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적 고찰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아시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몇 년 전부터 닥쳐온 經濟危機, 정확하게 말해서 外換危機와 그로 인한 國際通貨基金(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지배체제 하에 들어감으로써 제2차 世界大戰 이후 가장 고통스런 경제전쟁들로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한국에는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체제가 시작된 이후 정부통계로 약 200만 명의 失業者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고 그들에게 속한 약 6-700만 명의 가족들이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다. 노조 등의 계산에 따르면 약 350만 명이 실업상태에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서 그들은 경제적 위협뿐만 아니라 심각한 심리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아직은 직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로 인해서 희망을 잃고 깊은 시름에 잠겨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월급을 삭감 당했고 상여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이제까지의 삶과 함께 그들이 계획했던 경제적 미래를 재조정하게 됨으로써 심한 패배감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성인인구 약 1천 500만 명이 외환위기로 인해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지난 3개월 동안 1188명의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로 인해서 약 3000개의 가정이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런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가난한 나라들은 지금 5조 달러에 달하는 外債를 걸머지고 있다. 이들이 1년에 갚아야할 원금과 이자가 약 1천억 달러 내지 1천 200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약 3천억 달러의 외채를 걸머지고 있다. 금년도에 갚아야 할 이자만도 약 120억불로서 그 액수는 한화로 약 20조에 달한다. 이 금액은 우리 나라 1년 예산의 약 4/1로서 우리 나라 국방비의 1.5배에 달한다. 이 돈을 가지면 200만 명의 실업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거나 그들을 고용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액수다.
그것은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金融資本”이 利子로 벌어들인 돈이 “産業資本”이 商品을 생산해서 世界市場에 내다 팔아서 남긴 이익을 능가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 결과 부유한 나라들에서도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벌게 되고 가난한 나라들에서도 부유한 일부 계층이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어 있다. 이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고 가능하게 해 주는 제도가 바로 “國際通貨基金” 이고 “世界銀行”등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은 그야말로 金權統治(Plutokratie)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부유한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전과는 달리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원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들의 부유한 사람들을 원조하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Spiegel)은 1992년 12월 칼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호에서 칼럼버스로부터 시작된 오늘날의 資本主義的 世界經濟秩序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全能者 하나님 代身 市場이 登場했다. 이 하나님의 顯現은 뉴욕의 株價指數(Dow-Jones-Index)이고 그의 聖體는 美國의 달라(Dollar)며 그의 미사는 換率調整이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레믈린의 指導者들까지도 讚揚하는 資本主義的 普遍文明이다.” 500년 전 거친 파도를 타고 大西洋을 건너던 경건한 가톨릭 신자 칼럼버스는 다음과 같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기도를 굳게 믿었었다.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偶像을 쓸어버리고 그들을 자기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칼럼버스의 기도와 희망과는 달리 오늘날 승리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資本主義며 敬拜받는 것도 하나님이 아니라 미국의 달러이다. 사회주의 국가나 회교 국가들에서도 찬양과 영광과 존귀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미국의 달라며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經濟思想 그리고 교회사에서 추구되었던 經濟思想들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의 실체를 성서와 교회사의 빛에서 조명해 보는 것이 앞으로 새로운 천년을 맞으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으로 인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교회사에 국한해서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의 경제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2. 고대교회의 경제생활에 대한 이해
예수는 1천년 이상 강대국들에 의해서 침략을 당하고 또 조공을 강요당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파괴당하면서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로 대안적 사회질서와 인간다운 삶의 질서를 추구했던 유대인들의 전통 가운데서 태어났다. 예수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전통 가운데서 새로운 계약(신약) 즉 대안사회를 하나님의 나라실현에 두고 있다. 예수가 추구했던 이 하나님 나라는 유대적 전통 가운데 서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것은 유대교에서와 같이 어떤 묵시문학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 한가운데 있다”(눅 17,21)고 하는 데서 즉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제국들(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과 헬레니즘과 로마의 세계체제들에 저항하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일차적으로는 유다의 율법과 예언자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수 당시 엣세네파 사람들은 이런 희망을 가지고 광야에서 동굴생활을 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렸었고,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된 예언자적이고 메시아적 집단들은 지하운동을 전개했었다. 이러한 집단출신이었던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청했다.
예수의 운동이 이러한 세례요한의 운동 선상에서 전개된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도 요한의 호소를 받아들였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세례요한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동시에 그것이 사람들 안에서 실현될 것을 확신했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대칭사회(Kontrastgesellschaft)가 이 “땅에서” 즉 유다에서 실현될 것을 기대했다. 그는 동시에 이러한 대칭사회가 유다 땅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실현될 것을 생각했다. 말하자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실현을 “민족들의 순례시편”(사 2,2-5)와 결합시킴으로써 전 세계적 사건으로서 이해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유대 땅에서부터 시작되어 세계 모든 민족으로 퍼져나갈 것을 그는 전망했었다. 예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가 “오늘날 성취되었다”(누가 417)고 선포함으로써 그 나라는 이미 “實現된 終末”의 틀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산상설교를 통해서 좀더 구체화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경제학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20장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 나라의 통치형식으로서 “섬김”과 하나님 나라의 경제 질서로서의 “나눔”이 곧 예수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지금 추가해야 할 새로운 삶의 질서였다.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통치형식은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가지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태 20:24-28).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경제질서는 아침 일찍이 와서 8시간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다(마태 20,1-16). 하나님 나라의 경제질서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세계에서와 같이 노동질서에서 처럼 “일한만큼” 대접받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대로 일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능력만큼 일하고도 모두 삶에 필요한 것 만큼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경제질서라는 것이다.
예수는 변방 갈릴리 출신으로서 의도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 살았다. 그는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이 이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다”(누가 6,:20).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마태 11:28). 그리고 예수는 부자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 10:25). 과거나 오늘날이나 부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몫을 차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외적으로는 당시 세계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초기에는 적어도 예수의 선포와 가르침 가운데 살았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기 공동체들의 삶의 조건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제자공동체가 형성되는데 그들은 우선 제국언어 즉 바벨탑의 지배언어로부터 해방된다(창세기 11장). 바벨탑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지배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당시 약소국들은 강대국에 의해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지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즉 언어적으로도 강제를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던 메시야 공동체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이러한 제국주의의 언어로부터 해방되어 자신들의 말로 서로 소통했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제자들 가운데서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생활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것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한 하나님 인식,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생동적 사귐, 매일의 공동식사, 예수에 대한 회상과 만족스런 봉사, 공동체의 공동과제를 위한 사유재산의 자발적 포기 등이다.” 그들은 자기들 주변에서 궁핍한 자들을 없애는 것을 과제로 삼았었다(행 4,34; 신명기 15,4). 나아가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설화를 통해서 사유재산을 목적으로 한 탐욕을 강력하게 거부했다(행, 5,1-6).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도행전의 共同體가 어느 정도까지 지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공동체가 상당 기간 하나님 나라운동의 정신에서 살아왔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시대 즉 헬레니즘 문화가 꽃피던 시절에 등장하던 도시화와 함께 거기에 사는 상부 계층의 사람들은 상당한 정도로 부를 누렸으나 다수의 농민들과 도시 하층 계급들은 상대적으로 빈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층계급들과 자기일치를 추구했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소유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 거리를 두었으며 세상적 부에 집착하는 데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사도적 교부(Die Apostolische Väter)들의 문헌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100년경부터 시작되는 사도적 교부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再臨이 지연되고 종말론적 긴급성이 교회 안에서 점차 사라져 갔지만 그들 가운데서 세상의 소유에 대한 입장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동방 종교들과 그리스 철학사상 특히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동방의 교회들 가운데서는 禁慾的 要素들이 교회 안에서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 가운데서 교회의 헌법이나 조직 등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규율들을 제시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착화의 방양으로 나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예로서 바나바의 편지 등).
그러나 다른 한편 100년경에 로마에서 활동했던 이른바 사도적 교부들 가운데 하나였던 클레멘스의 편지들에는 동방에서와는 다른 요소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클레멘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시절에 이른바 로마의 平和(Pax Romana)를 찬양함으로써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 교회공동체 운동이 다소 친 로마적 운동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이 정치적 권력에 의한 박해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교회공동체들이 점차 정착단계에 들어서면서 세상에 대한 생각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적 교부들의 글들이 대체로 반유대적 입장 표현이나 또는 교회의 조직 등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정치적 현실 가운데서 교회의 정착화가 상당 부분 전개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세기말 3세기 초의 辨證論者들(Apologeten)은 소유에 대한 재정적 사고들을 보다 철저하게 철학적 논거들과 결합시키고 있다. 그 대표적 예를 디오그네트의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인용해 보자. “幸福이란 인간이 자기의 이웃들을 지배하거나 자기보다 약한 이웃들 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란 또한 인간이 스스로 부해지고 낮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서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닫을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누시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財産들을 유용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하나님에게 그것을 주실 것을 간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재산들을 소유하기 보다는 오히려 輕蔑해야 할 것이다.
2-3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특별히 강조되었던 것은 그들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련대성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가난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의 변증서에 보면 이런 글귀들이 나타나 있다 “여분의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대들 가운데서 어떤 이가 가난하거나 곤궁에 처해 있거든 그를 위해 2-3일간 禁食하라. 그렇게 할 때 그대들은 그가 필요로 하는 먹을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로마의 교회는 250년경에 약 1500명의 가난하고 거처할 떼 없는 사람들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수자는 몇만명의 인구가 살던 로마에서는 커다란 사업이었다.
그리고 많은 부유한 家門의 여성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은 구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들이 특히 이런 구호사업에 동참했던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교회가 오늘날처럼 남성화되었거나 성직화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교회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던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초대 교부들(Kirchenväter)들에게서는 빈곤과 금욕이 문제되었다기 보다는 소유와 부가 더 문제가 되었었다. 그들은 성서의 관점에 서서 하나님의 통치는 로마 제국의 법의 지배와는 일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로마 제국에서 지배적 세력인 맘몬은 偶像崇拜의 誘惑을 내포하고 있다. 구원의 메시지의 담지자들은 원칙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 카파도기아의 세 신학자들 가운데 하나며 기독론에서 뛰어난 해결책을 제시했었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나지안스의 그레고리(Gregor von Nazianz)는 빈부의 격차로 이루어진 당시의 경제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왜곡된 경제질서는 인간의 墮落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초대 그리스교부들의 입장은 단순히 그리스 철학에 기초한 금욕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보다는 당시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온 貪慾的 삶의 자세들과 이론 인해서 생겨난 교회 안의 빈부격차로 생겨난 문제점들을 해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카파도기아의 신학자들 가운데 대 신학자였던 대 바실리우스(Basilus der Grosse)는 뛰어난 정치가요 실천가로서 경제질서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적인 것이 가장 理想的이며 기독교 精神과 一致하는 것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가파도기아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닛사의 그레고리(Gregor von Nyssa)도 역시 영적 부요함이 현실적 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상의 부는 所有할 수 없고 단지 管理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러한 입장을 종합적으로 대변해 준 교부는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공동의 것으로 같이 사용해야 할 것을 홀로 지배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惡이 아니겠는가? 특별한 소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싸움도 분쟁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물물공동체는 사적 소유보다 우리에게 더 적절한 삶의 형식이다. 이것이 자연에도 상응한다.”
동방의 교회들이 그리스 사상 특히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 서방교회는 스토아 철학(Stoa)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서방교회에서는 이 철학 사상 특히 자연법사상에 근거해서 만인은 소유에 있어서도 평등하다는 것이 주장되었었다. 거기에 따르면 사유재산이나 부의 과도한 축적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에 따르면 인간 사회에서 소유의 질서 혹은 부의 축적이 생겨난 것은 인간이 罪로 墮落한 결과라는 것이다. “자연은 만물을 모든 사람의 公益을 위해서 제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공동의 식물을 취하고 땅은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소유가 되게 할 목적으로 모든 산물을 낸다. 이렇게 자연은 만인을 위한 공동의 소유권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찬탈에서 私有財産權이 등장한다.” 암부로시우스 처럼 사유재산이 곧 악에 기인했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말한 사람은 없다.
5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게 와서 이러한 성서적이고 플라톤적이며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적 노선들이 약화되고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공식 인정한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 같다. 4세기 이후부터 기독교는 박해받던 종교로부터 인정받은 종교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타의 종교를 탄압하는 특권을 누리는 종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서 이제까지의 소유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기독교의 중심이 동방교회에서부터 서방교회로 옮겨오기 시작했고 또 거기에 따라서 동방교회적 금욕주의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자, 소유에 대한 저항이 교회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이해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사람은 사유재산을 관리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물건으로서 사유재산을 소유한다. 우리는 그런 권리를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 기독교가 견지해 오던 부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예수의 재림지연과 종말론적 긴급성의 약화와 함께 “콘스탄티누스적 전환”과 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國家神學”과 더불어 교회는 중세기에 들어와서는 하나의 특권계급으로 등장하며 예수의 민중적 전통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3. 가톨릭교회의 경제사상
고대 교회의 사회적 전통들 혹은 사회사상은 서방에서 게르만 민족의 침입과 그들의 기독교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공동경제를 전제로 하고 있던 게르만 민족들의 법체계와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세기의 경제사상에서 이러한 공동경제 전통은 매우 중요한 흐름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고대교회의 사회적 전통은 중세기에 와서 장원제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대결들은 주로 수도원들의 등장과 더불어 나타나기도 했고 또 천년왕국적 소종파 운동들을 통해서 담당되었었다.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이러한 사회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 전통들은 알비겐스파나 프란체스코파 등 금욕주의적 수도단체들을 거쳐서 종교개혁 당시에는 보헤미야의 얀 후스에게까지 미친다.
성 프랜시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사적 소유는 곧 죄의 결과라고 보았다. 3세기에 이집트의 안토니오(Antonio)나 파코미우스(Pachomius)등에 의해서 시작된 수도원 운동에서도 이미 소유라고 하는 것이 문제되었었지만 12세기 이후, 즉 중세 중기에 등장했던 수도원 운동들은 특히 사적 소유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십자군 운동을 통해서 일반인들 가운데 등장한 동양의 부에 대한 과도한 동경과 약탈에 대한 반작용이었고 동시에 당시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부를 둘러싼 부패와도 연관된다. 도미니크 파는 가톨릭의 정통교리에 대한 도전을 문제 삼았다면 프란체스코파는 오히려 가톨릭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부와 그것을 둘러싼 부패를 문제 삼았었다. 프란체스코는 스스로 모든 것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형제들에게도 모든 것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부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었다. 사유재산 제도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파악했던 그는 그것을 폐기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일차적 과제로 생각했었다. 이것은 당시 봉건체제 하에서 교회가 차지했던 막대한 재산들과 당시 초기자본주의적 시대의 문제점들을 깊이 통찰한 데서 나온 결론이었다.
프란체스코파나 다른 수도원운동들과는 달리 중세 중기의 스콜라 철학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성 토마스(Thomas von Aquin)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근거해서 인간학적 측면에서 인간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사적 소유를 통해서 인간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먹고 입고 마실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재산권을 인권과 결합시켰고 이러한 이론을 기독교적이고 철학적 이론을 통해서 논거지었었다. 토마스에 의하면 “재산의 공동소유”(communis omnium possesio)라고 하는 그라치안(Gratian)의 칙령은 인류가 무죄상태(status innocentiae)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당시의 상황에서는 사유재산은 인간학적으로 볼 때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재산의 합리적 사용과 함께 그것을 사용하는 데서 자연적 필요에 따를 때는 하나님의 창조와 상합한다는 것이다. 재산권 행사(proprietas)란 따라서 인류의 법에 따른 일차적 자연법의 실현을 의미한다. 만물의 질서(ordo)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만물은 재산소유자의 필요에 따르는 것이다. 다만 사용의 관점에서 개개인은 사물을 “공동의 것”으로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은 인정해야 하지만 사용에 있어서는 공동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이론은 사실상 그 자체 안에 모순을 내포한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소유권은 사용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선의 의무는 사용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지만 그것도 사실은 의무라기보다는 자발성에 근거하고 있다. 자선도 자신의 신분에 맞게 수행되어야 하며 그것을 넘어서면 질서를 범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는 교부들의 원리적 경고들이 복음적 권면들로 약화되었다.
사유재산권과 인간의 본성을 인간학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윤리적으로 결합시킨 것은 토마스 이래로 로마 가톨릭의 도덕신학의 사회 윤리적 진술들이 움직이는 틀을 형성했다. 이 틀에서 시민적 보수적 경향도 등장했고 또 사회 개혁적 경향들도 가능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을 경제적 판단의 준거로 삼을 때는 자유에 기초한 무제약적 사유재산의 소유를 긍정할 수도 있고, 동시에 공동체성에 기초한 소유의 상호적 공유를 긍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법, 혹은 양심을 윤리적 판단에 준거로 삼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모든 판단을 개개인에게 맡겨버림으로써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자연법에 기초한 윤리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1891년에 나온 교황칙서 Rerum novarum이 하나의 척도를 제시한다. 그것도 역시 자율적 인간성이라고 하는 토마스의 인간학은 자유주의와 상치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유주의”로 나가고 말았다. 이것은 어느 정도 당시의 세계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교황 레오 13세는 일차적으로 사회주의를 반대하여 사유재산의 폐지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더욱더 박탈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격적 품위와 가정을 돌볼 수 있는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에 머문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비오 11세는 그의 교서 “Quadragesimo anno"(1931년)에서 협협국가(Kooperationenstaat)라는 프로그람으로 통해서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반대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탈 프롤레타리아화”를 선언하고 나선다. 그에 의하면 생산품이 노동자들에게 충분히 돌아가야 하며 노동자들의 완전고용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따르면 사유재산권이라는 법적 질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의 완성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4. 개신교의 윤리사상
로마 가톨릭 교회가 私有 財産權을 자연법에 따라서 인간에 속한 고유한 권리로 인정한 반면에 改新敎(Protestantismus)는 이 문제에 대한 합의된 내용을 제시하지 못했었다. 잘 아는 대로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자연과 초자연, 自然과 恩寵 사이의 調和와 거기에 따른 綜合을 부정하고 인간을 죄된 존재로서, 인간의 공동체를 죄인들의 공동체로 봄으로써 새로운 하나님의 은총의 질서를 제시해야 했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사유재산권의 문제를 자연에 질서에 속한 것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루터는 한편으로는 토마스의 自然法 理論이나 僧侶制의 자발적 淸貧思想에 나타난 功勞思想등의 위험을 제거하는데 진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루터에게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공로 사상에 근거한 면죄부 문제였다. 이러한 “오직 은총만”이라는 종교개혁적 命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재세례파나 반 율법주의자들 및 그들과 연계되었던 농부들의 과격한 사회혁명적 시도들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자연질서를 승인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율법성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연질서를 과격하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종교개혁의 좌파운동들에 대해서도 루터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의 해석학적 도식 “律法과 福音”을 다루는 데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루터는 토마스와 같이 사유재산의 폐지는 사회에서 무정부상태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에서 같은 생각을 가졌었다. 그렇지만 루터의 삼중 질서론 즉 정치적 질서, 교회의 질서 그리고 경제적 질서는 모두가 공동체적 삶의 보호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 질서에 속하는 토지의 소유문제는 국민경제적 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한다고 봤다. 따라서 루터에 의하면 정치적 질서는 경제생활과 관련해서 高利貸金業이나 獨寡占 그리고 投機등을 막아서 그 질서를 유지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중들 사이에서는 진실한 노동을 장려하고 교회의 건물들을 유효하게 사용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의 설교 등 그의 글들에 나타난 문제는 어떤 자연법적 문제나 경제질서 일반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문제 즉 “하나님이냐 맘몬이냐?”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과되어 있다. 루터는 그의 대 교리문답서(Der große Katechismus)에서 “너희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재물을 가지면 하나님과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굳게 그리고 안심하고 의지하고 자랑하여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보라. 그러한 인간은 맘몬이라는 돈과 재물을 가진 것이며 지상에서 가장 평범한 우상인 그것에 자기의 마음을 의지한다. 돈과 재물을 가진 자는 자신을 잘 아는데, 그는 마치 파라다이스에 있기나 한 것 처럼 즐거워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어떤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의심하고 낙담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적게 가졌으나 선한 용기를 가진 자들은 맘몬을 못가졌어도 슬퍼하고 원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렁텅이에 빠졌다 해도 자신의 본성에 확고히 서 있다.” 따라서 루터에게서는 재물의 문제는 단순히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문제 즉 신앙의 문제였다.
루터는 당시 등장하고 있던 초기자본주의적 상황을 고려하여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물건상자나 돈주머니를 강탈하는 것만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가게, 정육점, 포도주와 맥주 판매대, 대장간 등 사람들이 장사하는 곳이나 물건이나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곳, 즉 장을 벌리는 것도 도적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길드 상들은 이자를 떼는 고리대금업자들이며 날강도들이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스스로를 귀공자들과 경건한 시민들이라고 칭하며, 그를 듯하게 강도질을 하고 도적질을 한다.... 지배자들과 영주들로 단체를 만든 거대한 최고의 도적은 도시나 마을뿐만 아니라 전체 독일에서 매일같이 도적질을 한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경제문제와 관련해서는 루터의 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루터에게서나 칼빈에게서 소비를 위한 자금에서와는 달리 생산을 위한 자금에 대해서는 이자 받는 것을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제네바로 이주해온 난민들을 염두에 두는데 그들이 생산자금을 빌려서 일정한 이익을 낼 경우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이자를 지불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 경우에도 정부는 이자율을 적극적으로 통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칼빈도 소유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그것의 과제를 더 문제삼은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재산은 의무적 요소를 가진 하나님의 질서에 속한다는 것이다. 모든 자산가들은 하나님의 세계지배의 기과(Organ)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칼빈에게서는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향한 공익성이 그의 경제사상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칼빈의 경제사상의 기초는 말할 것도 없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것은 또한 로마법에 나타난 논거 즉 공동체성과 결합되어 있다.
칼빈의 이러한 사상은 교회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형성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고 거기서 가난한 자들과 부한 자들이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부한 자가 부한 것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도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먹을 것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하면 이 둘은 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칼빈에게서는 근면의 훈련과 세계내적 禁慾도 교회론적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勤勉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봉사하며 동시에 금욕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모든 자기의 가능성들을 형제의 가능성들을 위해서 바치고 사적 이해는 오직 교회의 공동체적 건설과 관련해서 고려해야 한다.”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애로 결속된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의 필요를 도외시할 수 없다.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타인의 간청을 거절하는 것은 이미 도적질 하는 것이다. 농사짓는 일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것과 꼭같이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는 것 역시 공공의 복리와 연관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자들은 경제문제와 관련해서 철저하게 성서의 말씀을 따르려고 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화폐증식 경제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매우 강력한 제한조치를 강구했다. 이 경우 판단준거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조건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증식 메카니즘을 통제하는 집단이 될 것을 그들은 촉구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개신교회들이 점차 성공을 거두고 지역에 따라서 그것들이 점차 안정을 얻게 됨으로써 제기되는 문제들은 각기 다른 개신교 집단들 사이의 신앙고백상의 차이들에서 오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견해 차이들을 극복하고 이들 사이에서 일정한 합의점들이 도출되는데 그것들이 곧 루터파나 개혁파들 안에서 만들어진 신앙고백서 혹은 신조들이다. 이러한 교파형성과 정착과정에서 등장한 정통주의적 흐름들이 지배하면서 종교개혁 좌파들의 사상이 내포하고 있던 천년왕국적이고 종말론적 사상들을 점차 후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정론과 거기에 기초한 근면과 절약정신을 강조했던 칼빈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주의 즉 개혁교전통의 동인과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지상에서의 경제적 부를 누리고 복되게 사는 것이 바로 신자들 개개인의 예정(혹은 선택)을 확인하는 논거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이 모든 결실의 유일한 소유자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렇게 이들 칼빈주의자들은 사치스런 생활을 엄격하게 금하고 자신들이 얻은 소득을 자선적인 것에 사용하는 것 외에는 전부 저축하여 재투자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루터교 신앙고백서들이나 개혁교 신앙고백서들에서는 고대교회의 천년왕국적이고 종말론적 동기들이 제거됨으로써 세상에서 얻어지는 물질적 부의 축적과 더불어 그것을 보다 많은 것으로 늘려가기 위한 이윤동기들이 발생하며 그것은 곧 기업원리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적 전통의 빛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 책임성을 매우 강조했던 청교도주의(Puritanismus)에서도 사적이고 자본주의적 사고를 낳게 했다. 종교개혁적 봉토사상으로부터 일련의 자본주의와 사회개량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등이 등장하는데 공적 조건들의 조정이 점차 정치적 권력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개신교는 변화된 상황에서 복음이 가졌던 평등적 원리들을 관철하는데 별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17세기에 들어와서 달라진 정치적 의식과 더불어 등장한 변화된 소유 및 생산과계에서 발생한 대다수의 민중들의 궁핍화에 대항해서 정통주의(Orthodoxie)는 이렇다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선으로 대처하려고 했던 경건주의(Pietismus)나 각성운동들은 초기 산업사회와 더불어 등장하는 산업 프롤레타리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경건주의자들은 기껏해야 의지할 수 없는 고아들을이나 노인들을 돌보기 위한 시설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따라서 강력하게 등장한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처방안들을 찾지 못했었다. 무제약적 소유와 이윤추구를 목포로 한 자본주의적 원리와 여기에서 탄생한 시장인간(homo oeconomicus)들에 대해서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본격적 비판은 19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독일의 경우 비헤른(Johann Wichern)의 지도하에 등장했던 내지선교(Die Innere Mission)가 당시의 국가체제와 소유관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빈곤화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기구는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한 주거지역의 설치와 함께 빈민구제단체들을 만들어 갔다. 이렇게 교회가 공적으로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문제를 의식하고 행동으로 나아갔지만 그들은 여전히 구조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고 자선적 단계에 머물렀었다. 그들은 이러한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세속화되고 교회를 멀리하는 이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려는 “福音化”의 입장에서 접근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 Naumann)과 같은 社會的 自由主義者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기독교와 사회 혁명적 형식들은 일치할 수 없다는 논제를 제시함으로써 당시 교회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명적 사회개혁 운동들”, 그 가운데서도 마르크스주의 운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도 역시 이러한 사회변혁과정에서 기업가들의 편을 들고 있는 교회를 멀리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교회의 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밑으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당시의 산업프롤레타리아의 문제를 단순히 “고향을 상실한 떠도는 젊은이들”로서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문제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대처했던 이들은 “宗敎社會主義者들”이다. 그들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동안의 그리스도교와 勞動運動의 상호 불신이라고 하는 역사적 不幸을 극복하는데 그들의 운동의 목표를 두었었다. 1906년 이래로 스위스에서는 헤르만 쿠터(Hermann Kutter)와 레온하르트 라가즈(Leonhardt Ragaz)를 중심으로 종교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와 승리자 예수의 여명을 당시 열화같이 일어나고 있던 노동운동들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발견했었다. 이러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주의 운동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 즉 중산층의 세계에 대한 혁명적 공격이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중산층의 삶의 철학과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상치되는 것으로 그들은 보았다.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종교사회주의도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의 사악성과 그로 인한 유럽인들의 위기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는 운동이었다. 교회는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階層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삼고 사회의 필요하고 멈출 수 없는 혁명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은 운동을 지원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기초한 것이고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5. 결 어
필자는 교회사에 나타난 경제사상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2000년 동안의 교회사에서 경제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교회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로마제국 하에서 천년왕국적이고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소수의 소외된 집단으로서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생활공동체” 운동에서 잘 나타나 있다. 초기 예수의 공동체는 “신앙공동체” 혹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예배공동체”에 머물지 않고 삶을 같이 나누는 “생활공동체”였다. 그러나 재림이 지연되고 따라서 로마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체제에 적응해 가는 동안에 교회는 많이 세속화되었으나 여기에 반대하는 집단들은 수도원 운동과 같은 것을 통해서 교회의 세속화를 막고 나아가서 경제적 부를 따르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전환”(313년) 이후 교회는 로마 제국 안에서 박해받던 종교에서 특권을 누리는 종교의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교회의 종말론적 차원은 완전히 사라지고 세속정권과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중세기의 교회는 봉건영주들의 지원자 내지는 협력자가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교황권의 강화로 수많은 장원들과 토지들을 차지한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의 교회 아니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는 교회가 되지 못했다.
종교개혁에서도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사람들과 사회개혁을 주장했던 집단들 사이에는 경제문제를 둘러싸고 현격한 견해 차이를 보였다. 루터나 칼빈 등 초기개혁자들은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성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였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두고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군주체제 하에 편입된 地方敎會(Landeskirche)로서는 정치적-사회개혁은 거의 추동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역시 정통주의나 경건주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교회는 오히려 등장하는 산업자분주의의 파트너가 되어갔던 것이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자유주의 신학에 매몰된 교회는 정치에서의 自由主義, 경제에서 自由市場經濟, 무역에서의 自由貿易이라는 도식을 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등장하는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외면하고 그들의 적이 되는 상태에 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종교(宗敎)社會主義가 등장하고 당시의 사회주의적 노동운동과 연대하지만 그 성과는 역시 미미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칼 바르트 등 종교사회주의에 그 신학적 기초를 두고 출발했던 辨證法的 神學, 혹은 危機神學은 당시 약자들 특히 노동자들과 그들의 운동과 소외되었던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 기독교의 위기를 잘 간파했던 것이다. 바르트의 위기신학은 교회와 신학의 부르주아화를 교회 전체의 위기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변증법적 신학자들 특히 투루나이젠 같은 이는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역사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떤 처지에 있는가? 80년대에 들어와 경제적 번영(?)과정에서 한국교회는 中産層의 교회, 부르주아적 교회, 資本主義的 교회로서 정치적 물질적 특권을 누리며 지내다 보니 물질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예언자적 전통을 상실하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는 成長神學, 祝福主義라고 하는 物神崇拜가 지배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교인들은 경제윤리, 사회적 책임성을 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왜곡된 물질추구와 잘못된 소비문화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판을 치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이 지구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의 핵심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말할 때(고전 13장)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참다운 관계성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서 찾는다고 할 때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 불의로 인해서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상실하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도 오늘날과 같은 IMF체제 하에 들어가게 된 것에 대해서 책임적으로 설교하고 경고하는 파수군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앞으로 예수의 정신에 따라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청빈한 생활,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는 교회로 나아갈 때 비로소 한국 교회도 오늘날 상실한 신뢰성을 다시 찾고 선교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Zusammentfassung(독일어 요약)
Ich habe oben die in der Kirchengeschichte geprägten Idee des Wirtschaftslebens der bekannten Theologen zusammgefasst. Ich habe hier gefunden, daß in den letzten 2000 Jahren der Kirchengeschichte die Stellungnahme der Theologen und Kirchen über die Wirtschaftsfrage in einer Weise mit bestimmten historischen Kontexten eng verbunden ist. In der Frühkirche unter der Römischen Imperium bemühten sich die Christen als eine von der Gesellschaft isolierte und von chilialistischen und eschatologischen ausgeprägten Gemeinschaft darum, auch in dem Wirtschaftsleben bei der Lehre Jesu treu zu bleiben. Das kann man klar in der "Lebensgemeinschaft" in der Apostelgeschichte finden. Die frühe Gemeinschaft Jesu war nicht allein wie die heutige Kirche die "Gottesdienstgemeinschaft", sondern die "Lebensgemeinschaft", "Tischgemeinschaft" der Gläubigen, die untereinander geteilt haben, was sie hatten. Aber wenn die Parousie Jesu d.h. die eschatologische Erwartung des Reich Gottes verspätet und die Kirche an die politische und wirtschaftliche Ordnung des römischen Imperium langsam angepaßt wurde, war die Kirche allmählich säkularisiert und an der Wirtschaftsordnung der Umgebungen angepasst worden. Daher organisierten die gegen sie gekämpten Gruppen in den Kirchen das Klosterleben, um die Säkularisierung der Kirchen zu bekämpfen.
Nach der "konstatnischen Wende"(313) war die Stelluntg der Kirche in dem rõmisischen Imperium ganz anders geworden. Indem die Kirche der Verfolgten in eine Kirche der Priviliegieten wurde, war die eschatologische und chilialistische Dimension der Kirche võllig erlõscht und die Synthese zwischen dem Altar und Sacerdom errichtet worden. Darum war die Kirche im Mittelalter zum Zusammengehõrigen der Feudalherrn geworden. Damit hängt ein Weiteres zusammen: Die Erhöhung des Papstes auf die såkularen Rechte konnte die Kirche viele von Grundstücke und Lande besitzen. Daher war die Kirche im Mittelalter nicht mehr eine "Kirche der Armen."
Im Zeitalter der Reformation war angesichts der politisch-wirtschaftlichen Fragen die augenfällige Meinungsunterschiede zwischen den religiösen Reformatoren und der sozialen Reformatoren dargestellt. Die Reformatoren wie M. Luther und J. Calvin waren auch in der Wirtschaftsfrage der Meinung, daß die Kirche in den Geist der Bibel zurückkehren sollte. Sie haben die Wucher kritisiert, die mit Zisnehmen die Armen verschluckt haben. Mit der Stabilisierung der reformatorischen Kirchen konnten aber die unter dem Schutz der Feudalherren standenden Landeskirchen in Deutschland die Reformation auf der politisch-wirtschaftlichen Ebene nicht durchsetzen. Diese Lage änderte sich nicht auch in der Zeit der Orthodoxie und des Pietistmus. In dem Zeitalter der Aufklärung war die Kirche allmählich zum Partner des eben entstandenen Industriekapitalismus, indem sie an der Seite des Kapitals stand. Im 19. Jahrhundert hat die liberale Theologie den Proletariaten den Rücken gekehrt, indem sie den Liberalismus in der Wiirtschaftordnung der Welt annerkannt hat. Darin entstand zwischen den Kirchen und den Arbeitsbewegungen in Europa die unüberbrückbare Barrierre.
Um das antagonistische Gegenüber zwischen beiden Gruppen zu überwinden, organisierten am Ende des 19. Jahrhungderts einigen progressiven Theologen in der Schweiz und Deutschland die Bewegung der "relgiösen Sozialismus" und versuchten sie, die Solidarität mit den Arbeiterbewegungen wieder wiederzuherstellen. Es gelang aber nicht, die Feindlseligkeit zwischen den Kirchen und den radikalen Arbeitsbewegungen zu mildern, die unter der Führung der leninistischen Kommunisten ihre proletariatischen Revolution duchrzetzen wollten. Hier ist zu bemerken, daß einige Theologen wie Karl Barth und andere die Krise der Kirche und Theologie sahen, daß die bürgerliche Kirche in Europa sich von den Arbeiterschaften völlig abgewendet wurde. Die Theologen wie Thurneysen und anderen versuchten, die "das historische Gegenüber der Sozialismus und Kirche" zu überbrücken. Wir nennen sie "dialektische Theologie" oder "Theologie der Krise".
Wie ist die Lage der koreanischen Kirchen heute? Die koreanischen Kirchen kehren sich von Lehre Jesus und der alten Kirche ab, die in der Tradition der sozialen Propheten standen, indem sie die kapitalistische Errungenschaften genossen, die die Mittelklassen in den Kirchen vertraten. Daher herrschen in den Kirchen die Plutokratie, die im Namen der "Wachstumstheologie" oder "Segenstheologie" ordiniert und praktiziert wurde. Unter den Christen waren der Geist der Wirtschaftsethik und das soziale Verantwortungsbewußtsein verloren gegenagen. Darum herrschen unter den Christen der grenzlose Gewinnsucht und die widersprüchliche Verbrauchskultur.
Wenn wir Christen heute sagen, daß wir die Normen der Wirtschaftsethik in der Formulierungen "Glauben, Hoffnung und Liebe" vom Apostel Paulus suchen sollen(1 Kor. 13), leben wir in einer Gesellschaft, in der wegen der wirtschaftlichen Ungerechtigkeit alle drei verloren gegangen sind. Korea steht nun unter dem IMF-System. Denn die Kirchen in Korea haben ihr Wächtersamt niedergelassen und nicht rechtzeitig gewarnt vor der Katastrophe der Nation. Damit geraten die Kirche in eine Vertraunskrise in der koreanischen Gesellschaft. Wenn die protestantischen Kirchen heute der Lehre Jesu und dem Pflicht der Kirche treu bleiben und wieder die "Kirche der Armen" werden, gewinnen sie wieder ihr Vertraun und den Weg zur Mission und Evangelisation.
참고문헌들:
Die Bekenntnisschriften der ev-lutherischen Kirche
Johannes Calvin, Institute, III
Ulrich Duchrow, Alternativen zur kapitalistischen Weltwirtschaft - Biblische Erinnerung und politische Ansätze zur Überwindung einer lebens- bedrohenden Ökonomie(손규태역, 聖書의 政治經濟學, 한울 1997)
W. Haller, Die heilsame Alternative. Jesuanische Ethik in Wirtschaft und Politik, 1989
Handbuch der Christlichen Ethik, Herder.
Theodor Heussi, Kompendium der Kirchengeschichte
Nobert Lohfink, Das Jüdische im Christentum
Gehardt Lohfink, Wem gilt die Bergpredigt?(山上說敎는 누구에게? 분도출판사)
Martin Luther's Works, Vol 45. Philadelphia
Martin Luther, Weimar Ausgabe, 6; 15; 51.
Friederich Naumann, Ethik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Arthur Rich, Wirtschaftsethik-Grundlagen in theologischen Perspektive, Gü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1987(강원돈역, 經濟倫理, 한국신학연구소)
Gehard Theißen, Gruppenmessianismus. Überlegungen zum Ursprung der Kirche im Jüngerkreis Jesu, in: Jahrbuch für Biblische Theologie. B. 7.
E. Thurneysen, Sozialismus und Christentum, in: Zwischen den Zeiten, I.
Thomas von Aquin, Summa theologiae, II/2
Ernst Troeltsch. Die Soziallehren der christlichen Kirchen und Gruppen, Gesammelten Schriften I
Max Weber,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mus, in: 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 I
H.D. Wendland, Der religiöse Sozialismus bei P. Tillich, in: Die Kirche in der revolutionären Gesellschaft, 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