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노태우씨의 부정 축재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정계에서는 보수 논쟁이 뜨거웠다. 여당이나 야당의 지도자들 모두가 보수주의자로 자처하고 나섰다. 어떤 이는 자기야말로 ‘정통적’ 보수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상대방을 ‘위장된’ 보수주의자라고 규탄하기도 했다. 위장된 보수주의자는 보수주의를 단지 전술과 전략적 차원에서 이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한국에는 엄격하게 말해서 보수주의적 정치가들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안 진보적 입장에 있던 다수의 정치가들이 보수적인 집권당으로 가거나 아니면 보수당인 야당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보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보수란 한마디로 기존의 것, 전통적인 것에 대한 불변의 충성을 말하며 현존하는 것의 가치를 전적으로 수호하겠다는 신념 혹은 자세를 말한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보수 혹은 보수주의를 말할 때 그들은 지금까지의 정치체제 혹은 경제 및 사회제도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유지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보수적 정치인들이 지켜 나가겠다는 정치체제 혹은 경제 체제는 두말할 것 없이 ‘자유민주주의’및 시장경제 원리에 근거한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리라.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파악하며 여타의 민주주의, 예를 들면 사회적 민주주의와 같은 것은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오직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만을 용납하며 여타의 자본주의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와 같은 서구 유우럽의 발전된 나라들의 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의 이러한 자세는 지난 50년 동안 남북 대결이라고 하는 비정상적 관계와도 밀접하게 물려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들 한국의 정통 보수주의자들이 지키기를 원하는 보수주의의 실체는 어떤 것인가?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체제는 오늘날까지 어떻게 기능해 오고 있는가? 또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시장경제 체제에 근거한 자본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 이들이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는 실상 이승만 정권의 문민독재를 거쳐서 지난 30여 년 간 군부 독재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전락해 오지 않았던가? 이 제도에 의해서 정상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물론 건전한 정당정치의 기초도 마련되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들은 잔혹한 독재자이거나 아니면 부정 축재자들이며 그들의 말로는 한 결 같이 비극적이었다. 이러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정당들은 이들의 몰락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그리고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경제 체제는 어떤 것이었나?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잔재와 함께 외세 의존적 산업 구조에서 혜택과 특권을 누리는 소수 재벌들에 의해서 독과점 되어 있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생산해 낸 것은 사회적 불균형, 정경 유착, 기업 외적 부정과 부패에 의한 비정상적 성장들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잔혹한 노동운동의 억압을 통한 부의 정상적 분배의 차단과 함께 자본 및 금융시장의 독점화를 통한 비정상적 성장을 이룬 것이 한국의 자본주의의 현실이 아닌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보수 혹은 보수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과거의 억압적 정치 현실에서 그리고 철저하게 왜곡된 경제 체제하에서 특권과 특혜를 누린 집단들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러한 왜곡된 현실에서 특권과 특혜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누리기를 원하는 계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개신교의 보수화 전통 및 정치적 보수화와 결합
그러면 한국 개신교는 어떠한가? 보수 혹은 보수주의에 대한 논의와 주장은 사실상 한국의 교회사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보수 혹은 정통이라는 말은 옳은 것이고 진보 혹은 반정통은 틀린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실정이다. 한국의 개신교는 미국의 가장 보수적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되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철저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보수적 기독교는 신앙 선교(Glaubensmission)에 근거해서 ‘영혼 구원’만을 가르쳐야 했고 또 정치와 종교라고 하는 당시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정교 분리’ 원칙에 따라서 행동해야 했다. 1900년대 초 한국을 방문한바 있는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인 아서 브라운(Arthur Brown)은 한국 교회의 보수성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즉 한국 교회에 선교한 선교사들이 어느 정도 보수적인가 하는 것은 그들이 100년 전에 그들의 조상이 스코틀랜드에서나 지키던 신앙 이론과 실천을 한국에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당시 미국에서도 요구하지 않던 보수적 신앙과 실천을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 강요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의 목표는 세상을 멀리하고 영혼의 구원을 얻어서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신앙 형태가 한국의 개신교의 기초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선교 초기에 한국 교회는 민족운동이라고 하는 심각한 신학적 교회적 문제에 직면했었다. 이것을 우리는 한국 교회의 “정치화”라고 부른다. 선교 초기인 19세기말 20세기초 당시의 한반도의 상황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식민주의의 침략에 직면하는 위기를 마지 했었다. 무능한 조정과 유교의 성리학을 기초로 하고 있던 지배 세력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동학농민들이 대내외의 위기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어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의병 운동들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개신교인들도 만민공동의회니 신민회와 같은 단체들을 통해서 민족문제에 가담했었다. 개신교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들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애국적인 민족의 독립운동이 보수적인 선교사들에게는 교회의 정치화로 낙인찍혔고 이러한 운동은 선교 정책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거부당했다. 장로교 공의회는 이러한 교회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결의를 하는가 하면 1907년 부흥 운동을 통해서 민족적 기독교를 ‘순수한’ 기독교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다. 따라서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은 한국 개신교의 탈정치화 혹은 보수화의 기초를 형성한 전환점이며 이러한 보수성은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과 대결하면서 깊숙이 내면화 체질화되었다.
해방까지 한국의 개신교회는 거의 완전하리만큼 이들 보수주의의 보루가 되었다. 장로교의 경우 해방 후에 다소 진보적인 신학 사상과 실천들이 도입되지만 선교사들과 그 동맹 보수 세력과의 대결은 매우 힘든 싸움이었다. 50년대에 와서 기독교 장로교회의 출범이 이러한 보수주의의 벽을 허무는 운동이었지만 그것이 한국 개신교회 전체를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시 개신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은 보수진영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신학적 실천적 이유들로 인해서 장로교회 안에서는 여러 차례의 분열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어떤 진보적인 교회 갱신의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단지 이들은 장로교회 안에서 보수성의 경쟁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교리 외적인 지방색 내지는 교회 정치적 요인들이 이들을 갈라놓았을 뿐이다. 장로교 안에서 있은 여러 차례의 교회 분열들도 이들의 보수성에 어떠한 편차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전적으로 보수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보수적인 한국의 개신교는 해방 후 50년 동안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그 궤를 같이 하면서 그것의 충성스런 동맹 세력으로 길을 같이 했다. 한마디로 한국의 개신교처럼 한국 정치사 한가운데서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되는 역대 정권의 지원자 노릇을 한 집단도 드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신교는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가 온갖 부정과 부패에 둘러싸이고 또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대통령이 되려고 할 때도 교회 안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었다. 박정희씨로부터 시작되는 군사 독재 정권들 하에서도 그들을 투표로 지지해 준 세력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집단들 가운데는 역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왜곡된 형태의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에 대해서도 교회는 침묵했을 뿐만 아니라 지원하기까지 했다. 특히 KNCC계열에 반대하는 보수적 장로교회들은 박정희 정권을 반공산주의 정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원을 철회하지 않았다.
광주 학살의 원흉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또 정권을 찬탈하고 수많은 정치적 적대자들을 고문과 투옥으로 탄압했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교회의 지원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가 보안사령관으로 있을 때 그를 위한 기도회에 다수의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피 묻은 손에 신의 축복을 빌어 주기까지 했었다. 그들이 단지 섭섭해 했던 것은 그가 충실한 불교신자였다는 것과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보수적인 한국 교회의 지원은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이들 독재자들이 통치하는 동안에 보수적인 교회들은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이들 독재자들이 지배하던 시절에 여러 차례의 초대형 교회 집회들이 정부의 막강한 지원 하에 조직되었고 실천되었다. 빌리그래엄 전도 대회니 엑스포 대회니 하는 것들이 이런 독재자들의 물심양면의 지원 하에 이루어졌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의 보수주의적 정치체제는 그 동안의 말할 수 없는 왜곡과 시행착오를 범했지만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동시에 한국의 보수적인 개신교회들은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역대 군사 정권들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지원을 받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교 분리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이 왜곡되어 악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보수주의의 특성들
그러면 오늘날에 와서 왜 이러한 보수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보수주의 혹은 신보수주의의 특성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가지는 교회적 혹은 사회적 효과들은 어떤 것인가?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하고 미국에서는 이른바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ism)가 등장한다. 이들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으로서 우리는 당시 열광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히피들의 반문화 운동, 미국의 자본주의적 세계 지배에 항거하던 월남전 반대운동 그리고 젊은 층에서 열화같이 일어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비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권 운동들도 가세한다. 이러한 전반적 변혁 운동들이 미국 사회를 강타하자 여기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서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려는 운동으로서 신보수주의가 등장한다. 이러한 신보수주의의 이론적 대변자들은 과거에 다소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으나 역시 자유주의자들인 다니엘 벨, 피터 베거, 나단 글라츠, 마르틴 립셑, 에듀아드 실스 등을 들 수 있다.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카엘 노박 등도 이 집단에 속한다. 이들은 미국의 자본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서 다수의 잡지 등을 출간하면서 자신들의 사상을 미국 사회에 조직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이들 신보수주의를 지원하는 가장 강력한 종교 세력은 보수적 가톨릭교회와 함께 보수적인 남 침례교회와 루터교회 및 장로교회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지원을 받은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레이건의 당선은 이들 신보수주의 세력의 가장 찬란한 승리였었다.
이러한 신보수주의는 이념에 있어서는 ‘자유주의’를 따르고 있지만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왜 미국이라는 “자유로운 사회가 반자유적으로 움직이는가?“라는 물음을 통해서 자유주의라는 구조를 넘어서 해답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급진주의로부터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활동에 착수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주의의 옹호자로 나섰지만 그들은 또한 자유주의를 어느 정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정치적 사상은 점차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 하나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들로서 자유주의의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유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유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이다.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투쟁목표는 간단히 말해서 반공주의와 반민중주의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반공주의는 그들이 거부하고 있는 전체주의 개념과 맞물려 있다. 즉 공산주의는 파쇼주의와 나치즘이 모두 일당 지배 체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대하여야 할 정치적 체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체제야말로 자유민 주주 의적 정치체제와 가장 대립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다른 한편 반민중주의는 민주주의적 엘리트지배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적 엘리트 지배는 권력분립을 보장하고 있는 법치국가의 대의적 성격이 사회적 이해관계의 다원성과 함께 지도적 인물들의 이상적인 선별을 보장해 준다고 하는 데서 그 장점을 보고 있다. 신보수주의의 이와 같은 두개의 공통분모는 산업 분야에서 발전된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뭔가 모범적인 것으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념적으로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신보수주의는 독일의 경우는 자유민주당과 보수적인 기독교 민주당의 연정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정치사에 등장한다. 그 동안 자유주의를 이념으로 하고 있던 자유민주당은 사회당과 연정을 하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로 규정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 자유민주당이 기민당과 연정을 맺음으로써 자유주의는 더 이상 진보적 이념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철두철미 보수주의자들로 규정되게 되었다.
한국 보수주의의 특성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1960년대 이승만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치던 인사들은 예외 없이 자유민주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은 당시로서는 뭔가 진보적인 인사들로 평가되었었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의 확립(혹은 회복)을 그들의 정치적 목표로 삼았었다. 이승만의 의사 민주주의가 박정의 군사 정권에 의해서 붕괴되고 군사 독재가 지속되는 동안에도 진보적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민주회복”을 그들의 투쟁 구호로 사용했었다. 물론 4.19 이후에 소수의 젊은 학생들과 그 밖의 비합법적 운동 단체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민주주의 질서의 확립”을 군사 정권에 대항한 투쟁 구호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30여 년 간의 군사독재 정권이 지속되고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가 가진 실체들이 드러나던 8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정치사에서 커다란 변화가 도래한다. 자유민주주의와 거기에 기초한 시장경제 체제는 오늘날 허다한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억압적인 군사 정권이 내세우는 정치체제가 자유민주주의며 착취적인 시장경제 체제가 내세우는 것 역시 자유주의였기 때문이다. 이 때 사람들은 진정한 민주 질서의 회복과 함께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위한 기본 조건으로서 통일이 달성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이 때 진보적 인사들의 투쟁 구호는 “민족 통일”로 바뀐다. 통일 운동이 활화산과 같이 분출하면서 그 동안 민주 회복이란 구호에 머물려고 하던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들로 규정된다. 물론 보수적인 사람들도 통일과 그것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통일의 목표에는 진보적 인사들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민족의 대단결 보다는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로의 통일을 고려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들은 그 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을 통해서 진보적 인사들로 규정되었지만 이러한 통일 운동이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그들은 보수적 인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때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은 극우적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면 이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보수주의의 특성들은 어떤 것들이며 그것의 사회적 효과들은 어떤 것인가?
첫째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신보수주의의 특성으로서 우리는 탈집단화를 들 수 있다. 이미 앞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신보수주의의 이념은 철두철미 자유주의며 따라서 이 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에 기초하고 있다. 이 신보수주의자들은 집단주의를 철저히 거부한다. 그들이 반대하고 있는 공산주의도 그것이 전체주의 혹은 집단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독일과 같은 나라들에서 채택하고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 원리를 받아 드리지 않는 것 역시 이러한 달집단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이해관계에 있어서도 권리들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탈집단화 현상은 한국 개신교의 교회 조직에도 잘 나타나 있다. 총회나 노회와 같은 조직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체 혹은 개 교회를 전제로 한 것이다. 총회나 노회에서 결의되는 사안들은 이러한 개체나 개인주의와 모순되지 않는 것들에만 국한될 뿐이다. 그리고 집단적 의지가 표현되어야 할 것들이 결의된다 해도 개체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해 버리면 그만이다. 교회라고 하는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는 자세도 역시 개인적이다. 개인의 결단에 따라서 헌금을 내는 것이지 공동체가 결정하는 어떤 틀에 따라서 헌금을 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헌금이 낼 수 있는 종교적 효력도 개인적인 것과만 연관되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조직에서만이 아니다. 개신교회의 전통에서는 신과의 관계도 집단적 관계에서의 관계가 아니라 고독한 단독자로서 신과 대면하며 구원도 개인으로 받는다. 따라서 이러한 보수주의에서는 개인 구원만이 있을 뿐이며 사회 구원은 고려되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의 이러한 탈집단화 현상은 감리교회에서도 나타난다. 사실상 감리교회는 장로교회와는 달리 주교(감독)를 중심으로 한 집단 체제의 교회다.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집단적 이익을 대변하는 감독이 공동체의 건전한 형성을 위해서 목사들을 파송하고 또 그들의 삶의 조건도 시장 원리에 매끼지 않고 공동체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감리교회의 특징이다. 여기에는 모순점도 있지만 잘만 운영하면 감독 제도는 매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제도이다. 그러나 한국의 감리교회는 근래에 와서 그 조직과 실천에 있어서 탈집단주의적인 장로교회의 제도와 유사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에서는 권력과 도덕성의 일탈 현상이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다. 과거의 보수주의는 권력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려고 했었다. 따라서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권력은 사실상 그 권력으로서 자질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신보수주의에서 그러한 이해는 완전히 사라졌다. 신보수주의는 권력은 본질적으로 꼭 도덕적일 필요가 없다고 보며 따라서 권력은 그 자체로서 자기 완결적 실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예증해 주는 실례들은 얼마든지 발견된다. 즉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공산주의에 대해서 사용하던 무력행사들은 어떤 도덕적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은 제3세계의 독재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덕적 논거도 제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권력과 도덕의 일탈 현상과 관련해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재선의 실패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국의 보수적 투표자들은 권력의 도덕성을 강하게 주창하고 나온 지미 카터를 더 이상 그들의 대통령으로 뽑으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권력의 도덕적 기반 상실은 비단 미국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의 역대 정권들의 권력 행사에 대해서 도덕적 재가를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제게 된다. 그것은 비단 권력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폭력으로까지 사용했던 군사 독재 정권들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자명해 진다. 그 뿐인가? 정치적 허무주의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권력의 부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정권을 강탈한 군사 독재자들은 엄청난 부정 축재자들로 등장한 것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인가를 웅변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박정해, 전두환, 노태우등 정치군인들은 그 청렴성과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군인 정신을 완전히 상실한 타락한 사람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권력과 도덕의 일탈현상은 종교계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부패한 조계종 총무원장의 행태가 불교계에서 그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기독교계는 어떠한가? 여기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일부 총회장이나 감독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부도덕성은 널리 알려진 비밀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권모와 술수 그리고 모든 금전적 수단들이 동원된다. 종교계에서는 이러한 도덕성의 일탈을 뭔가 영적인 것으로 위장하려고 하는 시도까지 등장하고 있다.
셋째, 신보수주의의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업적을 미덕으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전통에 따르면 사람은 공로(업적)가 아니라 은총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세상에서의 모든 업적은 구원의 전제가 될 수 없고 단지 이웃에 대한 책임성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혁 교회 전통에서는 근검과 절약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이웃과 나누는 것을 예정된 사람의 징표로 생각했었다. 검소한 생활과 그것을 통해서 남는 재원을 타인과 나누는 것이 개혁교 윤리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과거의 보수주의자들은 절약하고 금욕적으로 사는 것을 가장 귀중한 그리스도인의 미덕으로 생각했었다. 이러한 전통을 개혁교 정통주의자들과 경건주의자들 모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의 생활도 금욕적 삶이 그들의 신앙생활의 기초였었다.
그런데 오늘날 신보수주의자들에게서는 그와는 정 반대되는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물질적 부를 향유하고 그것을 충분하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의 징표라는 것이다. 근검과 절약이 아니라 많이 벌어서 잘 살아가는 것을 신이 준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경제 원리가 교회 생활에도 철저하게 관철된다. 큰 교회 짓고 많은 성도들 모아서 많은 헌금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곧 목회에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목회에 성공한 사람들이 총회장도 노회장도 하고 교단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다. 업적주의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렇지 못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근검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성공한 목회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도 과소비하는 단체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금욕주의자들은 오히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러한 과도한 욕망의 충족과 소비 문화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고 지구의 미래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물질적 풍요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며 미래 세대에 대한 오늘날 세대의 무책임성으로 받아 드려지고 있다. 과거 보수주의자들의 금욕적 윤리가 오늘날에는 진보주의자들의 윤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보수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서 낙관적 태도를 취한다. 과거의 보수주의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했을 때 까무러치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세속화의 근원으로 보고 그것을 뭔가 반신적인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은 그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것에 의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만이 국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과학기술의 신화를 믿는 사람치고 보수적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보수주의의 특성들인 탈 공동체화, 권력과 도덕의 일탈, 탈 금욕주의 그리고 과학기술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 등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 가운데 피차 그 강도를 강화해 가고 있다. 탈공동체성은 권력과 도덕의 일탈을 가져오고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주의가 금욕주의적 세계관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반대의 도식들도 마찬가지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미래
우리는 앞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의 재편으로 요약되는 새로운 보수주의 물결이 가져다주는 교회적 사회적 효과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러한 신보수주의의 미래는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질서 개편 과정에서 틀이 짜인 이른바 세계 무역 기구(WTO)는 이러한 신보수주의의 관철을 위한 가장 확실한 장치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보수주의의 조류는 선진 강대국을 중심으로 해서 거세게 밀려올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국내시장의 예외 없는 개방 압력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신보수주의가 주장하고 있는 자유주의는 한마디로 체급 없이 자유로이 하는 권투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체급의 선수도 핵주먹을 가진 타이슨과 싸우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는 자명한 것이다.
그 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이론에서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정치 질서와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의 모순점들을 밝히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을 그 주된 사명으로 삼았었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창설 당시 제창한 세계교회협의회의 ‘책임 사회론’(Responsible Society)은 양대 세계대전이 가졌던 제국주의적 성격을 간파하고 그것을 막지 못한 유럽의 교회들의 책임성을 묻는 동시에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 사회와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구체적인 현장에서 책임적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들 가운데는 제3세계의 식민지적 상태에서의 해방과 함께 선진 공업 국가들에 의한 정치적 억압과 착취로 인한 빈곤의 문제를 개발의 신학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시도했었다.
1963년도 방콕의 세계선교대회에서 주제로 내건 “오늘의 구원론”(Salvation Today)은 그 동안 전통적 구원론(즉 영혼구원론)과 함께 사회 구원의 책임을 교회가 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여기서는 구원이란 시간 저편에 있는 뭔가 피안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차안에서의 인간다운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구원론은 통전적 구원론이다.
1960년대에 들어 와서 등장한 세계 교회 협의회의 사회 신학은 빈곤의 문제와 관련해서 주로 “사회 정의”(Social Justice)에 집중하고 있다. 앞서의 신보수주의의 교회적 사회적 효과에서 다루었던 탈공동체성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결과는 사회적 불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불의는 국가 안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 문제로 파악되었다. 여기에서 빈곤의 문제가 가진 심각한 신학적 주제로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빈곤은 아시아나 혹은 아프리카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서 선택된 빈곤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빈곤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서 발생하는 “만들어지는 빈곤”(Poverty made)을 말한다. 이러한 빈부의 엄청난 격차로 발생되는 사회적 평화의 파괴는 결과적으로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론에서 “사회 정의”를 우선적 과제로 다루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는 60년대에 제시했던 개발의 신학의 문제에서 오늘날의 과학기술의 실체를 파악하고 “지속가능한 사회”(Sustainable Society)를 제창하게 된 것이다. 빈곤의 문제를 단순히 개발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자원의 고갈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인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사실상 개발의 신학은 신보수주의적 미래 논리에 말려들었던 결과였었다.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가 이른바 “창조질서의 보전”이라고 하는 신학적 도식이었다. 창조 질서의 보전 없이는 인류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었다.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이론의 중심적 주제로 다루어져 오던 동서 냉전 체제의 문제가 80년대에 들어와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등장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유럽과 미국의 평화 운동과 손을 잡고 이것의 극복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 결과로서 등장한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이론이 “정의, 평화, 창조직서의 보전”으로 나타났다. 이 세 가지 분야가 오늘날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합해서 해결해 나가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1990년 서울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다.
결 어
이렇게 볼 때 에큐메니칼 운동은 오늘날 새로운 질서 개편 과정에서 불어 닥치는 신보수의의 역풍을 안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동안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러한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과 손을 잡고 탈 공동체적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책임사회 구현을 위해서 노력했다. 과학기술의 신화에 사로잡힌 개발이데올로기의 숨은 정체를 폭로하고 기술 진보가 가져다줄 묵시문학적 재앙을 밝히고 새로운 금욕적 삶이야말로 미래를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같이 나누었다.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과 손을 잡고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지난 50여 년 동안의 권력의 탈 도덕적 남용에 대항해서 힘든 투쟁을 계속해 왔다.
시행착오도 많았고 인적 요인으로 인한 장애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복음과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이제까지 걸어온 길 가운데서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전”이라고 하는 과제들을 우리의 현실에서 보다 구체적인 프로그람을 통해서 추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특히 평화 문제와 관련해서 남북의 통일을 달성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가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주어져 있다. 그 동안 희년 운동을 통해서 이 과제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담당해 오고 있지만 만족하다고 자평하기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많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런 모든 과제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들과 물적 자원들을 필요로 한다. 그 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은 해외 원조에 과도하게 의존함으로써 이러한 물적 토대를 장만하는 데 게을리 했다고 보여진다. 해외에서의 지원들이 끊어지면서 KNCC 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칼 단체들은 일차적으로 재정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또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아니 교단의 운동이라기보다는 교단의 엘리트들의 운동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다. 에큐메니칼 정신과 그 실천이 교단이나 개 교회들에 확산되어 나가지 않고 있다. 그것은 교단들이 이러한 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당한 수 있는 부서나 인원들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저변 화대의 실패는 앞서 언급한바 있는 물적 토대 형성에도 실패하게 만들었다. 중요한 사회 신학적 방향들을 발굴해 내는 지적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장들과 사람들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일을 위해서는 지금 가지의 엘리트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양하고 이 운동을 한국의 교회운동으로 정착시키는 작업부터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