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민중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아프리카의 해방신학들과 함께 이제까지의 유우럽과 북미중심의 신학운동을 청산하고 상황성(Kontextuality)과 지역성에 기초한 새로운 토착화 신학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제3세계의 신학적 자의식은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이념국가들의 등장과 더불어 동서의 냉전체제가 강화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한 제3세계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독립성의 확보를 위한 투쟁들 즉 비동맹국가들의 탄생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제3세계의 신학운동은 이제까지의 피선교지의 교회들이 선교모국으로부터 강제되었던 신학적 교회적 형성으로부터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과 실천에 기초한 신학적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미성숙 상태로부터 성숙한 교회들로 나아가려는 운동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위 제3세계의 신학운동들은 계시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유우럽적인 도식을 뛰어 넘어 그것이 가지는 특수성을 개개 나라들과 대륙들의 구체적인 역사성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민중신학의 등장은 이제까지 영미계통의 근본주의적인 선교사들의 신학적 교회적 사상에 지배를 받아오던 한국교회에 깊은 충격과 함께 새로운 변혁을 가져왔다. 이 신학은 70년대 박정희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던 절대 다수의 ‘민중’의 삶의 현실을 증언하고 그들과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기독교적 이론과 실천을 제시하려고 했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민중신학자들은 이들 민중과 현장에서 만나고 그들과 연대하여 이들을 억압하는 세력들과 투쟁하는 것을 통해서 이른바 ‘민중사건’의 현장에 섬으로써 과거의 이론신학 즉 서제의 신학을 뛰어넘어 이론과 실천을 결합시켰다. 이렇게 민중신학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토양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제3세계적’ 정치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민중신학에 영감을 받은 젊은 성직자들은 그 이론과 실천을 단순히 그때그때 주어지는 민중사건의 현장에서 개인적인 참여(Commitment)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들 민중을 묵어 세워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역사의 주체로서 서게 하기 위한 하나의 운동으로서 민중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중교회의 등장은 민중신학의 탄생만큼이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신학이라는 것이 단순한 이론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한시적으로 일정한 역사적 순간에 자기의 과제를 완성하면 그 생명력을 다하는 것이 안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그 사상을 담을 틀과 그 사상을 현장에서 구체화할 역사적 실체로서의 조직체를 가지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과 더불어 민중교회의 탄생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이론과 실천의 결합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실상 민중심학 못하지 않게 민중교회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과 기대는 컷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민중신학은 몇가지의 문제들에 대한 유보적 입장(예를 들면 민중에 대한 정의와 같은 것)으로 인해서 그것의 학문성에 대해서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리고 현장성과 사건성의 강조로 인해서 그 신학과 더불어 탄생한 민중교회들과의 관계규정에 있어서 문제들을 야기했었다. 말하자면 현장성과 사건성의 강조는 그것이 민중교회들과 가지는 신학이론적 체계화를 거부하거나 민중교회들이 목회적 실천에서 기대하는 신학이론적 지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입장들이 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강조하는 현장성과 사건성이 초래한 불가피한 귀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민중신학은 그 촛점을 수난당하고 아파하는 민중들의 삶의 현장과 그들이 해방과 사회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데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건의 신학, 현장의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이 가지는 장점이기도 하다.
그 결과 신학사상의 담지자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문제 즉 ’민중신학의 교회론‘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기여를 하고 있지 못하다. 여기서 우리가 ‘교회’를 신학의 실천적 담지자라고 전제할 때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들이 있다. 첫째 물음은 민중신학이 ‘교회 일반’을 그 사상을 담지할 수 있는 틀로서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안에 들어와 있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을 민중신학을 담지하고 실천해 나갈 주체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혹은 기성교회는 제외하더라도 민중교회를 민중신학의 담지자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교회론을 논함에 있어서 민중신학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계속 유보할 수는 없는 싯점에 도달한 것 같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슐라이엘마하는 주로 자기의 신학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종교를 멸시하는 지식인들“로 삼았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를 휩쓸고 있던 계몽주의와 과학적 발전을 통한 급격한 세속화 과정에서 발생한 반기독교화 내지 탈기독교화한 서구사회에서 불가피한 결정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그의 변증적 신학은 당대의 무신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경건주의적 뿌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깊은 위안을 주었다. 리츨같은 신학자는 신칸트학파의 철학적 틀을 자기 거점으로 삼아서 자신의 신학을 도덕율에 환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었다. 그리고 로데 같은 이는 당시의 진보사상의 구체적 현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헉적 발전에서 자기의 신학적 논거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른바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계몽주의적 서구사회의 발전과 여기에서 도출되는 탈기독교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들에게서는 당시 제도로서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신학연구의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교회는 사실상 ‘주변실존자들’의 안위처 정도로 파악되었었다.
이러한 계몽주의와 거기에 기초한 세속화의 문제에 지속적으로 자기의 신학적 작업을 집중시킨 이는 고가르텐이다. 그에게서 교회론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인식은 초기 바르트의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사펜빌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에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하나님 나라운동은 교회를 통해서 보다는 오히려 동터오던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에서 보려고 했었다. 즉 당시의 교회가 그의 신학적 관심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은 같은 변증법적 신학의 틀안에서 활동했던 불트만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을 자기의 신학의 기본범주로 삼음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이 인간의 현존재의 규정으로서 말해질 때만 인간에게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1919년 ‘로마서’를 쓰면서 그리고 그의 ’기독교 교회학‘을 ’교회교의학‘으로 제목을 바꾸어 쓰면서부터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 그리고 그것의 매개와 실천의 장으로서의 교회가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여기에서 신학의 교회성(Kirchlichkeit)이 문제된다. 우리가 흔히 신학이 가지는 4중의 과제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신학의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행위들을 찬양하는 것으로서 송영(Doxologie)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교회’의 예배적 사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학은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서 ‘설교학’(Homologie)인데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비의적(秘義的) 사안이 아니라 사회와 세계에 대한 ‘교회’의 공적행위(Öffentlichkeitsauftrag)이다. 셋째 신학은 설교를 통한 케리그마의 현재화에 대한 봉사로서 ’성서주석‘인데 따라서 신학은 ‘교회’안에서 “전통”의 현재화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신학은 ’교회‘의 책임적 발언에 봉사로서 시대의 자기이해에 대한 수용적이고 비판적인 관련에서 ’신앙의 변증학‘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위에서 이미 제기했던 문제들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즉 현실적으로 교회 없는 신학운동이 가능한가? 역사적으로 그것은 가능했다. 그러면 민중신학도 교회 없는 신학인가?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민중신학이 ‘반신학 ’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반교회적’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인가? 그리고 만일 민중신학이 서구적 신학과 교회에 대해서 반신학적이고 반교회적이라면 민중교회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런 물음들을 답하는 것이 본논문의 과제가 될 것이다.
민중신학의 교회이해
민중신학의 교회론은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이 기성교회에 대해서 가지는 비판적 거리감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중신학은 그 청중을 주로 교회밖에서 찾은데 본격적인 교회론을 전개하지 않고 있는 주된 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말하자면 정치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은 그 이념의 실천의 장을 교회 보다는 교회 밖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주된 관심은 억눌리는 민중의 해방사건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중신학의 자기이해와 방향성을 고려하여 본 논문에서는 서남동교수의 논문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및 안병무교수의 글 "민중의 공동체 - 교회“ 를 중심으로 그들이 교회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남동교수의 글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쓰여진 글로서 민중신학에서의 교회론을 전개하기 위해서 된 글이라기 보다는 민중신학 일반과 세계교회사 그리고 한국교회의 현금의 과제를 제시하기 위해서 출판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중교회를 염두에 두었다기 보다는 기성교회의 개혁방향을 의식하고 쓴 글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병무 교수의 글은 서남동교수의 글 보다는 약 10년정도 후에 나온 것으로서 비교적 민중신학과 민중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서남동교수의 글보다는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매우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글들을 통해서 민중신학에서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자.
이들 두 신학자들은 다같이 민중신학도 교회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비판적이지만 교회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에서 교회론의 비중은 대단히 미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병무 교수에 의하면 그동안 ”민중신학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제가 시급했기 때문에 ‘교회론’을 다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교회론을 구체화하지 않고 있으며...교회론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런 요청에 대해서 ‘굳이 대답을 한다면’하는 식의 전제가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교회론’은 민중신학에서 중요한 항목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동시에 민중신학의 실천의 장으로서 교회가 설정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에서는 교회론은 부수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기존교회를 비판할 필요가 있을 때 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입장은 교회의 기원에 대한 이해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즉‘교회’라고 하는 것은 본래 그 기원을 예수에게서 찾을 수 없는 뭔가 비본래적인 실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로이시(Loisy)가 언급하고 있듯이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탄생한 것은 교회였다”고 하는 인식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남동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는 왕국(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다. 예수의 십자가 이후의 신국도래의 기다림은 ‘예수의 재림’(parousia)으로 다시 표현되었다. 이것이 원시교단의 본래적인 신앙 곧 기다림이며 또 교단의 출현이다. 그것은 종말을 기다리는 공동체며 새 질서를 기다리는 혁명적인 신앙이었다. ‘암하레쯔’의 꿈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안병무 교수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교회란 말은 바올로 서신에서 46회나 사용되고 있어요. 그만큼 그에게서 교회의 비중이 커진 것입니다. 그런데 공관서에는 마태오 복음에만 2번 나오죠. 그러나 이것들을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근원을 예수에게 돌릴 수는 없어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의 서신들 보다 훨씬 후대에 쓰여진 공관서들에서 교회의 모습이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은 것은 예수가 교회를 세울 의도가 없었었고 또 제도화되어 가는 교회에 대한 비판세력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제도화의 대표적인 예로서 사도권의 확립과 함께 의식(예배및 성례전) 그리고 교리화를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 안병무 교수나 서남동 교수 모두가 재림의 지연에서 교회탄생의 원인을 보고 있다. 즉 예수가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 자리에 교회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남동 교수는 좀더 자세하게 교회의 출현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역사의 궁극적 종말인 ‘신국’과 준궁극적 종말인 ‘천년왕국’으로 정형화 되었다. 신국은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이고 ‘천년왕국’은 역사안에 있는 종말(the end in history)이다... 미래의 약속된 ‘새 것’에 대한 기다림 대신에 ‘마지막 때’인 이 시대에 선택받은 공동체라는 교회신앙 - 땅위에 있는 신성한 제도인 교회 - 이 탄생한 것이다.” 무엇 보다도 제도적 교회는 본래적 종말신앙의 쇠퇴의 댓가로 얻어졌다는 것이 서남동교수의 생각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교회는 예수의 선포의 핵심내용인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종말론적 현실이 사라지고 그것의 실행자인 예수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서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뭔가 비본질적이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뭔가 비본질적인 실체로서 생겨난 교회가 처음에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재림이 지연되면서 더욱더 비본질적인 제도적 교회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뭔가 비본질적인 것인 교회의 출현도 문제지만 그것의 제도화는 더욱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제도화 혹은 교리화는 초대교회의 “그리스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이 교회의 제도화 혹은 절대화는 콘스탄틴적 전환(313-337년)을 거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말하자면 이제까지의 박해받던 종교가 박해하는 종교가 되었고 눌린자의 종교가 누르는 자의 종교가 되었다. 즉 기독교는 황제의 종교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본래적인 종말론적 재림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소종파나 이단으로 간주되어 박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제도화에 반기를 들었던 몬타니즘 운동이나 제국교회와 과정에서 일어났던 도나티스트파 운동이 그런 것딜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의 본래의 입장이 제도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취급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교회의 입장을 신학적으로 정형화한 것은 어거스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화되고 지배자의 종교가 된 기독교 내에서 개혁을 시도하던 이들이 있는데 13세기의 요아킴 피오레나 종교개혁 운동의 좌파에 속했던 토마스 뮌츠 같은 이들이 그러한 본래적인 복음에로 돌아 가려고 한 대표적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다시 종말론이 신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맑시즘과의 대화를 통해서 촉발된 혁명.정치.해방의 신학들이 ’기독교 시대 이후‘에 기독교에 활력을 불어 넣어서 다시 민중종교로 복귀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기독교는 잃어버렸던 복음의 사회적 차원, 사회적 구원을 되찾았다. 둘째 기독교는 신의 초월을 형이상학적 영역으로부터 미래의 초월로 환원한다. 셋째로 기독교는 지금까지의 ‘억압자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민중의 종교, 해방의 복음으로 복귀한다. 넷째 기독교는 정통적 교리가 절대적으로 주어진 규범이라는 생각에서 탈출하여 역사적 현실에서 실험과 행동으로 진리를 검증하는 태도로 바뀐다. 다섯째로 교회는 정통적인 교회사의 족보를 자랑하는 것을 의심하고 이 시점에서 소종파들과 이단들의 동기와 족보를 찾기 시작했다. 여섯째로 교회와 사회와의 사이에 세운 두꺼운 담을 헐기 시작했다. 교회신학이 아닌 정치와 세계의 신학이다. 하느님의 선교다. 카톨리시티(catholicity)의 새로운 이해다).
종합하자면 민중신학에서 교회론은 교회가 예수 자신이 세우지 않은 뭔가 비본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역사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교리화되거나 제도화 되지 않은 ”예수 공동체“로의 복귀 혹은 제도화되기 이전의 ”종말론적 본래성“에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현장성과 사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또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은 기독교 혹은 교회는 민중들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런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했던 것은 정통 기독교회가 아니라 소종파들이나 이단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종교’로서의 기독교 혹은 교회관은 안병무 교수에게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교회는 민중이 주도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이에 따르면 민중과 예수의 만남, 민중과 예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 참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교회라고 하는 민중신학의 명제는 ‘민중이 메시야다’라고 하는 명제와 더불어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다.
안병무교수는 민중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명제를 예수는 당시 가난하고 수난당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기다리다가 예수의 운동에 동참하는 사건과 현장에서 교회의 원모습을 보기 때문에 민중만이 하나님 나라의 약속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운동에 초청받고 이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민중들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공동체는 “종교적인 특권층이나 또는 선별된 사람들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종교적 범주나 규율에 매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천지개벽에 참여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예수 주변에 모였던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이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서남동 교수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주로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를 말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통 그리고 구약의 예언자 전통 그리고 예수의 민중전통에서 민중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계약의 파트너요 그 주된 추동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신학자들은 제도로서의 교회 보다 하나님과 민중들 사이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교회’으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서의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자. 사건으로서의 교회에 관해서는 비단 민중신학자들만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서구의 신학자들도 교회를 다양한 측면에서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라고 정의할 때는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모일 때 거기에는 사건이 일어날 수 벆에 없기 때문이다.
‘사건으로서의 교회’는 ”형제들의 공동체로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가운데서 성령을 통해서 현재적으로 행동한다.“ 이와 유사한 입장은 에밀 부룬너(Emil Brunner)의 ”교회의 오해“(Missverständnis der Kirche)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교회란 것은 세상에 대해서 순수한 인격공동체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호켄디크는 ”교회는 세계안에서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행위의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렌토르프는 교회를 그리스도 사건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들 서구신학자들이 교회를 ‘인격공동체의 사건’, ‘하나님의 사건’, 혹은 ‘그리스도의 사건’이라고 말하지만 민중신학자들은 구체적으로 ‘민중과 예수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그 사건의 성격을 구체화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회가 ’그리스도 사건‘이라고 할 때 그것이 바르트가 말하고 있듯이 말씀선포에서의 사건일수도 있고 또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성만찬에서의 사건일 수도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너무도 힘드니까 도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종교의식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즉 고난받는 민중현장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현장에서 그리스도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참 증언이다. 중요한 것은 민중과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러한 발상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보거나 또는 “민중이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라고 하는 전제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얻게 되는 결론은 민중신학자들은 교회가 뭔가 예수 자신일 설립하지 않은 뭔가 비본래적인 것이긴 하지만 역사적 실체로서의 교회라고 하는 것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지상의 예수가 교회를 세우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지상의 예수가 없었다면 교회가 세워질 수 없었다는 한스 큉의 논제와 일치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종말론적 신앙의 역동성“ 즉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려는 역동성을 교회가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에서 말하듯이 세상 한가운데 혹은 민중들과 만나는 현장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초대교회가 가졌던 사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교회는 제도화되기 이전의 종말론적 신앙의 역동성을 가졌던 원시 기독교 공동체로의 복귀가 민중신학자들이 지향했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러한 교회를 ”민중이 주인이 되는 교회“ 또는 그것은 ”그리스도가 민중과 만날 때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두가지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그 하나는 교회의 주인이 민중이다르는 의미는 무엇을 발하는 것이며 동시에 교회를 사건이라고 할 때 그 사건의 주체가 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들은 신학적으로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대한 불분명한 대답들이 많은 오해와 신학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인은 민중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역사적 예수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른바 제도적 교회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기 주변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모았다. 이 사람들이 교회의 뿌리를 형성했다. 또한 그들이 예수의 멧시지를 계속 선포함으로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사건 즉 교회를 이루어 갔었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는 그의 설교와 활동을 통해서 부활절 이후의 교회의 출현을 위한 기초를 만들었다... 부활절 이후의 교회의 성립은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활동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여기에서 민중교회론은 오히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며 민중들은 교회의 주체라고 말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민중이 메시야라는 명제도 마찬가지이다. 메시야는 그리스도이며 민중은 하나님 나라운동에서 주체이다. 교회를 사건이라고 말할 때도 그 사건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민중은 주체로서 거기에 참여한다.
민중교회론의 새 지평들
만일 민중신학자들이 종말론적 신앙의 역동성을 가졌던 원시공동체로 복귀하는 것이 민중교회의 일차적 과제라고 한다면 민중교회는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 교회의 외피를 벗어버려야 할 것이다.
주후 500년까지 이른바 초대교회는 주로 그리스 철학사상과 형이상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주요한 교리체계(삼위일체론, 기독론등)을 확립해 나갔다. 그래서 교회사가들은 이 기간을 기독교의 그리스화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기간은 기독교회가 교리화 되어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삼위일체론과 기독론등 중요한 교리들이 그리스 철학의 지원을 받아서 제정되었다. 여기서 기독교의 중요항목들은 형이상학적 논리의 틀에 사로잡히게 되어 그 종말론적 역동성과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세기 1천년간은 로마적 게르만적 교회로서 로마법과 게르만적 법체계에 따라서 교회의 강력한 제도화가 시행되었다. 이러한 제도화에서 가장 강력하게 등장한 것은 성직계급(Hierarchie)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교황제를 비롯해서 성직자들의 계층화와 함계 평신도들에 대한 차별화가 나타난다. 제반 교회적 의사결정과 제의집행들은 성직자들의 독점물이 되었다. 평신도들은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한다. 이러한 객체화의 가장 대표적인 예들은 여성들이다. 즉 이러한 성직계급의 출현과 더불어 교회는 만성들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남성적 교회‘로 되어간다. 이러한 남성지배적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카톨릭은 물론 개신교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기독교를 지배자의 종교로 만들었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이러한 그리스화의 교리적 교회와 로마적 게르만적 제도교회를 어느 정도 붕괴시키고 교회를 다시 원시기독교 공동체에로 복귀시키려고 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출현한 시민사회에서 기독교는 여전히 지배자의 종교였고 복음이 가진 종말론적 역동성은 사라지고 신앙은 뭔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점점 사회적으로 통합되고, 부루좌적인 핵심조직이 되어 버리고 ’신앙고백의 교회‘를 거부하는 교회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법적으로 제정한 구원의 기관과 신자들의 공동체로 정의되건 하나님 말씀의 선포의 사건으로 규정되거나 아니면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피조물(creatura Verbi divini)이면서 동시에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제도화된 조직의 형태로 존재하건 간에 지금의 교회는 초기의 원시공동체가 가졌던 종말론적 신앙과 사회변혁적 역동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서 민중신학의 교회는 이러한 교리화의 교회, 제도화의 교회 그리고 사적이고 내면적인 종교의 교회를 떨쳐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4교회로서의 민중교회 출현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 논제를 통해서전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논제 1: 민중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회들로부터 교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기구적으로 탈출해야 한다. 이러한 논제는 교회의 보편성(Katholizität), 거룩성(Heiligkeit), 사도성(Apostolizität)과 상충되는 것이며 동시에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보편성은 제도적 혹은 기구적 결합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며 거룩성이나 사도성도 기존의 교회에 교리적 기구적 소속성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보편성과 거룩성 그리고 사도성은 중세교회의 제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개념들일 뿐이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일치성은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개혁 이후의 분열된 교파들의 일치도 고려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과 실천에의 신실성에서 일치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중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원시 기독교회로의 복귀를 지향하자면 기존의 제도적 교회들과의 기구적 단절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 좌파의 교회들 즉 평화교회들의 존재와 역할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들은 종교개혁 우파교회들의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에 대해서 원시공동체의 종말론적 신앙의 역동성을 지향했었다.
민중교회가 기존의 제도적 교회와 단절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제도적 교회와의 기구적 재정적 협력관계에 들어가면 궁극적으로 새로운 교회 혹은 원시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존교회와 기구적 틀과 재정적 연계를 가지고 있는한 민중교회는 그 이상과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 이것이 평화교회들이 보여주는 역사적 경험이다.
2. 민중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즉 민중의 교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제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민중교회는 ’성직화된 교회‘(klerkalisierte Kirche)가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카톨릭적 전통의 성직자 평신도의 전통적 구별은 사라져야 한다. 만인사제론의 실질적 실현이 전망되어야 한다. 민중이 주체가 된다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모델이 그대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민중교회가 아니다. 예배의식과 말씀의 선포 에도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나눔의 실천으로서의 성만찬도 그리고 축도와 같은 내용들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면 그것들이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않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민중교회는 계층성및 성차별성이 완전히 철폐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또 개신교 자유교회의 목회형식인 목회자의 삶의 기초를 평신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고려해볼 문제다. 목회자도 자기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일정한 직업을 가지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를 바울에게서 본다. 이 점에 있어서 민중신학의 이론과 현재의 민중교회의 목회방식에는 뭔가 편차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념은 새롭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는 전통적 교회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보여진다.
3. 그리고 민중교회는 전통적인 교리체제에 대한 새로운 핵석과 실천을 필요로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오늘날 기독교 교리체계나 신학적 이론들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철학에 기초해서 형성된 틀을 깨지 못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만찬이론과 삼위일체론및 기독론과 같은 것이다. 성찬은 예수의 밥상공동체 즉 나눔의 공동체의 종교화내지 의식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지금까지의 주요한 신앙항목들을 하나님 나라의 빛 즉 종말론적 신앙의 빛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 없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신학의 교회론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4. 마지막으로 민중교회는 제의공동체에서부터 삶의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운동은 사실상 산상살교의 정신에 기초해서 또는 예수에 대한 철저적 복종을 목적으로 초대교회부터 중세기를 거치면서 수도원운동이라는 것을 통해서 포기되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삶의 토대인 물질을 포기함으로써 나눔의 공동체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은 대개는 가장 물질적 토대를 확실하게 장악한 단체로 바뀌었다. 그러나 삶의 동체로서 수도원운동이 가졌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세상과 단절함으로써 그것을 변혁시키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중교회가 제의공동체에서부터 삶의 공동체로 나아간다고 할 때는 물론 종교적 울타리 안에서의 수도원적 삶의 공동체를 지향해서는 않된다. 여기에는 폭넓은 개방성이 요구된다. 민중교회원들 사이의 공동체적 삶을 실습할 수 있으며 동시에 모든 굶주리고 억압당하는 민중들의 귄리를 되찾아 주고 그들의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데 모든 사회운동과 연대하고 협력하는 것도 이들의 삶의 공동체의 한 존재방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민중교회운동은 비단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에 의해서도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평화교회의 모델과 일본의 무교회운동의 방식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