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역사적 고찰
한국의 장로교단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독교사상” 특집으로서 필자가 요청받은 주제는 “한국신학으로서의 장로교 신학의 과제”였다. 그러나 장로교 신학 즉 칼빈주의를 우리가 한국신학 혹은 한국적 신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지기된다. 장로교회는 루터교회와 성공회와 더불어 16세기 중교개혁운동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세 개의 개신교회들 가운데 하나로서 당시 프랑스와 스위스 그리고 남부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존 칼빈의 개혁운동에서 탄생했고 그 후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영국)의 개혁자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된 교회이다. 따라서 우리는 장로교회의 신학인 칼빈주의를 한국적 신학이라 규정할 수는 없으나 장로교회가 한국에 들어와서 조직교회로서 성장한지 역사가 100년이 되었으므로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에서 그 과제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른바 장로교회의 토대를 이루는 칼빈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수행해온 과제들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한국 장로교회가 감당해야 할 과제들을 찾아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장로교의 전통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칼빈의 신학은 첫째는 신구약성서에 충실하려고 했던 루터 등 다른 선배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에 서 있다. 둘째 교회사적으로는 칼빈에게는 그리스적 교부학 전통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그의 신학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했다. 셋째 칼빈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등 다양한 철학적 사상에도 정통하고 당시 에라스무스 등 유럽의 인문주의적 사상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넷째 칼빈은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사상을 비롯하여 개신교회들 안에서의 이단적 집단들과의 투쟁을 거친 교회적 정치적 상황 말하자면 역사적 과정들을 통해서 발전되었다.
따라서 칼빈사상의 정수를 담은 그의 대표작 “기독교 강요”를 읽어보면 기독교의 가르침, 즉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서 그는 위에서 지적한 사상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성서나 교부학적 전통들 외에도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여 기독교 사상을 폭넓게 해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과도하게 사용했던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의 모순들을 제거하고 동시에 성서만을 주된 신학적 자료로 사용했던 루터에 비해서 칼빈은 그리스 로마의 인문주의적 전통도 과감하게 대화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기독교신학의 폭넓은 지평을 열어놓았다. 특히 그는 법학전공자답게 기독교 교리내지 사상을 사도신경의 신앙항목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해명함으로써 후세에 개신교 교의학 서술에 모본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칼빈의 신학을 우리는 “도상의 신학”(Theology on the way) 혹은 “역사적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로교 신학사상의 역사적 공과(1)
그런데 16세기 후반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종교개혁운동의 활발한 역동성이 사라지고 이른바 개신교회 정통주의 시대가 온다. 이 기간을 교회사역가들은 대체로 가톨릭과 루터파가 대립투쟁을 멈추고, 서로 관용을 베풀기로 합의한 아욱스부르크에서 평화조약(Augsburger Friede)을 맺은 1555년부터 1675년 스위스의 개신교인들의 신조(Formula consensus Helvetica)가 완결되기까지 약 120여 년간의 기간으로 잡는다. 이 120년 동안 유럽에서 점차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가던 개신교회들 안에는 수많은 분파들과 이단적 사고들이 난무하여 루터교회나 개혁교회(장로교) 안에서는 많은 신학적 논쟁들과 함께 파당적 대결들이 일어났다. 이 때 이단사상들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들을 척결하고 갈라진 형제들을 수습하여 올바른 개신교회의 가르침 즉 정통주의(Orthodox)를 수립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물들로서 신앙고백서들 즉 교리서들이 출현한다. 그 중에서도 장로교회들 안에서 특징적인 것은 네덜란드에서 전개된 예정론 논쟁이다. 이 논쟁으로 네덜란드 국민들은 크게 두 파로 갈라진다. 기계적 예정론자인 고마루스(Gomarus)와 신인협동설적 예정론을 주장한 아르미니우스(Gomarus and Arminius) 사이의 논쟁 때문에 1619년에 도르트렉히트(Dortrecht)모인 장로교총회는 이른바 도드란스 총회신조(Canones synodi Dordrancenae)를 만든다. 그 다음으로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 직후 1646년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나온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Confesseion) 신조가 제일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장로교회는 정통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칼빈의 사상에서 하나님 중심주의에 근거한 예정론을 어느 교리보다 중요시하여 네덜란드의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내세우던 인문주의적 요소를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매우 협소하게 이해하고 배타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칼빈주의 전통을 가진 교회들, 특히 정통을 주창하는 장로교회들은 교리상의 적은 차이들로 논쟁을 일삼거나 서로 대립하고 투쟁함으로써 개신교회들 가운데 장로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분열된 채로 선교되거나 성장해 왔다.
그리고 그 후 이 정통주의 전통을 지키려던 배타적 칼빈주의자들에게서는 이렇다할 신학적 발전들이 없었다. 그들에게서는 교의학은 교리학, 혹은 신앙고백서들의 해설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칼빈의 사상을 정통적으로 수호하려고 했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 등은 매우 배타적 신학교육을 감행함으로써 분파주의를 조장하고 신학은 근본주의로 발전하여 편협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결국 정통주의자들은 가톨릭 교황에게서 해방시킨 성서를 교리체제의 울타리에 속박시킴으로써 근대적 성서신학의 발전을 가로 막았었다.
그러나 칼빈신학에서 정통주의의 공헌이라면 당시와 그 후에 개신교회들 안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했고 수많은 분열과 논쟁거리를 만들었던 이단들과 사설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고 성서와 칼빈의 순수한 가르침을 수호하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장로교회 신학과 정신의 역사적 공과(2)
19세기에 들어와서 서구의 사상가들은 칼빈주의가 유럽과 미국에서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과정에 기여한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연구들 중에 트뢸치 학파, 막스 베버 학파, 라차드 토니(Tawney) 학파들의 연구업적들이 특히 눈데 띤다. 이들 학파들은 칼빈주의 사상이 당시 사회적-경제적 발전과 어떻게 관련되고 기여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트뢸치는 칼빈주의 사상이 서구의 민주주의 신장과 인권의 발전 그리고 오늘날의 다원사회의 출현에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살피고 있다. 이 점들은 칼빈이 활동했던 유럽대륙에서 보다는 그 후예들의 활동의 주된 장이 되었던 영국, 특히 스코틀랜드와 미국 등에서 구체적 모습을 띠고 있다. 영국 스튜아트 가문의 왕 야곱1세(1603-1625년)는 당시 국가교회인 성공회주의를 앞세워서 장로교회의 종교의 자유와 의회의 민주주의를 억압하려는 정책을 사용했다. 그의 아들 찰스 1세도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라는 명제를 내세워 절대군주체제와 성공회의 주교주의를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하고 청교도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쓴다. 그러나 장로교인들이 장악했던 의회는 여기에 반대해서 1642년 혁명을 일으켜 왕을 추방하고 의회에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실시되던 장로교주의를 도입한다. 그것을 위해서 앞서 말한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Synode)가 열리고 거기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채택된다. 한국장로교회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바로 이때 청교도 혁명의 결과로 채택된 것이다. 따라서 트뢸치가 지적하는 대로 장로교회는 인류역사상 가장 고귀한 가치였던 종교의 자유와 함께 인간의 기본권리 특히 정치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다음으로 장로교주의가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그는 특히 종교사회학자로서 중국과 인도 그리고 고대유다주의의 폭넓은 사회학적 연구들을 통해서 종교적 신앙내용들과 물질적 관심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밝힌다. 그는 특히 청교도들의 역사적 활동과 삶을 검토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생활이 자본주의 형성에 어떤 정신적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데 주목했다. 그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라는 불후의 저서에서 청교도주의의 세속화된 신앙내용들로부터 현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추동력을 도출해 낸다. 그는 칼빈주의의 핵심사상인 이중 예정설을 단순히 정통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인간을 구원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로 구별하는 것에는 관심하지 않았다. 이 예정설을 푸는 열쇠로서 베버는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세상에서 일정한 직업(소명)을 가지고 살아갈 때 맺게 되는 선한 열매들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선택받은 자들은 세상에서 부지런히 일해서 부를 축적하여 성공을 이루는 것이 곧 선택의 확신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으로 정로교인들(청교도들)은 누구보다도 근면하게 일하여 직업(소명)에서 충실하고자 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축적된 물질(부)을 하나님의 선택의 징표로 보았다. 이것은 곧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성장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청교도의 윤리를 자본주의 정신과 비교해서 큰 공헌을 한 이는 영국의 경제학자 토니(Richard Henry Tawney: 1880-1962)이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성공회 주교요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동지로서 청교도 사상이 자본주의 출현의 온상이 됨으로써 생긴 모순들을 비판하는데서 출발했다. 성공회주교인 템플은 경건한 주교로서, 토니는 진보적 경제학자로서 모두 진보적 단체인 파비안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에서 활동했고 노동당에 가입했었다. 1926년에 출간된 “종교와 자본주의 발흥”(Religion and the rise of Capitalism)이란 책에서 16-17세기의 칼빈주의 및 청교도 사상과 자본주의의 상관관계를 앞서 지적한 막스 베버의 논제와 유사한 관점에서 탐구하고 있으나 베버와 달리 비판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종교개혁 이후 그리고 청교도주의 당시 성서의 사회적 가르침이 특히 미국에서 기독교 사회정책에서 물질적 부를 추구는 일에 굴복당한 것, 말하자면 상업행위와 예수의 정신이 서로 괴리된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 건너간 청교도주의가 예정론을 왜곡함으로써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예수의 사회적 가르침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왜곡 즉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즉 자본주의의 무한지배체제를 용인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20세기 장로교 신학의 바른 과제를 제시한 칼 바르트의 신학
장로교 혹은 개혁교 신학자로서 20세기 초반 가장 크게 공헌한 신학자는 주지하다시피 스위스 바젤 출신의 칼 바르트(Karl Barth)이다. 바르트는 당시 유럽에서 풍미하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 혹은 문화개신교주의를 극복하고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에 근거하여 이른바 신정통주의 신학을 주창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이다. 그를 신정통주의자라고 하지만 그는 과거의 낡은 교리주의적 정통주의로 회귀하지 않고 성서의 가르침을 당시의 사회정치적 현실과의 관계에서 해명함으로써 이른바 변증법적 신학을 발전시켰다. 또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을 위기신학으로 규정하는데, 그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은 발흥하던 신업자본주의 회에서 억압받던 프롤레타리아들, 즉 가난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열망을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과 결탁한 교회나 국가가 처한 상황을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한 위기로 규정한다.
칼 바르트는 이들 노동자와 농민들을 대변하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의 여명을 발견하고 여기에 응답하려고 했던 종교사회주의자들의 신학노선에 서서 신학을 하고 목회를 시작했다. 말하자면 그는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인문주의적 문화개신교주의(자유주의 신학)와 과거의 정통교리에만 몰두하던 신앙고백적 신학이라는 낡은 정통주의라는 두개의 기둥들을 극복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교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자유주의라는 부르주아 신학을 버리고 당시 등장하던 종교사회주의에 몰두하고 자신이 스위스의 사회민주당원이 되어 새로 동트는 시대를 준비하는 것을 교회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유럽의 위기를 극복한다고 주장하며 등장한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에 대해서도 예언자적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나치즘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외세, 특히 프랑스에 점령당한 독일지역과 독일민족의 이익을 회복하고 나아가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당시 부르주아들이나 유대인들이 독점한 부의 공정한 분배를 약속하고 정권을 잡았으나 나치당은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독점이라는 전대미문의 악마적 세력으로 변신한다. 이것의 구체적 실례는 유대인 학살과 전쟁 그리고 교회마저도 그에게 절대적 충성을 강요한 것에서 나타난다. 그 결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독일의 개신교인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종교개혁의 명제를 버리고 현대판 이단자들이 되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굴복하지 않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그리스도만을 믿고 고백하는 교회, 즉 “고백교회”(Die bekennde Kirche)를 설립하고 그 결의를 선포한 저 유명한 바르멘 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을 작성하여 공표한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이나 장로교 정통주의자들과는 달리 칼 바르트는 영국의 청교도주의자들이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추구했던 전통을 따라서 그리고 후에는 독일의 트뢸치나 막스 베버 그리고 영국의 토니처럼 성서와 기독교의 사회적 가르침을 인간의 물질적 소유와 분배에서도 적용했던 것을 본받아서 민주주의와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던 것이다.
특히 그는 당시나 오늘날 미국에서 보수적 정통주의 교회들의 정교분리 사상이 결과적으로는 정치나 사회 그리고 경제 등의 영역이 마치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에서 제외된 독자적 영역들인 것처럼 인식하여 정치가 자의적 독재로, 경제가 신자유주의적 독점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치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칼 바르트는 바르멘 신학선언 제1항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는 교회를 황폐화시킴으로써 독일개신교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독일적 그리스도인들과 현재의 제국교회정부의 오류들에 맞서서 다음과 같은 개신교의 진리를 고백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한 14: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요한 10:1.9).“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경청해야 하고, 생사를 걸고 신뢰하고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외에도 선포의 근원으로서 다른 사건들, 권력들, 인물들, 진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로서 승인할 수 있고 승인해야 한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그는 여기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구원자요라는 그리스도교의 대명제를 제시하고 “양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들 즉 구테타나 비민주적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자들은 강도라고 규정함으로써 청교도 신학의 정수인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청교도전통의 민주주의를 기독교의 대의로 규정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바르멘 신학선언 제2항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주인들을 섬겨야 하는 삶의 영역, 예수 그리스도의 의인과 성화가 필요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여기서는 이 세상의 어떤 영역도 하나님의 통치영역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유럽이나 미국의 보수적 정교분리론자를 비판하고 있다. 종교와 정치 그리고 종교와 경제를 서로 분리시켜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당시 히틀러의 독재를 외면하고 허용하거나 오늘날 자본주의가 제멋대로 가난한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바르트는 바르멘 신학선언 3장에서 “우리는 교회가 메시지(설교)와 질서의 모습을 그때그때 자의적이며 변화무쌍한 세계관적이고 정치적 확신에 내어맡겨도 된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바르트는 정치나 경제 등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속한다는 그리스도의 왕권통치(Königsherrschaft Christi)이론을 주창하여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정치나 경제를 외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장로교회의 현실
한국 장로교회나 신학의 현실은 다른 필자들에 의해서 상세히 분석되고 정리될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로서 칼빈신학에서 주로 청교도 혁명과 관련되었던 국가론을 중심으로 간략하게만 다루고자 한다.
100여 년 전에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회 혹은 장로교회 신학은 대체로 두 개의 신학적 흐름들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첫째 미국 남 장로교회나 호주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은 매우 보수적 정통주의 전통과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 상당부분은 미국에서 정통주의의 변종이라 할 수 있는 근본주의자들이며 국가론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교분리주의자들이었다. 둘째 미국 북 장로교회나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은 비교적 온건한 진보주의자들, 혹은 영국의 청교도적 전통들,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의 전통을 지닌 사람들로 국가론에서는 정교분리보다는 국가도 하나님의 통치영역의 일부로 파악하는 “그리스도왕권통치”(칼 바르트)를 주장하고 교회는 국가의 파수군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신학적 스펙트럼은 매우 폭넓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은 공히 초기부터 복음전파에만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 학교설립이나 병원설립이나 종교서적의 출판사업(성서번역출간과 기독교서적 출판 등) 그리고 고아원 같은 세속적 사업들 즉 교육, 의료, 자선사업 등 인도주의적(humanistic) 사업들에도 열정을 쏟았었다. 사실상 선교사들은 이러한 세속적 인도주의적 사업을 단순한 복음전파의 한 수단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는 곧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운동임과 동시에 유토피아적 인문주의 사업을 병행했던 것이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가 한국에서 복음전파에서도 크게 성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장로교회들의 선교의 성과는 서구의 분열된 교파교회의 이식이라는 매우 협소한 관점에서만 파악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한국의 개화 혹은 근대화라는 보다 폭넓은 인식의 지평에서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들이 한국의 일반 역사가들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거나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동안 한국의 교회역사가들이 한국의 기독교의 역사를 복음전파와 교파교회확장의 역사라는 너무 편협한 울타리 안에서 서술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한국에서 장로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깊이 성찰해야 할 대목은 짧은 기간의 교세확장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대립과 분열을 낳았다는 점이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굴복한 장로교인들을 배제한 고려파의 분열, 성서해석방식으로 대립한 기장과 예장통합의 분열, 에큐메니칼 운동의 용공성 여부를 둘러싼 이념적 분열 등을 기점으로 하여 장로교회는 수백교단으로 분열되어 현재는 교회사 전문가라도 그 계보를 따지는 것이 힘들 정도이다. 이러한 분열의 근원은 분열된 교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통”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데서 보듯이 과거의 유럽의 칼빈신학의 편협한 정통주의 성향에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정통주의는 이단과 사설을 방지하고 순수한 교리를 담보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그 결과로 낳은 분열은 장로교회의 신뢰성과 진정성에 깊은 의심을 갖게 됨으로써 복음전파에 막대한 지장을 준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회들 내지 개신교회들이 처한 현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칼빈의 정통적 교리와 그 후예들인 청교도 정신들을 망각하고 복음의 정신을 왜곡시키고 세속적 물질적 성공주의가 교회를 부패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들이 본격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70년대부터 시작한 경제개발을 위한 근대화와 이 물결을 타고 들어온 미국의 교회성장이론이 결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의 교회성장이론은 로버트 슐러 등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론을 종교적으로 각색한 것으로서 그 대표적 모델은 돈이 이자를 낳는 원리 혹은 세포나 핵(核)이 분열하여 확대재생산 되는 원리가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 즉 하나의 개체 혹은 세포(Cell)가 새끼를 처서 성장하는 것처럼 정점에 있는 한 교인이 한사람 한사람을 전도하여 자기 밑에 두어 피라미드처럼 교회를 성장하고 발전시킨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성장단계를 다단계판매 방식이라고 하고 교회선교에서는 cell mission이라고 한다. 다단계 회사는 새로 들어온 회원을 철저한 세뇌 교육을 시켜서 최대의 판매성과를 이루게 하고 또 그 조직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듯이 교회에서는 이 방법을 새 신자훈련 프로그램 등에 응용한다. 여기에서 다단계판매회사가 하듯이 무한한 경쟁이 생기고 교회들마저도 전도라는 이름으로 다른 교회의 교인을 쟁탈하는 수단으로 부흥회가 이용되고 온갖 종류의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운영된다.
그 결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한 거대재벌들처럼 거대교회들이 출현하고 거대은행이 지점들을 내듯이 거대교회들은 지교회 혹은 지성전을 만든다. 거대회사들의 회장들이 자식에게 부를 물려주듯이 거대교회의 성직자들은 자식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재벌들이나 거대교회들이 어떻게 김일성부자나 그 손자의 세습을 비판할 수 있을까? 그 뿐만 아니라 거대교회에 축적된 자본으로 인해서 성직자들이 과도한 사치에 매몰되거나 재정적 불의에 빠지고 자식들에게 부를 세습하여 타락하므로 교회 안에는 갈등과 분란이 끊이지 않는다. 근래에는 6.70년대 청교도적 전통에서 진보적 장로교회의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위한 투쟁을 정교분리의 이름으로 규탄하고 자신들의 순수성을 주장하던 정통적 거대 장로교회들이 지금은 정교유착의 온상이 되었다. 온갖 정권과 금권을 가진 권력자들이 성직자 혹은 장로라는 이름으로 교회 안에 금융인 선교회라는 소금회를 조직하여 온갖 불의를 저지르고, 심지어는 가난한 저축은행예금자들의 돈을 빼앗아 서로 뇌물로 주고받는 타락의 장소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개신교회 혹은 장로교회는 믿음을 기치로 내건 종교인데 가장 믿을 수 없고 변질된 집단으로 전락함으로써 최근 그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결론: 한국개신교회의 신학적(개혁적) 과제
이러한 현실분석에 근거해서 필자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가장 오래된 유산인 칼빈의 신학과 그 정통주의와 청교도주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제 하에 몇 가지 과제들을 간략하게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칼빈신학에 기초한 초기 정통주의는 앞서도 언급한대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진수를 파악함으로써 이단과 사설을 교회 안에서 물리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신인식론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참되고 믿을만한 지혜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 자신의 인식이라고 하는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세계와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근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후대에 와서 자연신학 논쟁으로 발전되었으나 필자의 소견으로서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바로 이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과 세상을 바로 이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하나님 이해의 전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 때야 그리스도인은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고 살게 된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 12:2).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온갖 잡다한 이단들과 사설들을 가려내고 오직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설교하고 가르침으로써 신앙과 경건을 어떤 물질적 이득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샤머니즘적 풍토를 한국교회에서 추방하게 된다.
둘째 한국의 장로교회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 청교도들의 삶을 본받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인권의 향상에 기여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청교도들의 전통을 따라 교육사업, 의료사업, 봉사사업 등 인도주의적 사업을 통해서 근대적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가 시작한 이러한 노력들은 다 어떻게 되었는가? 그 동안 한국은 일본식민주의 밑에서 고난을 당하고, 또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당했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선과 인도주의는 사라지고,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학교나 병원이나 기타 자선사업들이 모두 자본주의적 영리사업으로 전락함으로써 기독교정신, 특히 장로교회의 청교도 정신은 퇴색하고 “경건을 자기이익의 수단”(딤전 6:5)으로 삼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셋째 한국의 장로교회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본받아 군사독재시절 자유와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서 투쟁했었던 위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낡은 정통주의를 추종하는 다수의 장로교회들은 미국의 정통주의나 근본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교분리주의를 내세워 영국의 청교도 전통 하에서 투쟁하던 진보적 장로교인들의 투쟁들을 비판했었다. 한국은 그 동안의 투쟁을 통해서 19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된 국가체제와 정부를 갖고 자유와 인권을 누리고 있다. 그것은 청교도의 혁명정신을 계승한 장로교회들과 유토피아 사회를 추구하는 인문주의자들의 단결된 노력들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래 장로 대통령인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의 정통주의자들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정교유착을 통해서 이승만 정부시절처럼 정치적 특권이나 경제적 특혜를 누리려 하고 있다. 민주화투쟁에서 어렵게 이룩한 자유가 민간사찰에 의해서 위협받고, 민주주의가 특정 권력계층에 의해서 독식 당하며, 경제적 성과들은 특정 재벌들에 의해서 독점당하고, 인권이 신장되기는커녕 후퇴하는 현상을 보이는 것은 매우 우려할만한 일이다. 따라서 지금이야 말로 장로교 신학을 살려낸 바르트가 주창한대로 한국장로교회는 세상에서 파수군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넷째 영국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이렇게 설파한 적이 있다. “신학사상 혹은 교리는 유럽 대륙에서 출생하고, 영국에 와서 교정되며, 미국에 가서 타락한다.” 대륙에서 탄생한 장로교회 정통주의는 영국에 가서 청교도주의로 나타나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하다가 미국으로 가서는 자본주의와 결탁함으로써 타락한 것을 말한다. 청교도들은 칼빈의 예정론에 따른 소명의식의 확인을 위해서 청빈한 생활과 부지런한 노력으로 부를 쌓아감으로써 초기 미국의 자본주의 성장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청교도주의는 두 번째 세대부터는 초기의 사도적 청빈과 근면을 포기함으로써(halfway covenant) 그 본래 정신을 상실하고 오히려 폐쇄적이고 배타적 근본주의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장로교회는 자본주의 발흥과 성장에 기여했으나 동시에 그들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물질주의와 타협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자본에 굴복해 들어감으로써 타락의 길에 들어섰다 뉴욕 월가 한 복판에 그들은 황금 송아지 동상이 그것을 상징해 준다. 따라서 한국장로교회 신학은 교회성장론이라는 맘몬주의 자본주의신학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청교도의 사도들의 청빈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섯째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통주의의 배타적 유산으로 인해서 생긴 치욕의 분열역사를 청산하고 상호 인정하고 협력하는 관용정신으로 거듭나야 한다. 앞서도 말한 대로 한국 장로교회는 이러한 화해의 정신으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분열과 갈등이 심한 한국 사외에서 어떠한 구실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장로교회 교단총회 100주년을 마지해서 모든 장로교단들이 모여 잘못된 과거를 참회하고 그리스도가 하나인 것처럼 모두가 하나 되는 예배를 같이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