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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06 14:08
한국의 민중신학과 본회퍼
글쓴이 : 손규태

1) 들어가는 말

 한국의 민중신학은 1960년대 중반 그리고 1970년대 초 한국의 군사독재치하에서 몸으로 투쟁하고 수난을 당한 일단의 신학자들의 경험과 사색을 통해서 탄생한 실천적 정치신학이다. 이 신학은 구약의 히브리인들의 출애굽 전통과 신약의 갈릴 예수의 전통을 한국의 민중사적 전통과 결합시키는, 말하자면 성서의 빛에서 한국의 민중의 현실을 조명하고 한국의 민중의 현실과 경험에서 성서를 새롭게 읽어 가는 이론적 실천적 노력이다.

한국의 교회사적으로 말하자면 민중신학은 정치신학으로서 19세기말 20세기 초의 기독교의 정치적 수용과 그 전통을 다시 한번 한국의 현실에서 계승 발전시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이러한 선교 초기의 기독교 수용과정을 바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민중신학이 갖는 한국교회사에서의 역사적 맥락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필자는 한국의 민중신학이 해방신학이나 본회퍼 등의 사상에 의해서 자극을 받은 것을 인정하지만 이 신학은 본질적으로 한국의 초기 기독교의 정치적 수용을 계승시키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인의 기독교 수용에서의 정치적 동기들을 간략하게 살피고 이러한 정치신학적 동기들이 선교사와 일제에 의해서 어떻게 제거되었는가를 우선 고찰하려고 한다.

 

2) 조선에서의 기독교의 수용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조선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용이하게 받아들이게 만든 적극적인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가 갖는 민족해방의 전통과 예수의 민중해방의 전통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를 수용한 계층들을 살펴보면 곧 알 수 있다. 이를 수용한 계층들은 주자학이라는 유교의 전통주의 이념과 거기에 근거한 신분계급사회를 유지하려는 이들을 제외하고 실학파의 지식인들과 동학운동에 실패한 경험을 가진 이들 가운데 일부, 그리고 낮은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이미 정치적으로 특정한 계층에 의해서 수용되기 시작했다. 실학파의 지식인들은 이념적으로 개화와 민족의 자주독립의 수단으로서 서양문물을 수용하였고 동학운동에 참가한 이들과 천민들은 민족의 자주화는 물론 성리학에 바탕을 둔 신분계급사회를 극복하자는 데서 기독교에로 개종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의 초기 수용은 선교사와 일본 제국이라는 두 개의 각기 다르나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세력들의 연합전선에 의해서 비정치화 내지는 탈 정치화된다. 선교사에 의한 기독교 수용의 탈정치화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 사이 조선인과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정서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인 1907, 선교사들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준비되고 추진된 이른바 대부흥 운동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해는 구식군대가 해산되고 일본에 의한 신식군대가 강제로 조직되었고, 여기에 반발한 구식 군인들이 주동이 되어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운동이 전개되던 해이다. 이 해는 고종이 일본의 부당한 간섭에 항의하여 이준을 헤이그 평화회의에 보내서 일본의 식민지적 야욕을 규탄하려한 것이 발각이 되어 폐위되는 비운을 겪은 해이기도 하다. 또한 이 때는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일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고 애국적인 집회들이 연일 교회에서 열려던 해이다.

이러한 교회의 정치화는 소시민적이고 중산층 출신의 선교사들, 그리고 타계적인 개인적 신앙을 가진 선교사들의 눈에는 교회가 복음으로부터 탈선한 것이며 일탈이었다. 한 선교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 관한 한 이 시기(1890-1905)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사건들에 의해서 야기되었다. 애국심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민족적 존엄성에 대한 일본인의 침해에 대항해서 들고일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 같이 보였다. 다른 조직들이 전무한 상태에서 왜 교회들이 이러한 저항의 중심이 되지 않았겠는가? 교회들은 집회장소가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의 집단들은 한데 묶는 구실을 했다. 독립은 위기에 처했었고 조국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희생해야 했다. 이것이 몇몇 사람들이 이유로 드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기독교인 지도자들은 정치적 분규들의 위험들을 곧 인식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일에 모든 노력을 다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기독교인들이 불법적인 행동에 가담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의 지시를 따라주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이러한 정치적 수용에 당황하고 교회를 이러한 민족운동의 장으로부터 해방시키기로 결심했다. 이러하여 교회를 정치적 오염으로부터 정화시켜서 순수한 복음만을 즉 비정치화된 타계적이고 내면적 신앙의 장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정치의 장으로 변해버린 교회를 깨끗이 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어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부흥회를 주도적으로 끌어갔던 선교사 블레어(Blair)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가 일본인을 미워한 것을 회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죄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의 극동의 상황으로 봐서 조선이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소련에 편입되는 것보다는 일본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미국정부의 대외정책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고 선교사들은 이러한 정책에 충실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요약하자면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감행되었다.

교회의 비정치화는 선교사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도 감행되었다. 1907년 선교사들과 그 추종세력들에 의해서 교회에서 추방된 민족주의적이고 애국적인 기독교인들은 신민회(New People's Association)해서교육총회를 중심으로 해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신민회는 비밀독립단체로서 활동하던 중 1911년 일제는 이른바 데라우찌 총독 암살음모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5백여 명을 체포하여 그 중 105명을 실형에 처했다. 그들은 사건을 날조하기 위하여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다른 한편 교육입국을 목표로 활동하던 비교적 온건한 해서교육총회와 이들에 의하여 운영되던 사립학교들은 `1911, 1915년 등 두 차례에 걸친 교육령과 교육법을 통해서 해체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두 개의 비교적 온건한 독립운동단체들이 와해됨으로써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진행되던 민족운동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선교사들과 일본인들의 전술적 동맹은 교회를 사적이고 타계적인 신앙의 집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선교사들이 말하듯이 교회는 이제 완전히 청소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교회의 교권은 선교사들과 한국의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독점되기 시작했다. 유럽 신학의 소개나 성서비판한의 강의는 해방이 되고 조선신학교가 탄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3) 본회퍼의 한국수용과 민중신학의 탄생

 

한국에서의 정치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의 태동은 1960년대의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다. 1960년 군사 구테타에 의해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실체가 1965년을 기점으로 하여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학계와 교회는 이때까지만 해도 군사정권에 대하여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으며 당시의 세계적 추세였던 신학의 상항화(Kontextualization)와 관련해서 토착화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이때에 토착화 논쟁에는 약 20여명 정동의 지도적인 신학자들의 참여했으며 문화 신학적 논거 아래서 토착화를 적극적으로 들고 나온 감리교계의 신학자들과 문화 변혁적 논거에 따라서 토착화를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장로교계의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으로 발전되었다. 이 논쟁은 대체로 당시 한국의 신학적 입장들을 정리하는 데 기여했으며 동시에 서구 신학의 복사나 전수를 통해서는 우리의 교회적 신학적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일련의 신학자들은 세속화 문제를 둘러싼 토론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기에서부터 본회퍼의 한국 소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특이한 것은 한국에서의 세속화 토론은 단지 미국에서의 본회퍼 수용을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어서 실제로는 이렇다 할 교회적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한국은 당시로서는 미국이나 유럽이 경험하던 세속화를 실감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른바 성인 된 세계에서의 기독교 복음의 새로운 해석과 그 전달이 문제가 되고 있다.

본회퍼의 한국 수용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김의환 교수와 이장식 교수에 의해서 제기된 이른바 순교자 논쟁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세속화 논쟁보다는 훨씬 더 정치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통보수주의 진영의 신학 교수였던 김의환은 세속화는 기독교를 교회에서 세상으로 옮기는 것인가?” 라는 제목의 글에서 교회에서 세상으로”(Von der Kirche zur Welt)라는 한프리드 뮐러의 논제를 비판하면서 1930년대 신사참배를 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히틀러 암살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본회퍼와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세속화 신학은 성과 속의 영역의 구별을 없앰으로써 결국 복음을 사회운동으로 환원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신학대학의 이장식 교수는 본회퍼와 주기철이란 제목의 글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한 주기철 목사는 명백히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주기철 목사는 당시의 민족운동자들을 면박하는 설교를 했고 이들이 민족운동, 정치운동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는 사람과 인격을 높이며 도덕생활을 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으나 이제라도 교회를 떠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주기철은 민족적 동일성보다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동일성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반해서 본회퍼는 독일 교회에서 정치적 순교로 인정하여 순수한 종교적 순교자들과 조심스럽게 구별한다.”고 본 이장식 교수는 본회퍼가 생각한 크리스천의 자기 동일성과 정치적 투쟁을 하던 자기 형제들과의 자기 동일성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가 성립된다.”고 보고 있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하여 그리고 앞에서 구체적으로 죽어 가는 민족들과 동료들을 위하여 독재자를 제거하려고 한 애국적 행위는 단순한 정치적 결단으로만 불 수 없으며, 따라서 신앙적 결단과 정치적 결단 사이를 선명하게 구별하기 힘든 한계상황에서는 기독교인은 시민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장식 교수의 글은 기독교인의 실존과 한 시민으로서의 실존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려는 시도나 현대에서의 순교자의 고전적 이해를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데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본회퍼가 한국에서 가장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세속화 토론이나 순교자 논쟁보다는 그의 정치적 투쟁과 관련되어서 이다. 이것은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 하에서 본회퍼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정치투쟁을 위한 영감과 힘을 얻자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신학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들로 본회퍼의 신학 말고도 1960년대 세계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다루어진 책임사회론(Responsible Society)과 남미의 해방신학을 들 수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본회퍼의 역할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1960년대 중반 이후 본회퍼가 한국에서의 교회의 정치투쟁에 가장 강력한 영감과 추동력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신학계에서는 토착화의 논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사회윤리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돌아온 고범서는 사상계라는 잡지에다 독재에 항거한 신학자라는 글을 통해서 본회퍼를 정치 신학적으로 소개했다

이들의 본회퍼 소개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당시 독일의 상황을 소개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현실을 해명하자는 것이다. 당시 한국의 군사독재를 직접 대고 비판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독일의 상황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상황을 바로 해석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 필자들은 본회퍼의 소개를 통해서 용감하게 투쟁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본회퍼의 삶의 통해서 독재체제하에서 기독교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려고 했다. 오재식은 그의 글에서 교회의 목사가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한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논쟁은 한가한 사람들의 말거리요, 행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아니다라고 단언하면서 순교자 논쟁을 비판하고 나선다. 우리도 실제로는 미친 운전사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할 처지에 있음을 그는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때에 서구 신학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본회퍼에 관한 글들도 소개된다.

그러나 본회퍼의 한국 소개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한 박봉랑은 1975년 본회퍼 서거 30주년을 기념강연회에서 기독교인의 비족교화 - 본회퍼의 신학이란 제목으로 1960년대 이후의 기독교의 사상적 기후를 다음 다섯 가지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신학에서의 이 세상성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둘째, 신앙항목의 바른 진술보다는 행동의 성격과 방향의 강조, 셋째 신학적 사고가 변혁 지향적이다. 넷째 개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타자를 위한 삶과 연대성의 강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의 선포에서 삶의 전 영역의 인간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그에 따르면 세속화 신학, 신의 죽음의 신학,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해방의 신학, 혁명의 신학 등을 통해서 표현되었는데 이와 같은 20세기 후반의 신학의 변화에 대해서 결정적인 쐐기의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20세기의 기독교 세계에 수수께끼와 같이 된 본회퍼의 존재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박봉랑은 그의 논문의 결론에서 케리그마와 신앙의 비종교적이해는 개인주의적, 경건주의적, 실존주의적 신학으로부터 정치신학의 풍토를 만드는 누룩이 되었다... 오늘의 교회의 사마리아 사람의 역할은 단순히 영적, 정신적 자비에서만이 아니라, 책임성, 연대책임에서 이해하여 기독교가 오늘의 프롤레타리아의 인간 소외와 고난이 있는 그 곳에 동참함으로써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과 책임성에서 대답될 수 있게 되었다. 본회퍼의 윤리학의 이 사람을 보라는 이 대답의 종합이다.”

 

4) 민중신학에서 본 본회퍼의 신학

 

1870년대 말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에서의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그 이념성에 있어서 질적 도약을 했다. 1960년대 말의 인권운동과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감당되어 갔으며, 이들 운동에서는 군사독재정권의 인권침해를 고발하고 이 정권에 의해서 수난을 당하는 이들을 여러 측면에서 도와주는 일로 만족했다. 이러한 단순한 인권보호 차원에서의 운동은 독재정권을 제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적 정권을 수립하려는 정치투쟁으로 전화된 것이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운동방향이었다. 이러한 운동의 집결된 힘으로 1979년 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붕괴 이후에 광주학살과 더불어 이를 이어서 등장한 군사정권의 출현은 이제까지의 순박한 민주화운동 즉 자유민주주의 회복으로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달성할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미군의 지원을 받는 군사독재 정부와 이들과 결탁된 독점매판 재벌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권보장도 민주주의도 이를 수 없다고 인식한 진보적 지식인들과 학생들, 운동의 영감과 추동력을 사회과학적 연구결과에서 찾기 시작했고 운동의 방향을 통일 운동으로 전화시켰다. 외세에 의한 분단이 한국 사회의 제반 모순 가운데 기본적인 모순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분단 상항에서는 국가안보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이것을 위해서는 군의 역할이 강조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구사독재의 악순환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지식인들과 학생들에 의해서 이끌려가던 운동세력에 노동자들이 가담함으로써 운동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성장한다. 이러한 변혁운동의 양적, 질적 성장은 교회와 신학이 지금까지 차지해온 입지를 더욱 축소시켰다. 1970년대에 민중신학이 차지했던 위치가 축소되면서 민중신학은 이제까지의 연구방향을 바꾸어서 사회과학의 연구결과들과 마르크시즘의 연구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들은 주로 사회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소장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르크스와 사회과학의 인식수준이 앞으로는 민중신학의 발전의 템포를 결정해 주리라고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다른 한편 80년대에 들어와서 민중신학적 이론을 실천의 장으로 매개하려는 운동으로서 민중교회운동이 여러 교파의 젊은 목회자들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다. 현재 이러한 민중교회들이 전국적으로 100여 개가 세워져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그 이유는 이 운동이 엘리트적 운동이어서 대중성확보에 실패했다는 지적과 함께 이 운동이 교회로서 가져야 할 종교성을 너무 무시하고 있고 단지 사회변혁운동에만 주력하는 데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80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변혁운동의 양적 질적 상장과 함께 그리고 민중신학의 연구가 새로운 사회과학적 연구결과들을 신학에 매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본회퍼의 신학의 영향력은 속에서 저하되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력 저하는 대학 강단에서의 본회퍼 연구의 후퇴에서도 그리고 기독교 잡지들에서 본회퍼에 관한 연구논문들의 발표가 줄어드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본회퍼 신학의 퇴조현상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좋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무엇보다도 본회퍼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이념적 한계성이라고 보여진다. 1960, 70년대에 본회퍼의 삶과 신학은 당시의 사회적 인식수준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용기 있는 투쟁이라는 측별에서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서 변혁운동의 정향이 인권신장이나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라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회질서 즉 정의로운 사회의 모델의 창출을 목표로 하고 나서는 본회퍼에서 얻을 수 있는 영감이 극히 축소되게 된 것이다. 안병무나 서남동 같은 이들이 본회퍼의 행적에서 예를 들면 바셀로나에서의 목회나 벨린에서의 목회 그리고 감옥에서의 생활 가운데서 가진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만남의 경험을 민중신학이나 사건의 신학과 결합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본회퍼의 신학은 한국과 같은 제3세계의 현실이 갈망하고 있는 이념적 계층적 물음에 대해서 답하기는 힘들다고 보여진다. 그는 분명히 교회는 처음부터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것이었다.”(Die Kirche ist seit Anfangen eine Sache kleiner, unangesehener Leute gewesen)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는 동시에 교회는 단지 주변실존자들(Randexistenzen)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부르주아적인 것의 이상화의 자라에 반 부르주아적인 것, 질서 파괴적인 것, 혼돈적인 것, 무정부적인 것 등의 이상화에 대한 견해에서 본회퍼는 분명하게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본회퍼가 말하는 기독교인의 타자를 위한 존재타자를 위한 교회의 개념들은 오늘의 한국적 현실에서 보면 매우 추상적으로 보인다. 물론 민중신학 자체가 민중에 대한 개념 정의에서 프로레타리아 개념을 배제함으로써 민중을 추상화했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본회퍼의 타자개념은 한국의 변혁운동이 추구하고 있는 민중의 실체를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변혁운동이 부루좌적 사회의 청산을 그 목표로 하고 있고 또 민중신학이나 민중교회운동이 한국과 같은 예속적인 악성 자본주의에서부터의 민중의 해방을 그 이념적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볼 때 본회퍼의 신학은 더 이상 민중신학의 주목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보여진다.

그 다음으로 한국의 변혁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민중신학의 중심적 축이 1980년대에 들어와서 인권이나 사회정의 등으로부터 보다 조국의 통일이라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과 관련해서 본회퍼 연구의 후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사회의 주요 모순이 민족의 분단에 기인한다는 인식은 1980년대 한국의 변혁운동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성체 논쟁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합의점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1980년대의 변혁운동의 방향도 역시 일차적으로 통일운동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 통일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청산과 함께 남북의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였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한국의 변혁운동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바르트의 동서관계에 대한 태도나 그가 관련했던 종교사회주의에서 오히려 더 큰 영감을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공주의를 공산주의 그 자체보다 더 경계한 바르트의 입장이나, 동서의 대결을 단지 악마적인 정권들의 단순한 권력투쟁으로 본 그의 자세가 젊은 신학자들에게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본회퍼의 거리를 둔 시각이나 또 그 문제에 대한 연구의 결여가 통일운동에서 아무런 신학적 지원도 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본회퍼가 다시 한국에서의 변혁운동의 틀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89년 본회퍼 학회의 창립과 함께 유럽의 평화운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에 의한 평화신학의 정립 노력과 때를 같이 하고 있다. 본회퍼 학회는 침체된 본회퍼 연구의 활성화와 함께 그의 선집의 출판, 그리고 본회퍼 신학의 대중화를 그 목표로 설립되었다. 물론 국제적 교류를 통해서 본회퍼 연구의 동향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도 그 과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본회퍼가 다시 한국 신학계에서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통일운동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있다는 인식 하에 평화운동으로 전화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있다. 필자는 198949일 본회퍼학회 창립을 기념하여 본회퍼 - 에큐메니칼 운동과 평화운동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본회퍼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역에서 전개하려고 한 평화운동의 꿈을 소개한바 있다. 이 강연은 당시 세계 교회협의회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서울대회를 준비하고 있던 것과 맥을 같이 하여 준비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공의회는 실상 본회퍼의 생각에서 영감을 얻은 서독의 물리학자인 바이체크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이끌렸다.

 

5) 나오는 말

 

본회퍼 신학의 한국 수용에서 그것이 가졌던 영향력과 한계들을 간단히 요약했지만 앞으로 본회퍼 신학의 한국적 전재는 역시 통일운동과 그것을 넘어서서 아시아의 평화운동을 전망하면서 이룩될 수 있다고 보인다. 동시에 그의 타자를 위한 존재타자를 위한 교회의 개념들은 그의 나를 따르나와 매개될 때 한국 교회의 갱신과 함께 새로 일어나고 있는 민중교회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의 참여의 모델로 기여하리라고 전망된다. “신도의 공동생활훈련과 제자직 훈련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이 타자를 위한 공동체, 타자를 위한 존재로 되는 형성의 윤리를 창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본회퍼학회 세미나 강연:19901022-23일 일본 千城山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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