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공성과 공공성 신학
근래에 와서 한국 신학계에서도 “공공성 신학”(Public Theology)의 문제가 일부 사회문제들에 관심을 가진 신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되고 있다. 2008년 5월 17일 한국기독교윤리학회 연차학술대회가 “한국교회의 윤리적 성숙과 공공신학”이라는 주제로 열린바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한국학자들의 글을 모아 “공공신학”(2009년 4월 5일)을 펴냈다. 이 이 학술모임과 이 책은 최근 한국개신교가 1990년대 이래 점차 보수화되고 우익화 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심각한 신뢰성위기에 직면하여 사회적 정치적 책임성을 새롭게 의식하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공공신학이란 책은 주로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공공성 신학을 그 대안으로 보고 2007년 10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총 5회에 걸쳐 가졌던 연구모임의 결과들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서구, 그 중에서도 영미계통의 나라들의 신학자들이 “교회의 공공성” 문제를 논의하는 틀과 신학적 방향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것이다.
그러나 공공성 신학 혹은 교회의 공공성의 문제는 비단 최근에 와서 처음으로 새롭게 제기된 주제는 아니다. 신학은 오랜 역사 가운데서 교회와 세계, 좁게는 국가와 정치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위상과 정체성 그리고 과제들을 어떻게 정립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양하게 전개되어다. 그 흐름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주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로마제국의 정치체제와 황제교황제도 하에서의 국가교회 시대의 공공성 문제(국가교회), 그 후 로마제국과 가톨릭교회의 공존시대의 공공성의 문제(가톨릭교회), 종교개혁 이후 정치와 종교가 구별되던 시대의 공공성의 문제(성공회와 루터교회), 또 종교와 정치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교회들의 공공성(미국의 개신교회들) 등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의 자기이해에 따라서 공공성 문제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었다. 그 후 이 공공성 문제는 정치와 종교 혹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의 문제로서 주로 정치신학 내지 기독교사회윤리학의 주된 주제로서 다루어져 왔었다.
유럽의 경우 여전히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받아들이고 일정한 숫자의 고위성직자를 상원의원으로 파송하여 국가의 공적 사안들과 관련하여 정치적 법적 결정에 참여하여 공적 책임을 지는 영국의 성공회, 행정부 안에 종교장관을 두어 정부의 공적 사안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스칸디나비아 제국들의 루터교회(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총리실과 개신교 주교회의 의장 사이에 연락사무실을 두어 국가나 교회의 중요한 공적 사안들을 사전에 협의 하는 독일 등 국가교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아직도 국가와 교회가 공공적 현안들을 함께 협의하거나 결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국가의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정책들과 관련된 문제들이 교회와의 밀접한 협의 하에 논의되고 결정된다. 또 교회의 사회적 책임성과 관련된 제반 사회봉사영역에서 국가와 교회 사이에 협약이 체결되고 국가가 일정한 분야에 재원을 지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 공공성의 문제는 법적 행정적 권리와 의무의 문제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공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신학적 주제로 다루기 시작한 이는 독일의 경우 현재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이면서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의 주교로 있었던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이다. 그는 1973년 퇴트(Heinz Eduard Todt) 교수의 지도로 “교회와 공공성”(Kirche und Offentlichkeit)이라는 제목으로 교수자격논문(Habilitation)을 제출했었다. 이 논문은 1962년에 역시 교수자격논문으로 제출된 독일의 저명한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저작 “공공성의 구조전환”(Strukturwandel der Offentlichkeit)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하버마스는 공공성 혹은 공론의 장이 유럽에서 어떠한 변화과정을 거쳤는가를 역사적으로 철저하게 검토하고 특히 근래에 와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공성의 구조변화의 양태를 추적한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서 볼프강 후버는 그 동안 독일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공공성의 구조변화를 탐구한다.
첫째 후버에 의하면 종교개혁 이래 독일 개신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지방교회적 교회정부(Landeskrichliches Kirchenregiment) 하에서 지방영주가 교회의 수장으로 활동하던 교회체제가 1918년 시민혁명으로 붕괴되고, 헌법적(혹은 교회법적) 기초에서 교회가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체제로 전환된 이후 교회는 더 이상 공적 영역에 속하는 기관으로 인정되지 않게 되고, 따라서 하나의 사적 영역에 속한 기관으로 규정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더 이상 공적 활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고 국가의 공적 직무의 일부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이해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일 개신교회의 구조변화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아직도 다양한 분야에서 지방교회적 정부가 가지고 있던 공적 직무들을 변형된 형태로 수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후버는 이렇게 독일의 개신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공성의 구조변화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서 추적한다.
둘째는 후버는 독일 밖으로 눈을 돌려 세계개신교회들, 특히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교회들의 공공성의 구조변경에 주목한다. 공공성의 문제는 세계교회협의회(WCC), 특히 에큐메니칼 운동영역에서는 1960년대부터 다루어지던 “교회와 사회”(Church and Society)라는 주제의 신학적 발전들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말하자면 교회가 어떻게 급변하는 세계에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제반분야에서 책임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미 세계교회협의회의 창립초기부터 영국의 신학자 올담(Oldahm)이 제시한바 있는 “책임적 사회”(Responsible Society)라는 논제로부터 시작해서 “혁명의 신학”으로, 그리고 자유주의적 서구의 사회모델로부터 “급격한 사회적 변화”(rapid social change)의 모델로, 자유주의적 개인의 자유권으로부터 집단주의적 사회적 인권의 모델로, 교회의 공공성이라는 주제의 논의의 중심점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세 번째로 볼프강 후버는 이러한 교회와 공공성의 구조변화들과 함께 그동안 여기에 대한 신학적 성찰, 특히 교회론적 고찰(ekklesiologische Betrachtung)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 공공성 문제를 정치 신학적 혹은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 보다는 교회이론적 측면에서 다룰 것을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볼프강 후버는 교회와 공공성의 관계에 대한 당시의 불확실성에 직면해서 보다 분명한 교회론적 정향을 잡아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 볼프강 후버의 교회론에서 본 공공성
볼프강 후버는 앞서 소개한 “교회와 공공성”이라는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논문에서 무엇보다도 교회론의 틀 안에서 교회의 정치적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공공성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정치적 책임성의 문제는 앞서도 말한바와 같이 전통적으로는 교회와 국가 내지는 종교와 정치라는 도식으로 다루어졌었다. 그러나 근대 시민 사회의 출현 이후 시민사회가 국가로부터 분리되어 새롭게 등장한 이후 교회와 국가의 전통적 도식은 교회와 사회라는 도식으로 확대되게 된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라는 헤겔 이후의 사회이론을 받아드리는데서 온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후버에게서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변화된 교회의 위상을 시민사회 안의 한 “단체”(Verband)로서 규정함으로써 교회가 갖는 새로운 공공성의 영역을 확보한다.
따라서 볼프강 후버는 “종교는 사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근대적 사회에서 종교와 교회에 관한 진술에서 포기할 수 없는 기초라는 슐레테(H. R. Schlette)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출발한다. 후버에 의하면 “사적인 것”이란 개념은 국가에서 구분(혹은 분립)된 근대시민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범주로서 그것은 시민사회 안에서 국가로부터 간섭이나 개입을 당하지 않는 개인의 삶의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후버에 의하면 유대적 기독교적 전통에서 신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를 규정하는 데서도 사적 성격이란 존재하지 않고 나아가서 성서 특히 신약성서 전통에서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제의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더 나아가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명백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전통은 모두 개인의 사적 결단에 선행해서 역사와 전통과 사회적 매개를 통해서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에서도 역시 종교가 갖는 공적 역할을 문제 삼는데 그에 의하면 종교는 두 가지 기능, 즉 현실적 불행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은폐하는 것과 그 반대로 현실적 불행에 대하여 유토피아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종교적 불행은 첫째 현실적인 불행의 표현이고 그 다음으로는 현실적 불행에 대한 저항이다.”(Das religiose Elend ist in einem der Ausdruck des wirklichen Elendes und in einem die Protestation gegen das wirkliche Elend). 그런데 역사적으로 종교를 사적인 것으로 규정한 개인주의적이고 내면적이며 타계적인 종파들이나 국가와 종교의 종합을 시도한 거대교회들은 전자의 길을 따랐고, 현세에서 종교의 공적 책임성을 강조하거나 국가와 교회 사이의 구별(분리가 아님)을 강조한 교파들은 후자의 길을 택했었다. 그래서 후버에 의하면 “공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은 공적 삶의 영역들과 사적 삶의 영역들의 구획적(sektoral)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의 전반적 영역들 안에서의 다차원적 구별의 의미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교회가 갖는 공공성에 대한 성서적 전통적 신학의 근거에 의지하여 볼프강 후버는 교회 안에서 말씀의 사건에 집중함으로써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교회, 즉 특정한 사회 안에서 인간들의 단체로서의 교회를 신학적 고찰을 통해서는 접근 불가능하게 만드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교회론 보다는 “교회의 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를 통해서 전체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리행위에서 교회이론의 중심점을 찾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교회이론에서 그의 교회적 공공성의 논거를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본회퍼의 “교회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라는 그리스도론적 교회이론으로부터 “교회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리행위가 신자들 상호간의 대리행위와 그리고 세계 안에서 달성되어가는 장소다” 라는 명제를 통해서 그의 교회이론의 공공성이 더욱 구체화된다. 타자를 위한 교회라는 본회퍼의 신학적 주제들에서는 - 그것들이 그리스도론이건 교회이론이건 - 형이상학적 전제들이나 종교적 해석들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거기에서부터 공공성이나 공공성 신학의 출발점이 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볼프강 후버에 의하면 본회퍼의 “윤리학”(Ethik)에서 교회적 실존의 기본성격으로서 “세계를 위한 교회”의 대리행위(Stellvertretung)를 교회가 갖는 공공성의 특성으로서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온 세계가 서야할 장소에 서 있다. 그것이 대리적으로 세상을 섬기는 한에서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 다른 한편 세상은 교회가 존재하는 곳에서 자신을 완성해 간다. 교회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피조물’이고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길이며 목표다. 이러한 이중의 대리관계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리스도이신 그 주님과 완전히 사귀고, 그 주님에게 완전한 복종을 바치는 것이다.” 즉 볼프강 후버는 그리스도 교회의 공공성을 “세계를 위한 존재”라는 본회퍼의 교회이론의 명제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세계 없는 교회나 교회 없는 세계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세계에서 교회는 “새로운 창조와 피조물”로서 존재하는데 그것이 교회의 공공성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가 옥중에서 그의 제자인 베트게에게 쓴 편지(40년 8월)들을 모은 책 “저항과 복종”에서 교회가 갖는 세계적 공공성을 다음과 같이 보다 더 분명하게 설파하고 있다. “교회는 타자를 위해서 존재할 때 교회이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회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목사들은 전적으로 교회의 자발적인 헌금에 의해서 살아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이라고 하는 세계적 과제들에 참여해야 하나 지배하면서가 아니라 돕고 봉사하면서 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삶이 어떤 것이며, 또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말해주어야 한다. 특히 우리의 교회는 모든 악의 근원인 교만, 권력과 오만 그리고 환상이라는 악덕들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교회는 절제, 순수함, 신뢰, 성실, 불변성, 인내, 훈련, 겸손, 겸양, 자족함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교회는 인간적 “모범”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수의 인간성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데, 바울에게서도 매우 중요했다). 교회의 말씀은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범을 통해서 그 무게와 힘을 얻는다.” 교회는 하나의 자기 목적적인 자기만족적 단체, 즉 자기 완결적(自己完結的) 존재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데서 그것이 갖는 공적 성격 즉 공공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볼프강 후버교수는 오늘날 공공성 영역에서 독일 교회가 참여하고 있는 영역들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례연구들”을 통해서 서술하고 있다.
첫째는 전독일 국민의 공적 사안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교회와 신학계의 공적 입장천명과 관련된 문제이다. 볼프강 후버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진행에 대한 교회와 신학계의 대변자들의 공적 입장천명들이 교회의 신학적 확신들에게 어떤 결정적 의미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학의 기능은 다만 이미 내려진 정치적 결단들을 합법화하거나 아니면 과대하게 선전하거나, 사실상 신학과는 무관한 입장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확인해 주는데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신학자들의 정치적 입장천명은 당시 시민적 지식인들의 대표자들이 보여준 입장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던 것이다. 트뢸치(Ernest Troeltsch)는 제1차 세계대전을 “문화전쟁”(Kulturkrieg)으로 규정함으로써 독일과 적대국들 사이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행태를 규정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나 종교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이 민족들 간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염려하기도 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고 진을 치고 있던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빌헬름 황제의 전쟁정책에 동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선 반면, 바르트나 종교사회주의자들은 여기에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나 신학자들은 특정한 정권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공적 사안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동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독일에서 교회와 국가의 공적 사안이었던 군목제도에 관한 문제다. 교회와 국가라는 두개의 공적 영역에 동시에 소속되나 교회와 군대라는 두 집단들 사이에서 동일한 목표설정들과 가치체계들을 가질 수 없었던 군목제도가 바로 쟁점이 되었다. 이러한 양자간의 긴장관계 때문에 전통적으로 군목제도는 교회의 영역에서 분리되어서 군대영역에만 소속시킴으로써 해결해왔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이 정교분리의 나라들에서는 군목제도는 시민적 덕목들을 함양하고 국방과 전투력의 정신을 강화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군목제도가 순전히 군대영역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군사적 목적에만 봉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독일개신교회는 전통적 군목제도의 이러한 목적과 가치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전후의 독일 개신교회가 바르멘 신학선언서 제3항목을 개신교의 기본명제로 받아들인 상황에서 군목제도가 전적으로 “자의적으로 세계관적이고 정치적 확신”, 즉 국가적 혹은 군사적 목적과 가치에만 충성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바르멘 신학선언 제3항목에 보면 “우리는 교회가 메시지와 질서의 모습을 그때그때 자의적이며 변화무쌍한 세계관적이고 정치적 확신에 내어맡겨도 된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군목제도를 단순한 국가적 과제가 아니라, 교회적 과제로 이해할 때 제기되는 문제는 군목제도가 국가의 전쟁봉사만이 아니라 교회의 “평화봉사”에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 군목제도의 일차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독일에서 대학들 내의 신학부의 공공적 지위에 관한 문제이다. 중세기의 대학은 신학부 덕분에 태어났으면 종교개혁 시대에도 개신교적 영역들에서는 대학의 신학부의 위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신학은 대학의 학문영역에서 독자적 구성요소를 갖게 되고 그것은 성직자들을 양성하는 교회의 사인으로 이해된다. 이 때 바이마르 헌법(3부 149조)에 따라서 대학 안에 신학부의 존재를 승인하고 있다. 그러나 1910-20년도 사이에 설립된 대도시의 대학들, 함부르크, 쾰른, 프랑크푸르트 대학들에는 신학부가 없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성직자수의 감소로 신학부가 필요가 없었다. 현재는 이러한 바이마르 헌법에서 받아들였던 대학의 신학부는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본법에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대학의 신학부들은 교회의 목사들뿐만 아니라 공립학교의 종교담당을 위한 교사양성에도 기여하고 있다.
넷째로 1965년의 추방당한 이들(난민들)을 위한 교회의 백서와 교회의 공공성의 문제이다. 독일개신교협의회의 “공공적 책임성을 위한 위원회”(Kammer fur offentliche Verantwortung)는 1965년 10월 “추방당한 사람들의 상황과 동구의 이웃국가들과 독일 국민의 관계”라는 백서(Denkschrift)를 출간한바 있는데 이 문서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추방당한 사람들을 위한 독일교회의 백서는 공적 사안에 대한 의사표시의 한 형식이었다. 이 추방당한 사람들을 위한 백서를 내면서 당시 독일개신교 의장 라이저(Ludwig Raiser)는 다음과 같이 그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사는 추방당한 사람들의 인간적 운명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것은 모든 정치적 행위 배후에 서 있는 독일 민족의 도덕적 자기이해. 정치적 운명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교회가 복음의 선포에서 위탁된 세계의 평화의 유지에 대한 염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채택하고 출간한 이 백서형태의 문서는 교회가 공적 사안들에 대한 공적 입장표명이라는 의미에서 이후에 독일 교회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 예를 들면, 가족, 청소년, 성의 문제, 낙태 문제를 비롯해서 , “사회적 유럽” 등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 공적 입장을 천명해 오고 있다.
따라서 독일의 개신교회가 공공성 영역에 참여했던 분야들은 국가와 긴밀한 협력 하에 진행하고 있는 1) 사회정책 수립과 사회봉사의 영역, 2) 전후에 독일의 제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놓고 새로운 설계를 했던 아카데미운동과 3) 매 2년 마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개신교평신도 대회(Kirchentag)를 통해서 제반 사회정치적 현안들을 같이 의논하는 일 4) 앞서 말한 백서 등을 통해서 제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공적 입장의 표명과 전달하는 사업, 5) 전후 독일의 재무장과 같은 정치적 군사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비판적 입장천명 등이다.
볼프강 후버의 공공성 신학의 출발점은 전통적 사회윤리학 내지는 정치신학의 틀, 말하자면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의 연구의 성과라고 한다면 교회와 국가라는 전통적 정치신학의 틀 안에서 특히 독일교회가 갖는 공공성의 구조변화들에 주목했다는 점이고 그것들을 사례연구(Case studies)를 통해서 상세하게 해명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공공성 신학 혹은 정치신학의 연구에서 보완해야 할 점을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오늘날 공공성 신학을 다루려 할 때 공공성 내지 공론의 장이 세계적 차원에서 엄청나게 구조적 변동을 격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세계화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오늘날 거대시장의 통제 불가능한 메커니즘들,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구조적 실업사태, 사회적 약자들의 급격한 배제와 유럽적 사회국가(Sozialstaat)의 파괴를 가져오는 세계화라고 하는 세계사회의 구조적 변동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오늘날의 세계적 현실에서 우리는 공공성신학 내지는 정치신학의 논의를 이전의 국가와 교회라고 하는 전통적 도식의 틀 안에 국한해서 다룰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시민사회가 국가라는 영역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역사의 실체로서 강력하게 등장하며 시장이라는 자본주의적 거대세력에 대항해서 그 모순들과 투쟁하는 현실에서 이전의 교회와 국가라고 하는 정치신학의 도식은 오늘날 공공성 신학의 논의의 틀로서는 너무나 제한되고 협소하다고 할 것이다.
둘째 교회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이 국가와 대칭관계에 있던 유일한 독립된 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다양한 형태들로 등장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국가와 거대시장을 상대로 하는 다면적 관계를 설정해야 하고 또 다양한 과제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공공성의 영역의 강력한 주체가 되고 있는 시민사회에서 그 일원으로서 교회는 자기가 처한 공공성 영역의 구조변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시민단체들과 협력하여 국가체제의 잘못된 권력행사와 시장 세력들의 맘몬주의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것이 공공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길이다. 특히 한국과 같은 종교다원사회에서는 이 일을 해 나가는데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들과의 협력을 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셋째 오늘날 국가와 시장의 세력들에 대항해서 등장한 시민사회에서 그 일원으로 위상을 갖는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공공성 신학의 정향과 목표는 하나님 나라와 그것을 지상에 실현하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의 실천이다. 공공성 신학의 목표는 교회 자체를 더 확장하기 위한 선교 신학적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공성 신학은 정치신학으로서 그 목표는 지상서의 하나님 통치,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이다.
3. 세계화 시대의 신학으로서 공공성 신학
따라서 오늘날 필자가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세계적 공공성구조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 점을 위에서 몇 차례 언급한바 있지만 여기서 간단히 요약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1990년 동서냉전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권의 몰락이후 등장한 미국을 초(단)극으로 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거기에 근거한 세계화와 더불어 등장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로 인한 제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변화와 거기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모순들에 직면하여,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의 텍스트들, 교회사의 전통들 그리고 인간의 이성과 경험들에서 얻은 공공성의 이해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현재의 세계적 차원의 문제들에 보다 책임적으로 응답하기 위한 방안들을 모색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볼 수 있다. 한국도 방문하여 여러 곳에서 강연한바 있는 미국의 공공신학자로 알려진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가 “공공신학과 정치경제학”을 매개시킨 것은 따라서 공공성 신학의 문제는 정치 신학적 내지는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책임성과 관련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그동안 에큐메니칼 운동과 진보신학 진영의 학자들이 이 공공성 신학의 문제를 정치 신학적(politisch=theologisch) 영역에서 교회의 정치적 경제적 책임성의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체제에 대응하여 성서적 신학적 비판과 함께 응답들을 해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구의 정치신학 외에도 제3세계에서 출현한 남미의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등이 이러한 문제를 놓고 씨름해 오고 있다. 이러한 입장이 바로 진보적 신학자들이 공공성을 주제로 삼아 연구해온 방향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스택하우스가 공공신학의 출발점을 오늘날 미국의 자본주의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세계화”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대척점을 제대로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세계화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끌어 가는 미국에 의해서 추동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제국주의적이고 신식민지주의의 요소들을 애써 외면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이들 용어들 대신 “패권주의적 영향력”이란 매우 애매하고 모호한 용어를 제안하고 사용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적 차원에서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 행사와 세력팽창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세계교회협의회(WCC), 특히 “교회와 사회”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발표된 문서들의 반세계화의 경향과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에 기초한 해방신학적 세계해석과 그 운동들을 비판함으로써 에큐메니컬 운동의 사회 윤리적 성향에 반대하고 있다.
스택하우스는 나아가서 세계화의 정치적 경제적 현상들 가운데 하나인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와 무제약적 이윤추구에서 잘못된 점들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다국적 기업들은 “고삐 풀린 괴물”이 아니라 세계시장과 경쟁자들에 의해서 통제되고 나아가서 시장은 국제법이나 규약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들 다국적 기업들을 홍호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국제법이나 세계규약들, 특히 IMF나 세계은행 그리고 최근에 등장한 세계무역기구(WTO) 등의 규약들이 얼마나 선진국들 특히 미국에 유리하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전혀 언급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스택하우스의 세계화이해와 다국적 기업들에 대한 변호에 기초한 그의 공공 신학적 논거들은 필자가 보기에는 현대판 제국신학의 전형 내지는 자본주의적 신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세계화는 단지 정치적 경제적 영역에서만의 현상은 아니며, 문화적 종교적 영역에서의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 세계화 현상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초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타 문화에 의한 “강요”이며, 따라서 문화들 간의 만남(Begegnung)이라기보다는 한 문화가 다른 문화의 정복(Conquest)이다. 1994년 미국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은 콜럼버스의 미 대륙발견 500주년을 맞이해서 그 해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정하고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콜럼버스 남신상의 결혼식을 거행한바 있다. 이 때 콜럼버스 날의 축제주제는 “두 대륙 문화의 만남”이었다. 이러한 행사에 대해서 언어비평가며 반제국주의 체제비판가인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자유의 여신상과 정복의 남신상의 결혼행사를 가리켜 미국의 두 얼굴 즉 자유를 내세우면서 정복을 일삼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합”이라고 비판한바 있다. 당시 콜럼버스의 미국대륙의 상륙은 두 문화간의 만남이 아니라 우수한 유럽문화가 남미의 문화를 정복한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세계교회협의회(WCC)도 콜럼버스 미 대륙점령 500주년 연구위원회를 만들었고 그 보고서에서 “신대륙 발견은 두 세계의 만남이 아니라 우월한 민족들이 약한 민족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운명을 마음대로 규정한 계층적 원리의 승리다”라고 선언했다. 문명비평가 세일(Kirpatrick Sale)은 그의 책 “낙원의 정복”(Conquest of Paradise)에서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되는 서구문명의 승리는 오늘날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팔리는 코카콜라에 이르기까지 정복자들의 창던지기나 대포 쏘기와는 달리 정신적 승리요, 심리적 정복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했다. 이제까지의 세계화 과정에서 유럽문명의 확산은 단순한 초청(Stackhouse)이나 만남(Reagan)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강요된 정복의 성격을 띠고 있다. 미국에 의한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문제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에 대해서 미국의 공공신학자들은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가해자들의 입장 즉 변호적 입장에서 보려고 하는데서 그 신학적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 같다.
둘째는 오늘날 교회가 공공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근래에 와서 극단적으로 세속화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교회들 특히 미국이나 한국의 교회들이 극단적으로 보수화되고 자본주의적 성공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매몰되면서 교회성장이란 이름으로 교회를 “타자를 위한 교회”(Kirche fur andere= D. Bonhoeffer)가 아니라 자기 완결적 집단으로 인식함으로써 교회의 활동과 역할을 개인주의적이고 사적 영역으로 국한시키고 영적 구원에만 몰두함으로써 공동체적 연대성과 사회적 책임성 그리고 봉사를 멀리하거나 등한히 한 결과 개신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상실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선교의 길들이 차단되어 그 대책을 구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세계교회협의(WCC)가 방콕에서 “오늘의 구원”을 주제로 하여 전인구원 내지는 사회구원을 추구하고 강조한데 비해서 반에큐메니칼 측 복음주의적 진영에서는 로잔 언약에 기초해서 “영혼구원” 내지 “개인구원”을 강조했고, WCC가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을 강조하자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선교”로 대응했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이 주어진다는 전제하에서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선교에 근거한 종교다원주의를 이단적 발상으로 몰아가서 종교 간의 대화를 거부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가져온 보수적 교회들의 종교 간의 신뢰성 내지는 사회적 신뢰성 위기는 단순한 조정위기(control crisis)가 아니라 목표위기(goal crisis)로서 쉽게 회복될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 오늘날 신학이 공공성의 영역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선교 신학적 관점에서 오늘날과 같이 발달된 통화수단들과 함께 등장한 다양한 소통가능성들에도 불구하고 제반 세속적 상업적 요구에 매몰된 일반 대중들과의 소통단절에 직면하여 그 대응책들과 방법들을 모색하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전통적으로 교회나 신학이 성서와 교리를 자신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내지는 형이상학적 언어와 비의적(秘意的) 제의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공공성의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결과들을 초래했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일찍이 나치의 박해로 옥중에 갇혀서 당시 독일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을 했고 그 대책을 모색했었다. 성서적 개념들을 비종교적 언어로 해석하는 문제와 하나님에 대해서 종교적이고 교리적 언어가 아니라 세상적 언어로 말해야 할 때가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대응책을 찾는다고 하여 대부분의 보수적이고 부흥회적 설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특히 십자가 사건을 선포하는 것(Proclamation)대신 자신과 자신의 교회를 선전하는 것(Propaganda)으로 전도시키고 있다. 따라서 복음 선포의 전당이 되어야 할 교회가 목사 개인들의 업적주의 내지는 성공주의를 선전하는 장이 되고 말았다.
넷째로 오늘날 신학이 이 공공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공공성(혹은 공론의 장)은 거대시장과 그들의 자본이 장악한 대중매체에 의하여 조정되고 왜곡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나아가서 거대한 화폐권력에 의하여 식민지화된 생활세계에서 개인주의와 소비문화에 매몰된 대중들을 본래의 삶으로 일깨우고 해방시키며, 소비적 대중을 비판적 대중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방안들, 특히 비판정신과 합리성으로 무장하여 공동체적 연대성의 재구성을 위한 이론들을 발굴하기 위한 관심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공공성이라는 주제는 단순히 세계를 해석하려는 철학적 주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계를 변혁시키고 구원하려는 사회 철학적이고 정치 신학적 주제이다. 왜냐하면 공공성은 창조된 하나님의 열린 세계에서 모든 인류가 자본주의적 맘몬의 세계에 굴복하지 않고 그의 축복을 인류가 함께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계명인 동시에 인간들의 유토피아적 열망에서 같이 만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