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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0-25 09:49
루터의 삶과 사상
글쓴이 : 손규태

I. 루터의 인물됨

   역사가나 신학자들 가운데서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인류 정신사에 끼친 영향은 지극히 큰 것이어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서 서구의 역사 특히 정신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종교에서 뿐만 아닐 서구의 사상과 삶 전체를 근본적으로 개혁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개인의 책임성과 병행해서 사상의 자유를 성취한 해방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바빌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은은 실상 당시 유럽인들의 삶 자체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의 삶은 종교로부터 해방되어 독자적으로 영위되던 부분이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을 통해서 그가 주장한 내용들이 대다수 국민들의 보편적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인 루터교회의 창시자로 받들어질 뿐만 아니라 전체 프로테스탄트 교회나 신학에서는 언제나 문제에 직면하면 그에게서 어떤 암시와 해답을 기대하고 또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재능과 용기 앞에서는 경탄할 뿐이며 또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대한 진리를 재발견하고 선포한데 대해서는 감사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단지 학문적 재능만을 가졌었다면 결코 그가 당시 가톨릭교회라고 하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제도화되고 전통으로 권위를 갖춘 커다란 세력과 홀로 대결할 수 없었을 것은 자명하다. 반면에 그가 단지 두려움 없는 용기만을 가졌었다면 초대 교부들을 거쳐 중세, 아우구스티누스 및 아퀴나스의 토머스 등에서 완성된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체제 앞에서 아무런 자기표현도 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위대한 인물들에 대한 반이성적 숭배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라 하겠다. 한 인격에 대한 통전적 이해는 그의 전기나 사상만으로도 불가능하고 이들을 종합적으로 동시에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는 루터를 종교개혁의 시조로서 95개항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문교회에 부친 것을 기억하거나 또는 내 주는 강한 성이다라는 찬송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루터를 이해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선 그의 글을 본격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그의 전집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이마르 판(Weimar Ausgabe) 전집을 읽어야 한다. 이 책들을 읽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고전 독일어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많은 어학적 훈련을 필요로 한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루터의 글들은 대부분이 조직적으로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필요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큰 장애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나 해석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상존하며 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 점에서 루터는 체계적으로 글을 쓴 칼빈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루터를 종교개혁의 설교자로 보고 칼빈을 조직신학자로 보아 구별짖는 종래의 견해에서는 취할 점도 있으나 마땅히 시정될 점도 있다. 그 까닭은 루터는 칼빈과 같이 체계화된 조직신학을 쓰지 않았으나 그의 글들은 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또 칼빈은 루터 못지않게 많은 설교와 성서강해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 연구가들은 루터의 초기 사상과 후기 사상 사시의 큰 차이가 있음에 착안하여 그 차이점의 명백한 해명에 집중한 적이 있으며 이러한 논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노력들은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거기서 얻어진 결론들은 신학의 체계화에서 빚어지는 자의성도 커다란 장애라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루터연구의 새로운 매력들이 들어나기도 한다. 루터에게서 조직적 사변적 신학체계를 찾으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문제를 끌어안고 고투하며 씨름하는 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배워야 한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의미를 찾는 인간은 언제나 해결된 대답 자체가 아니라 해결하려는 인간의 모습에서 깊은 뜻을 얻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루터의 보습을 그의 신학적 사상을 통하여 살피고자 한다.

 

2. 루터의 생애

마르틴 루터는 14831110일 독일 아이스레벤(Eisleben)의 한 광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전형적인 중세적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보존해 왔으며 따라서 교회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나 또는 특별히 온화한 생활양식 속에서 성장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환경은 만스펠트(Mansfeld)의 시립학교 시절(1488-97)이 끝나고 막테부르크(Magdeburg)의 교회학교에서 1년 동안 교육을 받기 위해 보내졌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후기 중세의 신앙에 의한 각성을 통해 순수한 가톨릭의 신앙세계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인상은 1498년에 그의 부모에 의해서 아이제나하(Eisnach)에 있는 명문출신의 학교에 보내지기 까지 계속되었다.

1501년 루터는 유명론(Nominalismus)이 지배하던 엘푸르트(Erfurt) 대학으로 가서 공부했다. 거기서 그는 주로 고전어 문법,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기초적인 자연과학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공부했다. 거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평 및 그것을 교회의 교리와 조화시키려 했던 아퀴나스의 토머스의 신학을 공부했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개 학설들, 특히 그의 논리학과 윤리학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매우 고차적 단계에 까지 도달했었다. 1505년 문학사가 된 그는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서 법률을 공부하기로 하고 자기의 진로를 바꿀 했는데 곧이어 그의 미래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바로 엘푸르트 근처 스토테른하임에서 150572일 심한 폭풍우 속에서 그가 불안에 휩싸여서 걸인들의 성자인 성 안나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동시에 그 조건으로 수도원에 들어가겠다는 서약을 했다. 이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유쾌하고 음악을 사랑하는그에게 죄의 고통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근심이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으며 그는 급기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한다는 의식이 그를 사로잡았고 가톨릭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장 거룩한 생활양식에로의 초청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해 717d일 엘푸르트에 있는 가장 엄격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자기 뜻을 거역하는 루터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을 굽힐 수는 없었다. 수련기간 동안 루터는 그에게 주어진 규율들을 철저히 지켜나갔고 또 걸식행각을 병행했으며 참회시간에는 철저하게 자신을 해부해나갔다. 그는 1506년에 정식으로 선서를 마친 수도사가 되었고 그의 철저한 자기훈련 덕분에 그는 1507227일 정식으로 신부가 되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옥캄(William Occam)의 신학을 통해 계시론 및 하나님의 자유에 중심을 둔 그의 신학을 공부했으며 페터 롬바르트(Peter Lombardt)등을 공부했고 신학공부의 일차적 단계를 마치기도 전에 그곳의 보좌신부의 책임자인 스타우피츠(Staupitz)에 의해 비텐베르크대학에서 도덕철학 강의를 맞게 된다. 그해 가을에는 엘푸르트에서 롬바르트에 강의를 맡아달라는 초청장을 받기도 한다. 거기에서 그는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스스로 두려움을 금할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성서에 전승된 개개 면모에서 통일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두 가지 면모 즉 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이 그를 신학적으로 깊은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가장 내적인 경험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으나 숨겨두고 있을 수 없는 그의 삶의 문제, 즉 성서의 가장 대표적 문제인 율법과 복음의 문제로 몰아넣었다.

그는 1512년 이제까지 슈트우피츠가 맡고 있던 성서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일생의 과업이 되었다. 그는 1513-15년까지 시편강해, 1515년 부활절부터 15169월까지 로마서 강해, 15174월부터 15183월까지 갈라디아서 강해를 했다. 그는 이러한 여구를 통해서 마침내 15171030일 종교개혁의 역사적 선언의 신학적 근거를 확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의 요인 중에는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요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문제들에 관해서는 다수의 책들이 우리 나라에도 출판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3. 루터의 내적 투쟁과 신학형성

  우리가 루터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갈등(Konflikt)의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앙은 언제나 시련이다”(Der Glaube ist immer die Anfechtung)라고 한 신학자 틸리케의 말은 루터의 신학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대부분의개혁이나 혁명운동이 예외 없이 현실비판에서 출발하듯이 루터신학의 출발점은 역시 거의 규범화된 중세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에 대한 회의와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그의 이름인 마르틴(Martin)이라는 말 歷戰鬪士라는 뜻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루터연구가들은 루터가 이러한 사고의 틀을 갖게 된 것은 대체로 그의 청년시절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그는 성격적으로 보아 우울하다기 보다 종교적 정서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담화나 유머를 즐겨 사용하였고 음악에 풍부한 취미를 가졌으며, 자연을 사랑하였다. 소위 르네상스 문화에 물든 청년이라기보다 오히려 소박한 시골 타입의 학도라고 함이 거에게는 더욱 어울리는 수식어일 것이다.”

소박성은 종교성과도 통한다. 그러나 이 소박성은 동시에 쾌활하고 구김 없는 성격과도 통한다. 루터에게는 이러한 열정적이고 파토스적인 면과 동시에 이성적이고 현실 긍정적 면이 그 속에서 균형을 빚어 왔었다. 그는 깊은 회의 속에 빠지는가 하면, 드높은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한다. 그래서 소위 현대 심층심리학적 측면에서 그를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평한 사람들까지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는 질서 잡힌 고착된 세계의 무거운 지반을 뚫고 나온 일종의 갈등의 인간 혹은 투쟁의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대항해서 법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 것과 비유되지 않는가?(3:1-6; 12:9-14). 그러나 우리가 루터를 갈등의 인간이라고 말할 때 심리학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어떤 성격이나 심리상태에서 균형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전체 환경에 대해서 보다 새로운 이해를 위한 투쟁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 혁명 숭배자는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과정에서 다소 미온적인 인간이었다고 당시 열광주의자들(Schwärmer)은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루터의 그런 입장은 농민반란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칼빈은 (개혁과정에서) 목욕물과 함께 어린이도 버렸으나 루터는 단지 목욕물만을 버렸다는 그에 대한 평가는 개혁운동에서 얼마나 자기를 자제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전통에 대해 반기를 들려고 했지 그 전통 자체를 부정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루터교의 예배의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루터는 전통의 새로운 해석자 혹은 그것을 철저화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마태 5:17).

이런 면에서 볼 때 루터는 갈등의 의미를 깊이 인지했고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해결하려고 한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존질서에 대해서 깊은 모순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혁명적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 외적 갈등을 내면화 하는데 까지 가져갔었다. 그가 쉽게 행동으로 자기를 표현하려고 한 사람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는 깊은 자기성찰을 거쳐서 한걸음 한걸음씩 앞으로 나갔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는 모순들을 내면화해서 해소해 버리는 방식으로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갈등은 갈등대로 두고 그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그가 흔히 대비시켰던 개념들 즉 문자와 영, 율법과 복음, 인격과 업적, 신앙과 사랑,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숨으시는 하나님, 하늘과 땅 등이 그것들이다. 그는 이러한 대치개념들을 두루뭉수리하게 처리하지 않고 이들의 특성을 철저하게 드러내서 그 모순과 대치지점을 밝혀냈었다. 그것은 대화에서 상대방에 대해서 자기의 입장을 명백히 함으로써 어떤 출구를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과도한 설득이나 억압은 대화의 적절한 발전을 가로 막는다. 명백한 대립성(Gegensatz)을 발견하는데서 진정한 관계성이 성립된다.

루터가 이러한 대립분석(Konfliktforschung)에 소홀히 했더라면 그는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도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대립투쟁의 형식은 내면적으로는 신학적 저작으로 나타났고 외면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복음의 율법화와 광신자들의 율법의 복음화에 대한 투쟁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한편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극단적으로 전통을 수호함으로써 복음의 의를 율법의 의로 만들었고 다른 한편 반율법주의자들(Schwärmer)은 율법의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한 부분을 부정함으로써 복음의 바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루터에게서는 그의 삶의 활동력이 신학의 저변을 흐르고 있으며 따라서 삶과 신학이 분리되지 않고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그는 성서해석에서 많은 알레고리를 채택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해석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사사기 성서해석에서 종교개혁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침입을 불레셋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침입과 동일시했고 또 로마 가톨릭세력과 인문주의 양대 세력을 당시 블레셋의 다곤 신전을 떠받들고 있던 커다란 두 기둥으로 비유하고 그것들을 붕괴시키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생각한다. 루터는 자신을 로마 가톨릭 세력과 인문주의라는 양대 세력을 블레셋의 다곤 신전의 두 기둥으로 이해하고 자신을 삼손과 동일시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이 두 기둥을 쓰러뜨려 신전을 파괴하는 것을 삶의 과제로 삼았었다. 이렇게 그는 성서해석을 하면서 성서의 인물과 자기를 동일시하거나 성서의 사건을 자기 시대의 사건과 일치시켜 해석하는 실존론적 성서해석을 감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루터의 내적 인격적 투쟁과 그의 외적 종교 개혁적 투쟁은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함께 얽혀 있다. 그는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 및 자기자신을 이해하고 그 부름에 응답했었다. 루터에게서는 신앙과 자기 이해하는 하나였고 또 그의 신학은 이런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실존적 갈등을 통해서 얻어진 귀중한 산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들은 전혀 사변의 세계를 넘어서고 있으며 이 점은 그가 칼빈과는 달리 중세 교부들의 글을 거의 인용하지 않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루터는 자기의 신학을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란 말로 특징짓는다. 이러한 전제에서 우리는 앞으로 그의 신학적 특성들을 잘 나타내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다루고자 한다.

    II. 문자와 영

 1. 신앙과 지식활동으로서 신학함

     루터에게서 신학이란 그의 소명과 관련된 철저히 이해해야 할 주제였으며 인간 실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본질이요, 확신과 구원과 생명을 주는 진리였다. 말하자면 신학이란 자기의 실존과 유리된 일종의 관념조작이 아니라 자기의 내댄 투쟁이요 실현이다. 따라서 신학 하는 일(Theologisierung)은 인간의 기능, 인식, 지적 활동인 동시에 신앙, 은총,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신학이란 성서를 해석하고 성서에 따라서 교리들을 해설하는 것인 동시에 신학은 인간의 실존적 체험과 관련된 사안을 다룬다. 즉 신학은 이해의 능력과 거기에 근거한 자기이해 및 결단과 관련된 학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신학 하는데 있어서 이 두 가지 측면 즉 지식과 신앙, 다시 말하면 자료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설하는 지적 능력과 개인의 주관적 응답과 개입 사이에는 구별(區別)될 수는 있으나 분리(分離)될 수는 없다. 신학 하는데 있어서 전혀 주관적 확신, 양심의 책임적 응답이 없는 객관적이고 과학적 탐구가 있을 수 있겠으나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 없다. 동시에 성서에 대한 철저하고 객관적 이해 없이 어떤 주관적 확신에만 근거를 두어 성서를 전통이나 자기 확신에 예속시키는 것도 두려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역사적 진리는 실존적 진리와 올바로 구별되어야 하며 이것이 혼동되거나 뒤바뀌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전통과 신앙, 역사와 실존 사이의 올바른 구별(Distinction)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전통이 성서에 선행할 때 율법주의가 등자하며 신앙이 전통을 배제해 버릴 때 열광주의가 등장한다. 그래서 성서와 전통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는 언제나 그 이해에 수반되는 신앙을 전제하며 이 신앙은 언제나 성서적 전통이라고 하는 터전에 뿌리를 두어야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것이다.

루터에게서는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신학과 인격적 대결의 장으로서의 신학의 불가분리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루터는 성서를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거기에서 어떤 일반적 해석학적 진리를 찾아 사상적으로 체계화하기 전에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말하고 계신가를 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단순히 과거 일정한 기간 동안에 형성된 문서의 영역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말을 걸어오는 계시의 형식이었다. 즉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외 방식으로 그를 만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오랜 역사를 통해서 계시하신 이 말씀 즉 성서가 현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때 해석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해석학적 문제는 단지 사변적 이론의 표현이 아니라 실존적 자기이해와 관계된다. 이 점에서 루터의 성서해석의 특수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논리는 성서의 개개의 장절의 해석에서 단순한 특수성만을 강조하거나 개개인의 역사적 체험이나 소위 전이해가 비판될 수 없는 정당성을 갖는다는 말이 아니라 개개 성서는 외형적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 인간에게 - 보편적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구체적으로 말을 걸어오고 대답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2. 문자와 영: 외적 말씀과 내적 말씀

     루터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 혹은 보편성과 인간 실존의 구체성이라고 하는 관계문제를 문자(文字)와 영()”이라는 도식을 통하여 해명하고 있다. 우선 그의 말을 들어보자. “성서에서 영과 문자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왜냐하면 이는 올바른 신학자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부터이다.” 그는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외형적 말인 문자에 만족하지 말고 영 자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외형적 말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직접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의 진리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가 외형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믿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그의 영원한 말씀과 영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채우신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말씀 즉 외적 말씀과 내적 말씀은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다. "영은 말없이는 말씀하지 못하며 말씀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음성으로 말해지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마음 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문자로부터 영이 도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이 문자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런 외적 말씀 없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매개물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당시 열광주의자들이 이런 외적 말씀을 배제해 버린 내적 말씀만을 긍정하려는데 대하여 루터는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성을 주장하게 되면 해석상의 수많은 가능성이 생기게 되며 통일성이 상실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적 말씀은 그 자체로서 영적 능력을 갖는다. 그것은 단순히 외적인 것, 그것 자체로서 존속되지 않고 인간 안에 들어와서 내적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말씀은 루터에게서는 같은 말씀이다. 루터에 의하면 문자와 영은 같이 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뗄 수 없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문지를 넘는 영을 통한 성서이해는 어떤 일반적 문서의 이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이며 어떤 확정된 결론이 없는 계속되는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에 얽매인 해석은 - 문자 없이는 해석할 수 없다하더라도 - 가장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문자적 성서이해에 있어서는 계속적 전진이 요청된다. 영이 문자가 되고 또 문자가 다시 영이 되어야 한다. 루터에게서 이 둘의 관계는 어떤 순환적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 관계다. 문자가 선행할 수 없고 그렇다고 영이 선행할 수도 없다. 이 둘은 동시적이다. 문자가 오면 영이 사라지거나 영이 오면 문자가 사라지는 그런 관계도 아니다. 이 둘은 언제나 같이 존속한다. 그래서 루터는 영이 배제된 문자는 죽었다고 말한다.

     3. 성서의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

     그러면 루터는 문자와 영이라는 논제를 어디서부터 발견하고 그의 성서이해의 원리로 삼았는가? 그는 이 명제를 바울에게서 발견했고 특히 고린도 후서 3:6 “기록된 율법은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은 살린다.”라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학자 G. 에벨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전히 성서본문의 외적 의미에 근거를 둔 이해와 내적 의미에 바탕을 둔 이해, 또 생명이 없는 문자에 만족한 채 머무는 것과 텍스트의 살아 있는 영에 집중하는 것 사이의 구별은 일반적 해석학적 원리가 되었다.” 루터의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러한 사상은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것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기록된 텍스트 일반을 이해하는 기본원칙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낡은 계약의 율법과 새로운 계약의 결정적 요소로서의 영() 사이의 구별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다. 따라서 바울에게서는 문자와 영의 구별은 율법과 복음의 의미에서 이해와 해석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런데 바울의 문자와 영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초대 교부들 특히 오리게네스에게 와서 전혀 달라졌다. 그는 이 바울의 논제를 플라톤적 의미에서 해석하는데 그에 의하면 성서해석에서 지각의 세계를 넘어서 마음속에서 인식할 수 있는 의미에까지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성서를 해석할 때 문자적 의미 저편에 있는 영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함으로써 성서해석에서 비유적(allegorical) 해석방법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린도 후서에 나타난 문자와 영은 일반적인 수식적 용어가 아니라 율법과 은총 사이의 구별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오리게네스의 주장을 다른 측면에서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도 오리게네스의 방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도 문자경시의 경향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적 해석방법은 여러 가지로 자의적 성서해석의 길을 열어놓는 위험을 낳고 말았었다.

이러한 비유적 해석방법은 점차 발전하여 성서의 4중의 의미라는 사상을 통해서 자의적인 敎義的 형태로 발전되기에 이른다. 성서의 4중의 의미에 의하면 문자적 의미 외에 세 가지 방법의 영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1) 교회와 교리에 대한 비유적 적용과 2) 개인과 관련된 윤리적(tropological) 혹은 도덕적 해석 및 3) 텍스트를 형이상학적이고 종말론적 신비한 요소들에 적용시키는 오의적(奧義的=anagogical) 해석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교회의 교리에 어긋남이 없는 한에서 가능한 것이긴 했으나 늘 그 과정 속에는 성서본문을 경시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비유적 해석 방법들을 모든 텍스트에 적용시키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러한 비유적 방법에 맞추기 위한 인위적 노력들이 때로는 성서 자체가 말하려는 의미를 넘어서 어떤 교리적 영역에 가두어 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도 초기에는 전통적 성서해석방법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성서 텍스트가 갖는 무수한 의미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성서의 독자적 의미를 찾자는 데서 그렇게 했었다. 그러나 루터는 전통적 스콜라주의 방법으로 문자와 영을 구별하지 않고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반제(antithese)로 보았다. 비록 신플라톤주의에서처럼 문자와 영 사이의 구별은 육신과 영,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 감각적인 것과 지적인 것,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 현재와 미래 등 유사한 반제에 적용될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들 사이의 반제의 개념은 바울의 율법과 은총의 개념에서 이해되었다는 점에서 전통적 알레고리적 방법에서 해방된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그 점은 루터가 문자적 의미를 죽이는 문자와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비유적 의미를 살리는 영과 동일시하지 않았던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죽이고 살리는 구별은 문자적 이해냐 비유적 이해냐 하는데 달려 있지 않고 이해의 방향이 그리스도냐 아니면 모세냐 하는데 달려 있다고 루터는 보았다. 문자냐 알레고리냐 하는 소위 전통적 도식은 그리스도냐 모세s냐 하는 것에 의해서 무력한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 사이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을 때도 그는 문자적 의미로, 역사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기독론적 의미로 해석한다. 이것은 루터의 시편해석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서의 기본적 의미인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한다는 원칙이 루터의 기본원칙이었다. “껍질이 두껍고 딱딱해서 깨기 힘든 호도와 같은 성서의 텍스트를 대할 때마다 나는 즉시 바위(그리스도)를 향해 내던지면 가장 맛좋은 알맹이를 발견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가 시편들, 특히 탄식시들(Klagelieder)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할 때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을 결정적으로 넘어섰으며 그의 십자가의 신학을 위한 길 예비의 과정이 완성된 것이다.

여기서 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영이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식에서 이해되는 한 모든 것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영적인 것은 기독교신앙에서 참된 이해의 범주다. 그러나 이 영이란 말의 오해를 피하기 위한 궁극적 카테고리는 그리스도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넘어선 영적 의미란 없다. 그래서 영 가운데 사는 것은 신앙 가운데 사는 것이며 따라서 영과 신앙은 같은 말이다.

4 거룩한 언어와 민족들의 언어

     우리는 위에서 루터가 문자와 영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것을 여기서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

1) 루터는 문자와 영의 관계를 밝힘으로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도그마의 권위 아래서 단지 형식적 권위만을 유지하던 성서를 해방시켰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것은 성서의 세계를 새로운 차원 즉 실존적 창원에서 해석함으로써 성서를 교회의 책으로부터 신자들의 책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선 성서를 번역하여 자기의 언어로 읽게 한데서 구체화되었다. ‘성서는 성서에 의해서만 해석되게 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전통이 수립되었다.

2) 루터는 성서를 순전히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의 이원론적 해석방법을 지양하고 새로운 성서해석 방법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그의 언어에 대한 깊은 연구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루터는 언어 자체가 갖는 창조적 기능을 발견했다. 그는 1513-1515년 그의 시편강해에서 언어의 본질과 생명에 대한 그의 사상의 윤곽을 밝혔는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행동의 통일성을 강하게 역설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력을 가지며 또 창조는 그의 말씀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을 통해 역사할 때 구체적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루터가 외적 말씀인 글로 씌어지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언어와 내적 말씀으로서의 영을 구별해서 말하지만 이것들을 분리해서 말하지는 안는다. 이 둘은 동시적이며, 상대적이다. 열광주의자들이 문자적 언어를 부정하고 내적 언어에만 집중하는 것은 언어의 본래적 기능을 무시한 것에서 온 처사이다. 그들은 외적 언어는 내적 언어의 모사(Abbild)로 보려는 태도에 대해 루터는 복음은 언어라는 옷을 입고 전달된다고 보아 언어의 새로운 이해가 복음을 새롭게 이해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루터의 언어에 대한 강조는 성서 자체의 권위의 강조와 함께 소위 형식적 권위만을 강조하는 축자영감설에 부분적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문자에 대한 철저한 역사적, 문법적 지식을 통한 이해 없이 성령에 의존하려는 성서해석자의 태도는 중세기 열광주의로 되돌아가는 일이며 여기서는 엄밀한 의미의 성서신학은 성립되지 않는다. 동시에 성서의 문자가 지니는 영적 차원을 무시한 성서해석은 문자는 죽이고 영운 살린다.”라는 성구의 근거가 된다.

3) 루터는 문자와 영이라고 하는 변증법적 통일을 통해서 성서라고 하는 굳은 밭을 갈았다. 동시에 그의 문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민족어(Volkssprache)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았다. 당시 거룩한 언어들(희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와 민족어(이상의 언어들과 다른 언어들, 즉 독일어 영어 등) 사이를 철저히 구별하는데 대하여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모든 언어는 다 거룩한 언어라고 보았었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성서의 번역, 민족어로 된 예배서 사용, 그리고 자기 나라 말로 하는 성서해석으로 발전되었다. 그는 문자와 영의 통일성을 찾아냄으로써 성서의 바른 이해의 길을 열어놓았고 동시에 성서 자체의 권위를 되찾게 했으며, 언어들의 평등성을 주장함으로써 성서번역 및 예배의식서 사용의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문자와 영의 바른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척도는 그 양자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III.율법과 복음의 구별

     1. 신구약성서의 기본 내용

     신구약성서는 크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역사와 삶을 규정하는 율법을 담고 있는 구약성서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신약성서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구약성서는 모세의 5경으로 지칭되는 율법과 그 율법을 실천하면서 살아갔던 이스라엘 민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은 역사서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율법의 정신에 따라서 이끌어가기를 원했던 예언자들의 글을 담은 예언서들 더 나아가서 그 율법의 정신과 지혜를 노래한 성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갈 삶의 법칙들, 즉 하나님의 뜻을 담은 율법이 그 중심을 이루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네 개의 복음서들과 초기에 그 제자들의 활동을 담은 사도행전과 더불어 사도 바울과 함께 초대교회를 세우고 목회했던 이들의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율법서들들 완성하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난 하나님의 뜻 복음을 담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학자들은 창세기로부터 말라기로 끝나는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담은 책을 구약 혹은 옛 약속(Promise)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해 가는 그의 구원사건을 새로운 약속 혹은 옛 약속의 성취(Fulfillment)라고 했다. 그런데 이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과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인 복음의 상관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마르시온처럼 구약성서 즉 율법의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신약에 나타난 복응만을 중요시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유대인들처럼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인 복음을 외면한 채 구약의 율법만을 존중해서는 구약은 물론 신약성서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구약성서에 자기의 뜻을 나타내 분은 모두 한 분이며 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성서, 즉 율법 없이는 복음을 바로 이해할 수 없고 동시에 신약성서 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율법과 복음의 일치와 대립

     우리가 율법과 복음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 구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에벨링(Gehard Ebeling)은 구별(distinction)은 곧 분리(separation)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구별은 율법이냐 복음이냐의 양자택일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선포는 다만 복음이요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주장하는 열광주의자들의 주장은 전적으로 부정된다. “구별” (Unterscheidung)은 언제나 양자 사이의 공존(miteinander)과 대립관계(gegeneinander)에서 말해진다. 따라서 이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전제된다. 그러나 여기서 포괄성과 배타성은 가능하지만 무관계성이나 일치성은 불가능하다. E따라서 양자는 각각의 위치와 한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율법이 복음이 되겠다고 주장할 수 없고 복음의 율법의 역할을 하겠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의 구별에서 당면하는 문제는 이 양자 사이의 차이를 가려내는 것에 있지 않고 설교를 통해서 이 구별이 세워지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구별의 명백한 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혼합된 상태에서 경험되어야 하며 명백히 이해되었다 해도 거듭해서 명백히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계속해서 혼합의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이 제목 즉 율법과 복음의 구별에 관한 지식은 가장 고차적 정도까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기독교 교리의 요약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는 법을 말에서 뿐만 아니라 느낌과 경험 가운데서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둘 사이를 마음에 있어서나 양심에 있어서 잘 잘 구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말들에 관한 한 이 구별은 용이하다. 그러나 그것이 경험과 마주칠 때 복음은 가끔 오는 손님이고 율법은 - 율법과 죄의식에 익숙해진 양심 가운데 - 늘 같이 하는 손님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성 역시 이 의식을 뒷받침 한다.” 따라서 이 구별은 엄밀한 의미에서 행동규범(normen actionis)이란 에벨링의 말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 에벨링에 의하면 신학은 논리적 학문이 아니라 선교적 학문임을 지적하고 율법과 복음 사이의 구별은 기독교 선교의 참된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 하는데 관계되기 때문에만 중점적 문제가 된다고 했다. 이런 뜻에서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설교는 율법과 복음의 구별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과정이고 사건이다. 설교의 목적은 율법과 복음의 구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될 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구별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이다. 이 구별의 실패는 설교 즉 하나님의의 말슴의 선포에서의 실패이기도 하다. 복음의 순수성을 위해서 복음만을 설교할 때 복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직 율법과 구별되어 설교될 때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 비로소 율법은 참으로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월터(C.F.W. Walther)는 그의 책 율법과 복음의 적절한 구별에서 다음과 같은 이 둘 사이의 구별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1) 계시하시는 방식, 2) 그 사용, 3) 약속, 4) 위협, 5) 기능과 효과, 6) 대상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이 구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학의 임무로 본 것이다. 말씀의 내용과 효과가 일치하게 하는데서 그 기능을 다 했다고 한다면 설교는 인간의 삶과 죽음과 관련된 사건으로서의 구별되는 말씀이다.

루터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구별하여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될 때 인간의 양심이 즐겁게 열리고 확고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총과 용서의 말씀이고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이 설교되면 양심은 속박되고 고통스럽고 두렵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의 말씀, 죄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에벨렝에 의하면 인간 스스로 자기의 능력에 의해서 감당하도록 짐을 지우고 그의 가능성과 능력을 고려하여 요구하고 결국 홀로 내버려 두는 말을 인간의 말이라고 하며 이 말의 궁극적 결과는 인간을 노예화하는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했다.

인간의 말에서 하나님은 숨으시는 하나님으로 머물러 계신다. 반면에 하나님이 현재하시고 계시하시는 말씀은 유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포기하기 때문에 나를 붙잡고 있는 힘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는 말씀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 신앙의 말씀, 즉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 즉 은총의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요구의 말씀이 될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행동하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만으로 의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신앙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율법과 복음 사이의 바른 구별의 결과이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 사이의 구별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가 하는 것을 밝혀주는 척도가 된다.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언제나 공존과 대립이 동시에 말해짐으로써 이 양자의 기능이 실현된다.

루터는 정치적 의(政治的 義), 의식적 의(儀式的 義), 율법적 의(律法的 義)를 신앙의 의와 구별하여 위의 세 가지 의를 능동적 의(active righteousness)라 칭하고 신앙적 의를 수동적 의(passive righteousness)라 하였다. 이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의 관계를 살핌으로써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3.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

     정치적 의, 의식적 의, 율법적 의들은 모우 능동적 의며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 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가된(imputed), 즉 부여한 의는 수동적 의다.” 루터는 의인론은 기독교 교리 전체와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하여 그것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 율법과 복음의 적절한 구별을 말했다. “율법은 우리가 행해야야 할 것을 명령하고 요구하나....복음은 해야 할 것이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설교하지 않는다.” 능동적 업적을 요구하는 율법에 대하여 복음은 순수한 수납(Empfangen)만을 호소한다. 루터의 사상에서에는 이러한 관계가 늘 존속한다. 신앙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는 율법은 침묵하며 인간의 업적의지는 중지된다. “당신과 나는 거룩하고, 교회와 도시와 백성들은 낯선(fremd), 즉 주어진 거룩함에 의하여 즉 능동적 거룩함이 아니라 수동적 거룩함에 의하여 거룩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신앙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 그를 믿는 것이며 그를 진실하고 현명하고 의롭고 자비롭고 전능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 즉 모든 선의 창조자와 수여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주체가 하나님인 것만이 선하다. 인간의 성취, 업적, 즉 노력의 성과들 말하자면 능동적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행위 자체, 업적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의에 이르려는 생각이 악하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선행의 도구는 될 수 있으나 주체는 될 수 없다. 인간행위는 항상 능동자로서가 아니라 수동자로서 그 정당성을 갖는다. 성서가 업적을 요구할 때 그것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것이다. 그 요구는 인간의 업적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의 업적의지의 중지를 목표로 한다. “나는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의 근거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요구하신다. 루터에 의하면 우리의 업적을 중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수동적이 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그의 일을 시작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요구하는 말씀으로서의 율법과 선사하는 말씀으로서의 복음의 구별은 능동적인 의와 수동적인 의 사이의 구별과도 동일하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제정자로서 복음이 새로운 법으로 설교될 때 - 이 견해는 당시 스콜라주의 사상에 만연돼 있었다. - 복음은 요구와 성취로서 설교된다. 말하자면 복음이 율법화되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능동적 의는 수동적 의가 되고 인간의 수동적 의는 수동적 의가 된다. 루터에 의하면 이 때 하나님이 선하고, 능동적이고 신뢰할 수 있다는 그의 영예가 박탈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버릴 수 있었던 위로가 인간에게서 상실된다.

외스트(Joest)율법의 능동성과 복음의 수동성”(gesetzliche activas, evangelische passivitas)라는 말로 이 개념을 대립시킨다. 루터에 의하면 업적(Werk)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업적을 추구하는 인간(wirkende Mensche)의 자의식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 행위의 전적 중지나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자의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한번 신앙에 의하여 의롭게 되면 우리는 행동적 삶(vitam activam)에 들어간다.” 루터가 행동적 삶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가능성 저편에서부터 부여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를 - 우리 편에서는 수동적 의 - 전제로 한다. 따라서 행동으로서의 길은 신앙의 수동적 의로부터(aus)가 아니라 신앙의 수동적 의안에(in) 존재한다. 루터가 인간의 영점(Nullpunkrt)이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점이라고 말 할 때, 또 거기에서 율법이 침묵해야 한다고 말 할 때 그 장소는 인간의 동적 가능성에 대항한 정적 가능성에서 거룩해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적 정적 구원론 예로서 해탈과는 구별된다. 동양적 정적 구원론은 자기의 정적 가능성이 그 출발점이며 철저한 행동주의가 정적주의의 힘이 된다. 그러나 루터가 인간의 영점을 말할 때는 언제나 행동주의의 중지가 그 힘이 된다. 따라서 율법의 능동성(activitas)이 인간에게서 철저히 제거되고 성령에 의한 인간의 수동성(passsivitas) 이룩될 때 복음 안에서 율법은 완성되고 그 직무를 다하게 된다.

루터는 수동적 의와 능동적 의 사이의 중간지대, 어떤 과정을 인정치 않는다. “두 가지 종류의 의,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 즉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 사이의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3. 자유와 강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루터가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를 대비시켰어도, 율법과 복음,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설명할 때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문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규정에서 논해져야 한다고 할 때 인간이 지니는 자유와 속박의 문제에서 떠날 수 없다고 하는 논리적 귀결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설교(넓은 의미에서)에서 인식되고, 신앙하고, 회개하고, 복종하게 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늘 교리문제들을 분질(substantia)에서가 아니라 관계(relatio)에서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문제 삼는다. 이는 이미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가 본질개념이 아니라 관계개념이며 이것들은 이미 의인론과 밀접하게 관계되었던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따라서 루터는 형이상학이나 관념론적 사고가 아니라 실존적이고 역사적 사고를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설교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나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 사건을 의미한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대립시킨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비본래적 규범과 억압 아래 있고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은 자발적 자유에서 행동한다. 영과 법은 글자로 씌어 지지 않고 말로 언급되지 않고, 사용 가운데서 생각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살아 있는 의지 그 자체이며 경험의 의지이다....글자의 법은 글자로 씌어지고 말로 말해지고, 사용에서 생각된 것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믿는 자에게는 타자로서 마주서지 않는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의지와 내적 삶이다. 율법의 요구와 당위는 복음 앞에서의 자발적 응답이 된다. 신앙 안에 있는 자 즉 의로워진 자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선한 삶을 살며 선하게 가르칠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할 필요가 없고 요구 이전에 행한다. 루터에 의하면 3+7은 숫자의 내적 법칙에 의하여 10이 되며 10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듯이 신앙의 행위는 모든 법령과 요구를 초월한다. 가열된 쇠가 나무를 태우는 것은 쇠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불의 속성인 것처럼 신자의 행위는 인간 자신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루터에게서는 인간의 자유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는가? “인간 안에서 어떤 것이 변하지 않고 율법이 변할 때는 그것은 인간적 자유다. 그러나 율법이 변하지 않고 인간이 변할 때는 그것은 기독교적 자유다. 이전에는 자유의지에서 증오가 되던 율법이 이제는 즐거워졌다. 왜냐하면 사람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5:5). 이 자유 가운데서 그는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는 강하고 견고하게 서야 한다. 우리를 위해 율법을 완성하고 죄를 극복한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정신을 보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자유로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의롭게 하고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한다. 만일 여기서 떠난다면 그리스도의 은총을 저버리고 자신의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없이 율법으로부터 의롭게 되고 자유롭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서 율법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 때 루터에게서 극단적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은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관계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자발적 관계다. 루터가 율법의 강제성을 넘어서 복음 안에서 그 요구를 자발적으로 행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의식, 혹은 본능의 관계가 아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율법의 당위”(Du-Sollst)는 내부로부터 솟아나는 사랑의 복음의 자발성(I-Will)이 율법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당위, 강제에서 자유로운 자발성만이 하나님의 뜻의 실행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행위는 강제적 행위가 아니라 자발적 행위, 즉 자유로운 행위이다.

그러면 왜 신앙의 행위는 자유로운 행위일까? “우리 자신의 의지로부터 자유로이 행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강제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일은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그것을 요구하는 자의 일이다..... 만일 사람이 율법 없이 자유롭게 산다면 그는 자발적으로 율법의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때 그 행위는 행위자와는 무관하다. 율법의 요구에서 행한 행위는 자유로운 자신이 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다. “네가 해야 한다.”내가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배후에 숨어 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한다.”내가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배후에 숨어 있다. 루터는 철저하게 율법의 강제성을 인식하여 복음을 통해서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즐겨 그것을 행하는 것을 자유라고 했다. 루터가 복음 안에서 율법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의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요구에 복종하는 것이 복음 안에서 자발적이고 자기 자신의 의지로 복종하는 데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한다. 율법의 억압적이고 강제적이고 ,위협적인 요구에 복종하는 것이 복음 안에서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즐겨 복종된다. 여기에서 율법의 본래적인 기능 즉 요구, 위협, 형벌, 심판 등은 무효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은 율법의 일이 아니고 사랑의 일이다. 그것들은 율법의 오구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한 형제들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다.” 복음이 설교되고 믿어질 때 율법은 고소하고, 심판하고, 정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편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행동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입법자가 되고 복음의 율법화가 생기고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강제가 지배한다.” 여기서는 복음의 율법화가 생기고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억압자로서 이해된다. 이것이 당시 스콜라주의자들이 범한 오류이다.

그러나 루터가 강제와 자유의 관점에서 율법과 복음을 구별할 때 다음 것에 주의해야 한다. 율법이 인간 안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변화될 때 그것은 인간적 자유다. 그러나 율법이 변화되지 않고 인간이 변화될 때 그것은 기독교적 자유다.” 그리스도교적 자유란 율법의 변화에서 성취된 자유가 아니라 복음 안으로 자기가 변화하는 자유다. 이 자유는 율법의 강제성이 무효화되는데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그 근거가 있다. 이리하여 루터는 율법과 복음이 같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원칙에서 율법의 본래적 직무가 복음이 온 이후에도 결코 취소될 수 없음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마지막은 복음 안에서만 말할 수 있으며 복음 밖에 있는 인간에게는 율법의 마지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율법의 강제성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율법 자체의 무효화나 폐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제 하에 있던 인간들이 복음에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자유를 말 때 외형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모든 일들(행위들)과 모든 것들(존재)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안에서 자유롭다.” 또한 루터가 자유를 말할 때는 정적이고 부정적인 동양적 초탈을 말하지 않고 신앙 즉 신앙의 행위에서 자유를 말한다. 이 자유란 자기중지가 아니라 자기실현이며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변화에서 가능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 자신의 속성의 변화나 가능성의 현실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뜻하며 그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루터에 의하면 이 자유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 자유는 우리가 오직 그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거기에서 율법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응답의 대상이 된다.

이 자유는 정치적 자유나 하나님에게도 율법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의 욕심의 자유도 아니다.” 이 자유는 인간의 노예적이고 폭압적인 세력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로부터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자유다. 어디에서? 양심에서. 양심은 우리의 자유가 멈출 장소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정치적 자유자 육신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학적 또는 영적 자유 말하자면 우리의 양심을 자유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도래할 진로에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영원히 자유하게 하는 자유는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보다 더 위해하다. 루터에 의하면 이 자유로부터 다른 모든 자유가 나온다. “실로 그리스도가 죄와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의와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고 율법의 노예화의 공포를 양심의 자유와 복음의 위로로 대치했다.” 루터에 의하면 율법에서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오직 사랑의 의무만이 주어진다. 이 사랑의 의무는 루터에 의하면 자발적 자유의 최고의 표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지의 총체인 율법을 성령 한에서 즐겨 행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요구 아래에 있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으로 즐겨 나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억압상태에서 즐겨 복종하는 상태로 옮겨졌다. 루터는 이것을 율법의 활동(Gesetzeswerk)이 아니라 은총의 활동(Werk der Gnade)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유력한 것(efficax)이 아니라 공허한 것(vacua)이다. 강제와 자유와의 관계에서 율법이 복음과 철저하게 대립되며 구별된다.

루터는 수동적 의와 능동적 의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주권으로 하는 의인론을 다루었고 강제와 자유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삶 즉 성화의 문제를 대립시켜 설명했다. 의인론에서 인간은 수동적이며 성화와 윤리에서 자유인임을 말했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잘 구별하는데서 각자의 본래적 기능을 찾으려고 했다.

     4.)루터연구: 자 유

루터에 의하면 신학적 대상은 이중적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인간이 신학적 대상이다. 범죄하고 더러워진 인간과 그 인간을 의롭다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신학의 대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이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다. 이러한 주제에서 이탈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에서 오류요 해독이다. 따라서 신학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관계를 확증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절한 구별(Unterscheidung)이다.

이러한 기본적 논제가 루터의 전체 사상을 꿰뚫고 있음을 우리는 임 앞에서 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본적 논의가 기타 제반 물음들에 결정적 제공하게 된다.

이미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다룰 때 이 둘 상호간의 갈등과 긴장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상호간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었다. 말하자면 율법과 복음은 동일한 하나님의 뜻으로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상호적으로 인간에게 역사한다. 율법은 인간의 자기구원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졌고 복음은 이 불가능성을 이해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멸망하게 함으로써 복음을 찾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은 동일한 하나님의 뜻으로 상호 대립하지 않지만 동시에 인간의 구원이란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율법은 인간을 절망하게 하고 복음은 희망과 구원을 약속한다.

이러한 루터의 사고패턴에서 볼 때 자유의 개념도 자연히 그 상대개념인 죄의 속박과 관련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속박은 그 자유의 마지막으로서 생각될 수 없고 인간의 자유는 그 속박의 마지막으로서 생각할 수 없다.” 동시에 이 양자의 관계는 두 개의 부분적 병행적 존재로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율법과 복음, 은혜와 계시의 관계의 부분적 병행적 존속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의 사고에서는 계층적 이해란 언제나 부정된다. 이 점은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문화상대주의의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철저한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있을 뻔이며 부분적 이것 혹은 저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루터처럼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속박을 철저하게 대립시켜 논의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특징적인 두 개의 책을 저술했는데 하나는 1520년에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고 1525년에 에라스무스와 논쟁에서 쓴 노예의지론이다.

루터에 의하면 자유는 구원에서 가장 본질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인간의 제반 노력으로부터의 철저한 해방이다. 이러한 새로운 삶은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삶이다. 은총과 율법적 질서는 상화 배타적이며 우리가 은총을 받게 되는 수단인 의인은 율법적인 것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질적 자유를 향유하는 표이다.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와 권위를 갖게 된 제사장이다. “그는 이 주권을 가지고 그의 권위를 만물 위에 행사하며 이 제사장직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그 권력을 행사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면에서 신실한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이 말은 위에서 말한 자유의 개념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루터는 이러한 종교적 개념들을 말할 때 결코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말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아니 실존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추상적 자유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말하며 인간의 자유에서도 가장 본질적 자유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루터는 왜 철저한 대립개념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관견해서 제시하는가? 그는 가장 철저한 그리고 직설적인 형식으로 인간의 자유와 속박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봉사하기 위한 자유와 의무는 오직 이 둘의 통일성을 역설적인 용어로 설명하려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 봉사를 향한 자유와 의무야 말로 자유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통해 받은 자유는 사랑으로 봉사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즉 그 봉사가 언제나 자유가운데서 실천될 때 그것이 사랑의 봉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자유로운 의지와 사랑으로 지키지 않고 불안이나 유치한 사람으로 지키는 한 계명은 오직 그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될 뿐이며, 그것은 성취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은 자발적으로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는 은총과 도움의 시간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지킬 능력을 얻게 되며 동시에 그것을 유용성이나 보상 때문에 행하거나 혹은 고난이나 죽음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자연의 일이 아니라 은총의 일이다.”

이 자발적 사랑이 복음에 의해서 계시된 신앙의 본질인 자유의 열매다. 그러나 만일 복음이 율법의 저주와 장제로부터의 자유의 계시고 인간이 이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된다면 그 많은 인간의 제반 사회적 질서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루터는 교황과 인간적 교훈과 계명으로부터의 자유를 우선 염두에 두고 있다. 말하자면 율법적 자유가 아니라 종교적 자유다. 그래서 그는 이 그리스도인의 해방, 자유, 능력을 순수 영적 자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양심이 자유할 때 존재하게 된다.” 라고 하여 그 자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 소위 종교적 자유라는 말이 크게 오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소위 열광주의자들(Schwämer)이다. 그런데 루터는 소위 양심의 자유와 결부된 이들의 자유개념을 그 양심이 쉽게 비복음적인 것과 혼동된다는 이유에서 철저하게 배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개념을 직접 정치적 질서에 도입하는 것을 배격했었다. 그 대표적 예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장유하게 한다는 근거에서 농노제도의 철폐를 들고 나온데 대하여 루터가 반대한 것이다. 이 점은 현대 해방신학이 크게 외쳐지는 상황에서는 크게 오해될 수 있는 sodd이지만 가톨릭교회의 종교의 정치화를 공격하던 그로서는 이 자유의 개념의 무제약적 확대를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이 갖는 종교와 정치의 영역철폐는 신중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루터가 인간의 의지의 노예적 성격을 철저하게 이해한 것은 그가 순수한 복음을 이해하자마자 도달한 영역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의지는 은총 없이는 부자유하며 노예적이다라고 했고 인간의 의지가 본래 바른 안내를 따르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오늘날 심리학이 철저하게 밝혀낸 사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예정이라고 하는 필연적 귀결을 낳게 된다. 그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타락 후에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은 말장난이다. 만일 그것이 그 능력 안에 있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오직 죽을죄를 짓는 것뿐이다.”

이러한 명제는 결국 파문을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나 그 후 그는 그것을 재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철저화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자유의지에 관한 한 스콜라주의 전통과 휴머니즘적 전통을 일치된 견해를 가졌었다.

그런데 자유와 속박이라는 두 개의 개념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을 철저하게 대립시키면서도 상호 분리시키지 않는 것은 이 둘이 상호 관계가 단절될 때 그 의미가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철저하게 죄된 인간의 의지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의지는 악의 지배하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노예의지라는 말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로운 가능성이 대립하는 측면에서 인간의 의지를 문제를 문제 삼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지는 신적 칭호며 신적 전능 외에는 누구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자유의지 개념을 인간과 관련시키는 것은 신성을 인간과 관련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자유의지란 용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이 가능하며 인간에게는 다른 말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루터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을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의 부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의지의 논쟁의 근거는 전적으로 윤리적 영역과는 다른 측면에서 논의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소위 자연과 은총의 구별에서 루터가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은 그것을 은총의 영역에서 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자연의 영역과 은총의 영역의 연속성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자연의 문제를 은총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지 말 것을 주장한다. “우리가 논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은총이다.... 우리는 인간이 만물의 주인으로 임명된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인간이 자기 의지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의 영역으로서 은총의 영역과는 구별되는 곳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찰하면 이 자유의지란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수용자, 의존자.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세계에서 인간존재에 대하여 어떤 부가적이고 특수한 존재는 아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계층적 이해는 루터에게서는 배제된다. 그것은 철두철미 의인-죄인의 동시성에서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의지란 어떤 중성적인 것이 아니라 늘 결단을 요구받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결단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의 의지는 말과 마부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님이 타면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달리고 악마가 타면 악마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린다. 말의 안장이 비어있을 때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 말과 마부의 비유는 가톨릭 신학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것은 이들을 의지의 자연적 능력과 은총의 초자연적 능력 사이의 협동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가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나 결정론에 빠졌다고 보는 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인간과 사탄 사이의 공존과 대립에서 드러나는 이원론적 표상은 우리가 사탄이 하나님의 부재를 은폐하는 가면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때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은폐하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한다는 신비와 직면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의 영역을 보존하며 그것의 한계를 알게 만든다. 이 관계에서 명백한 구별의 근거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의 자유개념을 서술해 왔으며 그 자유의 한계영역을 루터를 통해서 이해했다.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정치적 자유도 육체적 자유도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주어지는 수동적 자유다. 이 자유는 모든 자유의 근거며 목표이다. 즉 타인을 사랑가운데 섬기려는 자유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이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한 자유며 그렇기 때문에 확실한 자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자유기 때문에 인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개의치 않는 궁극적 자유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궁극적으로 승리한 그리스도가 주신 소망에 근거하기 때문에 종말론적 자유며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자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유의 도상에 있는 존재이다.

 (1974-75년 잡지 현존지에 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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