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1979년 7월 16일은 니카라과 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renta Sandinista de Liberacion Nacconae)의 지휘 아래 니카라과 민중들은 촉 공세를 감행해서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진원을 받던 소모사 일족의 군대인 이른바 국민방위군을 굴복시키고 긴 투쟁의 여정 속에서 그렇게도 갈구했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한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초반부터 당시까지 영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중남미를 미국이 장악함으로써 시작된 제국주의적 지배와 그 추종세력들의 잔학한 통치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간접적 관여의 기간이 끝난 다음부터 미국의 대기업과 상상들이 점차 미국의 대외정책에 압력을 행사하면서 자기들의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미국은 노골적으로 중남미 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를 보장해 줄 군사독재 정부들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39년에 등장한 것이 바로 소모사정권이었다. 이 정권은 그때부터 미국의 전적인 지원 하에 강압통치를 일삼았으며 민중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개입은 결국 중남미의 민중들에 대한 무자비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을 가져왔고 이렇게 강요된 종속과 착취는 필연적으로 중남미 국가들로 하여금 시민혁명 내지는 사회혁명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본 논문에서는 중남미 제국들에서 20세기 초반부터 일어난 사회혁명운동들을 개괄해 보고 이 혁명들을 밑거름으로 해서 성공한 니카라과 혁명의 배경과 이념지향성및 이 혁명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역할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20세기 초 니카라과의 상황
니카라과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제라야(Zelaya)는 스페인 식민지 통치가 종식된 후 처음으로 중앙정부를 수립했다. 이때까지는 중앙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어서 지방에서는 영주들(Gaudile)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그는 중앙정부를 수립한 후에 커피, 설탕, 바나나 등의 대량재배를 장려하여 세계시장에 내다 팔려고 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영농방식에 따른 대규모의 장원형태로 모든 농업구조가 바뀌게 만든 것이다. 중미와 카리비아 해에서의 미국의 지리적 내지는 정치 경제적 이해의 테두리 안에서 미국은 젤라야 대통령에게 파나마 운하 외에 니카라과에 설치하게 될 운하에 대한 전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요구는 주권국가에 대한 일종의 협박과 같은 것이었다. 젤라야 대통령이 이러한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자 미국은 군대를 동원해서 젤라야 정부를 전복시켰다. 그리고 나서 철도, 은행, 관세징수를 뉴욕에 있는 회사들에게 넘겨버렸다. 1914년 미국은 이런바 “브라얀 챠모르”(Bryan-Chamorro) 조약을 체결하여 운하건설을 영구히 소유하게 된다.
1925년 미국 군대가 철수했으나 그 후에 마나과 정부의 민족주의적 정책에 대항해서 미국은 다시 군대를 파견했다. 니카라과 민중의 지원을 받은 군대의 저항에 직면한 미군들은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해서 수많은 희생자들을 내게 했다. 이것은 스페인의 바스크족의 수도인 게르티카를 독일의 파시스트 군대가 무차별 폭격을 통해서 잿더미로 만들기 10년 전에 일어났던 끔찍한 대량학살이었다.
미국은 마침내 니카라과 군의 고위 장성들을 다수의 금품을 제공함으로써 매수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그들은 항복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장교들의 반민족적 행위에 분개한 일단의 군인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을 계속했다. 산디노(Augusto Cesar Sandino)의 지휘 하에 있는 군인들은 산간과 농촌에서 민중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7년간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산디노는 국제적 지원을 받았으며 그의 탁월한 전술로 인해서 미국의 군사적 승리는 불가능해졌다.
미국은 1933년 군대를 철수시켰으나 그들에 의해서 조직된 국민방위군과 그 지원을 받는 소모사 장군의 독재기반을 확보해 줌으로써 자기들의 이익과 영향력을 영구히 확보해 놓았다. 미국은 소모사를 지원해서 친미군사독재 정권을 세운 다음 정국이 안정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물러간 것이다.
산디노의 지휘 아래 계속된 저항운동은 그가 소모사의 협상제의를 받고 회담에 참석했다가 붙잡혀서 처참하게 살해되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게릴라 운동의 경험들은 니카라과 민중들에게 고귀한 교훈을 남겼다. 즉 그들은 국민의 지원만 받을 수 있으면 약간의 무기만을 가지고도 외국의 점령군이나 그 지원을 받는 정규군들과 장기적인 저항을 지속할 수 있다는 그것이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경험에서부터 얻은 확신이 산디노라는 이름을 통해서 구체화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 그들은 50년대에 들어와 다시 소모사에게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산디니스타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3년에 걸친 소모사 일족의 독재(1936-1979)는 일방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이익들을 보장해 주는 정치적, 사회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은 곧 니카라과의 독자적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은 곧 니카라과의 농산물이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게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시에 농경지가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용되었으며 또 빈약한 산업시설은 외국의 기업에 의해서 완전히 통제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니카라과는 거대한 왜채를 걸머지게 되었고 증가하는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미비한 의료시설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의해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노력들은 가차 없이 억압을 받았고 따라서 이 소모사 체제에 대한 저항은 죽음과 고문을 가져다주었다.
1955년 이후부터 니카라과는 약 20년 동안 세계은행(World Bank), 중남미 개발은행(Interamerican Bank), 남미에 대한 유엔 경제위원회를 통해서 정치적 안정에 바탕을 둔 경제적 역동성을 인정받았다. 말하자면 정치적 안정이 올 때 경제적 번영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내려졌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성장은 나타나지 않았고 선진국의 발전과는 반대로 경제적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정치적 안정이 곧 경제적 성장으로 연결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하나의 선전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농업은 대농장주들의 손에 넘어가서 거대한 장원농업으로 둔갑했고 농부들은 이러한 장원의 노동력으로 이용되었으며 산간지역에서 적은 농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적 농업국가인 니카라과에서 농민들의 삶은 가장 처참한 처지에 빠지고 모든 이익은 몇 안 되는 소모사 일족에게 돌아갔다.
산업분야에서도 강력한 자본을 배경으로 한 외국 기업들, 예를 들면 엑손과 텍사코 같은 정유회사들과 제국화학회사, 웨스팅하우스 전기와 네슬 등에 의해서 완전히 점유됨으로써 그들에게 막대한 이익이 돌아갔다. 그들은 단시일 내에 순수투자분의 몇 배가 넘는 이익을 자기 나라로 회수해 갔다.
소모사 일족은 자기들의 집권기간 중에 2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긁어모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외에도 토지의 3분지 1을 강탈했으며 금광, 양조장, 섬유공장, 항공사 및 해운업과 금융기관을 모두 사유화했다. 그는 유명한 서독의 벤츠 자동차 회사의 대리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국민들의 생활조건은 소모사 통치기간에 조금도 향상되지 않았다. 니카라과인들이 겪어야 했던 빈곤보다 더 처참한 것은 소모사가 자행한 정치적 억압이었다. 그의 군대인 국민방위군에 의해서 자행된 체포, 고문, 처형 등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이 결국 민중들로 하여금 소모사에게 조직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게 했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적 저항은 5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니카라과 민중이 무장하고 저항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소모사는 이러한 와중에서 암살을 당하지만 사태가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들이 뒤를 이어 통치했고 그의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독재자 개인을 제거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쓰라린 경험을 한 것이다. 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지도자의 제거는 무의미했다.
이러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장기적 투쟁을 위해서 1961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성이 창설되었다. 이것을 만든 창설회원으로 아직도 살아 있는 유일한 인물은 토마스 보르게(Thomas Borge)이다. 그는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활동은 게릴라전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63, 1970년에는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부분적으로는 드라마틱한 요인납치와 체포된 동지들의 석방이 시도되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리고 했으나 그들의 적극적 지원을 받는 일은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산디니스타의 활동에 대한 대응으로서 소모사는 1974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군대를 동원해서 전체 민중을 심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심한 반격을 받은 상태에서 민족해방전선은 두 진영으로 갈라졌고 이론 인해서 일부는 도시들에서도 게릴라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1976년 미국의 지휘 하에 있는 중미 방위위원회(CONDECA)의 기동훈련 명목으로 이웃 나라 군대들이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 대해 공격을 가해 오자 교회계통과 중산층들 사이에서도 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에 비로소 중산층과 교회들이 각성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국제적 여건에서 경제적 위기는 니카라과 같은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들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모사가 중산층과 수출기업운영자들에게 중과세를 하고 또 계속해서 외채를 끌어들임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자 여기저기서 항거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1974년까지 중산층은 소모사를 지원했지만 그들은 소모사 일족에게만 집중된 권력의 양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도 “민족해방 연맹”(UDEL)이란 자유민주주의 단체를 구성하는데 여기에는 일곱 개의 부르주아적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이 참여했다. 이 연맹의 회장은 자유주의적 신문의 소유주인 샤모르(Pedro Jaquin Cahmorro)였다. 소모사와 이 연맹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 사이의 대결이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철저한 투쟁의 시초가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소모사는 우선 비상사태의 해제와 신문검열의 완화를 통해서 이들의 항거를 무마하려 했다. 그렇지만 샤모로와 그의 추종세력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소모사 독재정권의 인권탄압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렇게 되자 소모사는 샤모로를 살해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총파업으로 인해서 전국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남아 있던 부르주아 정당들도 여기에 가담했고 “확대된 전선”이 형성되었다. 저명한 사회민주주의 지식인들과 산디니스타를 지원하는 지식인들이 “12인 집단”을 구성해서 강력한 반소모사 선언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것은 산디니스타들의 투쟁을 크게 격려한 것이었다.
이렇게 반정부 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소모사 독재의 전복을 위한 유리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총파업과 독재타도에 대한 호소에 산디니스타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또 부르주아적 연합전선은 자기들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는 것을 미끼로 해서 소모사와의 협상을 매개한다는 구실로 산디니스타들의 무장해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소모사 퇴진을 가져왔을지는 모르나 그의 정책은 계속될 수도 있었고 또 현재와 같은 새로운 체제로의 혁명을 완성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모사 궁전의 성공적 점령, 국회의원들의 체포, 60명의 민족해방전선 수감자들의 석방은 마침내 1978년 전국민의 봉기를 가능케 했고 그 결과로 소모사는 마사야, 레온, 치난데가, 에스텔리에 대한 통제를 상실한다. 5천명이 생명을 잃은 봉기가 무산된 후 부르주아 집단과 민중집단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했고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도 하나가 되었다. 과테말라와 도미니카 공화국과 함께 매개를 시도한 미국은 결국 부르주아적 운동이 점차 약화됨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카터 행정부가 새로운 정부구성을 위해 압력을 가하려고 무기지원을 중지하자 소모사 군대는 이스라엘과 아르gps티나에서 사들인 무기로 무장한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태에서 소모사와 그 일족들이 최후의 결전을 시도했으나 1979년 7월 16일 소모사정부는 문어지고 말았다.
3. 1979년 산디니스타 정부출현 이후의 정치적 발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과 니카라과에서 소모사의 독재추방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중산층 사이의 연대관계는 10개월 만에 깨지고 만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정당들을 대변한 로멜로(Alfonso Robelo) 와 소모사에 의해서 살해당했던 자유주의적 신문인 라 프렌사(La Prensa)의 대표였던 샤모로의 미망인 등은 산디니스타 혁명이 민주발전의 길에서 벗어나서 th련과 쿠바 진영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과 더불어 이들은 혁명위원회를 탈퇴한다.
이들이 퇴진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산디니스타들에 의해서 조직된 국가평의회 구성과 관련된다. 이 입법기관에는 약 70%가 산디니스타나 그들과 가까운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대표로 참여하고 부르주아적 정당들에게는 단지 30%만의 대표권이 돌아간 것이다. 로벨로의 퇴진은 그래도 모든 부르주아적 정당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다른 정당들의 대표들은 그 안을 수락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평의회 대표권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 무렵부터 산디니스타 혁명전선의 정책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요구들을 하고 있다.
1) 산디니스타 민병대의 해체
2) 군과 경찰의 비정치화
3) 경제의 철저한 민주화
이러한 요구들은 산디니스타들에게는 혁명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경제의 철저한 민주화”는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었던 지난날의 경제적 특권을 부르주아 계층이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노동계급과 농부들의 사회적 성과를 다시 착취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동시에 니카라과를 다시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종속관계로 끌고 가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부르주아적 정당들은 쾌재를 올렸다. 왜냐하면 이들은 산디니스타들이 그들의 혁명을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끌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쿠바혁명을 수입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를 것이 산디니스타들은 쿠바로부터 많은 지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디니스타들과 부르주아적 정당들 사이의 대결이 첨예화되자 후자의 대표들 일부가 소모사 진영으로 넘어가고 대외적으로 산디니스타 정부에 대항하는 조직으로 저항과 폭력행사가 발생했다.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부르주아적 정당들과 경제인 협의회들이 국가평의회에서 이탈된 자들을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순교자”로 찬양하고 반혁명적 행동들을 조직하고 실천했다.
이러한 산디니스타들과 부르주아적 계층간의 갈등은 결과적으로 내분을 격화시켰고 국제적으로는 혁명지원 세력과 반혁명세력의 간섭을 자초하게 될 가능성을 낳았다. 미국은 레이건이 당선된 직후 약속했던 7천5백만 달라 차관 가운데 1천 5백 만불을 거두어 들였다. 중남미에서 산디니스타들은 멕시코, 파나마, 에꾸아돌로부터의 지원만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코스타리까, 페루, 베네주엘라 등은 등을 돌렸다. 따라서 남은 것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나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이 레이건 행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까지 비판적 연대를 지속해 줄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들의 지원이 없게 된다면 사정은 분명했다. 즉 쿠바와 사회주의 불럭으로부터의 지원에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독립된 민주주의적-사회주의적 사회의 건설을 위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었어도 니카라과는 남미에서 두 번째로 소련에 종속되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81년 산디니스타들은 “민족광장”(nationales Forum)을 조직하고 새로 부르주아적 반대자들과 대화를 제안했다. 이 “광장”은 혁명을 지지한 정당의 대표들과 반대파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19개 조항의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국가재건에서 제기된 산디니스타들의 사회혁명과 부르주아적 세력들 사이의 갈등을 잠정적으로 해소한 것이었다.
니카라과 북부에서의 반혁명적 세력의 군사행위들이 크게 증가했다. 1981년 6월 일주일 동안 15명의 산디니스타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여기에 대한 산디니스타들의 강력한 대응조치가 취해졌으나 반혁명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유리한 지형조건들을 이용하고 또 온두라스로부터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미국의 지원 하에 플로리다에 15개의 반혁명군 훈련진지가 만들어져서 거기에서 반혁명군들이 훈련되고 있었다.
이러한 산디니스타들과 반혁명 세력들 사이의 갈등은 엘살바도르의 기지를 둔 미군들의 지원 하에 계속되었고 이러한 미국의 반혁명적 세력의 지원은 결국 독립된 니카라과 건설을 방해하고 다라서 사회주의 불럭에로 밀어 부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4. 산디니스타 혁명과 그리스도인들의 역할
로마 카톨릭 교회가 16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식 식민지를 중남미에 이식한 이래 그것은 착취계급인 노상, 봉건영주, 자본가 등과 공범자가 되어 왔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상업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주로 미국에 의해서 이식된 개신교인들도 이와 유사한 역할을 했었다. 기독교 정신은 수세기에 걸쳐 지배계급과 착취계급의 이념을 지원해 주는 일련의 개념, 가치관과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는 지배계급의 착취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및 무제약적 개인의 자유와 함께 사회현실에 대한 관념적 환상과 같은 부르주아적 이념이 자기들의 종교사상과 전통의 본질적 내용으로 받아들였었다.
대다수의 니카라과 성직자들은 이러한 이념 하에 교육받고 훈련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를 사적 영역의 것으로 만들어서 개인적 악의 치유방법으로 의식을 행하고 또 설교도 주로 그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민중들의 삶에 관해 역사 속에서 인간의 수동적 역할과 계급투쟁의 조화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을 주루좌적 계급지배의 둘도 없는 동맹자군으로 만들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역사적 지배자와 동맹관계를 갖고 착취의 동반자가 되었던 교회들이 어려운 혁명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또 그들의 역할을 뒷받침해 준 성서적 신학적 논거들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니카라과 혁명과정에서 기독교의 참여
니카라과 혁명이 무르익기까지 즉 1960년대까지만 해도 니카라과 교회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니카라과 교회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몇 개의 사회혁명들에 대항했던 반혁명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apr시코 혁명(1911년), 볼리비아 혁명(1952년), 쿠바혁명(1959년) 등은 니카라과 혁명의 전 단계들로서 이것들은 모두 중남미가 가지고 있던 전통적 억압과 착취구조에 대한 항거로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중남미의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인 것에 얽매어 있었다. 1969년도에 실시된 니카라과의 교회에 현실에 대한 한 조사연구는 당시의 교회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교회와 성직자는 민중과 무관했고 가진 자들의 편에 서 있었다.
2) 수많은 종교협회들은 주로 제의행위에만 관심을 가졌다.
3) 교리문답은 신앙명제에 대한 단순한 암기로 전락했다.
4) 종교집단들은 술과 도박을 수반하는 축제와 제의행사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 따르면 교회 내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였다. 이러한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1959년에 사회혁명에 성공한 쿠바혁명의 영향이 전체 중남미에 확산되면서부터 라고 볼 수 잇다. 이 혁명은 멕시코 혁명이나 볼리비아 혁명처럼 후퇴하지 않고 사회주의적 국가형성에 성공했고 그 혁명은 지속적으로 중남미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적 정치적 조건의 영향과 함께 내적 조건들도 성숙해 갔다. 그것은 카톨릭 교회의 내적 갱신의 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창한 새로운 선교정책을 들 수 있다. 그 결과로서 1965년경부터 브라질과 파나마 등 인접국가들에서 교회기초 공동체(Ecclesiastical Base Communities)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기초공동체들은 성서의 메시지가 가난한 자들의 삶과 현실과의 관련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특히 기초공동체에서 행해진 성서연구는 구체적 사회현실을 문제삼고 또 교회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층적 차별도 점차 철폐되고 미사도 민중의 언어로 읽도록 함으로써 전통적 성직자-평신도 사이의 구별을 극복해 갔다. 이러한 기초공동체들은 몇몇 지역에서 모범적으로 발전해 갔다.
이 기초공동체들에서는 사실상 사제부족으로 인해서 교리문답과 성사관리에 평신도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 전도자들(Delegados de la Parabra)은 단순한 종교적 행사인도 외에도 읽고 쓰는 것을 포함해서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의 삶의 문제를 교안에 포함시켰다. 이 운동에는 브라질의 파울로 프레어리의 의식화 교육방법이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 기초공동체의 주요 임무는 피압박자의 입장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전통적 성서해석은 성서를 계급갈등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단순히 사적 영역과 관점에서 이해되어다. 그러나 기초공동체는 성서를 해방하는 책으로 새롭게 발견했다.
이러한 기초공동체와 함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반 소.모사 혁명으로 이끈 것은 학생운동들이었다. 이 학생운동들은 선봉에 서서 소모사정권의 억압과 착취를 폭로하고 선전활동을 해나갔다. 이들은 교회와 기독교 기관들 속에서 조직적으로 반소모사 운동을 심어갔다.
이 밖에도 해방신학에 초점을 맞추어 구성된 기독교 사상학습과정(Cursillos de Christianidad)이 중상류 계층의 의식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 밖의 기구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훈련시켰으며 문서 활동과 조직화 사업을 통해서 의식화 훈련을 전개했다.
루이스 세라(Luis Serra)는 “니카라과 혁명의 이념, 종교 그리고 게급투쟁”이란 글에서 위의 제반 운동들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한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민중은 의식화된 역사의 창조자가 되었으며 그들은 또한 종교적 문제들을 혁명적 방식으로 실행함으로써 종교적 영역을 이용했다. 가난한 자들에게 헌신한 복음전도자들과 성직자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종교적 설교와 실천들을 폭로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조직적인 지식인 집단으로 발전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식화와 조직화의 수준을 반영한 새로운 복음주의적 실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와 관련하여 이 조직적 지식인들은 원래의 예수의 가르침의 참 뜻이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교계중심 사회 안에서 억눌려 있음을 보았다. 정의 평등, 물질의 공유, 평화적 방어들과 같은 기독교적 가치들을 그들은 노예화와 봉건주의 및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피착취 계급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
2) 산디니스타들과 반혁명 세력들 사이에서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역할
부르주아적 정당들의 반혁명적 운동들은 1980년대 중반에 오면서 크게 두개의 세력들에 의해서 지원을 받았다. 하나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군사적으로 훈련된 반혁명군(Contra)과 다른 하나는 추기경 오반도(Ovando)로 대변되는 제도적 교회가 그것들이다. 교황 요한 바오르 II세는 니카라과에서 가장 극우적이며 부르주아 정당들과 기업및 반군지도자들과 미 행정부의 지지를 받는 인물 오반도를 1985년 4월 15일 전격적으로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니카라과의 사회혁명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오반도는 추기경으로 임명된지 두 달 후부터 4개월 동안 72개 구역을 방문하면서 반혁명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것은 반혁명군인 콘트라스의 내부 전선구축을 목표로 한 것으로서 외부의 군사적 침략이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동시에 권력으로부터 제거되고 있는 부르주아적 집단들이 교회의 지배권마저도 상실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었다.
오반도 추기경이 순방 중에서 설교의 중심 테마로 삼은 것은 “화해”와 “총화”였다. 그가 말하는 화해란 정확히 말해서 반혁명과의 대화를 말하며 또 그 대화의 조건은 산디니스타 혁명 프로그람의 포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화해나 총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보수주의자들의 연합전선 구축과 그것을 통한 반혁명 세력의 승리를 가져오자는 것이었다.
1985년 산디니스타 혁명정부가 총선거일자를 공고하고 나서자 오반도 추기경이 이끄는 주교회의는 산디니스타 정부를 “니카라과를 위협하는 무신론, 공산주의적 전체주의”라고 규정하고 조직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제시한 논거들은 다음과 같다:
1) 니카라과에는 전체주의적이며 무신론적인 유물론자들의 정부가 존재한다.
2) 산디니스타 해방전선(FSLN)은 단일 무장당의 독재권력을 구축했다.
3) 정부와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은 정치적 목표달성을 위해 종교인사와 종교를 교묘하게 조정해 왔다.
4) 계급적 증오, 폭동, 군국주의가 정부와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
5) 민중은 유물론적 무신론적 이념으로 세뇌 당해 왔다.
6) 쿠바와 소련이 신정부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상은 1980년 10월 20일 주교회의(Conferencia Episcopal)에 의해서 채택된 것인데 이러한 입장은 1985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혁명정부를 공격했다.
이러한 반혁명 세력의 연합전선에 대항하기 위해서 오르테가(Ortega)의 산디니스타 정부는 1985년 10월 15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그해 12월에는 오반도 추기경의 기반으로 작용했던 모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기반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반혁명적 종교운동은 개신교를 통해서도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니카라과의 개신교 세력은 극히 미약했으나 산디니스타 혁명이 성공을 거둔 후 크게 팽창했다. 주로 보수적이고 부르주아적으로 정향된 개신교 지도자들은 미국, 멕시코, 우루과이, 과테말라의 우익들의 지원을 받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산디니스타 혁명을 공산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선전했다. 이들은 모리스 셀룰로(Morris Cerrulo)와 같은 부흥강사 등을 초청해서 반혁명적 집회를 시도하는 등 대중들을 대중조직들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들이 혁명입법에 복종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특히 산디니스타 혁명 수호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이렇게 극우적 가톨릭 성직자들과 개신교 지도자들 및 부르주아적 정당들에 의해서 시도된 5년간(1980-1985)의 반혁명 운동은 다음과 같이 조직적으로 수행되었다:
1) 혁명에 찬동하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국회로의 전보발령
2) 반 마르크스주의 확산을 통한 정신주의의 확산
3) 성례중심의 교회행사의 강화
4) 교권의 강화와 징계강화
5) 신도들을 극우적 행사들에 동원
6) 대중매체를 통한 반 산디니스타 선전
7) 미국과 연결된 종교단체의 강화
8) 혁명에 동조하는 사제, 평신도, 조직 등에 대한 비판 강화.
3) 혁명을 수호하려는 기독교인들의 운동
힘들게 성공시킨 니카라과 사회혁명의 수호를 위하여 전개한 반혁명 세력들에 대한 저항은 주로 기초공동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파울로 리햐르는 “복음주의적 궐기”라고 명명했다. 이 “복음주의적 궐기”는 1985년 반혁명 운동이 극에 달하고 여기에 대항한 비상사태선언이 있기 전인 7월 7일부터 8월 6일까지 단식과 기도운동의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산디니스타 혁명정부의 외무장관이었던 데스꼬토 신부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주로 도미니칸 교단의 신부들에 의해서 지도되었다. 이것은 자연발생적이거나 충동적 행위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기초공동체 내에서 “혁명과정을 통해 그때까지 축적되어 온 영적 힘의 억제할 수 없는 폭발”이었다.
이 “복음주의적 궐기”는 다음 네 가지 배경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1) 테러와 살인과 거짓말을 이용하여 니카라과 혁명을 파괴하려고 한 미국정부의 결정.
2) 선과 악, 하느님과 사탄, 미국과 소련 사이의 聖戰 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니카라과에 대한 침략행위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 레이건은 자신을 복음과 교회의 수호자로 자처함.
3) 니카라과의 위계적 교권이 이러한 군사적 및 신학적 침략과 관련되어 있음.
4) 가난한 자들의 복음화 잠재력, 억눌린 자들의 영적 힘, 그리고 권세 있는 자들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불가사의한 에너지 등에 호소할 필요성. 니카라과는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법적으로 모든 전선에서 제국주의와 대결하고 있다. 여기 니카라과의 유일한 힘은 가난한 자들과 신앙인들의 힘이며 가난한 자들의 교회의 힘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제국주의적 미국의 침략행위에 대한 자기방어 운동이었고 우월한 무기에 의한 공격에 대항한 기도와 영의 힘의 운동이었고 부유한 자들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힘에 대항한 가난한 자들의 영적, 도덕적, 이 성적 힘의 투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 중에 “우리의 무기인 기도와 단식은 레이건의 무기 보다 훨씬 강하다”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복음적 궐기”운동에는 여러 종류의 그리스도인들, 시민군과 군인들, 산디니스타 전사들, 시장의 여성들과 장관들, 노동자와 농민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주류는 기초공동체의 소속원들이었다. 7월 14일에는 6천명의 “기초공동체” 대표들이 레온(Leon)에 모여 “생명의 주되시는 예수, 침략에 직면한 우리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신다”라는 주제로 기도와 금식을 했다. 7월 26일은 평화를 위한 단식의 날로 선포되었다. 데스꼬토 신부는 그의 메시지에서 “오늘 우리는 그 악마의 제국이 우리에게 강요한 긂 주림과 전쟁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표시로서 아무 것도 먹지 않는”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단식기도운동은 강력한 무기로 공격해 오는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가장 강력한 저항무기였다. 이러한 “복음적 궐기” 운동은 따라서 남미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유럽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얻게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레이건 정부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종교계 분만 아니라 의회 등 수 많은 단체들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니카라과 반군에 대한 레이건 정부의 원조법안(200만 불)이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다급해진 레이건 정부는 전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안에 반대하여 해임당한 싱글로브 대장 등이 주동이 된 극우단체들을 통한 민간차원의 모금이 진행되기도 했다. 여기에 통일교도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기독교 신앙과 사회혁명 사이의 변증법적 통일에 대한 신학적 논거들
1) 중남미 혁명에 있어서 신앙과 혁명의 문제
“그러므로 특권을 누리는 소수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서 다수의 가나나한 자들에게 넘겨주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을 속히 수행하는 것이 진정한 혁명의 과제다. 권력자들이 무력적 저항을 하지 않을 경우 혁명은 평화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 혁명이란 굶주리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들을 입히며, 무식한 자들을 가르치는 정부를 세우는 것, 즉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의 실천은 기회 있을 때에나 하는 잠정적인 것이 아니고 도 몇몇 사람들의 욕구만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자매들 모두를 보살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허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하게 효과적이고 충분한 가능성이라면 혁명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다.”
이것은 콜롬비아에서 지하혁명운동을 통해서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시도했던 또레스(Camilo Torres)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호소다. 그는 이웃사랑 때문에 혁명에 가담했다고 주장하고 경제와 사회적 긴장이라고 하는 세상적 영역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미사 드리는 일을 포기하고 사회혁명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서 이웃사랑이 최고의 기본명제가 되는 체제를 이룩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혁명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혁명이란 정치적으로 정의하면 “지금까지 합법적인 정치권력이나 국가적 사회적 질서를 제거할 목적으로 새로운 지도집단에 의해서 전통이나 과거와 단절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전체 인류가 해방될 수 있는 전체 사회질서의 재편이요 “모든 소외의 적극적 지양과 인간다운 사회에로의 전환”을 뜻한다. 종교개혁이래 특히 독일에서의 농민혁명을 겪은 이래 전통적 교회는 신학에서는 혁명이 지향하는 목표가 어떤 것이었든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가담하는 것을 타부시해 왔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불란서 혁명과 같은 시민혁명이 기독교적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반대함으로써 반혁명 세력으로 남았었다. 유럽의 근대에서 신학의 사유화 내지는 부르주아화에서 이러한 반혁명적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대륙에서나 북미에서 진보적 신학으로 불렸던 “세속화 신학”, “신 죽음의 신학”, “희망의 신학” 들도 실제로는 “종말론적 프로젝트의 진정한 징표로서의 역사적 해방의 프로젝트”를 매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공적 대변인들이 남미의 지배자들이나 외부 세력들과 결탁해서 불의의 상황을 지속시키고 제도적 폭력의 지배를 정당화해 주는 상황에서 혁명에 대한 타부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멕시코 혁명, 볼리비아 혁명, 그리고 쿠바 혁명에서의 사회혁명적 과정들에서 나타났다. 이들 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이 새롭게 검토되었으며 브라질에서는 60년대 초에 이미 사회의 기독교적 이해에서나 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있어서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강력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과 사회혁명 사이의 변증법적 통일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것을 리처드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사회적 불의는 신성한 법을 무시함으로써 나타난다... 불의를 말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공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그 임무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났던 이유이다. 그들 중에 예수가 있었다. 민중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은 교회의 추종자들이다.”
싼디노는 “지상에서 불의를 척결하고 빛과 진실의 영혼이 군림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니카라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불의와 투쟁하는 사랑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고귀한 과제라고 본 것이다. “진정한 혁명가와 진정한 그리스도인 사이의 통일은 산디니스타 전선에서 기본적이다. 그것은 남미의 피압박 민중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체 게바라 장군과 토레스 신부가 함께 총을 들어서 만들어 낸 통일이다.” 니카라과에서의 경험에 따르면 신앙인이 되는 것과 혁명가가 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해방전쟁이나 혁명목표에 따른 잠정적 동맹형성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전통적 부르주아적 신학적 사고의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산디니스타들에게는 혁명을 불의한 제도적 제거를 넘어서서 인간애의 넘치는 사회를 지향하는 동지애와 연대성으로 승화시킨 결과였다.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혁명이 인간화되었고 혁명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해방시킨 것이다.
니카라과에서 신앙과 혁명의 통일은 정치적 측면에서의 보다 낳은 사회건설의 지향과 종교적 측면에서의 하나님 나라에로의 지향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이 둘은 방향을 밭이 하고 있다. 이들 니카라과에서의 경험은 혁명과 신앙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부르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억압받은 인간에 대한 정치적 연대가 혁명으로 나타났고 착취당하는 이웃에 대한 종교적 이웃사랑이 혁명을 요청하게 되었다. 따라서 산디니스타 혁명실천의 경험이 가져다 준 것은 다른 혁명운동들이 주었던 전통적 교조적 요소들인 무신론이나 반종교적 세계관을 넘어선 것이었다. 혁명을 통해서 종교의 진리가 보다 밝게 드러났고 이웃사랑의 계명이 구체적으로 실천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보다 가까운 접근이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혁명과정을 거치면서 니카라과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바르게 읽은 방법을 매웠다. 또 그들은 예수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동안 하나님은 민중의 하나님이 아니고 철학자들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하나님이었다. 교회가 설교하는 하나님은 지상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는 성전과 교회에 갇혀 사회에서의 정의와 신실성을 역사적으로 형성해 가는 분이 아니었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사에서 숨어서 일하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다. 가난한 자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성 때문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파괴적 기억”(Subversive Memory)은 가난한 자들이나 부자나 모두 똑같이 예수의 죽음에 대해 책임 있다는 논리로 바뀌었다.
그런데 니카라과 혁명을 통해서 예수의 종교는 다시 한번 주변실존자의 종교가 되었다(고전 1, 26이하). 이것은 다시 노동자, 무식꾼의 종교가 되었고 사제와 주교의 종교에서 벗어나 혁명가들의 종교가 되었다. 니카라과 혁명에서 사회혁명적 희망이 기독교적 종말론적 희망과 만났다. 니카라과 혁명에서 신앙과 혁명이 그리스도인과 혁명가들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2) 니카라과 혁명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문제
니카라과 혁명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이제까지 기독교 신앙과 사회주의 이념의 관계를 “선의 제국”과 “악의 제국” 사이의 투쟁으로 도식화했던 전통적 도식이 극복되었다. 이러한 도식의 극복은 현재의 세계적 위기상황을 근본적으로 미소의 이념적 대결이라고 하는 “동서모순”에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남북모순”에서 파악하려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즉 북반구의 부유한 세력과 민중의 대결 즉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죽음의 세력에 맞서는 다수의 민중의 삶을 위한 투쟁에서 오늘날의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미의 가난한 자들의 교회의 투쟁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된 교회의 문제나 산디니스타 사회주의의 교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위한 투쟁, 즉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 문제 삼는 생명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한 전혀 반대되는 전통적 입장은 1980년도에 나온 다음과 같은 이른바 “싼타페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의 기본적 자유들과 경제적 자기이해는 미국이 최강자로서 존재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형이상학적 위기다. 미국의 기본적 가치들과 신념들을 지키거나 진척시킬 능력과 의지를 미국이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우유부단과 무능을 낳고 말았다.”
이러한 자성과 함께 미국은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을 증진시키고 남미에서의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기 위해 직접 투자를 증가시킬 것을 이 문서는 제안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미 “시작된 제3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이원론적 세계상 배후에 서 있는 것은 신학은 요한 계시록 마지막 장들(14장 이하)의 재해석과 결부되어 있다. 미국의 군대는 마작 심판에서 적의 세력을 굴복시킬 천사들과 동일시되며 니카라과 혁명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악의 세력”과 동일시되었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학을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고 기독교 신앙을 반공주의와 같이 보려는 시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중세적 종교재판의 멘탈리티의 현대판이며 콘트라스 반군의 활동은 십자군 성전과 이단척결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거룩한 전쟁 멘탈리티에서 사회정의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세력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소외시키거나 누명을 싸우고 필요한 경우 살해까지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이들은 해방신학자들의 운동을 통제하고 그들을 신학자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대변자들로 몰아 부치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관계문제, 특히 니카라과에서의 이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위기상황을 어느 시각에서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여진다. 전자의 경우처럼 현재의 갈등구조를 동서모순에서 보지 않고 남북모순에서 파악하려 할 때 그리고 니카라과의 혁명가들은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며 보다 민족주의적으로 개방된 휴매니스틱한 마르크스주의자들로 볼 때는 이들 사이의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일 수 있는 공통의 장은 훨씬 더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쿠바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회혁명에 대해 전통신학적 이원론에 서려고 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반혁명 세력으로 몰리고 때로는 심각한 박해를 받거나 망명마저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니카라과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혁명사업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하는 것은 이것이 대중설교에서 공통된 일상적 주제이기 때문에 숨기거나 유보할 수 없다. 만약 교회당국자가 제국주의의 음모를 지지할 것을 선택하면 마찬가지로 다른 신도들은 산디니스타의 계획을 지지할 권리를 갖는다.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이러한 갈등은 니카라과 내의 카톨릭과 개신교인 모두에게 있어서 통일성과 응집력을 파괴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결단은 단순한 이념적 선택과 관련되기보다는 복음적 선택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복음적 선택이란 성서에 나타난 해방전통과 민중전통에 자기를 동일시하느냐 아니면 이원론적 세계상에 근거한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체제에 근거한 전통적 기독교에 자기를 동일시하느냐 하는 것이다.
6. 결 어
이러한 주장은 미국의 중남미 지배의 제국주의적 과거 및 현재의 잘못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은폐하려고 하는 것이며 자신들의 신식민지적 지배를 지속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중남미에서 일련의 혁명들 - 멕시코의 혁명에서부터 쿠바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 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이란 틀에서 서구 자본주의에 대항한 혁명들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20년대부터 중남미와 카리빅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개입에서부터 시작해서 과테말라(1954), 쿠바(1961), 도미니카 공화국(1965)에 대한 개입과 브라질(1964), 칠레(1973)에서의 구테타 지원 및 1983년의 그레나다 침공에 이르는 미국의 일련의 중남미 지배의 콘텍스트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니카라과 혁명은 거의 40년에 걸친 미국의 세계지배가 1968년 월남전 패퇴를 기점으로 해서 급격히 약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월남전 이후 미국은 더 이상 민족주의적인 반미적 정권들의 등장에 대해서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없게 되었기 대문이다. 이들은 월남전 이후 닉슨 독트린의 등장과 함께 이른바 “저강도 전쟁”(Low-Intensity-Warfare)을 통해서 자기의 지배권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는 변화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저강도 전쟁”이란 개념은 종래의 군사적 개입을 줄이는 대신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문화적 개입을 극대화함으로써 미국의 종래의 이해관계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월남전 패퇴이후 급격히 약화되어 가는 반미감정을 견제하고 제3세계 민족들의 “믿음과 이성“을 얻어 보자는 미국의 새로운 지배전략이다. “보수연합“이란 구상도 이러한 전략의 산물이다.
따라서 니카라과 혁명을 이원론적 반공이데올로기나 반공신학의 틀에서 보는 것은 그 혁명의 세계사적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동서갈등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보려는 잘못된 시각에서 나온 판단이기 때문이다. 1955년 반둥회의 이래 등장한 제3세계 나라들의 세계사적 역할들과 그들의 이념지향성은 동서갈등이란 낡은 도식으로는 더이상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카라과 혁명은 불란서 시민혁명과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서구나 동구에서의 혁명을 능가하는 쿠바혁명과 함께 제3세계에서의 새로운 문중시대를 여는 민중혁명으로서 앞의 혁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양대 혁명들이 이룩해 놓은 이념지향성의 갈등들을 지양하고 보다 고차원의 도덕성과 합리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적 차이는 특히 남미에서 탄생한 가난한 자들의 기초공동체의 출현과 해방신학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제까지의 전통적인 교회들이 양대 혁명에서 반혁명 세력으로서 부자들의 편이 되고 역사 안에서 성령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 왔으나 니카라과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을 새로 발견했고 기초공동체를 통해서 그들을 혁명의 한가운데로 끌어 모았다.
이런 의미에서 니카라과 혁명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차원을 넘는 윤리적, 영적, 종교적 차원을 갖고 있다. 1979년도의 정치적 혁명이 1985년 복음적 궐기를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견해는 바로 니카라과 혁명이 갖는 영성 신학적 측면을 더욱 분명히 해 주고 있다. 니카라과 혁명은 출애굽이라는 해방사건과 초기예언자들의 변혁을 위한 투쟁과 예수의 가난한 자를 위한 절대적 연대라고 하는 종교적 차원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니카라과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변혁 한가운데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그들의 혁명 가운데서 새롭게 발견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