 상대방의 이념이나 체제를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고 서로 화목해야 한다는 말씀을 보게 된다. 서로 같은 생각과 체제를 가지고 살고 있다면 화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화목은 각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의 삶의 자세다. 우리는 남한 내에서도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며 각기 다른 종교와 교파들을 배경으로 하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다른 사람과 사상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화해의 복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화해의 정신이 없이는 남북의 통일은 불가능하고 또 통일된다 해도 무서운 갈등에 휘말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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