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993년 2월 독일의 “인간다운 죽음을 위한 단체”의 의장인 아트로트(Hans Henning Atrott)가 체포되었다. 의사인 그는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락되지 않고 있는 독일에서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죽음을 원했던 사람들로부터 그 대가로 엄청난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불치의 병에 걸려서 괴로워하거나 인생살이에 지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청산가리(Kaliumcyanid)를 제공해서 죽게끔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1500 마르크에서 4000마르크(약 200만원)까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청산가리는 편안한 죽음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소개되었지만 전문가들에 의하면 죽을 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먹고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자기가 그렇게 한 것은 병으로 괴로워하고 또 인생살이에 지쳐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편안히 죽도록 도와주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그가 받은 돈의 액수는 그가 노력한 대가로서는 좀 많기는 하지만 그 돈은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의 것으로서 그들은 더 이상 그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취했다는 것이다. 죽는 사람들에게는 돈의 액수의 많고 적음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상거래에서 적정한 가격의 결정은 앞으로 계속 살아갈 사람에게나 해당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양심”에 꺼리는 일이란 하지 않았고 오히려 괴로운 사람들을 그 괴로움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의사는 산 사람의 질병을 치료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을 편히 죽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에서 아트로트가 말하고 있는 “양심”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의 현대의술에서 제기되고 있는 윤리적 문제들, 예를 들면 낙태문제, 안락사의 문제, 인공수정과 뇌사 및 장기이식 등의 문제들에 있어서 기독교적 양심이란 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일까? 의술에서 병을 치료해서 살리는 것만 양심적인 것이고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죽도록 돕는 것”은 양심적이 아닌 것인가? 또 기독교적 양심이란 현대의학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 가운데 어떤 판단기준과 행동기준을 제공하고 있는가?
현대의술의 특징들:
우리는 오늘날 과학기술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알고자 하는 것은 거의 다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미신이나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그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시대는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다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은 시대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의 특징이다.
따라서 현대의술은 우선 현대과학기술의 발전과 같은 수준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현대의학은 다양한 인접학문의 발전을 통해서 인간의 신체의 구조들과 그것들이 갖고 있는 제반 기능들을 밝혀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신체의 제반 기능들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기술들도 발견했다. 그리고 현대의학은 나아가서 인간의 신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들도 해명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신체의 다양한 질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들과 약물들을 개발해냈다. 따라서 암이나 에이즈 등 몇 가지 특수한 질병들을 제외하고는 치료하지 못하는 질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학의 이상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까지 같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의학은 인간이 태어나는 일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일까지를 모두 조정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인공수수정은 이제는 일반화된 추세이다. 여러 가지 신체적 구조의 장애로 임신하지 못하는 남녀들을 도와서 의사들은 인공으로 수정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는 체외수정도 포함된다. 따라서 현대의학은 생명의 출발에서부터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서론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고통 받는 생명을 중지시키는 일예를 들면 안락사와 같은 것도 현대의학에서는 하나의 과제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경우 의사들은 생명을 단절시키는 일에 관여하게 된다. 물론 안락사를 돕는 데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따른다. 첫째 가족이 아니라 환자 자신이 안락사를 원해야 한다. 따라서 환자 자신이 안락사를 반복해서 원해야 하며 이 경우 외부의 압력 예를 들면 가족들의 압력은 배제된다. 둘째 안락사 환자를 다루는 의사는 화자들에게 안락사에 대안 예를 들면 통증치료와 같은 것을 자세히 알려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동료의사들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의사는 이러한 안락사시행을 담당판사에게 알려야 한다.
한걸음 나아가서 뇌사자들의 장기이식 시술은 선진국의 의학계에서는 거의 일반화된 추세에 있다. 의학기술적 측면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장기들을 불치의 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이식시켜줌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것은 이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고 있으며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크게 권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뇌사를 죽음으로 판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윤리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말하자면 심장은 뛰고 있으나 뇌는 죽었을 경우 이런 상태에 있는 환자를 죽은 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산 자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판단은 각기 처한 사회의 문화적 윤리적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과학기술에 기초한 낙관적 신념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현대의학으로 하여금 인간의 생명의 모습을 자의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유전공학적 조작(manipulation)을 통해서 현대의학은 인간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DNA 조작을 통해서 선대에서 가졌던 여러 가지 신체 기능적 결함들을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공학적 조작은 식물계에서는 이미 일반적으로 응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전공학적 조작을 통해서 보통 보다 3배이상 더 큰 토마토를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작을 통해서 생산량도 크게 늘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신체에 이러한 유전공학적 조작이 가져다 줄 결과들을 우리는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체중이 2-300 킬로나 나가는 거인을 만들어 낸다든지 또는 꼭 같이 생긴 인간들을 수십명 내지 수백 명씩 만들어 낸다고 할 때 발생하는 결과들은 어떤 것일까? 또는 특정 스포츠를 잘 할 수 있는 인간들을 만들어낼 경우 어떤 결과들이 생길 것인가? 거인들의 출현이 가져다줄 사회적 결과들은 우리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가기 위한 제반 조건들의 변화를 우선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입고 막고 자고 하는 모든 기본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도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야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발산업에서도 그들에게 맞는 신발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산구조를 바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동일하게 생긴 사람들이 한 200명 정도 존재한다면 그들이 인간으로서 겪어야 할 주체성(Identity)의 문제가 심각할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쌍둥이들이 파생시키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스포츠계에서는 인간의 신체의 능력에 대한 조작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예를 들면 업적을 올리기 위해서 특정한 신체부위가 발달한 인간을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약물을 복용하는 것이다.
판단과 행동의 정향으로서 기독교적 양심
양심이란 개념은 서구전통에서는 문화사적으로 볼 때 양심형성(Gewissensbildung), 양심속박(Gewissensbindung) 그리고 양심의 오류(Gewissensirrtum)라고 하는 세 가지 요소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양심형성이라는 것은 우선 그리스와 기독교적 전통 내에서의 개인의 양심의 형성으로서 등장하며 그 다음으로는 개개 인간의 삶의 역사에서 개인적 양심의 형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양심형성은 서구기독교 전통에서는 강한 개체화를 전제로 하고 있고 따라서 양심과 인격은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된다. 특히 서구의 계몽주의 이후에는 양심은 단지 개개인의 양심으로서만 성립된다. 즉 개개인은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양심은 인간의 인격적 주체성이 언제나 질적인 주체성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양심은 인간의 윤리적 판단이나 행동에 있어서 자기 자신과의 일치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양심이라고 하는 스스로 거역할 수 없는 권위 앞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심이 인간 스스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신학에서는 이러한 사고는 흔히 양심의 권위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고 잏는 것으로서 규정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신학에 있어서도 양심은 계몽주의 이래로 전적으로 개인의 양심이지 공동체나 기독교의 양심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더불어 교회의 양심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의 일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논의되었다. 양심이 어떤 책임적인 것에 대한 대답을 주어야 한다면 여기서는 단순한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결단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양심”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해방된 양심으로서 “삶의 법칙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경고자로서” 존재해야 할 경우, 예를 들면 독일의 제3제국 당시의 유대인 학살의 경우 개인적인 양심의 영역에만 머물 수 없고 집단적 양심의 소리를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적-기독교적 양심의 발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역에서는 대표적으로 “인종차별문제”를 다룰 때 등장했었다.
그러나 양심이 하나님에 대한 호소로 나타나거나 그리스도가 양심을 움직인다고 할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일까?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계몽주의 이래로 인간의 개체성의 역사적 발전은 집단적 양심결단을 등한시 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양심형성은 한편으로는 문화나 종교와 같은 공통적인 것을 통해서 규정되고 다른 한편 인격적 성향이나 교육과 같은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다. 일정한 문화영역이나 일정한 교회적 전통 내에서의 양심형성은 개개인의 양심에 보편적인 양심을 매개하는 것이다.
양심결단은 그 결단을 내리는 사람에게만 구속력을 가진다. 인간은 자신의 양심에 대한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양심결단과 양심판단들은 양도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책임하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양심구속력이 가지는 개체성은 다른 사람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데서 양심을 상대화한다. 따라서 양심결단의 개체성은 그것이 가지는 주관성 때문에 양심결단 자체를 상대화 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양심결단들이 모두 보편타당한 법정이 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양심은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양심이란 것은 실상 다른 사람들이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에 대해서만 무조건적 권위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오류는 전적으로 배제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양심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며 “양심은 법정적일 수가 없다”는 골비쳐의 말은 타당성을 가진다.
과거에는 단지 예외적으로만 받아들여졌던 양심의 존중이 근대에 와서 중요시되게 된다. 종교개혁 당시만 해도 양심은 도덕과 종교에서 보편적인 것과 일치하는 경우에 한해서 존중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개신교들의 출현과 함께 그리고 정치적 영역에서는 관용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양심에 대한 존중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헤겔이나 그를 따르던 개신교 전통에서도 승인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에 대해서 양심이나 행동하는 개체가 아무런 권리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계몽주의에 와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교회와 신학적 전통에 반대해서 양심에 대한 존경과 거기에 따른 양심의 자유가 관철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루터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개인의 불가침의 권리로서의 양심의 자유를 위한 길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서구 역사에서 양심은 진리판단과 그것을 향한 행동의 기본적 정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계몽주의 이래로 개인화 내지는 내면화됨으로써 그 판단은 매우 주관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개신교 전통에서 일정한 교파를 선택하는 기준도 양심이 그 기초가 되었고 여기에서 이른바 “신앙양심”이라고 하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양심개념의 개체화는 한편으로는 양심의 중요성에 역점을 두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양심의 상대화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심의 상대화는 상대방의 다른 양심에 대한 존중이 불가피하다는 차원에서 관용이라는 새로운 삶의 형식이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제기되는 문제는 양심의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양심의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
양심이 과도하게 개개인의 내면적 판단의 문제가 된다면 여기서는 양심판단이 가지고 있는 객관성의 문제 즉 보편타당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위에 서론에서 언급한바 있는 의사가 내세우고 있는 “양심”을 우리가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청산가리를 주어 죽음을 돕는 행위가 객관적으로 양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는 실증법의 위반이라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 많은 의의제기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즉 아무리 심각한 중병에 걸렸다 해도 인간의 생명을 자의적으로 단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 의사는 양심에 반해서 사물을 판단했고 행동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렇게 심각한 불치에 병에 걸려서 고생하는 사람의 소원 즉 스스로는 죽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중지시켜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양심적이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양심들의 판단이 존재할 수 있고 동시에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서 결단해야 하는 실천적 상황에도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로서 불치의 병에 시달리는 사람의 간절한 소망이 죽음이라면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양심적인가 아니면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양심적인가?
이런 경우 우리는 양심의 문제를 객관적인 차원에만 가두어 둘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락사가 실증법에 의해서 허락된다면 결단은 의사의 개인적인 양심에 의해서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차원은 좀 다르기는 하지만 낙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양심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보편타당성을 요구하고 있는 차원도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종차별이나 노예제도와 같은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오지 못하게 하는 콩고조약이 맺어지기 전에는 노예제도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할 비인간적인 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사냥을 한다면 누구도 그것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심형성이 문화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나치 하에서 유대인의 대량학살 같은 것은 단순한 개인양심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안에 있어서는 양심은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심이란 개념이 가지는 매우 주관적인 성격과 함께 그것이 가지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성격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양심의 주관성이 강조되면 될수록 우리는 양심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 예가 앞서 말한 의사의 경우다. 그리고 나치 하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장교들 가운데 자기들이 한 일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수전노와 고리대금업자로서 인간 쓰레기였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것은 양심을 과도하게 주관적 차원에서 보고 있는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양심이라고 하는 인간의 내면적 세계가 갖고 있는 판단력과 행동정향에서 가져야 할 보다 객관적인 지평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양심을 개인의 주관적 영역에만 마껴 두는 데서 제기된 또 하나의 예가 핵무기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판단이다. 1959년 서독에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되면서 교회 안에서는 찬반논쟁이 심각하게 일어났었다. 핵무기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핵무장을 찬성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서독교회는 양분화 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이른바 하이델베르크 논제가 발표되었다. 이 논제는 어떤 하나의 입장을 지지할 수 없는 처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서로 대립하는 양측의 견해를 조정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반대하는 것도 그리고 핵무기를 가지고 자유를 수호하려고 하는 것도 기독교적 행동양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말하자면 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핵무기 반대가 기독교적 행동양식이라 전제하고 나서 핵무기를 가지고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주장도 받아들여서 핵무기를 가지고 자유를 지키는 것도 기독교적 행동양식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핵무기에 대한 판단은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의 양심에 따라서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있다는 어정쩡한 대답을 제시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교회는 분명한 입장을 피하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식으로 얼버무린 것이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양심의 객관적 판단을 보류하고 모든 것을 주관적 판단에 마껴 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는 분명했다. 핵무기에 대한 찬반논쟁은 계속되었고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교사직(Lehramt)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분명하게 낙태를 반대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그 딜렘마를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핵무기의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의 양심판단에 마낀 것이 얼마나 심각한 양심오류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그 후의 결과들에서 잘 나타난다. 말하자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적개심에 불타는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한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지금까지 현대의술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 즉 인간의 신체를 자의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런 인간신체에 대한 조작가능성을 우리는 개개인의 양심에만 마껴 두어서 되는 것일까? 개개인의 양심이 주관적이면 주관적일 수록 양심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도 몇 가지 실례에서 살펴본바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양심이 보다 확실한 진리판단이 되고 행동정향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객관적인 지평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객관적 지평으로서 우리는 성서와 기독교 전통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양심”이라고 하는 명제를 말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제반 문제들 예를 들면 인공수정이나 낙태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의견일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적 양심이라고 말할지라도 이런 문제를 다룰 때는 매우 주관적인 입장에 서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특히 개신교의 전통에서 그러하다. 그 까닭은 신앙과 구원의 문제를 가톨릭교회에서처럼 제도로서의 교회의 가르침에서 그 기준을 보려고 하지 않고 개개인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와 기독교적 전통에 기초하면서 동시에 인간이성에 기초한 현대적 가치들을 원용하여 기독교적 양심의 객관성의 토대를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오늘날 과학기술 시대의 제반 새로운 문제들을 모두 대답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인류가 추구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체계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의학에서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도 기독교적 양심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 그리고 현대적 가치체계를 통해서 객관적 준거를 확보함으로써 양심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에서 이런 객관적 조건들이 구비되지 않을 때는 주관적으로 결단함과 동시에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기독교 양심이 갈 길이 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