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 Küng(손규태역)
내 용:
I. 현재의 세계정치의 지평
II. 국제관계의 낡은 패러다임
III. 국제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윤리적 전제들
IV. 새로운 패러다임은 벌써 끝장났는가?
I. 현재의 세계정치의 지평
2002년 10월 20일 필자는 워싱턴에 있는 국제통화기금 본부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사무총장인 쾰러(Horst Köhler) 박사와 함께 우리의 재단 세계윤리(Weltethos)가 주관하는 “세계 종교들-보편적 평화-지구윤리”라는 전시회의 개막에 참석했었다. 필자는 10월 20일 같은 날 안보보좌관인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a Rice)가 발표한 부시 대통령의 대외정치적 전략문서(das außenpolitische Strategie-Dokument)를 읽고 나서 백악관 옆을 걸어서 지나갈 때 매우 상반되는 감정들이 필자를 사로잡았습니다. 우리의 전시회와는 얼마나 대조되는가: 이 전략문서는 (국제법을 어기는) 선제공격과 예방전쟁 및 중동의 “새로운 질서”의 개념을 통한 확고한 차단전략과 위협전략을 담고 있으며 같은 수준의 강력한 세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도적 입장이 내포되어 있다. 그 세력이란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국주의적이고 지정학적으로 고려된 제반 계산(das imperialistische geopolitische Gesamtskalkül)을 담고 있는 이 문서는 이미 1993년 냉전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여 작업되었으며 (뉴욕타임스의 잘못으로) 공개된바 있다. 그것은 당시의 국방장관이었던 체니(Cheney) 밑에서 스쿠트 리비(Scooter Libby)와 폴 월포비츠(Paul Wolfowitz)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미국은 “가능한 미래의 지구차원에서의 경쟁자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형식적인 우방들은 포기하고 그 대신 군사력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9.11 테러가 나기 오래 전에 체니, 리비, 월포비츠 등은 “사담 후세인은 그들이 미리 선택해 놓은 국가안전 전략 - >제국이 일차적으로 공격하는 것< - 을 실험하기 위한 완전한 실험실의 쥐”라고 생각했다(Maureen Dowd, NYT 30.1.03). 이미 1996년 지금의 국방성 고문인 펠레(Richard Perle)는 같은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과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한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거기에 보면 중동에서의 “세력균형”이 변했고 사담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스라엘은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유엔의 모든 결의안들을 무시했다). 사담이라는 쥐를 실험실에서 제거해버린 다음 월포비츠, 펠레 그리고 다른 친구인 아리엘 샤론 등은 이라크를 아랍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실험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능한 한에서 미국이 원하는 것인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아랍 민족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샤론(Sharon) 식의 해결책이기도 하다. 모든 동맹국들을 초강대국 하에 두기 위해서는 모든 것은 “Pax Americana"에 봉사해야 한다. 2001년 9월 11일은 이 집단에게는 예기치 않은 기회로 주어지는데, 그것은 아버지 부시 밑에서 잘 준비된 계획들이 아들 부시 하에서 실천되었다. 왜냐하면 테러에 대한 공포가 전세계로 하여금 미국의 제국주의를 받아들이는데 용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정책은 물론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지미 카터 외에도 전 안보보좌관이며 상원의원이었던 전 부통령 고어를 비롯해서 여러 나라의 많은 이사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고 있음을 나는 워싱턴에서 경험했다. 부시의 미국과는 다른 미국도 존재했다. 즉 링컨, 케네디, 마틴 루터 킹 그리고 점차 강해지는 평화운동의 미국 말하자면 민주적이고 인도적인 미국도 존재한다. 우리는 진지한 생각을 가진 신문들에서 거듭해서 매우 비판적인 글들을 읽게 된는데 예를 들면 2002년 9월 24일 자 뉴욕타임스의 사설에 보면 “부시 독트린”이란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른 점들에서는 이 전략문서는 오히려 로마나 나폴레옹 제국이 선포될 수도 있는 것 같이 들린다... 부시는 위협을 가하는 헤비급의 미국(an intimidating, heavyweight America)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국제법에 준 하는 일방적 선제전쟁(Präemtivkrieg)과 국제법에 반하는 일방적 예방전쟁(Präventivkrieg) 사이의 구별이 무시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초강대국의 가시적 군사적 승리와 함께 엄청난 부정적 결과들을 초래하는 이러한 예방전쟁을 그 동안 경험해 왔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장은 어떤 확실한 예측들이나 정해진 해결책들(Patentlösungen)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분들에게 제안할 수 있고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첫 부분에서 현실의 세계지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다음)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러시아와 체첸 나아가서 북조선에서 점차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는 사안들과 관련해서 세계정치적 기본대안들을 철저하게 해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제관계에서의 오래된 낡은 패러다임, 국제관계에서의 새롭고 이미 실현되고 있는 패러다임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 관한 평가에 대해서 몇 가지로 성찰해 보자. 그 문제를 제II부에서 다루겠다.
II. 국제관계의 낡은 패러다임
미국의 국방장관 로날드 럼스펠드는 프랑스와 독일이 미국의 전쟁을 반대했다고 해서 경멸하는 조로 그 나라들을 “낡은 유럽”이라고 부르고 블레어, 벨루스코니, 아즈날, 크와스닙스키 등의 유럽을 “새로운 유럽”이라고 했다. 저는 이와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적 부시의 정책에서 우리는 - 위대한 미국의 평화염원들에도 불구하고 - 20세기 중엽까지 근대의 유럽을 파멸로 몰아갔던 정책 즉 “낡은 패러다임”에로의 후퇴를 보게 된다.
저는 국제관계들에서 낡은 패러다임을 서서히 그러나 어렵게 종말을 고하게 만들고 동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관철해낸 세 개의 매우 상징적 날자들을 회상시켜드리고자 한다. 그 새로운 패러다임은 1918년에 예고되고 1945년에 실현되었으며 마침내 1989년에 돌파 당하고 말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1천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끝난다. 이 때 독일 제국, 합스부르가 가의 제국, 러시아 자르의 제국, 오스만제국, 그리고 중국 황제의 제국이 몰락한다. 그리고 나서 미국 군대들이 유럽 땅에 나타나고 소련제국이 등장한다. 이것은 근대의 유럽 중심적 제국주의적 패러다임의 종말의 시작이고 아직 정의할 수 없으나 멀리 보면 예견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미국에 의해서 제안되었었다. Woodrow Wilson 대통령은 (1918년 1월 8일) 자기의 평화 프로그램을 “14개 항목”으로 제시했다. 패배자나 피정복자 없는 “정의의 평화”(Gerechtigkeitfrieden)과 국토의 합병이나 배상요구 없는 “제 민족들의 자결”(Selbsbestimmung der Völker) 등이다. 그러나 현실정치가인 Clemenceau와 Lloyd George 의 “베르사이유 조약”은 새로운 패러다임 실현을 가로막았다. 정의의 평화대신 패배자의 참여 없는 강요된 평화(Diktatfrieden)이 등장한다. 결과는 뻔했다. 파시즘과 나치즘(극동의 일본의 군국주의의 지원을 받았다)은 파멸적인 반동적 사태발전이었는데 20년 후에 그것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낳게 만드는데 그것은 세계사에서 볼 수 없었던 참상을 낳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은 약 5천만 명의 전사자와 수백만 명의 난민을 낳고 끝난다. 나
치즘과 파시즘은 끝장나고 소련공산주의가 대외적으로 전에 없이 강해졌으나 내적으로는 스탈린식의 정책으로 인해서 정치적-경제적 사회적으로 이미 위기에 빠져든다. 다시 미국에 의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된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창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설립과 더불어 새로운 경제질서를 위한 브레튼우스 조약체결, 1948년 보편적 인권선언, 나아가서 유럽재건을 위한 미국의 경제원조와 유럽을 자유무역체제에 가입하게 한 것 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자기의 영향권에서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차단했고 세계를 동서로 갈라놓았다.
1989년: 비인간성, 전체주의, 국가테러의 상징인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진다. 동유럽에서의 성공적인 평화적 혁명과 소련공산주의의 몰락. 골프전쟁이후 다시 미국의 대통령은 새로운 패러다임 즉 “새로운 세계질서”를 선포했고 이러한 표제어는 세계에서 열광적인 반향을 얻는다. 그러나 전임자 윌슨과는 달리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러한 “비전을 담은 사안”(vision thing)인 패러다임이 어떻게 발전되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약속과는 달리 쿠웨이트에서는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우디 아라비아와 다른 독재국가들에서도 민주화의 증진이 없었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은 끝나지 않았고 이들 나라들은 테러의 온상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회를 세 번 간과했다 아니 기회를 세 번 결정적으로 놓쳤다.
그렇지만 시간은 충분하다. 우리는 20세기에 와서 전쟁들, 대량학살들, 난민행렬들에도 불구하고, 또 Archipel Gulag, 홀로코스트, 원자폭탄들에도 불구하고 보다 낳은 많은 변화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많은 과학적 기술적 성과들을 넘어서 이미 1918년부터 새로운 근대 이후의 전체 상황을 규정하는 운동들이 1945년 이후에 관철되었다. 평화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교회일치 운동 등이 그것들인데 이것들은 전쟁과 군축, 남녀의 파트너 됨, 경제와 환경의 관계, 기독교 교파들과 세계종교들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한 새로운 자세가 그것들이다.
유럽에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지배하던 제국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라고 하는 지배적인 정치적 방향들이 사라졌다. 아프리카, 아시아, 아랍 세계는 여전히 (유럽에서 수입된) 민족적 권력정치에 의해서 지배되지만 수많은 전쟁, 특히 두 개의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제국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의 원조국가들이 서유럽은 패러다임 전환을 확실하게 달성했다. 이들 나라들은 양대 세계대전에서 군사적 수단을 통해서 해결하려던 대결적 무력정책과 특권정책은 명백하게 실패로 돌아갔고 오랫동안의 대립을 평화적으로 극복하려는 지역간의 협력과 통합의 새로운 공동의 정치모델로 나아갔다. 미국인들에게도 이것은 지금까지는 중요했다. 그 결과는 유럽 공동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1948, 1960년에 설립) 및 서구 산업국가들(유럽 외에 미국, 캐나다, 멕시코, 오스트랄리아, 뉴질랜드, 일본)의 전체 영역에서는 반세기 동안의 민주적 평화를 제공했다. 사실상 그것은 성공한 패러다임 전환이 아닌가!
이러한 매우 간략한 역사적 고찰을 거친 다음에야 우리는 제3부에서 국제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 규정을 다룰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필자는 “세계윤리 프로젝타”(Projekt Weltethos) 그리고 “세계정치와 세계경제를 에 대한 세계윤리”(Weltethos für Weltpolitik und Weltwirtschaft)와 같은 책들에서 서술한바 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아이디아들은 2001년 유엔의 선언서(Manifest) "미래에로의 가교들“(Brücken in die Zukunft)에 들어가 있다. 필자는 전 독일 대통령 리챠드 폰 봐이체커와 함께 유엔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이 초청한 20명으로 구성된 ”저명인사들의 집단”의 일원으로서 국제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한 선언서 작업에 참여했다.
회교도며 개혁적인 이란의 무하마드 챠타미(Muhammad Chatami)가 제안한 문화들의 대화의 해가 그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선언서는 2001년 11월 9일, 즉 9.11 사건이 나고 몇 주간이 지나지 않아서 “분단을 가로질러서”(Crossing the Divide)란 제목으로 사무총장과 유엔총회에 제출되었다(독일어로는 Brücken in die Zukunft, Fischer Verlag 2001). 이러한 개인적으로 참가한 배경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국제적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매우 간략하게 스케치해 드리고자 한다.
III. 국제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윤리적 전제들
유엔과 OECD에서의 경험들에 기초해서 새로운 정치적 전체위상을 다음과 같이 간략한 특징들로 제시할 수 있는데 여기서 윤리적 범주들도 불가피하게 다루게 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근대적 국가적 이해관계의 정책, 권력정책, 특권정책 대신에 지역간의 합의, 조정, 화해의 정치(Verständigung, Annährung, Versöhnung)의 정책을 말한다. 많은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독일이 이 정책에 수행에서 모범을 보였다. 독일과 폴랜드, 독일과 체첸 사이에서는 이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을 요구한다. 중동, 아프가니스탄, 카시미르, 사이프러스 등에서도 그런데 이전의 대결, 침략, 보복 대신에 상호간의 협력, 타협, 통합(Kooperation, Kompromiß, Integration)이 요구된다.
여러분들은 이미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전체위상은 일상의 정치를 넘어서는 사고의 전환(Mentalitätsveränderung)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곧
- 그것을 새로운 기구들로는 불충분하며, 새로운 사고방식(Denkart, "mind-set")이 필요하다.
- 국가적, 종족적(ethnische), 종교적 차이는 근본적으로 더 이상 위협으로서가 아니라 적어도 풍요하게 하는 것(Bereicherung)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사고는 항상 적, 철천지원수를 전제했으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유럽공동체 안에서와 같이) 사고는 더 이상 원수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물론 그들 사이에는 파트너, 경쟁자, 때로는 반대자들을 전제로 한다. 경제적 경쟁의 제반 영역에서 군사적 대결 대신 파트너와 경쟁자 나아가서 반대자들이 존재한다.
- 이것이 보여준 바는 민주주의와 국가의 복지는 장기적으로는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통해서 증진된다. 그것들은 대립관계나 경쟁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협력관계(nicht im Gegen- oder Nebeneinander, sondern im Miteinander)를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협력관계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들이 만족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도 상대방을 제압하는 제로섬게임(Null-Summen-Spiel)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얻는 포지티브 섬게임(Positiv-Summen-Spiel)이 가능한 정책이 요구된다.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에서의 정책은 당장 용이한 것은 아니며 “가능한 것의 예술”(Kunst des Möglichen)이 남아 있다. 그것들이 기능 하려면 그것은 “포스트모던주의적” 임의성다원주의(Beliebigkeitspluralismus)에 기반을 둘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일정한 기본가치들, 기본권리들, 기본의무들과 관련해서 하나의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사회적 기본동의는 모든 사회적 집단들, 신앙인들과 비신앙인들, 다양한 민족들, 종교들, 철학들, 세계관들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담지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민주주의적 체제가 강요해서는 안되지만 전제로 해야 하는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어떤 공동의 윤리적 체제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말하는 것은 기본적 가치들과 척도들, 권리들과 의무들에서 공동의 기본구성요소, 공동의 에토스(gemiensames Ethos), 인류의 윤리이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초구조”가 아니고 인류가 이미 가지고 있는 공동의 종교적-철학적 원자재들을 한데 묶은 세계윤리(“global ethic")는 율법적으로 밖으로부터 주어지지 않고 안에서부터 의식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세계윤리는 가능한 방식으로 개체의 짐을 덜어주는 집단적 책임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마치 특정한 잘못들에서 단지 “상황들”, “역사”, “체제”만이 책임이 있는 것처럼). 그것은 특별히 사회 안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모든 개인들의 개인적 책임(individuelle Verantwortung), 특히 정치적 지도자의 개인적 책임을 목표로 한다.
공동의 윤리에 자유롭게 의무를 지는 것은 자명적으로 법의 지원을 받아서 언제라도 법을 통해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인종학살, 인류에 대한 범죄, 전쟁범죄, 국제법에 반하는 침략은 계약국가가 자기 영토에서나 자기의 구인들과 책임자들에 의해서 자행된 범죄를 법적으로 처리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을 때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처벌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USA)은 - 이스라엘과 중국과 더불어 - 자기들이 긍정했던 국제재판소를 사보타지 하고, 또 도쿄의 기후협약, 러시아와 맺은 ABM 협약, 생물학무기들의 개선협약 등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나아가서 요한네스부르그의 유엔정상회담을 보이코트 하다시피 하고 세계인구기금을 위한 기금출원의 삭제, 철강수입의 처벌관세와 농업보조금의 엄청난 증액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들 부시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세계공동체를 수 없이 무시하는 사례들은 미국이 근본적으로 어떤 동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토 동맹, 유엔 헌장, 심지어 반테러 동맹도 부당하게 미국의 행동의 자유에 국한하고 있다. 많은 것등을 파괴하고 많은 희생자들을 내는 “폭력회교”(Brachialdiplomatie + Frankfurter Allgemine Zeitung)는 때로는 적들에 대해서보다는 미국의 친구들 사이에서 자행되고 있다. 독일 수상은 - 이것은 내가 “정당의 지지자”로서 말한다 - 자기의 평화정책을 선거를 고려하여 만들어냈고 많은 전술적 실수들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용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미국의 군사정책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었는데 그는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무제한적 연대성”을 통해서 협력했었다. 내 생각에는 그의 유일한 잘못은 대의(Sache)에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초강대국의 오늘날의 미국 행정부가 새로운 패러다임에서의 정책과 문화들 간의 대화를 아시아, 아라비아 혹은 아프리카 세계의 강대국들보다 더 파괴 할 수 있고 실제로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인가? 그래서 제기되는 물음은
IV. 새로운 패러다임은 벌써 끝장났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유럽에서는 “친선과 자유의 헤게모니 국가” (wohlwollende und liberale Vormacht)로서 활동했고 특히 완전히 파괴되었던 독일에게 끊임없이 많은 일을 했고, 계산할 수 없이 자유, 민주주의, 평화, 복지를 제공했다. 누가 이것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필자도 개인적으로 미국에서 가진 강연여행이나 초빙교수로 지낼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 많은 호의, 우정, 학문적 경험과 영예를 경험했다.
1973년 미국 세력은 몰락하는 것 같이 보였다. 월남전의 결과로 과도한 군비지출, 에너지 위기, 달러폭락, 금본위 제도의 포기와 브레톤 우즈 세계통화체제의 실질적 종말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체제의 정치적 경제적 내파(內破) 이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급속히 지구화 되어 가는 세계에서 자기의 기술적,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계속 확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점차 단극화 되고 제국화 되는 기국의 권력형성에서 유럽(몇십 년 동안 어떤 구조개혁, 공동의 대외정책도 마련하지 못했고, 발칸반도 사태의 실패 등)과 일본(매우 비정상적으로 흘러간 국가재정과 병든 은행체제 때문에)이 책임을 져야한다. 이 들은 미국에 대해서 충분한 반대비중을 형성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의심스러운 재정적 정치적 상황에서2001년 1월 아들 부시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미국은 - 이전 대통령이며 노벨상 수상자인 지미 카터가 워싱턴포스트지에 실린 매우 비판적인 논문(2001. 9. 6)이 보여주듯이 - 자기의 “불안을 야기 시키는 새로운 얼굴”(“America's troubling new face”)을 드러냈다. 물론 테러와 독재 없는 세계는 일차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일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바로 초강대국이 모든 나라들 특히 자기자신의 이해관계에서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합법성과 어떤 수단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하는가?
예나 지금이나 평화도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 필자가 많은 전문가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확신한 바에 의하면 다른 전술이 가능했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놓고 내면적으로 계속 생각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위르겐 토덴회퍼(Jürgen Todenhöfer=전 기민당 국회의원)는 그의 인상적인 책 아프가니스탄 침공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처참하고 가장 곤혹스러운 실패”라고 한 것은 맞다.
결정적 물음은 이런 일이 정말 계속되어야 하는가? 이런 일이 어떻게 계속되어야 하는가? 장차 모든 세계강대국들이 -체첸인과 관련해서 러시아, 티벧이나 위구루인들에 대한 중국 등 - 유엔에게 “당신들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혼자 할 것이며 당신들은 상관없다”라는 최후통첩을 해도 되는가?
이라크와 관련된 것을 생각해 보자. 건설하는 것보다 폭격하는 것이 쉽고, 새로운 것을 건설하는 것보다 타락한 정권을 파괴하는 것이 쉽다. 아프가니스탄에서와 같이 이것은 이라크에서도 보여준다. 사람들은 독재자의 몰락에 대해서 매우 즐거워하겠으나 사람들은 사담 후세인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전쟁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미국 대통령 아버지 부시 하에서의 이라크 전쟁은 쿠웨이트에 대한 사담의 공격에 따른 것이어서 분명히 방어전쟁이었다. 그와 같은 전쟁은 유엔 헌장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유엔안보리의 승인도 받았었다. 그러나 아들 부시 하에서의 두 번째 이라크 전쟁은 분명히 공격전쟁이고 그것은 유엔헌장에 의해서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예방전쟁이라고 할 수 없다. 세계공동체인 유엔의 첫째 문서로서 유엔 헌장은 모든 공격전쟁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고 이 전쟁이 안보리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여기서 “정의로운 전쟁”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지 여부는 윤리적 관점에서 상세히 논의되었다.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토마스 그리고 근대 국제법의 창시자들인 비토리아(Vitoria)와 수아레즈(Suarez)에 의해서 발전되고 그로티우스(Grotius)와 바텔(Vattel)과 같은 근대의 국제법 학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정의로운 전쟁”에 관한 고전적 이론은 결코 전쟁의 증진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 반대로 “불의한 전쟁”을 막는데 있었다. 거기에 따라서 이라크의 경우에서 “정의로운 전쟁” 다음과 같은 여섯가지 고전적 준거들이 충족되었는가를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그 고전적 준거들이란 정당한 원인(iusta causa), 올바른 의도(rechta intentio), 균형성(Verhältnismäßigkeit), 합법적 기관(auctoritas legitima), 최후의 유일한 수단(ultima ratio), 국제적 국제법(ius in bello) 등이다. 이러한 물음은 권위 있는 정치학자들과 윤리학자들에 의해서 분명하게 부정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지면관계로 개개의 논거들을 다룰 수 없다. 현재의 위협상태에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섯 개의 모든 준거들이 다 같이 충족되었어야 하지만 실은 단 한 개의 준거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 전쟁은 비 비록 그것이 안보리에 의해서 승인되었다 할지라도 비도덕적이다. 안보리의 다수는 그 전쟁을 거부함에 있어서 모든 나라들에 사는 세계인구의 절대 다수가 분명하게 표명한 윤리적 감정에 의존할 수 있었다.
예방전쟁을 위한 대안은 억제(Eindämung=Containment)일 것이다. 이 억제는 유화정책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12년 동안 세계에서 최상의 감시체제를 갖춘 독재자인 사담 후세인은 다른 독재자들의 경우에서처럼 외부로부터의 무장상태를 감시하고 압력을 행사했어야 할 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옹호하는 자도 그 결과들이 매우 모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정권교체를 강제한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이나 다른 곳에 있는 누구도 그리고 사담의 정권을 다시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권교체는 해방은 아니다. 이라크 국민의 대다수는 “해방”을 점령으로 받아들이고 미국인들의 가능한 조속한 철수와 민주정부의 구성을 원한다. 이 민주정부는 미국에 망명중인 매우 의심스러운 이라크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편적 자유선거를 통해서 수립되어야 한다. 기간산업구조(수도, 발전소, 병원, 학교 등)의 엄청난 파괴와 국립박물관과 유적 발굴지들의 약탈의 이해할 수 없는 용인, 이것들이 민주주의 건설에 대한 어두운 징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착수해야 한다.
그러면 장차 누가 이라크를 위해서 책임을 질 것인가? 적어도 이론에서나 말로 모두가 동의하는 바는 이라크인들 자신이다. 그렇지만 부시행정부에 견해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점령군들의 지원을 받아 나라의 요지를 점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무엇보다도 석유의 착취(도둑질)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 연합의 대부분의 나라들은(이 경우 영국조차도) 유엔이 “생활문제를 담당하는 역할”(인도적 지원)을 할뿐만 아니라 “중심적” 역할 즉 정치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낡은 패러다임, 이 경우 미국의 헤게모니의 모습이 다시 지배해야 하는가 아니면 전쟁과 평화의 문제들에서 최고의 권위로 임했던 지금까지 유엔을 통해서 대변되었던 새로운 패러다임이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바라기는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준 20세기까지 유럽국가들에 의해서 대변되었던 낡은 패러다임이 아니라 유럽연합과 전체 OECD 세계의 틀 안에서 분명한 성공모델임이 드러난 새로운 패러다임이 다시 관철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침내 군사적인) 대결, 침략, 보복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이해와 화해, 이해관계의 조정과 협력의 모델이 지배해야 할 것이다.
이제 결론을 내리겠다. 여러분들은 이 강연을 듣고 나서 왜 우리의 세계윤리 재단이 매우 특정한 프로그램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지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재단의 네 가지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국가(민족)간의 평화 없다!
- 종교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 없다!
- 지구적 윤리기준 없이는 종교간의 대화 없다!
- 지구적 윤리기준에 근거한 국제간의 새로운 패러다임, 세계윤리 없이는 평화와 정의 가운데 우리 지구의 존족이 없다!
성공회대학교
3003년 5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