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공성의 일반적 개념규정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의 핵심 내용인 하나님 나라를 이 지상에 건설하는 것(마가 1:15)이 오늘날 그리스도인교인들의 궁극적 실천과제라는 것을 전재로 하고 이 책을 고 있다. 말하자면 지상에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야 말로 그리스도교회 아니 그리스도교 사회윤리의 실천목표라는 것이다.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이상들이나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성서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교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꿈이고 희망이다. 여기서 필자는 지상에 이 하나님 나라실현을 특정의 종교적 집단, 즉 그리스도교 교회만이 추구하고 실현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동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 나라 이상은 비단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집단인 교회나 그리스도인들만의 독점적 과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특정한 종교나 교회라는 틀에서만 논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전 세계와 전체 인류를 위해서 그들 인류와 더불어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일(opus Dei)이고 하나님의 선교사업(missio Dei)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보편적 세계통치의 내용이고 목표며 따라서 전체 인류들에게는 보편적이고 따라서 공공적 성격을 띠는 개념이다. 필자는 그동안 이 하나님이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그의 나라의 의미를 우리가 오늘날 말하고 있는 중요한 정치철학의 개념인 공공성 개념과 결합시켜서 신학적으로 고찰해 왔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 특정 국가나 종교가 독점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공적 성격을 띤 개념이고 따라서 이 세계에서 인간들 사이의 제반 관계들, 특히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관계에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구유럽에서는 공공성이란 개념은 근대적 의미에서 계몽주의 이래로 특히 프랑스 혁명이후 절대군주체제들이 붕괴되면서 등장한 정치적 개념이며 근대 민주주주의의 정치적 과정들에서 모든 시민들이 같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 삶의 목표로서 사용해 오고 있다. 공공성이란 정치적으로 과거 봉건주의 시대나 절대군주 체제에서 신분적 우선권이나 특권이나 경제적 시장적 독점을 지양하고, 모든 시민들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열린 공간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삶의 모델을 의미한다. 이 공공성 개념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그리스도교적 이상처럼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민주주주의 국가나 사회의 이상을 지향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실현해 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역사 일반에서는 인문주의나 계몽주의 그리고 그 결과로 등장한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는 공공성의 형태로 실현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향성은 오늘날 국가들의 공공성의 지향성과 같은 그 방향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공공성 개념을 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우선 공공성이라는 개념정의로부터 출발해 보자. 일반적 사전적 의미에서 공공성이란 개념은 “뭔가 공개된 것, 사실적으로 알려진 것, 혹은 어떤 경우에도 누구나 접근 가능한 것, 널리 알려진 것의 속성 - 혹은 드러난 것, 사실적으로 알려진 것 혹은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 안에 있는 영역을 말한다.”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공개되고 접근가능하며 잘 알려진 삶의 영역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공성 내지는 공적 영역이라고 말한다. 정치적 영역에서 그 의미는 좀더 구체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다른 사전에 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공공적인 것은 1. 누구나 듣거나 볼 수 있는 것. 2. 개인이 아니라 많은 사람 혹은 전체 대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3. 국가나 공공기관들과 관련된 사안들 등이다.
독일의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그의 “영구 평화이론”에서 인간들의 공공적 권리의 초월적 원리를 발전시키면서 공공성을 다음과 같이 소극적으로 기술한다. “다른 사람들의 공적 권리들과 관련된 행위들에서 공공성과 합치되지 않는 것들의 원리는 부당하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공공성에 합치하지 않는 어떤 사적 권리, 즉 특권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공공성을 필요로 하는 모든 원리들은(그것들의 목적에 타당하기 위해서) 법과 정치와 합치된다.” 다른 말로 하면 법과 정치는 공공성과 합치되는데서 그 정당성을 가는다는 것이다. 의회에서의 법제정이나 행정부의 정치적 법집행 행위가 공공성에 부합하지 않고 어떤 개인의 사적 권익이나 특정집단의 이익에만 부합하는 것은 공공성을 상실한 것이며 따라서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공성을 결여한 재판, 예를 들면 비밀재판이나 공익에 벗어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재판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의 공적 권리가 공공성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은 곧 그 권리가 대중의 보편적 목적들, 즉 공적 관심사 말하자면 공공의 복리를 지향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칸트는 전정한 정치행위란 공적 권리의 이념과 일치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부연하자면 국가의 공적 권리의 행사인 정치는 공적 견해(öffentliche Meinung) 즉 국민들의 여론에 상응해야 하고 공공의 복리를 위해서 공적 봉사(öffentlicher Dienst)를 할 때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에게서는 공공성은 “정치적 지배의 합리화의 원리다.” 따라서 정치적 지배의 합리성이란 곧 특정한 정치집단이나 정당이 대중들의 공적 권리, 공공의 관심사(여론)와 공공의 복리(봉사)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시민의 해방과 더불어 등장한 부르주아적 사회를 구성하는 국가는 이러한 공공성을 일반적 법이라는 형식과 결합시켜야 했다. 말하자면 국가의 법제정과 법집행은 공공성, 즉 시민들의 공동의 관심사들과 이익들을 대변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특정한 지역민들이나 권력층이나 특정한 재벌들을 위해서 법이 제정되고 집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이며 따라서 반미주적이며 독재가 된다.
따라서 오늘날 국가의 제반 행위는 보편적 법률체제에 속박되어야 하기 때문에 Kant는 법치국가성이라는 원리를 도입하는데, 여기서 국가의 강제와 시민적 자유가 서로 매개된다. 법치국가성도 거기에서 공공성이라는 기본원리가 관철될 때 합법성과 함께 정당성을 갖는다. 보편적 법에서 이러한 필연성과 자유의 매개는 공공성에서는 정치와 도덕의 매개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치국가라는 사고에서도 공공성의 요청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공공성이란 개념은 한국에서는 공론장이론으로도 번역되는데 앞서 이 장 초반에서 언급한대로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 이후 근래에 와서는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되었다. 하버마스는 우선 18.19세기 유럽에서의 공공성 개념의 구조변화를 추적하는 역사적 연구로부터 출발한다. 공공성 혹은 공공영역은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그 사이에서 “여론과 같은 것이 형성되는 사회적 삶의 영역”이다. 18세기 이전 절대군주체제 하에서의 공공성이란 왕이나 귀족, 공위성직자 등에 의해서 연출된 일종의 “과시적 공공성”(誇示的 公共性)을 거쳐서,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이들 제1.2 계급들이 몰락하고 나서 등장한 제3계급들, 즉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공공성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는 공공성은 사적 개인들의 영역으로 나타나며 그 형태는 문예적 공론장(文藝的 公論場)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르주아적 공공성은 19세기 중엽부터 당시 유럽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제반 혁명적 과정들을 거치면서 문예적 공론의 장을 탈피하고 정치적 공론의 장으로 바뀌어간다.
이러한 정치적 공론장은 부르주아적 법치국가에서도 공론의 장의 제도적 모순들, 즉 제한된 자유,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 성적 불평등 등의 모순된 형태로 나타난다. 조직화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공론의 장은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고 관료체제를 옹호하게 되는데 이를 하버마스는 ‘정치적 공론장의 再封建化“라고 했다. 그 후 기술관료 체제의 확장과 더불어 정치적 공론영역은 위축되고 기술적 합리성에 의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화되면서 정치적 실천의 영역도 도구적 기술의 영역으로 변환된다. 그 결과 정치의 과학화가 진행되면서 왜곡된 의사소통기구가 심화된다. 즉 공론의 장이 거대 자본과 시장에 의해서 조정되는 여론매체에 종속된다. 그 결과 공론의 장은 권력화한 투기장으로 전락하고 공중은 적극적 공중에서 개인주의적 공중으로, 문화비판적 공중은 문화 소비적 공중으로 변모한다. 그 결과 상호이해를 추구하는 의사소통적 생활세계는 화폐와 권력에 의해서 철저히 장악되는데 그것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植民地化”라고 한다.
오늘날 새롭게 국가와 분리되면서 등장한 시민사회는 국가와 자본이라는 두 축이 가지고 있는 제반 모순들에 대향하여 생활세계에서 의소소통의 계기를 재 활성화함으로써 정치와 도덕의 영역에서 이성에 의한 정당성의 기초를 확보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시민사회의 공론의 장이 정당성 확보의 장이 되어야한다. “공론의 장은 민주주의 질서 속에서 담론과정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주는 유일한 장이며, 이성적 담론을 통한 합의야말로 하버마스에게는 정당성의 최종근거이다.” 그러나 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의 장은 무시간적이거나 무역사적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그 자체가 본래적 정당성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권력이나 시장만능주의 사고들의 위협과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국가권력이나 시장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매스미디어들의 여론조작이나 왜곡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비판적 이성이라는 도구를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공공성이라는 공적 이익의 영역이 사익만을 추구하는 사적 영역에 의해서 점령당하거나 공공의 영역인 우리의 생활세계가 다시 식민지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2. 공공성의 성서적 개념규정
신구약성서에는 창조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보편적 의지의 표현으로서 공공성의 실현이 중심적 주제를 형성한다. 하나님은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거기에 인간과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을 창조하심으로써 모든 만물이 살아갈 수 있는 보편적이고 공적인 영역, 창조의 세계를 만드신다. 하나님의 창조 혹은 개벽이라는 이 열린 세상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 인간과 동식물과 자연을 위한 공공의 영역이다. 인간이 홀로 동물의 세계를 독점하거나 아니면 자연계를 마음대로 점령하고 파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 1:28)고 한 말씀에서 땅을 정복하고 거기 사는 생물들을 다스리라는 헤브라이어의 원래의 뜻을 그 동안 서구의 신학에서는 데카르트(Decart)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서 잘못 번역한 것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번역한다면 인간들은 그 땅을 경작하고 생물들과 자연을 돌보라는 뜻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개벽(開闢)의 영역인 창조의 세계는 만물을 위한 열려 있는 하늘이고 열려 있는 땅이다. 이 열린 공간으로서 창조세계는 누구에게나 허락된 간이며, 따라서 특정 인간이나 집단이나 국가에 의해서 차단되거나 독점 될 수 없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공성의 장, 공익의 장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물에게 개방된 공공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는 창세기 1장의 보도에서 그 주인은 하나님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창조된 공적 영역은 인간들의 사적 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따라서 성서에 의하면 이 세계는 인간의 사적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 즉 공적 영역이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들과 동물들을 포함한 모든 만물들의 공생을 위한 영역인 것이다. 창조세계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 세계 어디에도 인간의 사적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자 캘빈이 그렇게도 강하게 주창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개념도 십계명의 제1계명에 근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공공성의 영역이 다른 신들이나 우상들에 의해서 탈취당하거나 아니면 인간들에 의해서 사유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가 주장하는 “인간의 전적 타락”도 공공성의 개념에서 해석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공적 영역을 사유화하려는 욕망을 종교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 만물들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6-27). 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모든 만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적 본체인데 그 내용은 사적인 것, 어떤 숨겨진 것, 어떤 접근 불가능한 것, 어떤 특권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 드러나 있는 것, 접근 가능한 것, 보편적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전처럼 인간만이 가지는 어떤 특권적인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이해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는 개념은 모든 생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창조에서 만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누구에게나 개방적인 것이고 개방적인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탐욕으로 인해서 그의 창조의 공적 영역이 인간들에 의해서 파괴당하고 그 결과 인간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다시 회복시켜준다. 인간의 타락이란 곧 공공성의 파괴를 의미한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곧 구원이다. “주님은 넘어지는 피조물들을 모두 붙들어주시며, 짓눌린 모든 사람을 모두 일으켜 세우신다.”(시편 145:14). 이 회복의 사건이 그의 나라의 건설이요 인간들의 구원행위다. 창세기는 아담의 타락사건을 통해서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형상, 즉 공공성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 즉 공공성을 상실하고 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난 아담의 타락이라는 상징적 사건이나 인간의 죄 된 성품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 즉 공적인 것을 사유화하고 독점화하고 탈취하고 점령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사건은 하나님의 공공성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인간세계의 공공성에 대한 도전이다. 그는 하나님의 공공성에 도전함으로써 인간의 세계의 공공성에 도전한다. 그는 하나님이 금지한 생명나무의 과일의 탈취를 통해서 그에게서 소외되고 그 아들 가인은 동생을 살해를 통해서 그 동생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 즉 공공성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출애굽기는 이 공공성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타락한 인간사에서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을 노예화하고, 그들이 가진 것을 탈취하고 나아가서 강대국가가 약소국가들을 점령하는 종족적 내지는 민족적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 구원해 냄으로써 인류사에서 하나님의 공공성 회복 즉 해방의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해방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출애굽기의 해방사건은 인간들의 공공성의 회복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내리라”(출 3:7-8). 여기서 이 해방사건이야 말로 인간들의 죄와 탐욕에 의한 사유화에서부터 공공성을 지향하는 역사 즉 구원(회복)의 사건이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자파들에게 공공성의 원리에 따라서 공정하게 분배하고, 또 각각의 지파들은 그 땅을 지파구성원들에게 분배하여 살게 하였다. 그들은 7년마다 안식년을 두어 그 땅을 쉬게 하고 49년마다 희년을 두어 그 땅의 소유관계가 불공평해지는 것을 방지했었다. 희년은 한마디로 해서 그 동안 왜곡된 소유관계들을 원상으로 복구하여 먹고 사는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없게 하는 법률제도이다. “ 너희는 서로 이웃에게서 부당하게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세운 규례를 따라서 살고, 내가 명한 법도를 지켜서 그대로 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그 땅에서 너희가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레위기 26:17-18).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의 토지나 물건들을 부당하게 탈취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세운 규례와 법도대로 살아야만 그 땅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회적 평화가 절대적 삶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성 사상은 무엇보다도 구약성서의 율법들 가운데 “사회법”(Social Law)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이 사회법은 토지나 유산과 같은 것들을 가지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은 보호하는 법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사회법에서는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인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이 보호의 중심적 대상이 되어야 했었다.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신명기 14:29). 사회법은 토지를 분배받지 못했던 사제지파인 레위인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이 아니 나그네들이나 외국인들 그리고 고아나 과부와 같이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공공성을 담보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약자들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예언서들에 나타나 있는 사회정의의 문제를 공공성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자.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고 종족 내지 민족국가를 형성했을 때 제기되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 불의의 문제였다.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관료체제를 강화해 가면서 백성들을 온갖 종류의 이름으로 동원하고 또 국가의 막대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엄청난 과세를 부과했었다. 특히 솔로몬 시대에 와서 성전과 궁전건축 등 수 많은 토목사업, 호사스런 궁중생활(아랍인들을 흉내 낸 후궁들을 둔 밀로궁), 므깃도 등에 막강한 군비시설을 만들고 군대와 군비의 증강 등으로 인해서 백성들은 말할 수 없이 수탈당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고 특히 유다와 베냐민 등 두 지파가 특권계급으로 등장하자, 다른 10개 지파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었다. 솔로몬 사후에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차지하려할 때 세겜에서 모인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은 분열되어 두 지파는 남 유다로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우고 10개 지파는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세움으로써 국가는 분열된다. 그 결과 솔로몬 이후 나라는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비극은 그 후에 형제국가 간에 수 없는 전쟁을 치르게 했다. 또 그들 분열된 두 왕국들,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은 백성들을 향해서 잘못된 권력행사와 사회적 경제적 불의를 감행했고 그들은 마침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모두 망하고 만다.
또 종교와 그 지도자들은 솔로몬 왕 이래서 권력형성에 앞잡이가 되어 하나님 예배라고 하는 이름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억압하고 갈취했다. 분열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국가들의 왕들은 다른 이웃의 이방나라들처럼 폭정을 일삼게 된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들은 이러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사회정치적 불의 특히 제사장들의 불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벌리는 종교적 절기행사들이 싫고 역겹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드리는 짐승도 싫고 시끄러운 노랫소리도 집어치워라. 거문고 소리도 듣기 싫다. 너희는 오직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하라”(암 5:21-24). 공공성이 상실된 나라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서 망했다는 것이 예언자들의 증언이다. 따라서 사회정의를 상실한 하나님 예배는 무의미하고 인간들 사이의 정의 즉 공공성보다 예배가 선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예배를 내세우며 불의를 감행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행위를 먼저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태 5:23-24). 사회법이 예식법(예배)에 선행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예수는 사회법이 성결법에 선행한다고 본 것이다.(마가 7장).
마지막으로 신약성서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 즉 공공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은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는 대로 전체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공공성을 파괴하고 지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의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한 3:16).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지의 보편성 아니 공공성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이 죄와 사망, 하나님의 형상인 공공성을 버리고 사익에 빠져서 생기는 인간들 사이의 제반 갈등들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즉 공공성의 회복을 위한 사건이며 바로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과 회복의 사건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거대한 화해의 사건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 5:17-19) 인간의 죄와 탐욕으로 인하여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 즉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에 보면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골 1:15)라고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분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성육신 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구원(해방)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실현은 곧 그의 형상의 내용인 공공성의 실현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육신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출현 역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세계와 인류를 위한 구원행위이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의 신도들은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구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공공성을 회복하는 생활을 하려고 했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행전 4:33-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임박한 종말론의 영향을 받아서 자기의 소유를 공공의 소유로 만들었고 따라서 원시적이긴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는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없는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신구약성서의 이상, 즉 공공성을 회복하여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 같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이 사실적으로 실천되지 않았고 단지 하나의 이상적 꿈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이러한 공동체 생활은 실제로 존재했었으나 그 후 시간이 감에 따라서 교회가 점차 로마제국의 세계에 정착되어가면서 그리고 나중에는 공적 종교로 인정되어 특권을 누리면서 그 이상과 실천이 퇴색되고 마침내 제국종교가 됨으로서 그 이상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민중의 종교로부터 지배자의 종교로 변위되어가면서 그 본래의 정체성과 실천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 28:18-20). 여기서 “공공성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위탁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에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가능성들을 전 인류에게 제공해야 할 그의 과제를 갖게 된다.” 여기서 공공성의 회복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선포는 첫째 그 대상을 전 세계인류로 하고 있고 둘째 그 내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구원의 메시지의 내용과 대상은 전적으로 누구에게 열려져 있기 때문에 공공적인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
신약성서 특히 마태복음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 개념들 가운데 20장에 나타난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마태 20:1-16)와 “세베대의 두 아들들의 요구들”(마태 20: 20-28)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른 성서구절들과는 달리 그 나라의 현실을 우리 인간의 (나라)현실과 관련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원리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직접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선 우리가 실현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경제원리부터 살펴보자.
마태복음 20장 1-16절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에서는 그 주인이 아침 일찍 거리에 나가서 첫 일꾼들을 아마도 7시경에 포도원에 보내고, 다시 나가서 9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주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노임을 약속한다. 일이 끝나자 당시의 관례에 따라서 해지기 전에 노동자들에게 노임을 지급하는데(레위기 19:13; 신명기 24:15) 주인은 제일 늦게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에게 약속한 노임 한 데나리온씩을 준다. 그러자 가장 나중에 온 사람 보다 시간적으로 12배 그것도 땡볕에서 일한 맨 처음 온 사람들은 자기들은 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들도 주인으로부터 같은 액수의 노임을 받게 되자 불평을 말한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시는군요.” 이것은 당시나 오늘날이나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이라는 경제적 원리 즉 업적주의를 어겼다는 불평이다. 여기서 일꾼들은 공로나 업적에 따른 노임지불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라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대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주인은 일을 오랫동안 많이 한 사람이나 잠시 동안 적게 한 사람에게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라는 “기이한 정의”(die seltmame Gerechtigkeit)로 응수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이한 정의는 공로나 업적에 따른 이른바 “공정한 정의”(die gerechte Gerechtigkeit)와는 대립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공정한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허락하거나 배당하거나 아니면 할당해 주는 행위의 표현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일반적 정의와 특수한 정의, 즉 분배의 정의(iustitia distributiva)와 균형의 정의(isutitia commutativa)로 구별할 수 있다. 공정한 정의는 노동의 세계에서 노동시간과 생산품의 양을 더해서 생긴 결과물에 근거해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이한 정의”는 당시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정의 특히 유대적 정의나 로마의 정의와는 대치되는 것으로서 “시민적 정의”와는 대립되는 일종의 “복음적 정의” (iustitia evangelica)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공로가 아니라 은총”, “공적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당시 가톨릭교회의 공로사상에 기초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바 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하면 업적주의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원리에 기초한 삶이 아니라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복음의 원리, 아니 사회주의적 원리에 따라서만 인간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어떤 종교적 신념체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같이 살아감으로써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사회정치적 공생의 원리요 체제인 것이다. 믿음으로 어떤 사적 구원 혹은 영혼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사고는 성서에 반할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정신에도 반한다. 루터에 의하면 공로주의적 원리인 율법에 따라서가 아니라 믿음의 원리인 복음에 따라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포도원 농장주인의 뜻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의 삶에 관한 의지로 이해하고 골비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삶은 매우 포괄적 의미를 갖는데 신체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 정치적 삶, 우리의 실존이 실현될 수 있는 제반 조건들 하에서의 삶을 말한다. 예수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안 제자들은 자신의 형제로서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을 인정하고 삶을 감사로서 섬긴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로서 그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봐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의인과 같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복음적 정의는 칼 바르트가 말한 대로 공로나 업적에 의한 대가로서의 의인(Rechtfertigung)이 아니라 공로 없이도 주어지는 권리(Recht)인 것이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장차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한마디로 복음적 정의는 기존의 정의, 제반 모순된 질서들, 특히 그 중에서도 업적에 근거한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와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정의다.
따라서 마태복음 20장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는 업적이나 공로에 의한 분배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분배, 즉 공동체적 삶에 기초한 복음적 정의를 지향하고 있다.
또 마태복음 20: 20-28절에 나와 있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질서는 당시의 정치질서의 원리와는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다. 당시의 국가의 통치방식은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마태20:25)는 예수의 말씀에 집약해서 잘 나타나 있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귀족 사회에서나 중세기 봉건체제에서나 통치지들은 국민들을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한 통치방식을 사용한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 후 14세기 이후에 등장했던 절대군주체제에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었다. 그 후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점차 발전되고 의회주의와 국가법치주의가 실현되어 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통치자와 기득권 세력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든 법과 제도들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현실 가운데서 살고 있다. 오늘날 민주화되어 가고 있는 국가와 사회에서 통치자들은 국민의 공복으로서 국민들을 섬기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대다수이다. 국가는 오늘날도 여전히 특정집단들, 특히 과거부터 정치적 특권을 누리던 집단들과 자본주의 시장에서 경제적 특권집단들 사이의 결탁 가운데 운영된다. 또 국가운영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제반 법률들은 이러한 특권집단과 기업집단들의 이익에 부합하게 개악되어지고 있다. 정치나 경제의 현실은 권력자들이나 부유한 자들의 사적 욕망과 의지에 따라서 운용된다. 따라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은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는 착취당하는 현실 가운데 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현실은 오늘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더욱 심화되고 공고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할 때 예수가 당시의 상항에서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통치자는 주인이었고 그 백성들은 그를 섬기는 처지에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는 “통치자는 섬기는 자, 즉 종이 되어야 한다.”고 전도된 현실을 주장한다. 또 그는 이렇게 선포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태 20:28).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에 따르면 통치자는 국민들을 섬기는 자가 되고, 국민들이 섬김을 받는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 원리를 정확하게 선포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정치권력의 공공성, 경제 권력의 공공성이 실현되는 나라를 의미한다. 정치권력이 특정인이나 특정 정당에 집중되어 그 공공성이 훼손될 때 거기에는 정치적 독재와 억압이 등장한다. 동시에 경제적 부가 특정인이나 특정 재벌집단에게 집중되어 경제적 공공성이 파괴될 때 시장의 독점적 지배가 등장하여 빈부격차와 사회적 평화가 파괴된다. 따라서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재화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나 지역들, 특정한 인종들이나 계층들에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될 때 계급사회가 등장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가 말한 대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고 하는 공공성이 상실된 세계가 도래한다. 하나님 나라는 따라서 공공성을 실현하는 것이며, 여기서는 모든 권력과 부를 가능한 한 함께 나누어 사용할 수 있도록 국제법이나 국내법 그리고 제반 제도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칸트가 언급한대로 법률제정에서 공공성이 그 기본원리가 되어야 한다
.4. 하나님 나라와 사회적 유토피아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그리스도교적 윤리의 실천적 목표개념으로 상정할 때 제기되는 문제는 그리스도교적 종말론과 인문주의적 유토피아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서 시작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인간들에 의해서 타락하고 낡은 세상이 극복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나라며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과 함께 실현해야 한다면, 유토피아는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갖는 “미래를 향한 인간들의 꿈”(Traum nach vorwärts)이고 “부정적인 것의 부정”(Negation des Negativen)이라고 할 때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게 된다.
전통적 신학에서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질 뭔가 전혀 새로운 것, 즉 미래에 도래할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이며 피안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인간들의 노력이나 역할은 전적으로 배제되고 무시된다. 전통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간을 창조의 협력자(Cocreator)로 이해한 신학자들은 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 과거에는 신인협동론자로 이단시되거나 근대에 와서는 인본주의자로 낙인찍었었다. 이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지상에서의 실현에 인간들의 노력과 역할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의 의지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면, 인간들이 꿈꾸는 유토피아 사상, 즉 이 세상에 뭔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인간들의 노력들은 어떻게 이해되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인간들은 종교나 하나님 나라사상 없이도 현재의 제반 모순들을 극복하고 뭔가 인간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 세계를 꿈꾸고 설계하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와 인간이 꿈꾸어 온 이상적 나라인 유토피아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Adventus) 유토피아는 인간들이 미래를 향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미래의 꿈의 나라(Futurum)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미래로부터 우리를 향해서 오는 것이라면 유토피아는 우리가 현재로부터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어느 지점에선가 서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 나라와 유토피아 사상은 상호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목표를 지향해서 정 반대방향에서 추구되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폴 틸리히(Paul Tillich) 같은 종교사회주의를 주창했던 신학자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한다. 공간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 혹은 통치는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이고, 피안적인 동시에 차안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미래, 현재, 과거를 모두 내포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 나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에서, 지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은 뭔가 공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월은 시간적으로 현재의 제반 모순된 상태들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초월, 즉 하나님이 일으키는 이 세상에서 뭔가 혁명적 변혁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들의 변혁의 의지로서 인본주의적 유토피아 사상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소 교리문답서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기도 없이도 스스로 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가 오도록 기도한다.” 즉 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유토피아적 열망은 같이 만나고 같이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웨덴의 신학자 니그렌(Nygren)이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아가페와 인간의 에로스가 만난다.
오늘날 21세기에 들어와서 등장한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모순들, 신제국주의의 정치적 억압들과 그것들로 인한 전쟁들(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들 사이의 갈등),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의 물결과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모순들(세계화로 인한 전 세계적 불평등, 2008년도 발생한 미국의 금융위기), 후기산업사회의 생태학적 모순(화석 연료에 의한 지구온난화와 환경과 먹거리의 오염) 등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로막고, 동시에 인간의 꿈인 사회적 유토피아 열망들을 차단하고 방해하는 세력들에 직면해서 인간들은 책임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나 휴머니즘의 유토피아적 사상의 윤리는 오늘날의 이러한 도전들에 직면해서 함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책임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책임성은 현재 인간들의 죄 된 현실과 그로 인한 제반 모순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와 인간 이성의 해방의 열망이 책임적으로 결합되는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사고는 고대로부터 인문주의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러한 사고들은 시대에 따라서 진보적 그리스도 사상과 그 열망과 밀접한 연관성 가운데서 상호 발전되어 왔다. “역사적 실존으로서 인간에게는 신학적으로 파라다이스에서 추방당한 이래(失樂園), 관념론적 철학적으로는 인간이 자연과의 통일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래(소외), 그리스도교적이고 인문주의적-고전적 유토피아 사상은 점차 사회적 유토피아로 바뀌어 갔다.”
구약성서의 율법에 나타난 사회법과 주전 8세기 사회적 예언자들에게서 나타나 있는 사회적 선포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나타난 사회적 메시지들을 통해서 제시된 하나님 나라사상과 앞서 말한 사회적 유토피아에서 우리는 그 사상과 행동의 지향성에서 접촉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를 놓고 일생동안 씨름한 많은 신학자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도 대표적 인물로는 독일 자유 베를린대학의 신학과 교수였던 골비쳐(Helmut Gollwitzer)을 들 수 있다. 물론 그의 스승인 칼 바르트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체제 하에서 사회적 유토피아, 즉 사회주의와 진보적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문제를 놓고 신학적으로 깊은 성찰을 했었다. 이들의 신학적 연구와 실천적 영향 하에서 유럽에서는 다수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의 대화”라는 주제로 다방면에서 신학적 토론들을 전개했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체제 하에 존재했던 동독 개신교회에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그리스도교”란 주제로 총회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집단들에서 많은 토론을 가졌었고 또 다수의 연구결과들이 발표되기도 했었다.
이러한 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노력들의 결과들로 선진 사회인 유럽에서는 그리스도인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사상적 대립이나 적대적 감정이 크게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었다. 거기에는 대화의 노력들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적 수렴과정을 거치는 동안 정치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사회주의가 공인되고, 다수의 사회주의적 정당들이 존재했고, 사회주의적 정책들, 특히 사회보장제도나 복지정책들이 받아들여졌고 또 그들이 여러 번 집권을 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서구유럽에서는 동서 냉전시대에도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는 어느 정도 평화롭게 공존했었고 서로 보완했고 서로를 존중했으며, 소련식 사회주의가 붕괴된 오늘날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동구유럽의 나라들에서도 그리스도교는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지만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그리스도교적 정체성과 이상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했었고 어려운 시기를 오히려 교회의 갱신의 기회로 삼았다. 왜냐하면 인문주의자들의 사회적 유토피아 사상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강력한 추동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독일의 경우 서독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동독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경제적으로나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동독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서독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신학적으로 많은 영감을 주었다.
여기서 진보적 그리스도교인들과 사회적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의 공동의 목표는 필자가 보기에는 사회적 공공성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사회적 공공성은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사회적 전통과 사회적 유토피아 사상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유토피아가 지향하는 바가 곧 신구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 나라이상과 상응하는 이상적 사회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가 지향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실천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단 사회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과 협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같은 꿈을 가지고 있는 다른 종교인들과도 협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협력을 위해서는 개신교회는 특히 독단적 교리지상주의를 버리고 성서가 가르치는 화해의 복음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 5:18-19). 하나님은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인류들이 서로 화해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화해의 직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 동안 그리스도교가 분열되고 서로 파문하고 적대시 한 것은 모두가 교리문제들 때문이었다. 새로운 교리가 탄생할 때마다 이단이 생기고, 새로운 이단이 생길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열되었던 것이다. 특히 개시교인들은 중세기 교황권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찾았지만, 그 자유를 분열의 자유로 오용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공공성을 실현하자면 그리스도인들 안에서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가 된다. 그래서 세계교회협의회에서는 “교리는 분열시키고, 봉사는 하나 되게 한다.”(Dogma divides, Services unites)는 명제를 제시한바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하나 됨이 다른 종교인들과의 화해와 협력의 전제가 된다. 오늘날의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맘몬의 세계의 거대한 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교리적 차이나 종교적 차이를 벗어나서 모든 종교인들과 합리적 이성을 가진 휴머니스트들이 힘을 합해야 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