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작년 11월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그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선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지금도 부도로 문어지고 있다. 또 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쫓겨났다. 오늘도 수많은 실업자들이 깊은 좌절 가운데 거리를 헤맨다. 1998년 8월 현재 정부가 공식으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는 약 150만명의 실업자가들이 있다고 한다. 년말쯤 되면 실업자 수는 약 200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요즘도 하루에 1만명 혹은 2만명이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업대란은 앞으로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무도 도른다.
사회적 연대망 즉 사회복지제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는 실업자가 된다는 치명적이다. 우선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것은 가장으로서 자기의 책임성을 다할 수 없게 되어 가정을 경제적으로 유지시키고 자녀들을 교육하여 온전한 가정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그 결과 가정은 파괴되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 따라서 실업은 우선 가정생활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그 다음으는 사회생활에서 실업자의 인격성은 말할 수 없이 추락당한다. 사람들은 직업과 거기서 하는 역할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해 나갈 수 있다. 사람은 직업을 통해서 사회적 관계들이 유지되고 또 품위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친구들과 친지들을 당당하게 대할 수 있고 또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확보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실업자가 되면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인격성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 근거가 상실된다.
따라서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실업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적 삶과 정신적 인격적 삶 전체가 위협당하고 붕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많은 실업자들의 가정이 파괴되고 그 가정들을 위해서 책임을 지고 일해야 할 가장들이 죽음의 길을 택하거나 거리의 방랑자가 되어 고통 속에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어려운 현실에서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세계적 차원에서나 국내적 차원에서나 우리 모두가 걷고 있는 깊은 어둠의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뭔가 희망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 이 고통스런 시간들이 끝날지 아무도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더욱 고통스런 삶의 시간들이 닥아오고 있다는 비관적 전망만을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는 세계의 “대공황”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이들도 있고 또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의 급작스런 붕괴를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전망을 말하든지간에 오늘날 금융자산가가 돈놓고 돈먹는 식의 “카지노 자본주의”가 계속되는한 우리의 미래는 매우 불확실하다. 외곡된 오늘날의 세계경제질서는 중지되고 새로운 세계경제질서가 출현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오늘날과 같이 “금융자본”이 무제한적 이윤을 취하고 전세의 일반민중을 죽음의 수령으로 몰아넣는 세계경제질서가 지속되는한 세계는 가히 묵시문학적 위기에 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역사
신화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구약성서에서 처럼 노동의 기원을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는 역사적 문서는 없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보면 노동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것었으니
이제, 따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훍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기 3: 17-19)
이 구절은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내린 저주의 말씀 가운데 일부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인간을 타락으로 떨어지게 한 뱀을 정죄하고(배로 기는 고통) 또 뱀의 꾀임에 빠진 이브를 저주한 다음(임신과 출산의 고통) 마지막으로 이브의 꾀임에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아담 즉 남편을 일해야 먹고 살도록 저주한다. 창세기 1장 창조설화에 보면 “내가 온 땅위에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29절)고 해서 인간이 노동하지 않고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 즉 자연의 열매로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결과 인간에게 저주가 내려진 것이다. 위에 인용한 창세기 3장 17-19절이 담고 있는 남자에 대한 저주는 “땀흘려서 노동하라”는 것이다. “너는 죽는날까지 수고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17절). “죽을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낱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19절).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노동하도록 저주를 내린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의 기원은 인간의 타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타락의 최초의 결과 즉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은 곧 노동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그의 저주에서 왔다. 인간은 노동하도록 저주를 받았다. 이제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노동은 인간의 숙명이 된 것이다. 이렇게 노동이 하나님의 저주의 산물이라는데 노동이 갖는 몇가지 신비가 있다.
첫째 노동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임으로써 인간의 노동은 삶을 위한 숙명 내지는 계명이 되었다. 이 노동의 숙명성은 곧 노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보다 큰 저주를 내포하게 되었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일하기 실은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고 했다. 그러므로 노동하지 않고 먹고 사는 사람이나 먹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두 번째 저주 아래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먹고 산다. 즉 타인의 노동의 대가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성서는 “먹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남의 노동을 착취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또 돈놀이와 같은 불로소득을 획책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두 번째 저주 아래 있다. 그리고 타인의 노동에서 잉여분을 갈취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또 한번의 저주 아래 서 있는 것이다.
둘째 노동이 한나님의 저주 아래 놓임으로써 노동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또 한번의 저주를 받게 된다. 이러한 두 번째의 저주가 오늘날 산업사회에서는 “실업”(失業)이라고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실업 즉 일하도록 저주받은 인간이 일을 상실하는 것은 보다 더 무서운 저주다. 왜냐하면 실업자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생산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삶을 위한 기본적 조건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의 현실 즉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해 땀흘려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할 현실에서 실업자가 된다는 것은 다시 한번의 추방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에덴의 동쪽에서 일해야 할 인간이 실업자가 됨으로써 다시 한번 노동하여 먹고 사는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이렇게 일하지 않고 남의 노동으로 사는 사람들이 저주받았을 뿐만 아니라 노동해야 할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사람들도 저주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업자의 운명은 엄격하게 보면 노동하지 않고 먹고 사는 사람들의 움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니 노동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을 착취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불의로 인해서 실업자가 생겨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일하지 않고 먹고 살려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저주가 결국은 일하기를 원하지만 실업자가 된 사람들 위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 즉 에덴동편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역사는 실상 일하지 않고 살려는 인간들과 일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사라고 할 수 있다.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여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던 “에덴 동산”을 자신들만을 위하여 만들려고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모든 인류에게 보다 큰 저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왜 실업자들이 이렇게 많이 늘어나는가?
이러한 인간에 대한 두 번재 저주인 실업은 오늘날 전 세계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국가들에서조차도 약 1500만명의 실업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이들을 포함해서 전 세계적으로는 약 4000만명 이상의 실업자들과 그 가족들이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남미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면 실업은 숙명적인가 아니면 인위적인가? 진정한 의미에서 실업이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저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1. 오늘날의 실업은 후기산업사회가 가진 필연적 결과들로 설명할 수 있다. 고도의 기술발전은 기계로 하여금 이전에 인간들이 노동하던 영역들을 대치하게 만들었다. 기계가 인간들을 실업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발전되면 될 수록 기계는 더 많은 실업자를 양산한다. 독일 빌레펠드의 한 방적공장에서는 이전에 500명이 하던 작업을 단 한 대의 기계가 하고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술자가 이러한 기계 10개를 조정하고 있다. 따라서 기계 10대와 한 인간이 이전에 약 5000명이 하던 일 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장의 공간도 100분지 1로 축소되고 노동시간도 단축된다. 물론 기계들은 노동조합이나 파업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점차 노동의 세계로부터 추방당하고 있는 반면에 기업주는 더 많은 이익을 올리고 있다.
2.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컴퓨터와 같은 정보매체들은 사람들을 일자리에서 추방하고 있다. 컴퓨터의 등장은 사무업무와 정보업무를 담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감축해 나갔다. 컴퓨터는 수퍼마겥 같은 곳에서 물건을 팔고 계산하는 업무를 효율화함으로써 유통부문에서만 인원을 5분지 1이상을 감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컴퓨터의 질이 1%정도 향상되면 거기 따른 실업자도 1%정도 더 늘어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과학기술의 발전의 속도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인간들은 노동의 현장으로부터 더욱더 소외된다.
3. 이러한 대다수의 인간들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기술력과 정보 그리고 자금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자본들의 반사이익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과거와는 달리 고도의 기술시대의 거대기업가들은 고도의 기술력과 정보력을 통해서 인간의 노동력을 대치함으로써 보다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지난 50여년간의 이러한 과도한 이윤추구와 그 결과로서 자본력의 집중은 다음과 같은 결과들을 초래했다.
우선 거대한 기업들의 자본의 집중의 결과 초국적 자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초국적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는 다국적 혹은 초국적 기업들은 최고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전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해 다닌다. 이들은 지구화 혹은 세계화(Globalisation)라는 표제어를 내세우면서 “온 세계인들은 한 가족으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지구화에서는 자본은 전통적 민족국가들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모든 나라들에게 개방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 모든 국가들의 무역에서 자유화를 부르짓는다. 이러한 지구화라는 표제어 하에 개방화 혹은 자유화는 곧 자신들의 자본이 마듬대로 다른 나라들에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구화라는 이름의 개방화 혹은 자유화는 사실상 강력한 자본력을 가진 기업들이 세계 어디에서나 마음대로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기업 뿐만 아니라 유통업 그리고 금융업등 모든 것이 속한다. 이제 이러한 지구화의 조건 하에서는 엄청난 괴력을 가진 타이슨과 같은 헤비급 선수들이 라이트급 선수들과 맞 싸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말하자면 세계화에서는 급수를 초월한 권투시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불을 보는 것과 같이 뻔하다. 강하고 힘센 놈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의 전환이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금융자본이 남긴 이익이 산업자본이 남긴 이익을 능가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물건을 공장에서 생산해서 팔아서 남긴 이익 보다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아서 남긴 이익이 더 많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산업자본을 점차 금융자본으로 돌리고자 한다. 산업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모험들을 피해서 보다 안전한 금융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활동은 전체 생산과정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의식화된 노동자들을 사용하는데도 많은 문제점이 야기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노동자들이 기업주에게 뭔가 처우개선을 강력히 요구하면 “젠장 공장 문닫고 남은돈 은행에다 넣고 돈놀이나 하겠다”고 노동자들을 위협한다.
특히 부자 나라들의 금융자본이 가난한 나라들에 들어와서 이자를 받아서 남긴 이윤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국제금융자본이 돈을 가난한 나라에 빌려주고 받아가는 이자가 1년에 약 1200억 달라(한화로 1천 500조) 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 나라도 1년에 갚아야 할 이자가 120억불 즉 우리 돈으로 약 16조에 달한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전체 예산 80종에 약 5분지 1에 해당하는 돈이다. 그 돈이면 아파트 1억짜리 16만채를 살 수 있는 돈으로써 한가구당 4인가족이 산다면 240만명이 살 수 있는 주거공간을 확보해 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이자를 3년 동안만 갚지 않는다면 서울에 집없는 서민들에게 모두 집을 줄 수 있는 돈이다. 지금 초국적 자본들은 우리 나라에서만 이렇게 엄청난 돈을 벌어가고 있다. 이러한 외채는 대부분 은행간부들이나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꾸어 온 것으로 일반 국민들과는 사실상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채에 대한 무책임한 정부의 보증으로 인해서 지금 국민들이 그 빚을 걸머지고 IMF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구화 혹은 정보화는 이러한 초국적 기업들과 초국적 금융자본들이 말하고 있는 인류의 공생과 공영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화 개방화라는 일금으로 전통적 민족국가들의 장벽을 헐고 약소국가들을 경제적으로 마음대로 유린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초국적 기업들과 자본들의 은폐된 전술용어인 “세계화”를 그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아니 알면서도 외국자본의 지원을 받은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이 같이 장단을 맞추고 춤을 춘 것이다. 아이큐 70 수준의 김영삼대통령은 매국적인 관료들의 부추김을 받아서 그 내용도 실체도 모르는 “세계화”를 국정지표로 내걸고 호돌갑을 뜬 결과가 오늘날과 같은 IMF의 경제신탁통치로 나라를 몰아넣었다. 한국의 역대지도자들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사대적이어서 그동안 정치적 주권국가의 체면을 지켜오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적 주권국가의 입지도 마련하지 못하고 모든 시장을 외국인들에게 팔아넘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세계경제체제 하에서 IMF 경제신탁통치를 받고 있는 우리 나라의 현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빚을 갚아가는데 모범생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잘못된 조건으로 빚을 진 가장이 자기 가족들의 생계는 고려하지 않은채 열심히 빚쟁이들의 조건들을 들어주면서 그들의 비위만을 맞추려고 한다면 그 가족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대량실업은 왜 오는가?
오늘날의 전세계적 실업사태는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오늘날의 산업구조와 연관되며 동시에 오늘날의 소비구조와도 연관된다. 간단히 말해서 산업구조의 기계화 내지는 자동화로 인한 생산성의 폭발적 증가가 실업자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된 상품들의 소비는 그동안 대중소비사회를 부르짓음으로써 해결하려 했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완전고용과 더불어 정의로운 분배가 실현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두가지 목표는 실패했다. 생산시설의 자동화는 완전고용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을 노동현장으로부터 추방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서 자동화가 먼저 실시된 유럽에서는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많은 실업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동안 이 실업자들의 문제는 잘 되어 있는 사회보장제도에 의해서 카바되었다. 그러나 실업자들이 더욱 증가하게 되자 지금은 이 사회보장제도가 완전히 붕괴되기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대량실업으로 실업기금의 적립보다는 그 지출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동안 악화된 부의 분배는 노동자들의 노임을 갉아 먹어서 그들의 구매력을 극도로 제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실업자가 되거나 적은 월급으로 살아가야 할 노동자들이 이른바 대중소비사회를 형성해 갈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대중들의 소비의 시대가 오지 않게 되자 다량으로 생산된 상품들은 팔 수 없게 되었다. 상품을 팔 수 없게 되자 돈이 돌지 않게 되고 물건이 팔리지 않고 재고로 남게 되었다. 그 결과 생산이 위축되어 생산시설을 줄이거나 생산라인을 쉬게 함으로써 더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대량실업사태의 유발은 이미 앞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산업자본이 금융자본화하는 추세와도 결합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시설의 자동화로 다량생산된 상품들이 팔리지 않게되고 뜨 그동안 축적된 자금을 돌릴 수 없게 되자 초국적 자본들은 산업자본을 금융자본으로 전화하는 길을 추구하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초국적 자본들은 남아도는 자금들 제3세계에 개발자금으로 빌려줌으로써 본격적 투기에 나선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초국적 자본들은 이른바 “개발 이데올로기”를 전세계에 화산시켰다. 말하자면 제3세계의 빈곤은 저개발 즉 공업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업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제3세계 국가들 특히 아시아와 남미 국가들은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빌려다가 산업화에 열을 열을 올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1960년대 후반부터 “잘 살아보자”라는 표제어로 시작된 박정희의 “근대화”이다. 이리하여 개발 이데올로기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초국적 자본들은 자신들의 돈을 저개발국의 개발자금으로 빌려주어 막대한 이자 수익을 챙길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외채며 우리가 지금 IMF체제 하에서 격고 있는 고통의 시발점이다. 이렇게 볼 때 제3세계 국가들이 잘 살아 보기 위해서 시작한 이러한 근대화 혹은 산업화는 사실상 개개 나라의 내적 필요에서 보다는 이러한 초국적 자본의 필요 즉 외부의 필요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근대화를 박정희의 아이디어나 지도력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 실상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초국적 자본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남미와 아시아의 나라들이 7.80년대를 거쳐오면서 외국자본과 기술도입을 통한 근대화를 열심히 추진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외채에 시달리고 고통을 겪게 되었다. 제3세계의 산업화를 통해서 얻어진 결실들은 거의 예외 없이 외채의 원금상환과 이자갚는데 다 들어가고 말았다. 이러한 외채갚기와 이자갚기가 그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 IMF 관리체제를 낳았는데 남미의 경우는 이미 15년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지난 3년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북미와 유럽의 초국적 자본들은 제3세계에서 투기를 통해서 벌어들인 돈들을 자기 국민들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탈세를 도와주고 있는 일부 국가들 예를 들면 스위스, 룩셈부르그, 릭히텐스타인등 세금을 거의 받지 않는 국가들의 은행에 넣어두고 지금도 투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만해도 약 1500역 달라에 달하는 외채를 걸머지고 있으며 금년도 이 외채에 대한 이자만 120억 달라 약 16조를 지불해야 한다. 16조란 1억짜리 아파트를 약 16만개 살 수 있는 돈이며 찬 채에 5인가족이 들어가 산다고 계산하면 80만명에게 집을 줄 수 있는 돈이다. 우리가 물어주어야 할 16조는 년봉 1600만원짜리 노동자를 160만명 고용할 수 있는 돈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자만 물지 않는다면 오늘날 우리 나라에는 실업자가 거의 없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기업들과 은행들이 들여온 이 많은 외채를 한국정부가 보증을 서 주었기 때문에 외국돈은 땡전 한푼 만져보지 못한 국민들이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것이다. 국민들은 잘못된 정부들, 박정희로부터 시작해서 김영삼에 이르는 국민들의 삶과 미래는 생각지 않고 대기업들과 은행들의 뒷바라지나 해주고 돈을 얻어서 정치한 사람들에 의해서 고통을 격고 있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이라는 것은 이러한 초국적 자본들의 돈놀이를 강대국의 힘을 등에 없고 보장해주는 집단이다.
오늘날 구조적 실업에 대한 대책은 없는가?
오늘날의 산업구조를 그대로 두고 제시되는 대안들은 다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시장경제론자들은 실업의 원인을 주로 경제성장의 둔화에서 보고 있다. 수요가 감소됨으로써 생기는 성장의 침체가 실업을 가져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노임의 상승이 결과적으로 경제성장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도 한다. 따라서 노임을 줄이고, 수요를 높이며 생산성을 높일 것을 권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나라도 10%가까운 고도 성장을 지속할 때는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은 타당한 것 같이 보인다. 현정부도 금년 8월부터 경기부양책을 씀으로서 침체된 경제를 회복한다고 한다. 따라서 성장정책은 그 원리에 있어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의 두 번째 조건인 수요창출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노임삭감과도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노임을 삭감당하거나 아니면 실업자가 될 경우 그들은 물건을 살 수 없는 처지에 떨어지기 때문에 내수가 창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내수침체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구조조정을 통해서 대량실업을 산출한 다음에 경제회복 특히 내수시장을 활성화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는 수출에 역점을 두고 있지만 그것도 용이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주요 수출상대국가들인 동남아 국가들은 이미 우리와 같은 내수시장 침체에 빠져 있어서 왜국물건을 사들일 처지에 있지 않다. 중국같은 나라들은 오히려 값싼 제품들을 통해서 우리 나라의 시장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이나 유럽시장도 그리 만만치 않다. 따라서 내수시장을 무시한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은 수출상대국가들의 조건들에 따라서 좌우되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것이어서 항국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이러한 성장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성장이란 내수와 수철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안되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시장에서 문제해결의 길을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실업자를 줄이기 위해서 노동시간의 단축을 권장하고 있다. 주당노동시간의 단축도 생각할 수 있고 평생동안의 노동시간의 단축도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1명의 노동자가 주당 40시간씩 일할 경우 10명의 노동자가 40시간씩 일한다면 모두 400시간을 일한 셈이다. 만일 노동자 한 사람이 주당 36시간씩 즉 네시간 적게 일한다면 40시간이 줄어들어서 노동자 한 사람이 더 일할 수 있게 된다. 만일 40시간씩 일하던 도동자 100명이 36시간씩만 일한다면 약 10명의 일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만일 100만명이 그렇게 한다면 10만명의 일자리가 생기는 셈이다. 이것은 엄청난 수자이다. 물론 노동시간단축을 통해서 그만큼 노임이 삭감될 수 있지만 현상을 유지하면서 동료들을 실업자로 내모는 것 보다는 훨씬 낳다. 독일이나 프랑스등은 이러한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해서 실업문제를 상당 정도 해결하고 있다. 평생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자들의 조기은퇴를 말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셋째 유럽에서는 일자리를 같이 나누는 운동들이 전개되고 있다. 아직 활발하게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고소득이 보장된 직장에서는 여러 곳에서 실험되고 있다. 대학이나 교회등에서는 하나의 일자리를 두 사람이 같이 나누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목사 자리 하나를 두 사람이 나누어서 일하면서 월급을 반씩 나눈다. 이 경우 절반의 월급밖에 받지 못하는 목사는 가난하게 살면서 그동안 못 했던 연구를 마치거나 다른 분야 예를 들면 환경운동단체인 그린피스에서 활동한다. 대학에서도 교수 자리 하나를 실업상태에 있는 동료와 나눈다. 월급이 반으로 줄어들므로 가난하게 살거만 일이 줄어들어서 남는 시간을 책을 저술하거나 다른 연구에 몰두하므로 유용하게 사용한다. 이러한 일자리 나누기는 일반노동자들에게는 적용하기 힘든 것이지만 고소득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대안들은 현존하는 경제질서 안에서의 대안들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대안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필자가 생각하는 것 몇가지를 여기에 소개해 본다.
성서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이윤추구 중심의 경제에서 “삶의 기본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경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맹수들도 자기의 배를 채우면 그만이지 먹을 것을 축쩍하거나 적은 동물들을 더이상 공격하거 않는다. 다람쥐와 같은 적고 약한 동물들이 오히려 긴 겨울을 지나기 위해서 물건들을 축적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 이상을 축적하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았고 탈취한다. 이러한 욕구가 원시시대에는 노예제를 만들고 전쟁을 불렀으며 근래에 와서는 식민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등을 낳았다. 이것이 인류가 저지른 비극들이다. 따라서 인류의 미래는 이러한 축적 경제가 아니라 “삶의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경제체제 형성에 달려 있다. 이러한 체제는 인간이 과도한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려 공생하려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그 다음은 이러한 기본적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초국적 자본들과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통제할 수 있는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국제기구는 비동맹 국가연합과 같이 약소국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서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 G7(8)이나 세계무역기구와 같은 그 동안 강대국들의 동맹체들을 대체하거나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별 국가들은 자기 나라 국민들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신토불이식”의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기본욕구인 의식주는 가능한한 자기 나라에서 생산된 것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이러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필란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식량과 의류에서만 약 20-20% 정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간다. 우리 나라는 어떤가? 중요한 식량자급률이 20%정도밖에 되지 못하며 의복원료도 거의 100% 외국에 의존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목화 한뿌리 생산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감의 원료 가운데 국산품은 거의 없다. 건축 자재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외국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돈을 아래로 내려 보내는 일이다. 돈은 그 본성상 늘 위를 향해서 올라가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금융체제는 이러한 돈의 본성에 따라서 구성되어 있어서 돈은 위 즉 돈 많은 사람들에게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돈이 돈번다는 말로도 표현한다. 은행에 들어있는 부자들의 돈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일요일에도 새끼를 친다. 일요일이라고 해서 이자를 제외해 주는 은행은 없다. 따라서 이렇게 위로 부한 사람들에게로 올라가는 돈을 정부는 아래로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그 돈으로 물건을 사고, 물건이 팔리면 더 생산하게 되고, 생산하자면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돈이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면 내수시장 형성은 불가능하고 결국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그의 책 “레비아단”(Leviathan)에서 돈은 곧 피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사람의 몸에서 피가 순환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는다. 이와 같이 사회에서 돈이 돌지 않으면 경제는 죽는다. 따라서 정부는 비생산적인 곳에서 돌아가거나 잠겨 있는 돈을 찾아내서 그것이 산업자금으로 잘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돈은 자기의 돈이어야 하며 또 적절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남의 피를 제대로 검사히지도 않고 수혈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수혈하는 경우에는 환자는 죽게 된다. 따라서 금융체제에서도 초국적 금융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국의 자본들을 잘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어덯게든지 해외의존도를 줄이고 우리의 것으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경제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다. 아무리 제도가 좋고 체제와 프로그람이 잘 짜여져 있다해도 인간의 마음이 왜곡되면 모든 것은 허사다. 오늘날과 같이 “무한경쟁”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모두가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겠다는 마음, 우리의 기본적 욕구의 충족으로 만족하겠다는 청빈한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삶의 자세를 위해서 오늘날의 종교들의 과제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냐 맘몬이냐?”하는 중대한 결단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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