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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15 10:01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표제어 “성서만으로”
글쓴이 : 손규태


     들어가는 말

내년 2017년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성채교회의 정문에 95개조의 논쟁문서를 계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시작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대결하면서 1520년에 3개의 이른바 종교개혁문서를 발표했다. 그것들은 독일 기독교 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교회의 바빌론 포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자유라는 논문들이다. 필자는 이 세 개의 종교개혁문서들을 바탕으로 3회에 걸쳐 루터가 생각했던 종교개혁의 방향들과 목표들을 오늘날 세계와 교회의 현실에서 비추어 재해석함으로써 교회와 세계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성서냐 교리냐?

 

19세기말 유럽 교리사학계에서는 초대교회 500여년의 역사를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로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났었다. 바울이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헬레니즘화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를 주창한 대표적 학자는 독일의 교리사가 아돌프 폰 하르나크(Adolf von Harnach)였다. 그는 불후의 명작 교리역사 연구 I”에서 초대교회와 가톨릭교회의 교리형성과정을 복음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그리스 정신의 작품이라고 규정했다. 하르나크에 의하면 초대교회의 교리형성은 예수의 순수한 복음과 초대교회 신학자들에게 스며든 그리스정신 사이에서 생겨난 대칭의 역사라고 했다. 여기서 이른바 복음의 헬레니즘화는 곧 기독교의 타락이론혹은 변질이론이라는 논리가 등장한다. 기독교 복음이 그리스 사상의 구성요소들과 혼합됨으로써 왜곡되었다는 말이다.

초대교회의 그리스교부들이나 라틴교부들의 신학사상에서 교리 형성적 요소들이 다소 발견되지만 교회가 교리를 공적으로 형성한 것은 325년 니케아공의회의 의결을 거쳤던 그리스도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니케아 공의회를 필두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하는 일곱 개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에서 주요교리들 즉 그리스도론, 거기에다 성령의 위상을 규정하는 삼위일체론, 예수의 어머니의 위상을 규정하는 마리아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상을 둘러싼 논쟁 등 중요한 교리들이 결정되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교리형성 작업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그리스도론, 삼위일체론 등은 당시 그리스철학 그 중에서도 플라톤의 이원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기초한 매우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 작업의 산물들이다. 그리스 사상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 대교구의 신학자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했는데 그 중 가현설을 주장했던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를 당했었다. 가톨릭교회 등 공교회들이 주로 예배에서 고백하는 니케아신조에서 그리스도론에 관한 핵심내용인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느님으로부터 나셨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하느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하느님이시다. 그는 피조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셨다.”라는 내용은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질료와 형상이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 후 중세에 와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8백여년 동안 13회의 공의회들을 통해서 교회의 제도와 교리의 문제들을 처리했었다. 1123년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제1차 십자군 파견이 결정되었고 동시에 세속적 권력(황제)이 성직자를 안수할 것인가 아니면 성직자(교황)가 세속적 권력(황제)을 안수하여 임명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교황청과 황제들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이것이 이른바 서임식 논쟁(Investiturstreit)이다. 이 문제는 세속적 권력과 영적 권력 사이의 권력투쟁으로서 어느 일방의 승리가 불가능했으므로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077년 교황 그레고리 7세에 의해서 파문당한 독일 왕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 성문 앞에서 3일 동안 눈을 맞으며 무릎을 꿇고 참회하자, 교황이 파문을 거두는 것을 계기로 교회권력이 세속권력 위에 군림하는 일도 있었다.

1179년 제2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교황중심에서 성서중심으로 돌아갈 것을 내걸고 개혁을 시도했던 왈두스와 그의 공동체인 발덴시안교회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 공동체는 지금까지도 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나의 독특한 개신교회로서 활동하고 있다. 1215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가 성직자의 축복을 통해서 실제로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이 교리로 정해졌다.

1274년 리용의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나온다는 필리오케(Filioque)교리가 확정되었다. 이 교리와 함께 교황무오설로 인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오늘날까지도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 1414년 콘스탄츠에서 열렸던 공의회는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의 성서중심의 개혁운동에 영향을 받고 개혁운동을 전개하던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했다. 1545-1563년 종교개혁의 마지막 단계에서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루터와 종교개혁의 원리들 특히 은총만으로, 성서만으로란 명제를 거부하고 반종교개혁을 선포했다. 1869-1870년 베1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황의 무오설과 사법적 수장권까지 승인했고, 1962년 개혁적인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서 주관되었던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평신도 사제직과 다른 종교들 특히 개신교회와의 대화문제와 함께 오늘날의 세계문제들 특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문제 및 노동자들의 권리 등에 관한 것들이 다루어졌었다.

이러한 교회의 교리화 과정은 비단 초대교회나 중세기 가톨릭교회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 안에서도 교리화 문제가 급속하게 등장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회들은 가톨릭교회의 교리적 족쇄에서 풀려났지만 개혁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신학적 신앙적 방향들과 흐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루터 생전에도 개신교 안에서 분열의 조짐들이 있었으나 그가 죽고 나자 루터교회 안에서는 필립 멜랑히톤을 추종하는 필립파와 마티아스 플라시우스를 추종하는 그네시오 루터파로 갈라졌다. 인문주의교육을 받았던 멜랑히톤은 신인협동설적 경향의 구원론과 그리스도의 영을 부어주심을 강조하는 칼뱅에게 기울어진 성만찬이해로 정통파인 마티아스파와 대립했었다. 이러한 루터파 안에서의 다양한 방향들과 갈등들을 조정하기 위해 1577년 루터교회 총회는 협화신조”(Formula Concordiae)라는 표준교리서를 만들었다. 이 신조는 필립파에 유리하게 만들어졌었기 때문에 마티아스파들은 불만을 품고 있어서 교회 안에서 화합과 평화를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종교개혁 교회들 안에서의 다양한 신학적 방향들의 대립들은 주로 1530년대부터 156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 루터교회, 개혁교회(장로교), 성공회 등 주요개신교회들의 교리서(신조)들의 채택을 통해서 일단락되었다. 교회사에서 이 시기를 신앙고백서들 즉 신조들의 형성기로 본다. 이러한 교리서(신조)들은 개신교회들 안에서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정통파들이나 온건파들 사이를 조정하고 교회 안에서의 평화를 지키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교황의 강력한 단일체제의 통제권을 갖지 못하고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주창했던 개신교회들은 이후에도 교리적 갈등과 그 결과로서 수많은 교파들이 출현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의 역사는 구교나 신교에서나 교리형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이러한 교리형성은 성서의 말씀에 기초해서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성서의 말씀에 반해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른 한편 이러한 교리형성의 역사는 교회의 성직자계급제도와 함께 교권의 강화를 가져왔고 따라서 교회가 복음으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여기서 성서와 교리 사이를 문제 삼는 것은 교리형성이 성서의 말씀보다는 교회의 교권과 제도들 그리고 관습들에 의해서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문서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서 성례전의 문제들

 

루터는 그의 종교개혁문서 가운데 하나인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서 가톨릭교회가 예전들을 성서에 근거하지 않고 만들어 내거나 해석하는 것과 함께 여기에 수반되는 왜곡된 교리화를 비판하고 있다.

첫째 가톨릭교회는 성서에 나타난 세례와 성만찬 외에 다섯 개의 성사들, 즉 교회가 임의로 교리화한 견신례, 혼례, 서품, 종도식, 고해성사 등을 루터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성직자의 서품(안수)을 폐기할 수 없는 질서(ordo)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은 단시 성직수행을 위한 축복행위(Segen)로 보았다. 그래서 루터교회에서는 목사가 새로운 교회에서 성직을 맡아 취임할 때마다 축복행위로서 안수식을 거행한다.

둘째 마르틴 루터는 토머스의 스콜주의신학에 근거하여 성직자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부정하고 그 물체들 안에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실제로 내재한다는 실재설을 주장한다.

셋째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1215년 이래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 안에 동시에 내재한다는 동반교리((concomitantia)를 내세워 평신도들에게는 잔을 금하고 빵만 나누어 주던 것을 비판한다. 루터에 의하면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두 빵과 함께 잔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고전11:23-27).

넷째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미사가 희생과 공로로 이해되는 잘못된 예배이해를 비판한다.

다섯째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교리화한 사제가 성례전을 집행하기만 효력을 낳는다.”(ex opere operato)는 교리를 반박한다. 루터는 무자격의 성직자가 집행하는 성만찬이나, 신자가 신앙 없이 받아들이는 성만찬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루터는 여기서 성서만이라는 철저한 입장에서 가톨릭교회의 자의적 성례전 제정과 해석 그리고 실천적 관행들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성서만이라는 루터의 개혁원리의 기원은 어디에서 발견되었는가? 앞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루터 이전의 선배개혁자들, 12세기 이탈리아의 발두스,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1320-1384) 그리고 보헤미아(자금의 체코)의 얀 후스(1369-1415) 등 교회개혁자들은 그들의 개혁운동에서 하나같이 성서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고 가톨릭교회가 교리화하여 수행하던 영혼미사,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의 불, 면죄부판매, 무자격 성직자의 성사집행 등을 강력하게 부인했었다 이렇게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개혁을 추동했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교리나 제도와 관습 같은 가톨릭교회의 병폐를 타파하고 성서의 말씀으로 돌아올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은 곧 성서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

 

한국의 개신교회의 성서와 교리의 갈등

 

한국교회는 다른 어느 나라들의 교회들 보다 성서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성서반포를 전도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사경회를 통해서 기독교의 핵심내용인 성서를 익힘으로써 신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중심내용을 담고 있는 성서를 사랑하고 공부하는 한국교회의 전통은 매우 귀중한 유산이며 앞으로도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기독교의 이러한 성서중심의 신앙생활의 전통은 점차 사라지고 교리로 인한 갈등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현재 300개 넘는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교리와 교권에 의한 분열의 배후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배타적 교리주와 교권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개신교 정통주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특정한 교리체제 축자영감설과 같은 성서의 특정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배타적 교리형성 때문이다. 이런 초기 선교사들의 극단적 정통주의전통을 물려받았던 받은 한국의 장로교회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번째 분열은 일제의 식민지시대에 강요되었던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보고 결사 저항했던 옥중성도들과 거기에 굴복하고 타협했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이었다. 여기에서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신사참배에 타협한 그리스도인들의 통렬한 참회와 그들에 대한 옥중성도들의 관용과 용서의 장이 마련되지 못한 점이다. 그러한 화해와 용서의 장이 만들어졌더라면 민족해방의 기쁨과 함께 분열되었던 형제들 사이에서 용서와 화합의 축제의 장이 마련되고 벌어지고 비극적 분열이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장로교회의 분열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 한가운데서 교리문제로 충돌하면서 진행되었다. 이 분열의 배후에는 지방색과 신학교문제 그리고 선교사들의 지원 등이 있었지만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성서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축자영감설과 거기에 근거한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박형용계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비판하면서 성서비판학을 도입했던 김재준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전면에 나섰었다, 미국에서 정통적 신학교육을 받았던 박형용목사는 성서의 글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직접적 영감으로 씌어졌다는 성서무오설을 주장했다. 일본과 미국유학에서 서구의 발전된 성서해석방법들을 접했던 김재준목사는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비판하고 성서비판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했었다. 이리하여 한국장로교회에서도 성서무오설과 성서비판학 사이의 교리적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서무오설과 성서비판학을 둘러싼 싸움은 교리적 충돌에서 교회 정치적 충돌로 이어지고 마침내 1953년 대구에서 모인 제38회 장로회총회에서 김재준목사가 파문당했다. 이에 김재준목사를 따르던 세력은 1954년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출범시킨다. 이것이 대한예수교 장로교회와 한국기독교 장로교회의 분열이었다. 그 후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다시 통합과 합동을 분열되었고 이어서 수많은 분열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약 300여개의 교단들로 분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거듭되는 분열은 다른 원인들도 있지만 그 핵심에는 정통교리의 수호라는 매우 비성서적이고 배타적인 요소인 리적 측면이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한국교회에서도 복음은 화평하게 하고 교리는 분열시킨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결론: ‘성서만으로원리에 따른 루터의 성서해석방법

 

루터의 종교개혁이 결실을 거두고 루터교회가 성립되기 시작하던 1520년대 말 1530년대 초 루터의 진영에서도 다양한 신학적 방향이 등장한다. 그 중에 루터가 직접 경험하고 강력하게 대처했던 문제는 동료였던 요한 아그리콜라의 반율법주의 설교였었다. 아그리콜라에 의하면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발하고 요구하는 율법설교를 통해서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총의 복음 설교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죄를 고발하는 율법설교는 더 이상 필요없다고 했다. 아그리콜라의 주장을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을 그리스도인으로 안내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채찍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당근이라는 복음을 통해서 가능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들에게는 따라서 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복음 설교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른바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s)로 규정하고 그들을 반박하는 글을 1539년에 출간한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해주시려고 율법에 끝마침이 되셨습니다.”(1:4)는 말씀을 오해하고 이전 시대의 마르시온처럼 율법과 예언서들 즉 구약성서를 부정한 것이다. 루터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으로서의 성서는 요구하는 율법과 허락하는 복음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배제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한 말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되 함께 설교하는 것이 루터가 말하는 성서만으로종교 개혁적 원리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미 1515년 바울의 갈라디아서 강해와 1520선행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으로서의 율법과 복음의 관계규정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었다. 루터는 구약성서의 총체인 율법과 신약성서의 총체인 복음을 긴밀한 상관관계에서 해석함으로써만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를 율법과 복음의 구별”(Unterscheidung=Distinction))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을 올바로 구별하는 법을 아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신이 진정한 신학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기술(복음과 율법의 구별)을 아는 사람은 참된 신학자라 불릴 자격이 있다.” 따라서 루터신학에서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를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그의 성서해석과 이해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의 해석학을 루터신학의 몇 가지 주제와 관련해서 실례를 들어서 고찰해보자.

첫째, 루터는 의인론(義認論)에서 인간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사건이지만, 먼저 율법이 죄를 고발함으로써 인간이 전정으로 개회할 때만 복음을 찾게 되고 복음을 만나게 되며 이 때 비로소 의로움으로 인정받게 된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아도 완전히 무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죄의 지배하에 있어서 율법의 계속적 고발과 회개를 필요로 하는 인간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루터는 1515년 로마서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주시는데 그런 사람은 복이 있다.”(4:7)를 강해하면서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감싸 주신다로 이해하여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도 동시에 죄인이다”(simul iustus et peccator)라는 말로 해석하고 있다. “죄를 덮어주신다”(imputatio)는 것은 죄를 없이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는 죄를 보자기 같은 것으로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해주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일지라도 은혜의 복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의 고발과 징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태5:17-19). 말하자면 인간은 의롭다 인정받아도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은 필요하며 따라서 율법이 율법구실을 할 때만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이 제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적절한 구별과 사용을 그의 설교이론에서도 제시한다. 루터에 의하면 율법 없는 설교나 복음 없는 설교는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을 부분적으로, 단편적으로 만들어서 신자들이 온전한 회개와 온전한 은총을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루터 시대의 반율법주의자들처럼 근대서구에서는 부르주아 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난 자유주의 신학에서 인간에 대한 긍정적 낙관주의가 복음위주의 설교로 나타났었다. 근래 미국의 자본주의와 결탁한 일부 교회의 적극적 사고를 주장하는 교회성장론자들이 축복위주의 복음 설교만을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율법을 배제한 복음위주의 설교는 70년대 미국의 교회성장론을 받아들여 순수 복음만을 설교하는 순복음교회의 이른바 ‘3박자 축복이론을 필두로 시작되었다. 그 후 여기에 영합하는 장로교회 등 개신교회의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축복설교가 나타난다. 그들은 설교에서 말끝마다 율법의 고발과 신자들의 회개를 배제한 채 축복만을 외쳐대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싼 은혜”(본회퍼) 즉 싸구려 상품으로 만들어 방출한다. 그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참회와 죄책이나 아무런 실천훈련도 없이 복음을 싼 값에 받아들이고 따라서 잘못된 안심에 사로잡힌 태만한 신자들로 만든다. 그 결과 근래의 한국개신교회와 신자들은 가장 무절제하고 부도덕하며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있다. 루터가 말한 대로 이들 복음 설교자들, 즉 반율법주의자들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워 인간의 영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고 사람의 골수까지를 쪼개는 양날(율법과 복음)의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4:12)을 설교에서 꿀같이 단 만담”(토머스 뮌처)으로 변질시킨다. 그리스도의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주시는 값비싼 은총을 싸구려로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셋째 루터는 율법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의 상관관계의 문제를 그의 교육론에도 적용하고 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도 자녀교육에서 회초리와 당근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녀를 교육할 때 당근(복음)만 주면 무절제하고 방종에 떨어지며 또 회초리(복음)만 사용하면 좌절에 빠져 매사에 용기를 잃고 삶을 제대로 발전시켜나갈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어린이 교육에서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조화롭게 사용해야만 그들이 자기를 절제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 과거에 아버지의 엄한 훈계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들을 버릇없고 무절제한 홀래자식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율법 없이 복음만으로 교육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에게 기죽이지 않는 교육, 이른바 율법(채찍) 없는 교육을 장려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그 결과 한국의 다수의 어린이들은 요즘 주의력결핍장애와 과다행동장애(ADHD)에 걸려있고, 청소년들은 무절제하고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다. 독일의 의사이면서 교육학자인 요한네스 하레(Johannes Haarer)는 그의 책 독일의 어머니들과 첫 아이에서 버릇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채찍 사용의 필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어린이가 떼를 쓸 때 안아주고, 흔들어 대며, 무릎에 앉히고 달래는 일을 시작하지 마세요. ‘냉정하게빈 방으로 데려가 혼자 있게 내버려 두어 관심을 표하지 말아서 그런 태도를 어려서 고치도록 하세요. 그래야 절제되고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하레박사의 어린이 교육이론은 너무 권위주의적이라고 율법주의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독일의 어머니들은 그의 이론을 따라서 어린이들을 절제 있는 인간으로 가르친다.

최근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으로 문제에 휘말린 최태민의 딸 박순실과 그녀의 딸의 오만방자한 생활태도는 채찍(율법) 없는 교육이 얼마나 인간들을 파괴하고 사회에 부담을 주는 가를 잘 보여준다. 전철 같은 곳에서 핸드폰에 집중하면서 옆에 서있는 노인들을 무시한다단지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이나 자동차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핸드폰에 몰두하면 걸어다니는 태도도 율법 없는 교육의 한 단면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채찍 없는 교육의 결과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인간들을 대량생산하고 있다. 그 결과가 자기절제와 타인에 대한 배려와 더불어 공동체성을 함양하여 복지국가로 나가야 하는 우리 사회의 장래를 가로막는다.

따라서 마르틴 루터가 제시한 성서만으로라는 종교개혁의 표제어는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통해 성서무오설을 내세워 성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성서주의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성서 안에 뒤섞여 있는 문화적 관습적 표현들이나 오늘날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잡다한 요소들을 구별해내되 율법과 복음을 적절히 구별해서 사용함으로써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발견하고 우리 삶 가운데서 실천함으로써 온전한 그리스도인들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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