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교회를 말하기 전에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단들은 종교개혁 이후에 형성된 개혁교 정통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정통주의는 칼빈의 사상을 체계화 내지 교리화 한 것으로서 매우 배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교리화 되고 배타적인 개혁교 정통주의는 18세기 미국으로 건너가서 더욱더 배타적이 되어서 이른바 근본주의로까지 발전된다. 그것의 다섯 가지 기본원리들은 성서 무오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대속적 희생,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등이다. 이러한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서의 무오설에 근거해서 근대적 성서연구방법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성서학을 교리학의 시녀로 삼았다. 이 이러한 우리 나라의 정통주의적 장로교 교단들은 1970년대까지는 앞서 말한 근본주의의 다섯 가지 원리를 잘 준수하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순수성을 지켜갔고 엄격한 신앙생활을 신자들에게 요구했다. 이러한 보수적 장로교회들은 1950년대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신학적 사조 즉 성서비판학을 받아들여 성서의 자유로운 연구를 주창하는 한국기독교 장로회라는 진보적 교단이 등장했지만 흔들림 없이 정통주의적 선교사들이 전해준 근본주의 신학을 확고부동하게 지켜나갔다.
장로교와 같은 시기에 들어온 감리교회는 그들의 조상 요한 웨슬레의 정신에 따라서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고, 신앙의 경험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신학노선을 견지했다. 감리교회는 특히 교리적이고 배타적인 장로교회와는 달리 감성적이고 경험적 중생의 신앙 즉 예수를 통해서 거듭나는 삶을 중요시함으로써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중생의 체험을 갖도록 지도했다. 특히 감리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사경회와 부흥회를 자주 열어 신자들의 신앙이 식지 않고 늘 활성화되도록 노력했었다. 또 감리교회는 어떤 교리적인 틀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한국의 종교적 전통들과도 자유로이 대화하면서 종교신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로교회의 정통주의와 감리교회의 경건주의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한 것은 1970년대 중반 “교회성장론”이라는 신학적 원리가 미국으로부터 도입되면서부터이다. 교회성장론은 60년대 미국의 세속화 과정과 종교적 냉소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에 몇몇 종교적 천재들, 예를 들면 빌리 그래함, 로버트 슐러 등과 같은 부흥사들에 의해서 고안된 것으로 그 밑바닥에는 미국 자본주의의 철저한 경영논리가 깔려 있다.
이러한 교회성장론은 처음에는 순복음 계통의 교회를 통해서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 교단은 이 방법을 통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특히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그 여세로 다수의 지 교회(지점들)를 설립하자 한국의 전통적 개신교회들도 여기에 주목하게 되었다. 1970년대로 말하면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시작된 산업화와 함께 시작된 도시화로 인해서 다수의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 특히 서울로 이주해 옴으로써 도시교회들의 급성장이 있었으나 농촌교회는 피폐화되고, 1970년대 말 산업화로 인한 세속화로 그 성장세가 점차 둔화되기 시작할 때였다. 이러한 개신교회들의 성장둔화기에 급성장을 계속하는 순복음 교회에 대해서 대교단들은 무시하거나 이단시 하는 것으로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이 순복음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무조건 무시할 수만 없는 상황이었다.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전통적 개신교회들 장로교회들과 감리교회도 이 교회성장론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각 교단들은 5천 교회운동, 1만 교회운동, 혹은 5만 교회운동 등의 프로그램을 조직함으로써 교회성장론의 신학을 실천 프로그램화 하게 된다. 교단마다 개척교회 위원회를 조직하고, 부흥사들의 조직을 이용하여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총동원주일과 같은 군사적 용어들이 비판 없이 교회에서 사용되었으며 새 신자를 교회에 데려오는 대가로 교인들에게는 일정한 물질적 대가를 지불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성장론의 실체는 미국 자본주의의 세력 확대와 이윤창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프로그램들은 어떤 것인가? 간단히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는 전통적 목회방식으로는 유럽의 교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쇠퇴와 몰락의 길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교회의 목회에도 자본주의적 경영논리와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목회(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경영인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고상한 성직자가 아니라 뭔가 성과를 내는 대기업의 CEO가 돼야한다.
둘째 설교는 과거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복음의 선포하는 것(Proclamation)으로는 부족하며 오늘날 발전된 대중매체들을 통해서 선전(Propaganda)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포로서는 성과를 거둘 수 없고 오직 선전으로서만 성과가 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했다는 교회의 목사들의 설교는 더 이상 선포가 아니라 선전이 되었다.
셋째 교회조직도 과거처럼 신앙(은총)원리가 중심이 아니라 업적(성과)원리가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헌금이나 전도를 통해서 성과와 업적을 올리는 사람들 중심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 결과 업적과 성과에 따라서 교회의 지위와 역할도 주어져야한다는 것이다.
넷째 새 신자 훈련 프로그램은 세포조직(Cell Organization)으로 체계화돼야 한다. 각 단위의 책임자가 그 구성원을 잘 조직하고 철저하게 훈련시켜야 한다. 요즘 다단계 판매방식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판매망과 훈련방식을 교회도 채택해서 신자들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다단계 판매회사인 암웨이의 신입회원 훈련과 교회의 새 신자 훈련 프로그램들 사이에는 내용과 언어만 다를 뿐이지 형식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미국에서 발생하고 발전되어온 교회성장론은 철두철미 팽창과 성과(업적)를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본질과 성격을 담고 있다. 그 결과 1980년대부터는 한국의 대교단들의 지도력도 과거처럼 신학적 지식이나 고매한 인격이나 돈독한 신앙을 가진 선배집단들로부터 업적과 성과를 거두어 거대한 교회를 짓고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부활절 연합예배에서도 순서를 맡는 사람들도 자금력과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이른바 “능력 있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한국개신교회들의 신학적 변용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들이 필요하다고 보여 진다. 여기서 분명한 신학적 문제들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한국 개신교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해도 교회성장론이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원리에 사로잡혀 있다.
2. 이 교회성장론은 자본주의적 업적원리에 기초하고 있어서 “믿음만”(sola fidei)이라고 하는 종교 개혁적 복음의 원리에서 이탈하여 가톨릭의 업적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3. 이 교회성장론은 인간을 상호 믿음에 기초한 “관계적” 인간에서 이탈시켜서 사익만을 추구하는 사회적 경쟁자들로 만들어서 사회통합에도 거침돌이 되고 있다.
4. 특히 교회성장론자들은 친미적이고 반공. 반북한적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서 앞으로 민족 자주와 민족통일에 커다란 장애로 나타날 수 있다.
5. 이들 교회성장론자들은 자본주의적 업적원리를 신봉하기 때문에 정치적 영역에서도 그들의 정의와 도덕성을 문제 삼지 않고 정치와의 불건전한 타협과 유착을 가져올 수 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의 가장 큰 대의라고 할 수 있는 “은혜만” 혹은 믿음만이라는 대의는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이러한 자본주의적 업적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결과들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맘몬이 왕 노릇하는 자본주의적 독점지배, 즉 세계화가 가져온 세계 정치적 결과는 어떤 것인가? 여기서 파생된 문제들을 다 설명하는 것은 이 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해서 “은혜”가 상실된 세상이다. “믿음”이 상실된 세상이다. 은혜와 믿음이 없는 맘몬이라고 하는 거대한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을 우리는 지금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맘몬의 숭배요, 그것은 다름 아닌 “무한경쟁의 세계”이다. 교육영역에서는 유치원 때부터 과외를 해야 함으로써 성장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배우는 즐거움에서 공부의 짐에 억눌려 있다. 맘몬은 가능한 한 더 큰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 인건비를 깎고 일자리를 줄여서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수가 없다. 젊은이들로부터 자본은 희망을 빼앗아 간다. 나이 먹은 사람들도 봉급이 높아지고 능력과 성과가 떨어지면 일찌감치 직장에서 퇴출된다. 일자리도 정규직은 없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이 56%에 달한다. 그들의 원급은 정규직에 잔 밖에 안 된다. 그럴수록 기업가진 부자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된다. 이리하여 빈부 격차가 점점 더 심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은 붕괴되고 극빈층에 들어가는 인구가 750만 명에 달한다.
이것이 은혜중심, 믿음중심이라고 하는 종교개혁 정신을 망각하고 성과중심 업적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세계의 현실이다. 종교개혁정신인 은혜중심은 단순히 면죄부를 사서 구원받겠다는 가톨릭 신앙의 문제와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정신인 믿음중심은 단순히 가톨릭의 공로 중심에 대칭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맘몬 세계자본주의의 사슬에 사로잡혀 신음하고 죽어가는 전체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다. 은총의 원리 없이는 오늘날 물질을 더 얻기 위해서 피 흘리며 싸우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 따라서 은총의 원리는 평화의 길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의 원인도 맘몬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적 팽창논리에 있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도 “은총만으로”라고 하는 루터 박사의 종교개혁원리 아니 세계개혁의 원리에 따라서 살 때만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