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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6 06:40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존엄성과 사형제도
글쓴이 : 손규태
대한예수교장로회사형제도 폐지 위원회의 강연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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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우리는 그 동안 대중매체들을 통해서 정치범 혹은 “흉악범”들로 알려진 사람들이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처형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접하곤 한다. 이러한 개인을 살해하거나 혹은 사회적 질서를 심각하게 파괴한 범죄자들에 대한 사형이 국가의 법제도로서 자리잡은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흉악한 범죄자들을 국가라고 하는 대리기관이 재판을 하고 또 판결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는 제도의 성립은 이미 서구에서도 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구에서는 11-16세기 중에는 “결투”라고 하는 제도가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의 갈등해결의 가장 직접적이고 유효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서구에서 이러한 국가적 제도로서 사형제도가 확립된 것은 근대적 의미에서 국가성립이 달성했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갈등당사자들 사이의 해결책으로서의 결투는 매우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갈등 당사자들 사이의 진위의 판단이나 정의와 불의에 객관적 판단이 결여되고 있고 또 칼을 잘 쓰거나 총을 잘 쏘는 사람이 언제나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대국가의 대의적 제도의 산물인 사형제도는 그 동안 대다수의 국가들에 의해서 자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유우럽의 몇몇 선진국들을 제외하고는 제도로서의 사형은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승인되고 있고 앞으로도 쉽게 철폐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에도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사형은 요구되고 있으며 이러한 질서의 담지자와 보증자로서 국가의 권력을 통해서 집행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인간의 생명을 부정하는 이러한 제도로서의 사형이 국가라고 하는 대의적 기관에 위탁되어 있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이러한 형벌이 법을 어긴 자의 처형이라고 하는 형태로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사형이라는 제도를 통해서만 법과 질서가 진정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대체될만한 제도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또 사형제도를 폐지한 나라들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 그들의 법과 질서를 지켜나가고 있는 것일까?
 
사형제도의 논거들
 
이러한 국가의 제도로서의 사형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논리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원시적 이론으로서 사형제도를 지지하고 있는 이론은 개인과 사회를 자의적인 범죄로부터 보호하자는 데 그 논거를 두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범죄자들을 극적인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흉악한 범죄자들을 그대로 둔다면 그들은 거듭해서 재범을 하게 된다고 하는 확신이 이런 자들에 대한 사형을 정당화하고 있다. 동시에 이 이론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교훈을 얻게 하여 그들이 유사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형을 통해서 범죄자를 제거함으로써 사회와 개인의 보호는 물론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어서 교훈을 얻어 흉악한 범죄행위를 예방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이론은 보다 심오한 이론으로서 사형은 법을 어긴 자는 객관적으로 그가 받아야 할 마땅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사회나 타인에의 생명이나 재산 그리고 권리들을 침해한 정도에 따라서 범죄자 자신도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침해한 사람은 마땅히 자기의 생명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형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of God)의 선언이고 대변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근대 유우럽과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론으로서 범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이제 그에게 가해질 것의 형식을 통해서 자기가 행한 것의 성격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장차 스스로 개과천선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처벌은 도덕적, 교육적 목회적 목적을 갖는다.

이렇게 볼 때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사회와 개인의 보호, 범죄에 대한 응보 그리고 범죄자의 개전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처벌이 가지는 삼중의 목적들 외에도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형제도”라고 하는 형벌과 관련해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앞서 두개의 이론과 관련해서 세번째 이론 즉 범죄자의 개전을 위한 처벌이론을 먼저 고찰해 보자. 이 이론에 따르면 형벌이란 일차적으로 가해자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말하자면 이러한 관점에서는 가장 큰 수혜자는 일차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범죄자가 형벌을 통해서 스스로를 고침으로써 그에게 새로운 삶의 미래가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벌이 목표하고 있는 것이 달성된다면 이러한 이론은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벌로서의 사형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형은 분명하게 그 사람의 개전, 교육, 재활과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할 수 없는 차원의 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벌로서 사형은 범죄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책임성은 끝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까닭은 사형은 범죄자가 스스로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미래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은 지원을 보내고 있는 두 번째 이론 즉 하나님의 보복적 정의의 표현으로서의 형벌은 형법이론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내용이다. 또 범죄한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형벌이란 범죄당사자들이나 전체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하시는 정의를 지상에서 대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타당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기되는 문제는 살인을 한 사람에 대한 보복으로서 사형이라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복수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집행한 사형이 곧 하나님의 보복적 정의와 일치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국가와 그 구성원들을 자의적 범죄와 무질서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범법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첫 번째 이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이론에 따르면 범죄자에 대한 형벌은 사회와 개인에 대한 안전을 보장해 주고 그것은 또한 범죄의 억제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특히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사형으로 응답하는 것이 사회와 개인의 안전을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개인이나 사회를 흉악법죄자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은 사형뿐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신형을 받게 하여 범죄자가 더이상 활동할 수 없게 한다든지 일정한 지역에서만 활동하게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범죄자에 대한 형벌이 개인이나 사회질서의 보호와 보복적 정의의 실현 그리고 교육적 효과 등을 목표로 한다고 할 때 이러한 목표들은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범죄에 대한 형벌은 꼭 보복적 정의의 실현만을 목표로 한다든지 또 어떤 형벌은 교육적 효과만을 그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질서의 보호를 목표로 범죄자를 구금하는 경우에도 부분적으로는 교육적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고 또 보복적 정의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형이라고 하는 형벌의 경우 사회질서와 개인의 보호라고 하는 목표와 보복적 정의라고 하는 목표는 달성될 수 있지만 위에서 다룬 형벌의 마지막 목표인 도덕적, 교육적 혹은 목회적 목표는 당사자에게서는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목표는 단지 제3자들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사형이란 범죄 당사자와 관련해서는 앞서의 두 가지 목표들 즉 사회와 개인의 보호와 보복적 정의의 실현이라고 하는 목표들만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사형이란 형벌은 범죄자의 미래를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개인이나 사회의 책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는 물음은 개인이나 사회의 질서와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범법자를 꼭 사형에 처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벌의 두 번째 목표인 보복적 정의가 사형이라는 형벌과 관련해서 어떤 타당한 논거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에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사회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거나 개인의 생명을 빼앗은 살인범의 경우 위에서도 언급한바이지만 범법자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는 방법이 오늘날 사형을 폐지한 나라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나치의 전범들 가운데 처형되지 않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헤스(Hess)는 오랜 감방생활 끝에 3년전에 죽었다. 물론 벨린의 테겔 형무소는 그 한 사람의 죄수를 위해서 수백 명의 간수들을 두어야 했고 또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었다. 이렇게 사회적 안전과 개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사형이라는 제도 외에도 일생동안 범죄자를 가두어 두는 방법도 존재한다.

두 번째 문제 즉 보복적 정의의 실천을 위해서 사형제도가 필요다는 논리는 법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보복적 정의를 위한 사형은 단지 피해자 측에서 뭔가 심리학적 만족을 얻는 것 외에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그리고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사형제도가 진정으로 신적 보복의 반영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진정 보복을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재물들 예를 들면 범죄자가 소를 한 마리 도둑질 해 갔을 경우 그가 보복적 정의의 차원에서 다시 그 소를 돌려주거나 아니면 다섯 마리를 배상했다면 보복적 정의는 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인을 한 경우 살인으로 대답하는 것은 단순 논리로서 보복적 정의는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남는 것은 위에서 언급하대로 심리적 보상 외에는 다른 것은 없다. 따라서 사형제도와 관련해서 보복적 정의에 기초한 형벌이 우리 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법률적 문제를 넘어서서 신학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적 증언들
 
그러면 성서는 국가의 제도로서의 사형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스라엘에서의 공적 사형은 공동체의 적절한 법절차를 거쳐서 집행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사형은 지파공동체 시절부터 개인적 범죄에 대한 보복으로서 지파법의 위반자에 대한 처벌로서 그리고 성결법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에서 시작되었다.

구약성서는 사형과 관련해서 모살 즉 고의적 살인을 전제로 하고 있다(출 21,12; 레24,17;민 35,16이하). 고의적 살인이 아닌 경우에는 비호권(Asylrecht)이 허락된다. 또 간음(레 20,10;신 22,22; 에스겔 16,38이하), 근친상간의 경우(레 20, 11이하), 짐승과 성행위를 하거나 남자들끼리 성행위를 하는 경우(출 20,18;레 20,13,15)에는 사형에 처하였다. 부모를 폭행하는 자등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했다(출 21,15,;레 20,9; 신 21,18이하). 그리고 제사장의 딸은 욕되게 한 자도 처형되었다(레 21,9).

나아가서 배교와 우상숭배(출 22,19; 레 20,1이하; 신 13; 17,2이하), 신성모독( 레 24,15), 마술(출 22, 17;레 20,17),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출 31, 13이하; 민 15, 32이하), 거룩한 전쟁에서 금기를 깨뜨리는 것(여호수아 7; 삼상 14,24: 맹서를 깨뜨리는 것)에 대해서도 사형을 집행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인간의 생명과 자유, 대가족에서의 性적 질서, 제의 공동체 안에서의 종교적 순결성 등이 침해될 때는 사형으로 대처되었다.

사형의 집행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보복법에 근거해서 범죄자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 넘겨서 무기로 살해하게 하였다(신 19,12; 왕상 2,28). 사적 보복도 가능했다(민 25,7;창 34,25이하). 그러나 전형적인 사형집행 형식은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다(레 24,16; 민 14,10; 신 13,11등). 돌로 치는 벌이 화형(여 7,25), 신체를 절단하는 형(에스겔 16,40)과 결합되기도 했다.

구약성서는 사형에 대한 논거를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동태복수법(Talionsregel)인데 이것은 피해자가 받은 것과 똑같은 벌을 가해자에게 가하는 것이다(출 21,23ff; 신 19,21등). 따라서 사형의 목적은 보복이다. 그 다음으로는 사형은 “악” 즉 무죄한 자가 흘린 피를 씻어주는 것이다(신 19,13;21,9). 사형은 또한 성별된 사람들에 대한 신성모독의 대가이다(레 21,9). 마지막으로 잘못된 성적 관계는 거룩한 제의의 영역을 더럽히는 것과 같아서 그 더럽혀진 것을 제거하는 수단으로서 사형이 정당화되었다.

신약성서 특히 예수께서는 제도로서의 사형에 대해서 가부간 일정한 공식적 입장을 표명한 일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특히 복음서들에서 사형제도에 대한 일정한 입장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사형에 처하려 할 때(요한 8,2이하) 예수는 최초로 사형문제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그는 사형제도 그 자체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이 사건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따라서(레20,10; 신 22,22)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는 당시의 통용되던 법적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예수는 그 여인이 사형을 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 여인을 구해 주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율법에 기초한 사형제도에 대해서 찬성이나 반대를 표명하지 않고 있다. 그는 다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 8,7)고 말씀하심하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당시 통용되던 유대교의 율법의 문제성을 밝히고 동시에 몰려온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는 죄라고 하는 문제를 넘어서 죄인이라고 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써 당시 통용되던 제도로서의 사형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도로서의 사형에 대해서 일정한 입장표명이 없었다고 해도 그의 말씀들을 통해서 그의 생각을 우리는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즉 산상설교에 나오는 “엣 사람은 이렇게 말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도식을 통해서 예수는 구약의 율법의 대부분을 폐하거나 철저하게 다시 해석하고 있다. 즉 원수사랑의 계명등을 통해서 그는 이방인이나 이교도들에 대한 유대인의 적대감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예수는 구약의 배타적 율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제도로서의 사형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간음한 여인을 놓고 돌로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묻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예수가 제시한 근원적 대답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치라”는 것이었다. 이 예수의 대답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첫째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나아가서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한 인용구는 아니라고 할 지라도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는 예수의 말씀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심판의 중지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죄에 대한 예수의 대안은 심판이 아니라 용서다(마 6,12; 5,22이하). 살인을 저지른 죄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인간에 대한 궁극적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롬 12, 19; 히 10,30등). 예수나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심판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신약성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들 사이에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동태보복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까라서 심판 특히 사형에 처하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것의 궁극적 주인은 하나님이시기때문이다.

용서나 심판을 하나님에게 마끼는 것과 같은 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의 윤리적 규범이고 또 그것은 다분히 종말론적 지평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적 해석은 산상설교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해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성서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통용된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이고 또 오늘날 우리가 제반 윤리적 문제에 접근하는 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원적 성서해석은 성서 안에서 지킬 수 있는 말씀과 지킬 수 없는 말씀을 언제나 구별해 내야하며 또 지킬 수 있는 집단과 지킬 수 없는 집단을 구별해 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성서 특히 예수의 말씀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할 때 제도로서의 사형은 신약성서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사형제도의 신학적 문제
 
제도로서의 사형은 기독교 전통에서는 주로 그것을 통해서 정치적 권력의 합법성이 대표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사형의 문제는 국가권력의 신적 논거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형제도에 대한 여타의 다른 신학적 논거들은 이러한 연관에서만 비중을 가졌었다. 소수의사형제도에 대한 반대가 있었지만 그것은 곧 국가에 대한 신적 권위의 상실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인해서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초대교회에서는 터틀리안이나 Lactantius같은 신학자들은 사형제도 그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국가적 직무에 종사해도 좋은가 하는 것을 문제삼았었다. 그후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통속적으로 가졌던 입장은 교회는 사형과 관련된 것에 참여해서는 안되지만 국가는 신적 직무에서 공동체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사형은 이단의 제거에도 사용되는 것을 토마스 같은 신학자는 용인했다.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도 이러한 사형제도와 관련된 사상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정치적 권위의 신적 위탁으로서 형벌집행권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경우 정치적 권위는 신적 위탁을 통해서 행악자들을 억제하는 도구로서 강조되었고 따라서 사형은 당연시되었다(Von weltlicher Obrigkeit) 이러한 입장은 농민반란이라고 하는 정치적 혁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들과 연관되었던 재세례파와 같은 신앙적 열광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정치적 권위는 사형과 같은 수단을 통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J. Gehard).

오늘날에 와서도 보수적 루터파의 주도적 신학자들(Althaus, Kuenneth)은 사형은 “영원한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국가 권위의 형이상학적 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카톨릭 편에서는 자연법적 논거에서 공동체적 질서의 수호라고 하는 차원에서 사형을 승인하고 있다. 바르트나 에밀 부룬너 같은 신학자들은 사회의 공범성(Mitschuld)이라고 하는 사상에서 사형을 부정하고 있지만 국가의 형벌권에 대한 문제는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결 어
 
사형과 관련된 신학적 문제는 직접적으로 형벌 그 자체와 관련되기보다는 한편으로는 국가적 권위의 신학적 측면과 다른 한편으로는 죄책과 속죄에서의 범죄자의 책임의 문제와 연관된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라고 하는 정치적 권위에다 사형제도와 같은 인간의 생명을 부정하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말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타당한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법공동체가 사형제도와 같은 것이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동안 교회가 승인해 오고 있는 이러한 사형제도는 국가권력의 자의성에 의해서 정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오판으로 인해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사형을 집행해 왔다. 따라서 어떤 범법자라고 해도 하나님에게만 속한 생명권을 국가의 권위에 귀속시키는 것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그 시작에 있어서나 종국에 있어서나 지상에 있는 인간의 제도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죄책과 속죄와 관련해서 관찰할 때 사형은 전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죄인들을 위한 대속 사건으로 이해할 때 어떤 죄인도 그의 십자가 아래서 속죄를 받을 기회와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형은 범죄자의 미래의 시간을 박탈함으로써 그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게 된다. 그가 사형전에 참회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런 기회나 의도를 가지지 못하고 처형된다면 우리는 자의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차단하는 것이 된다. 동시에 범죄자의 참회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은 그의 미래의 새로운 행위를 위한 죄책을 걸머지는 것이므로 어떤 범법자에게도 그에게 주어진 자연적 시간과 함께 은총의 시간에서 단절시켜서는 안된다.

따라서 국가의 제도로서의 사형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오늘날의 대다수의 선진국가들이 이러한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권(생존권이 아님)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도 많은 문제점과 오류를 가질 수 있는 자상의 국가에게 귀속될 수 없는 고귀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인간의 생명은 잉태에서부터 무덤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세계통치와 역사경륜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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