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장공 김재준의 공적 삶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는 오로지 “진리의 탐구와 정의를 향한 투쟁의 삶”을 산 분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소 왜소한 체구에다 매우 소극적이고 온건한 성품을 가진 분이었지만 그의 일생은 학자로서 성서의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서나 “종교개혁자”로서 잘못된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서는 물론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부패에 대항한 “사회참여자”로서 투쟁의 삶을 살았던 분이다. 그는 신학자로서 새로운 비판적 성서해석학을 한국에 소개함으로써 진보적인 신학을 이 땅에 소개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배리새적 교리주의에 농성하는 한국교회의 교리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실패한 후 “기독교장로회”를 창설함으로써 새로운 신학과 운동의 장을 만든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박정희, 전두환 등 악독한 군사정권의 정치적 억압에 맞서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는 물론 조국의 통일운동에 앞장섬으로써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왜곡된 신학사상과의 대결, 그것에 기초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교권주의와의 투쟁, 나아가서 어두운 군사독재 정권 시절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맞서 투쟁하는 가운데 그가 항상 새롭게 직면하고 있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이데올로기 문제, 즉 동서 분단과 함께 냉전시대가 등장하면서 한반도를 어두운 그림자 가운데로 몰아 넣었던 이념 대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데올로기 문제는 이미 일본제국주의 시대, 남북의 분단과정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 분단이 고착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을 음으로 양으로 지배해 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문제는 해방 후 남북분단이라는 비극을 낳아서 국토와 민족을 두 동강이 나게 했고 한국전쟁을 통해서 수 백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남한에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인해서 정치, 경제, 사회 등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건전한 발전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왔다.
나아가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문제는 비단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만 악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까지 침투하여 심각한 대결양상을 가져왔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60-70년대 한국 교회 안에서 진행되었던 세계교회협의회를 둘러싼 용공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결국 교단분열(예장 통합과 합동)이라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당시의 일부 극우적 사고를 하던 장로교회의 목사들은 세계교회협의회가 러시아 정교회 등 동구라파 국가들의 교회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용공적”(容共的)이라고 단죄하고 거기에 가담한 예장(통합)을 탈퇴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교파주의와 지역주의에 편승한 일부 성직자들의 패권주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정치영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영역에서도 흔히 적대자를 공격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이러한 악영향과 해악을 끼친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대해서 장공 김재준은 어떤 생각을 가졌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자 했나를 살펴봄으로써 조국의 통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모두가 새로운 교훈을 얻고자 한다.
장공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
장공은 해방 이후 그의 생을 마칠 때까지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 왔다. 그는 거기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 차례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것은 분단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모든 지성인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의 경험이기도 한다. 장공이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 경동교회 교인들의 모임인 선린형제단(善隣兄弟團會)에서 발표한 논문 “기독교와 건국이념”(基督敎와 建國理念)이란 글에서부터라고 생각된다. 해방 직후 혼란한 정국에서 나라의 건국의 이념적 방향을 놓고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갈라서서 대립투쟁 할 때 이 글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본격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다시 찾은 조선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세력들 특히 좌우익 세력들이 이데올로기적느오 대립하는 가운데서 장공 나름대로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우리가 서론적 고찰에서도 살펴본 바이지만 장공은 인간의 “자유”(自由)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는 일차적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시민적 자유와 맥을 같이 하여 발전해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일단 장공을 화고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해방직후 즉 1945년 8월에 쓴 글 “基督敎와 建國理念”에서 기독교적 이상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최상의 목표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기독교적 영향력이나 국민의 민도(民度)가 낮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서 는 일단 인간의 기본적 자유(기본권)들이 보장되는 새로운 국가형성을 희망했었다. 당시 해방정국에서 좌우익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그들이 목표로 하는 체제의 국가를 형성하려고 투쟁하는 상황에서 장공은 다음과 같은 그의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신앙과 예배의 자유, 사상,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부만 수립되면 감사할 것이다. 이런 자유가 호상 충돌되는 때 각개의 경계선에 대한 호상 경의를 강제하는 것은 정부의 할 일이다.”
장공은 무엇보다도 “종교의 자유”, 즉 신앙과 예배의 자유의 보장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일반적으로 헌법에서 보장되는 기본권의 항목들을 중요시했는데 이는 그가 기독교 지도자로서의 당시 북한이나 사회주의권 국가들에서 행해지던 신앙과 예배의 자유의 침해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구 소련이나 동구라파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이미 종교의 자유가 상당 정도로 위축되거나 위협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공은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적대적이고 상호 충돌하는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국가들은 이 들 사이의 일정한 경계선을 그어주고 동시에 서로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는 책무를 가진다고 했다. 자유민주주의란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든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고백하고 또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고 활동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의 자유와 이념에 대한 고백을 부정하는 것 자체는 이미 자유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장점이 있다는 것이 장공의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자유민주주의자의 신봉자이면서도 다른 이념 즉 사회주의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거나 배격하는 극우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다루는 데서도 언급하겠지만 장공은 이데올로기의 다양성(多樣性)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방의 사상을 긍정하는 의미에서 이념적 관용적을 내세우는 사상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장공의 기본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한국전쟁 이후 1953년 5월 월간지 사상계(思想界)에 기고한 글 “민주주의론”(民主主義論)에서 보다 상세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1) 개개인의 인격의 존엄성 보장, 2) 개인의 자유의 보장, 3) 인간성에 대한 신뢰, 4) 사회적 연대성, 5) 권위의 내재 등을 들고 있다. 여기서 장공은 더 이상 종교의 자유에 관한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종교의 자유는 이미 자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에게는 오히려 인격의 존엄성과 자유의 보장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신뢰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장공은 이미 민주주의의 원리를 어떤 종교적 신앙에서보다는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장공 선생님의 사상의 깊이와 넓이를 보게된다. 즉 장공은 기독교의 기본원리들과 휴매니즘의 원리들은 서로 대립 상충하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들은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을 그의 민주주의론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서구에서는 이 계몽주의와 더불어 이 둘은 대립충돌하기도 했지만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는 데서는 상호 보안하기도 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장공은 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로서 “사회적 연대성(社會的 連帶性)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이 원리가 가진 핵심적 내용을 간파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민주주의에서 주장되는 개인적 자유가 사회주의가 강조하고 있는 사회적 연대성을 거부하고 사리획득(私利獲得)의 원리로만 사용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하여’ 등의 표어는 다 이런 것을 말함이며 전체와 개체가 서로 분리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자유이면서 기쁘게 자발적으로 서로 봉사하는 사회를 이루어 나가라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목표인 것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사회’는 어떤 공동목표적인 것을 위하여 각개인이 기쁘게 감격을 가지고 활동하며 봉사할 수 있는 직장이며 무대다.”
장공에 의하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개개인들의 사회적 연대성을 견지함으로써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 기술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만일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 연대성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 때는 홉스가 말한 것 같이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늑대며“ 이 세상은 ”萬人對 萬人의 鬪爭의 장“이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성패는 인간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장공은 같은 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결함”(缺陷)에 대한 비판도 가하고 있다.
첫째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결함으로서 “경제적 불균형”(經濟的 不均衡)과 과도한 경쟁으로 생기는 인간성 상실을 들고 있다. 그는 개인적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 자본주의가 오늘날 인류를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모순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부의 偏在와 그에 따르는 실직 무직자의 증대, 식민지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생산품의 덤핑(축적), 주기적으로 오는 恐慌, 이런 것을 다소 인위적으로 시정하며 가봉한다해도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統制經濟政策을 강화하면 민심의 해이와 함께 독재와 강박을 강화하여 종당은 공산주의 정책과 다름없이 될 것이다. 그러노라면 인간성의 연한 촉수는 저절로 시들어버린다.”
둘째 자본주의는 극단적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경쟁의 도구로 삼아 그 인격을 파괴한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국제간에는 식민주의(植民主義)와 제국주의(帝國主義)와 같은 것을 추구함으로써 전쟁을 그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레닌 등이 간파했던 제국주의론(帝國主義論)과 같은 맥락에서 장공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설파하고 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자본주의의 극단적 모순(矛盾)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기주의를 근거로 하고 자본을 萬能의 武器로 하여 인격을 機械化, 奴隸化 하며 불의의 策謀와 掠奪과 戰爭으로 시장을 獨占하여서 각자의 貪慾을 채우려는 것”이다.“
셋째 장공은 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결함으로서 여기에 참여해야 할 민중들의 무지(無知), 무능(無能), 무관심(無關心)으로 인해서 ‘국민의 정부’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장공에 의하면 제3세계의 나라들에서와 같이 민중들이 의식화되지 못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결함은 그들의 무지와 무능, 그리고 무관심으로 인해서 제대로 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데 있다. 그로 인해서 민중은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서 이용당하고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주체가 되는 시민들이 자기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고도의 훈련된 지식과 의식을 가진 민중의 참여를 통해서 막강한 제도이다.
넷째로 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결함은 그것이 종교를 떠나서 세속주의{世俗主義)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장공이 세속화와 세속주의에 대한 철저한 구별을 하지 않은데서 오는 약간의 오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민주주의는 뭔가 종교적 산물이 아니라 엄격하게 말하면 계몽주의에 기초한 유럽 사회의 세속화 과정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유럽 사회를 통합하고 있던 제단과 왕좌(종교와 정치)의 해체는 강력한 휴머니즘 운동에 뿌리를 둔 계몽주의와 그에 따른 세속화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세속화 과정에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과 같은 전통적 이데올로기가 깨어지고 국가의 정치의 신성성(神聖性이) 물러나서 통치관계는 “계약”(契約)에 의해서만 성립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세속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공은 이러한 모순에 가득 찬 자본주의를 교회는 그 동안 무조건적으로 지원했던 것을 비판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인간성을 파괴하고 나아가서 이윤추구를 위해서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마다하지 않고 전쟁까지도 불사했던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을 신의 뜻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선교의 기회로 삼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장공은 민주주의를 오늘날의 정치체제에서 가장 유효한 체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가 아니라 현실적 차원에서 요청된다고 보고 그 당위성과 실천을 강조하는 다수의 글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한국 敎會와 民主參與”, “한국가정의 전통과 民主主義”, “民主主義는 피할 수 없다”, “民主主義는 가정에서부터”, “한국 民主主義를 위하여”, “民主한국을 위하여”, “民主主義 운동과 한국교회”, “民主原則은 준수되어야 한다” 등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고귀한 가치와 그것의 실현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 글들은 주로 한국의 권위주의적 현실과 여기에 대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장공은 이러한 (자유)민주주의가 가진 모순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민주주의를 제창하면서도 그것이 가진 모순들을 시정하는 길을 늘 모색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길의 모색을 사회주의에서 찾기보다는 기독교의 예언자들과 예수의 민중전통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기독교와 이데올로기”를 다루는 부분에서 취급하기로 한다.
(2) 사회주의 문제
사회주의(社會主義) 혹은 공산주의(共産主義) 문제는 장공에게서나 우리 모두에게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장공은 이미 1920년대 중반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 유학시절, 일본, 특히 일본대학들 안에서의 공산주의 운동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었고 그래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곳에서 대학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서회(讀書會)와 같은 사회주의 학생단체들에 잠시 참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자기가 믿고 있던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탈퇴하고 만다.
장공이 사회주의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된 이후부터이다. 그는 1945년에 쓴 글 “기독교의 건국이념”(基督敎의 建國理念)이란 글에서 사회주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여기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매우 냉철하고도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공산주의 자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과학적으로 경제기구의 실상을 검토하며 그 더 좋은 (국가)재건을 기도하는 점에 있어서 존경할 것이며 그것이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을 드러낸 것인 한 우리는 그것을 수락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신앙과 예배의 자유, 사상 및 언론, 출판의 자유, 개인양심의 자유를 인정한다면 “공산주의나 기타 여하한 정부라도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우선 감사히 수락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장공에 의하면 사회주의가 그것이 선전하고 있는 대로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해서 대중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그들의 삶이 인격적인 것이 되도록 노력한다면 기독교 특히 예수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착취당하는 대중의 생활향상과 인간적 존엄을 위하여 경제와 정치기구의 가장 과학적인 개혁을 행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전연 비기독교적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장공은 공산주의가 주장하고 있는 이론은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합리적인 측면들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이런 면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실현되는 사회를 지향한다면 기독교가 여기에 대해서 적대적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장공은 공산주의의 문제점들도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공산주의가 사상적으로 유물론을 내세워서 신을 부정하고 무신론을 제시하면서 기독교와 대결하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은 그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스는 유물론을 제창하면서 우선 그것과 대립관계에 있던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은 당시의 매우 왜곡된 제도적 종교로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아편의” 요소와 함께 당시 기독교의 부르주아 사회와의 동맹관계를 깨기 위한 전술적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기독교는 마르크스의 이런 종교비판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도 가지게 되었고 “성육신”신학을 통해서 “초월화” 혹은 “타계화”된 자신의 모습을 수정해 나가기도 했다. 어쨌든 장공은 이러한 유물론과 무신론적 입장을 취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상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정신적 사상적 방면에 있어서 唯物論, 無神論的 견해를 전체에 강요하는 때 우리는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개인의 존엄을 위하여 감연히 거부할 것을 각오하여야 한다.”
그러나 장공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이러한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유물론, 무신론에 두고 있는 것에서보다는 기독교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실천적 적대행위에서 찾고 있다. 공산주의가 대중의 권리를 들고나선다는 점에서 예수의 정신과 일치할 수 있는 점이 있지만 그 실천과정에서 무신론을 내세우면서 기독교를 공격하는데서 출발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의 적대관계는 이 들 양자의 본질적인 면에서보다는 이 들 양자의 변질된 모습을 서로 공격하는데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장공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두 사상체계 사이에는 분명히 몰이해가 존재하며 이러한 몰이해가 양자를 적대관계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이 이론 방면보다도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沒理解한 敵對行動을 취하여 神을 冒瀆하며 聖域을 蹂躪하고 신자를 冒瀆殺害하여 悖倫의 道를 敢行하는 등 심히 불쾌한 인상을 남긴 것이 그 가장 큰 원인인줄 안다.”
장공이 공산주의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문을 쓴 것은 장준하가 내고 있던 1953년도 8월 호 사상계(思想界)에 실린 “공산주의론”(共産主義論)이라는 글이다. 이 때는 한국전쟁이 마지막 단계에 와 있었고 이론 인해서 그는 어느 정도 객관적이고 냉철한 생각을 가지기 어려운 때의 글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이 글에서 아놀드 토인비와 사회학자 소로킨(Sorokin)의 이론을 들어서 서양문명의 발달사를 개괄하고 나서 서구 문화의 세기말적 상황에 등장한 공산주의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장공의 개인적 신념에서 나왔을 수도 있으나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 특히 소련의 스탈린 통치하에서의 종교박해 등을 두고 쓴 서구 신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의 문화사적 위치”(文化史的 位置)라는 항목에서 그것의 출현과 함께 그것의 내용과 성격을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현대문명의 死前에 생긴 최종의 발악으로서 자기몰락을 재촉하는 것이요 결코 새 시대 창건의 역군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단언한다.... 전투적 무신론, 절대 현세적 과학만능 신봉, 유물적 인생관의 강화, 힘의 철학의 무자비한 응용, 철저한 전쟁윤리, 도덕의 상대성 등을 거쳐 광신적이라 할 만치 신봉하고 있다.”
그가 1945년의 비교적 냉철하고 객관적이었던 입장과는 달리 이렇게 공산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은 그 동안의 서구 공산주의의 전개행태와 함께 한국전쟁의 경험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동서 냉전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이었던 것으로 그 이후 양대 진영의 이데올로기적 선동선전과 무력을 통한 상호 침투에 적지 않은 상승이 있었다. 이러한 제반 사실들을 경험한 장공은 한국전쟁과 그 비극을 통해서 경험적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특히 공산주의가 과거의 자본주의적 잔재들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방법과 수단들을 동원한 것도 문제삼고 있다. 이러한 방법과 수단들이 결국 인간성을 무시하고 인간에게서 가장 고귀한 바유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일본, 인도 영국 등에서 아직도 공산주의에 대하여 어느 정도 동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감상적’인 작난을 즐기는 것이다. ‘恐怖’와 ‘肅淸’과 전연 ‘자유가 거부된’ 그들 밑에서 자유인으로 어찌어찌 살기를 바라는 것은 妄想이다. 우리가 만일 ‘人間’이라는 의식이 있다면 무엇을 운위하기 전에 벌써 ‘질식’해 보리지 않을 수 없는 고장이 그들의 ‘우산밑’(傘下)인 까닭이다.”
또 장공은 공산주의의 “장점” 그 자체도 비판하고 있다. 우선 공산주의의 장점으로서 들 수 있는 것은 1)노동자 농민 편에 서는 것, 2)급속도로 제반시절을 정비한다는 것, 즉 건설능력이 강하다는 것, 3) 일관된 목표로 생활을 지도한다는 것, 4)이민족간에 형제애가 더 강하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2)항의 건설능력이 강하다는 것은 그 건설의 목표를 물질적 성과에만 두고 “인간성의 건설”이라고 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장공의 비판이다. 이런 문제는 구 소련에서도 문제가 되었었다. 말하자면 당시 소련에서는 혁명을 통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매진하는 과정에서 인간 자체의 본성이 문제된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즉 “공산주의적 인간을 위한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 역시 장공의 “자유를 지향하는 인격성”이라는 준거에서 비판되고 있다. 그리고 3)항의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생활을 지도하는 것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제적 연대성” 즉 공산주의가 제시하고 피압박자들의 해방,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 같은 이념하의 국제적 연대성, 경제정의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들이 실천되지 않고 일종의 과도한 선전물로 전락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장공이 사회주의에 대해서 특별히 비판적인 것은 그것이 가진 이런 경제정책이나 사회정책이라고 하는 이론적 문제보다는 그것이 가진 “공산주의의 종교화”(共産主義의 宗敎化)다. 장공은 공산주의 철학이 가진 메시아주의의 고양(高揚), 공산주의 사상의 절대화(絶對化), 그들의 사상서의 경전화(經典化), 레닌묘의 참배(參拜), 지도자의 신격화(神格化) 등을 사실상 가장 문제삼고 있다.
장공은 1966년 8월 “空軍”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基督敎와 共産主義의 理論的 對決”이란 글에서 세계적인 신학자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평가를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스위스의 신학자 에밀부른너(Emil Brunner)의 전체주의 이론(全體主義 理論)을 소개한다. 말하자면 공산주의는 전체주의로서 자기를 절대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전체성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전체주의는 독재주의로서 개인의 자유와 인격성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전체주의는 국가주의와 결합함으로써 개인을 국가목표의 한 부품에 지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의견을 결론부에 가서 이렇게 적고 마감한다.
“이제 시대는 다시 일전하고 있다. 이른바 후기 공산주의 시대로 轉入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종교적인 후광은 날로 消散되고 있으며 후루시쵸프는 이후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보다도 ‘국가이익’(내셔날 인트레스)에 좌우되고 있다. 공산진영의 양 대국인 소련과 중공의 대립은 ‘이데올로기’의 차이도 있지만 그보다도 국가적 이익의 상반에서 오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세계혁명, 새 세기의 탄생을 위한 메시아적 정열보다도 자유민 생활향상의 도구 또는 방편으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미래세기는 역시 기독교적 인간혁명에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장공은 공산주의를 사회적 정치적 면에서보다는 신학적 측면에서 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기독교
장공은 이렇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가 가진 장점들과 문제점들을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면에서 그리고 기독교 신학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나서면서 그 대안으로서의 기독교의 역할을 들고 나온다.
우선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나 근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들의 뿌리들은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로서 “자유”를 지향했던 두 개의 역사적 전통들 즉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에 있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민주주의는 각개 인간의 인격적 존엄을 살린다는데 그 근본주의를 두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한다’는 것을 국각, 사회 모든 생활의 근본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빈주, 귀천, 남녀, 유무식을 막론하고 그 모든 차등을 초월한 인간성 자체의 새로운 평가를 주장하는 운동인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 역사에 있어서는 ‘예언자’들의 피압박자들에 대한 公義와 仁愛를 부르짖은 불타는 예언으로 나타났으며 ‘나는 죄인과 세리의 인구’라는 그리스도의 선언, 그리고 헬라사상에 있어서는 고정문화와 온갖 ‘자유’를 위한 투쟁, 인도주의, 이상향의 동경 등 다채로운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항상 독재전인 귀족정치에 참패를 당하기는 하였으나 기독교 사회운동과 아울러 꾸준히 인유역사의 가장 줄기차고 생명적 上昇 세력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공산주의도 사실은 이 이름과 전통을 차용하였다... 그러므로 ‘역사가 비록 곡절은 있었다 할지라도 더디나 오히려 확실하게 민주주의 정신의 體現을 지향하고 진행한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다’고 프랭클린 폴은 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민주주의나 공산주의는 인간의 역사과정에서 출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完成品”이 아니며 따라서 그 어느 것도 자기를 “절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이데올로기들 특히 “공산주의” 과도한 선전을 통해서 자신을 절대화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 장공의 생각이다.
“공산주의는 자기를 완전무결한 ‘완성품’으로 자처하여 겸허한 자기반성의 기회를 거부하므로 自己 閉塞과 함께 자기몰락의 준비를 진행하고 있으나 민주주의는 자기를 결코 완성품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생장할 여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에 대한 비교는 장공이 과도하게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를 동일시 한 것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민주주의 한 형태로서 “자유민주주의”도 오늘날에 와서는 매우 이데올로기화되어 있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자유는 약한 사람들의 정의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는 어떤 절대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은 본성상 자유를 추구하고 있지만 동시에 정의도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자유라는 것도 정의와 상호성에서만 그 본래의 의미가 드러나고 그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장공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전체주의 사회의 도전에 직면하여서 민주주의는 늘상 자기반성의 기회로 사용하며 이를 파악하여 자기의 과오를 시정하여 간다”고 말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상대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장공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의 “상대성”(Relativity)에서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가 그것들에게 개입하고 또 역할을 찾을 수 것으로 본다. 필자가 보기에는 기독교가 이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입은 곧 “宗敎의 이데올로기 批判”(Ideologiekritik der Religion)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의 “종교비판”(Religionskritik)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는 후자가 전자를 비판함으로써 출발했었다. 마르크스는 당시의 기독교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했었다. 이것은 당시나 오늘이나 기독교가 갖고 있는 악습 즉 일반 대중들을 왜곡된 허상으로 현혹하고 헛된 희망을 제공했던 것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장공에 의하면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이나 사회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도 그것이 자기를 “완성품”으로 이해하고 고정된 사상과 체제 내에 안주하면서 외부와 내부로부터 오는 비판들을 차단하는 기성품이 될 때 거기에는 당연히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대적인 것이 절대화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종교건 이데올로기건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우상숭배가 정신적인 것이든지 물질적인 것이든지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예화하게 된다는 것이 장공의 생각이다.
장공의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 그가 어디에서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지만 - 개혁교 전통의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과 “그리스도의 왕권통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장공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모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각기 장점들과 모순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정확히 인식했고,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존하는 이데올로기적 체제들을 기독교적 특히 개혁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하려고 했다. 그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영합하거나 무조건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서 그리스도인의 과제를 구하려고 했다.
이런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한 대표적인 신학자는 체코의 신학자 로마드카이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왕권통치라고 하는 개혁교 전통에 서서 모든 이데올로기의 절대화와 우상화를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회주의권의 신학자로서 특히 자본주의를 비판했는데 자본주의는 자유의 이름으로 인간을 무한 경쟁으로 몰아가고 시장경제라는 맘몬의 원리를 통해서 신의 질서에 반하는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의 선구자는 나치 하에서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고 그 화신인 히틀러를 우상화하는 “독일적 기독교인들”(Deutsche Christen)과 대항해서 투쟁했던 선구자는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신적인 것 즉 궁극적인 것 이전의 궁극이전의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이전의 것들은 궁극적인 것이 올 때는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그의 논문 “동서 사이에서 교회”(KIrche in Ost und West)라는 글에서 교회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자기를 일치시킬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주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기서 그는 서구 자본주의 세계의 교회들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마치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장공도 신학적으로는 개혁교 전통에 서서 이데올로기를 상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칼 바르트의 사상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공은 다른 한편 어떤 이론적 관계에서보다는 실천적 관계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수렴되어 간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수렴의 근원은 개개 국가들의 국가이익이라고 실용적 목적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나 이제는 어떤 신념을 위한 투쟁의 강도는 약화되고 실익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물질적 토대구축, 즉 자국민들의 생활향상이라는 도구가 목적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이라고 하는 종말론적 지평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사라지고 국민생활의 물질적 향상이라는 하나의 자본주의적 욕구충족이 모든 이상적인 것을 대치해 버렸다는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고 혁명성을 상실하고 현실정치에 기울어지면서 이전에 자본주의와 가졌던 극심한 대립과 적대주의가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세계에서도 “실용주의적 현실주의”(pragmatic realism)가 “미래지향적 이상주의”를 대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가이익을 지향하는 실용주의는 사실상 자본주의의 위장된 전술이었고 사회주의는 여기에 말려 들어감으로써 처음의 의지와 생동감을 상실하고 몰락의 길을 간 것이라고 보여진다.
마치면서 한마디
오늘날 소련과 동구라파의 공산주의가 와해되고 미국을 초극으로 하는 단일지배체제 즉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장공이 살아 계시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쓰셨을까? 그는 아마도 이렇게 쓰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최상의 선은 반드시 ‘자유’를 포함한다.”라고 말했지만(장공 김재준 전집 2, 285쪽) “나는 지금은 ‘최상의 선은 자유와 함께 정의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구약의 시편기자는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춘다.“고 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유와 정의가 입 맞춘다.”
2001년 11월 장공100주년 기념논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