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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6 10:23
죽제 서남동의 민중신학과 윤리사상
글쓴이 : 손규태
 
1. 서론적 고찰
 
죽제 서남동은 1918년 7월 9일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적은 섬 자은도의 바닷가 마을에서 서당훈장을 하면서 농사도 짓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합병 이후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농토가 적은 섬 마을의 생활은 그리 넉넉지가 못했다. 서남동은 소설가 천성세의 “落月島”를 읽고 그가 오래 전에 떠났던 고향 그 동안 잊었던 고향을 다시 회상하면서 자기의 고향을 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천승세의 중편소설 ‘낙월도’같이 그렇게 형편없는 낙도는 아니지만 하여간 목포 앞 바다의 한 섬에서 태어나서 교회도 모르고 자라다가 소학교 5학년 때에 목포에 있는 교회학교에 진학했다.” 천승세의 작품 ‘낙월도’는 일제시대의 심각한 경제적 수탈 가운데서 살아가는 섬사람들이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거기에 보면 한 지주의 온갖 횡포와 거기에 시달리는 소작인들과 뱃사람들의 처참하고 비인간적인 삶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남동이 소학교 5학년에 섬을 떠나서 목포로 나와서 소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정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 섬 아이들이 육지로 나와서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영리한 자식에게 보다 넓은 세상에 나가서 공부하기를 원했었다. 그는 목포에 있는 소학교에 다닐 때 그 학교가 미션계에서 운영하였기 때문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그는 당시 기독교라는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 크게 관심한 것 같지 않다. 그 보다는 이 지구상에 조선 외에도 많은 나라들이 있고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데 더 흥미를 가졌던 것 같다.

그는 소학교를 마치고 전주에 있는 역시 밋션계통의 중고등학교인 신흥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신흥학교를 다니면서 그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던 예배시간과 성경시간을 통해서 기독교란 종교가 어떤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 보다 많은 지식을 얻께 되었다. 그는 이 때 이른바 ‘세계’라는 것을 기독교를 배우는 시간에 더욱 실감나게 깨닫게 되었다. 당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세계관은 주로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지역국가들에 속해 있었고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해서 말로만 듣고 있어서 별로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신흥교회)에서도 자주 서양인 선교사들을 만났는데 그때 그는 다시금 세계라는 것은 크고 다양한 민족들이 어울려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생각을 보다 넓게 밖의 세계를 향하여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75년 필자와의 대화에서 그 당시 ‘기독교’에 대해서 좀더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서남동은 믿음이라는 문제보다는 기독교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기독교에 대하여 공부해 보겠다는 이러한 의식은 그가 가졌었던 세계성에로의 자기확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세계를 향한 자기확대와 지식에 대한 탐구정신이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그를 일본유학 길에 나서게 한다. 그는 동지사 대학에 입학하고 당시의 관습대로 우선 1년 동안 문학부에서 예과를 마친 다음에 신학과에 들어갔다. 이것이 1938년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당시 동지사 대학대학 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에서도 신학부는 비교적 자유로운 학문적 분위기 가운데 있었다. 당시 일본에도 미국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공부한 신학자들은 유럽으로 눈을 향했고 그들의 신학사상을 흡수하는데 정열을 기울였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와 같이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과 낡은 교회적 행태에 사로 잡여 있지 않았었다. 그는 당시의 인상을 두 가지로 집약해서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당시 유럽신학에서 유행하던 비판적 성서해석을 통해서 교수들이 성서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점과 신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엄격성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 도미노모리 교수는 ‘新約文學 槪論’을, 미국 사람 선교사 캅 교수는 ‘舊約文學槪論’을 강의했는데 그 때 그분들이 배워준 문헌비판에서 나는 처음으로 학문의 엄격성을 배웠고 그 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내 마음에 역역하다.”

그는 1941년 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약 1년간 감리교 계통의 요한 성경학교 교사로 있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대구에 있는 교회들의 부름을 받고 약 10여년간 목회활동에 전념한다. 그는 대구 제1교회를 비롯해서 범어교회와 동문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당시는 아직 기장과 예장이 갈라지기 전이었고 아직 조선 교회 안에서는 신학적 문제들이 제기되기 이전이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성서연구와 신학연구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야나이 하라가 주관하던 “嘉信”이란 잡지를 통해서 바르트, 부룬너, 불트만, 고가르텐 등의 유럽의 위기신학자들의 사상에 접했고 이러한 방향에서 신학을 하던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정치적 실재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일본 체류시에 시작했던 독일어 공부에도 열성을 다했었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가르친 교수들은 영어로 번역된 유럽신학자들의 책들을 소개하지 않고 독일어로 직접 읽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라인홀드 니버의 “비극을 넘어서”(Beyond Tragedy)와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등을 몇 번이고 읽곤 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서남동의 사상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바르트 등의 위기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사상형성에 영향을 준 두 사람을 들고 있는데 그들은 함석헌과 김재준이었다. 함석헌은 당시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간조의 영향을 받아서 제도적 기독교를 넘어서 예수의 참 진리, 그 중에서도 산상설교에 집중했었는데 3시간 이상씩 계속되는 그의 성서연구 시간에 뜻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참가했었다. 서남동은 비록 목회자로 있으면서도 그의 탐구정신과 일치하고 있는 이러한 함석헌 선생의 성서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또한 함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사”를 통해서 민족문제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가 후에 민중신학의 창설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나서게 되는 것도 이러한 함석헌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민족문제와 씨알사상과 밀접한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죽제는 대구시절에도 1940년에 조선신학교를 창설하고 자유로운 학문적 분위기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장공 김재준 박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장공의 인도로 소로킨의 사회학과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철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 학자들의 책들을 읽고 논문들을 발표했는데 그 역시 이러한 관심들의 영역 밖으로 밀려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죽제는 그 후에 사회학 보다는 역사학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죽제에게 가장 결정적 영향을 준 이는 파울 틸릭(Paul Tillich)이다. 죽제의 고백에 따르면 그에게 매우 큰 신학적 충격을 주고 영속적 힘으로 지속되었던 신학자는 틸릭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충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좀 길지만 인용해 본다. “아마도 1951년에 나는 비로소 그의 ‘프로테스탄트 시대’를 읽은 것 같다. 그 논문들을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충격적인 경험 중에 가장 脫自我的인 感銘은 그의 ‘싸크라멘트적 自然觀’이었다. 산도 하늘도 구름도 물도 숲도 풀도 돌도 바람도 추움도 다 신비한 그 내명을 내게 열어 보여 주고 속삭였다. 이러한 황홀경은 한참 동안 지속했었고 나는 한국신학대학 시절과 그리고 연세대학교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틸릭히의 哲學的 神學을 강의했다. 틸릭히를 통해서 나는 융(Carl Jung)의 心理學을 연구하기 시작해서 한때는 그의 저작들을 거의 읽었다. 본 논문집(轉換時代의 神學)에 실린 ‘聖靈’과 ‘人間’의 항목에 넣은 것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사상적 무드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나는 또 틸릭히에게서 ‘역사의 신학’을 배우고 특히 그를 통해서 12세기의 요아킴 플로리스의 ‘성렬의 제3시대’를 배웠는데 본 논문집에 시종 가장 많이 그 얼굴을 내보이는 신학자는 요킴임을 발견하고 나 자신도 놀라웁게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틸릭히는 내 속에 生來的으로 깃들인 物活論, 汎神論을 觸發시켰는지도 모르겠다(내가 ‘역사의 신학’을 배운 것은 틸릭히에게만이 아니고 또 그에게 처음으로 배운 것도 아니라는 점도 밝혀 두어야 하겠다).

그는 1952년 당시 한국신학대학의 학장으로 있던 장공 김재준의 초청으로 서울에 있는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오게 된다. 당시로 말하자면 성서연구에서 장공 김재준의 비판학의 사용이 문제가 되어서 장로교 총회가 그를 신학교에서 추방하려는 운동이 한참 전개되던 때이다. 성서비판학을 통한 새로운 성서해석을 문제삼고 일어난 이들은 주로 박형룡을 비롯해서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남하한 인사들로서 사실상 교권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서남동이 한국신학대학으로 오기로 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인 신학적 경향을 고려한다면 그의 결단의 길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신학대학에서 3년 정도 가르친 다음 가나다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가나다로 유학을 떠난다. 그가 가나다에 유학하고 있는 동안 주로 신약성서 학자 다드(C.H. Dodd)와 불트만(Rudolf Bultmann)의 글들을 탐독했었다. 그는 거기서도 러시아 정교의 종교철학자 베르쟈에프와 종교학자 엘리아데 등의 글을 읽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독서영역에 들어온 학자들은 그가 깊이 관심하고 있던 “종교와 역사 그리고 종말론”이라는 영역을 맴돌고 있다. 그는 다드나 불트만 등 신약학자들의 글 가운데 주로 역사와 종말론과 연관된 부분들을 집중해서 검토했었다. 그리고 베르쟈에프나 엘리아데의 글들도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읽었었다. 이렇게 볼 때 그때까지 서남동의 사상은 종교와 역사 그리고 종말론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맴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역사가 그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것이 가진 현실성이 아직 한국교회와 한국의 역사와는 구체적으로 체현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이러한 문제들을 그의 ‘철학적 신학’의 틀에서만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공이 당시 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 종교재판을 받고 있었지만 그를 옹호하는 글이 서남동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어느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쓰여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장공은 정치적 동지들은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신학적 동지들은 적었던 것 같다. 그는 이론적 투쟁에서는 고독한 싸움을 했었다.

그가 역사와 종말론의 문제를 역사적 현실과 보다 더 밀접하게 관련시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와의 만남에서부터였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충격다운 충격은 1964년에야 비로소 읽은 본회퍼의 옥중서신이다“라고 서남동은 고백한다. 이러한 본회퍼의 신학과 만남에서 파생되는 신학적 파도의 소용돌이가 그의 삶과 사상에서 약 10년 동안 지속되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1964년 토착화신학, 1965년에 세속화론, 1966년에 신 죽음의 신학, 1968년 희망의 신학 등의 탐구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 그는 서구의 새로운 신학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소개함으로써 이른바 ”신학적 안테나“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그는 본회퍼의 미국적 해석들인 세속화론과 신죽음의 신학에 매몰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역사의 현장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가 1968년도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라는 정치신학에 접하고서도 여전히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침착한 마음으로 한국의 신학계를 등지고 서재에서 현대의 과학기술문명과 더불어 신학적 싸움을 했다. 떼이야르의 진화론, 과정신학, 과학과 종교의 종합 등을 시도하는 자이곤(Zygon)지의 과학종교, 생태학, 반문화, 생명과학 등에서 나는 신학적인 충격을 받고 전율하면서 거기에 몰두했다."
 
2. 서남동의 후기 신학사상
 
1) 서남동의 역사이해
서남동의 신학사상의 발전에 대해서는 생애와 신학연구기를 다룬 ‘서론적 고찰’ 부분에서 이미 간략하게 언급한바 있다. 여기서는 그가 ‘민중신학자’로서 場外神學(The Theology of Outsider)을 하기 이전 시절 즉 1952년부터 1975년까지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 등에서 가르치던 ‘場內 신학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국한해서 그의 관심의 轉移와 사상의 발전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인 역사 이해, 그리스도 이해, 그리고 세속화론에 국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자연과학과 생태학 등에 대한 서남동의 연구는 서구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어 있고 그 이해도 미숙하며 동시에 그 주제들은 윤리적 문제이기 때문에 “서남동의 윤리”를 다룰 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내 신학자로서 서남동이 일차적으로 관심했던 문제는 “역사”의 문제였다. 그는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주로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들을 쓰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58년에 ‘基督敎 思想’誌 강좌에 쓴 “그리스도교 歷史觀”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역사구분과 역사해석의 다양한 모델들을 소개하면서 12세기의 요아킴(Joachim von Hiore)의 3세대론, 특히 종말론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콩트의 역사발전의 과정 즉 신화시대, 형이상학 시대, 실증주 등의 3세대론과 마르크스의 계급론적 연사발전 법칙 즉 제1계급인 제왕들과 귀족 및 승려계급 다음으로 제2계급인 부루좌 계급을 넘어서 제3계급인 프로레타리아의 계급의 등장을 소개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역사의 종말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확증하는 것으로 서남동은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남동은 그의 논문의 결론부에서 이렇게 자기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지금까지 고찰한 여러 가지 방식의 시대 구분은 결국 두 시대 구분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적 표현으로 말하면 이 시대(this age)와 오는 시대(the age to come)의 두 시대의 관계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는 종말론으로 이끌려 가게 됨을 알게 된다. 7로 구분하거나 3으로 구분하거나 문제의 초점은 최종의 전환기인 Crisis요, 따라서 그것과 각자의 ”지금“과의 관계다. 말하자면 각자는 자기 시대의 뜻을 찾자는 것이요, 결국 역사관이란 실존적 자기이해다.” 서남동은 이러한 종말론 앞에서 각자는 자기시대의 뜻을 따라서 결단해야 함으로 기독교 역사관은 결국 “실존론적”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남동이 역사를 “실존론적”으로 본다고 해서 그가 불트만식으로 종말론을 인간의 순산 순간의 개인적 결단으로 축소시켜서 파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가 이해한 역사는 세계적 차원이며 그가 생각했던 종말론은 개인의 종말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지향하는 종말론적 역사 과정에서 개인들은 자기가 속한 역사적 현실에서 결단하는 것이다.

서남동은 1959년도에 쓴 “歷史와 終末論”에서 본격적으로 그의 역사문제를 다룬다. 그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토인비에 이르기까지 종말의식이 역사의 과정에서 점차 해소되어 간다고 보고 불트만의 생각을 중심으로 해서 구속사의 종말, 종말론의 역사화, 역사의 자연화를 중심으로 고찰한다. 그것은 특히 바울 신학에서 종말신앙은 인간학적으로 이해되고, 요한 신학에서는 종말신앙은 영적으로 초월적으로 해석되며, 초대교회에서는 그것이 예전화 됨으로써 그렇기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쿨만(Oscar Cullmann)으로 대변되는 구속사적 종말론에서는 계약의 개념과 대리의 개념의 두 축을 중심으로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하나님은 처음 이스라엘을 택하고 그 다음으로 남은 자를 택하시며 그 남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택한다. 이것이 옛 계약의 역사 전반부다. 그리고 나서 이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를 택하고 사도들은 교회를 대표하고 다시 인류를 대표한다. 이것이 새 계약이다. 여기서 역사의 중심은 그리스도요 그 목표는 그가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다.

이러한 종말론은 로마 천주교회의 시대에 들어와서 국가종교가 되고 하나의 정치세력화 됨으로써 과거의 종말론적 기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종말론적 시간인 카이로스는 점차 크로노스로 바뀐다. 이러한 사상은 근대에 와서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의 진보적 사관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서 종말론은 역사에로 흡수 내지는 해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서 토인비 같은 학자는 역사의 진로가 종교에서 문명으로 나가는 것을 반대하고 오히려 문명에서 종교로 나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서남동은 또 1959년도에 쓴 “실존주의적 역사해석”이란 글에서 다시 한번 역사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야스퍼스, 불트만 등의 실존주의적 역사관을 소개한 다음에 이러한 실존주의적 역사해석을 넘어서야 할 세 가지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역사적 사건과 그것의 해석자로서 역사가 사이에는 재연과정을 통해서 거기에 참여하고 역사적 지식을 얻는다. 따라서 예수의 구속사적 사건 역시 이러한 인간의 재연과정을 통해서 실존적으로 나의 사건으로 나타난다. 둘째,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역사의 전체성에서만 이해되고 그 궁극적 의미를 갖게 된다. 셋째, 인간존재의 본질을 意志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신의 미래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역사가 완성을 향해서 나아간다. 여기서 서남동이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실존주의의 역사관을 넘어서서 실존에 선행하는 본질의 문제를 종말론적 차원에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50년 대말 60년대 초 서남동의 주된 관심사는 “역사와 종말론”이었지만 그는 몇 편의 글들에서 주로 서양신학자들을 소개하는 것 이상 뭔가 자기의 새로운 입장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서남동의 역사와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1975년에 쓴 논문 “성령의 제3세대”라는 글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되고 있고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그 글에서 1부에서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인 핸슨(R.P.C. Hanson)의 책 “성령의 신격”(The Divinity of the Holy Spirit, 1969)을 통해서 교회사적으로 성령이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를 밝힌다. 그리고 나서 그는 2부에서 어거스틴의 역사관과 비교해서 “요아킴의 역사신학”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리고 나서 결론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아킴은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역사를 구분했다. 틸릭히 등은 가톨릭 교회, 프로테스탄드 교회, ‘민중의 교회’식으로 시대구분을 했다.... 전통적 기독교의 2시대 구분이 지금에 와서는 상실한 위기의식을 이들은 3시대 구분을 통해서 회복하려고 한다.” 그는 결론에서 이상일, 이기백, 함석헌, 조기준 등의 글들을 인용하여 지금은 성령의 시대며 이 성령의 시대는 곧 민중의 시대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러한 오랜 기간 역사와 종말론의 문제를 놓고 씨름했고 그것을 위해서 서남동은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서남동은 오랜 연구와 방랑을 거쳐서 성령론적 역사이해에 도달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민중신학이라고 하는 한국적 정치신학의 길로 나아가는 발판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2) 서남동의 그리스도이해
역사문제 다음으로 서남동이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그리스도 이해의 문제였다. 그는 1967년에 발표한 “現在的 그리스도”란 논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재성 즉 그리스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서남동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현재성은 설교, 성서, 교회에서 찾던 전통적 그리스도 이해에 대비해서 현대신학에서는 케리그마적 그리스도, 세속적 그리스도, 우주적 그리스도로 구분해서 논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 내용을 상세히 취급하고 있다. 그 점에서 서남동은 전통적 신학에서와 같이 교리체제에 유폐된 그리스도, 과거의 그리스도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알파와 오메가로서의 그리스도는 또한 장래의 개인적 실존, 세계역사와 우주적 진화의 주님도 되신다”는 칼 브라텐(Carl E. Braaten)의 말에 자신도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개인의 역사와 세계역사 그리고 우주적 진화의 주님도 되신 그리스도가 현재적 그리스도라면 신학자들은 자기의 학문적 지평을 확대하여 그를 초청하는 다방면의 학문과 대화할 것을 서남동은 요청한다. 역사의 문제, 자연과학의 문제 등 현실적 문제와 대화할 때 비로소 신학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현재적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이해를 보다 구체화한 글은 서남동이 1972년도 기독자 교수협의회에서 행한 강연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지난 2천년 교회사에 나타난 예수의 초상화를 다음 여섯 가지로 요약해서 열거한다. 첫째 비잔틴 교회의 피안과 영원의 상징으로서 교회의 유리창에 그려진 예수, 둘째 서방기독교 즉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류관과 왕의 홀을 든 권력과 교권의 상징으로서 예수, 셋째 개신교 정통주의나 경건주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길을 올라가는 수난의 그리스도, 넷째 어린양을 가슴에 안고 양떼를 이끌고 있는 목자, 즉 근대 부루좌적 기독교의 예수 상, 다섯째 앞치마를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싣기는 “타자를 위한 예수”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상”, 마지막으로 1년도 채 안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입성하는 ‘어릿광대’ 예수 상이다.

서남동은 다섯 번째의 예수상 즉 본회퍼가 주장했던 ‘타자를 위한 예수’가 오늘날의 예수 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는 여섯 번째 나귀를 타고 오는 어릿광대형의 예수 상 즉 샘킨의 예수 상을 미래의 예수 상으로 받아들인다. 예수의 미래상을 이러한 어릿광대로 본 것은 지난 300여 년간 이성에 기초한 이분법적 문화를 극복하고 통전적 문화를 되찾으려는 문화에서 어릿광대의 상을 한 예수가 그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남동은 오늘날의 문화 즉 모더니즘적 문화의 이분법의 극복을 제창하면서 이러한 이분법적 문화를 가리켜, 1) 정신과 물질의 문열 2)지성과 직관의 분열, 3) 인간과 자연의 분열, 4)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로적인 것이 분열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으로서 서남동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의 어릿광대역을 생각하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숙청하였다. 즉 교회를 갱신했다. 그리고 그는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예수가 어릿광대로서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은 예루살렘의 교권주의자들, 교조주의자들 앞에서 그들을 대하는 유일한 수단이 마로 그것이었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문명, 사회, 교회라고 하는 예루살렘에 나타난 청년문화, 반문화의 기수들도 어릿광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도 예수의 모습을 닮으려고 한다. 이 어릿광대의 예수 상이 오늘날도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도덕적 표준과 종교적 신념과 국민적 염원과 교육적 이상을 심판한다.”

서남동은 샘킨 등의 반문화 신학, 축제의 신학 등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운 예수 상, 즉 미래적 예수 상을 모색하는 길에 동참하려 했었다. 이러한 반문화 혹은 통전적 문화를 그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에 대한 상세한 해석은 시도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의 새로운 예수 상 연구는 하나의 유행처럼 지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장 본격적 그리스도 이해는 1973년도에 발표한 논문 “한국 교회의 십자가 이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신학적 주제를 한국신학 혹은 한국교회라고 하는 구체적 상황의 틀 안에서 해석한 최초의 논문이다. 그는 한국장로교회의 가장 보수적인 잡지를 대표한 神學指南, 감리교회의 대표적 잡지였던 神學世界, 장공 김재준에 의해서 발간되던 十字軍등을 중심으로 해서 몇몇 다른 잡지들과 저서들에 나타난 대표적인 세 신학자들의 십자가 이해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십자가 이해의 세 가지 유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약술하고 있다. “첫째 類型은 神學指南의 版圖로서 朴亨龍 박사의 主導한바며 예수교 장로교회의 保守的 傳統이다. 그것은 刑罰代償說 곧 客觀說이라는 것이다. 둘째 類型은 李龍道 목사의 신앙유형으로서 十字架의 苦難을 통한 聖化新生을 말하는 主觀說이라고 말할 수 있다. 監理敎會의 傳統이 뚜렷하게 퐁기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셋째는 金在俊 박사의 주도하는 ‘十字軍’ 및 ‘第3日’誌의 版圖로서 十字架를 現實과 行動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基督敎 長老敎會의 進步的 立場이라 할 수 있다.” 서남동에 의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형벌대상설 즉 객관설이며 따라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즉 그의 피흘림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 이해는 어느 면에서는 잔인하리 만치 십자가에 달린 분의 피를 내 구원을 위한 속죄의 제사로 생각할 뿐 거기에 대한 이용도식의 연민이나 스스로의 동참은 고려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객관설은 장공의 십자가 이해 즉 역사적 현실과 거기에 대한 참여로서의 행동의 주관적 이해와는 무관한 것이다. 본회퍼가 걱정했듯이 루터나 칼빈 전통에서의 과도하게 해석된 객관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흘림의 은혜를 전혀 “값싼 은혜”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남동은 실상 이러한 세 유형의 십자가 해석을 소개한 다음에 매우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성부수난설(pater passus est=Patripassionism)이다.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이유를 서남동은 다음과 같은 좀 긴 인용에서 밝히고 있다. “현대신학에서 이러한 사상(성부수난설)이 새롭게 주목을 끌고 있다. 서방 기독교의 전통적인 神義論에서는 善과 惡이 지나치게 대립되고 自然界의 고난과 죽음을 創造안에 있는 異質的인 것, 나아가서는 그 實在가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고난과 죽음이 除去된 것이 幸福이요 救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지성의 새로운 지평에서는 고난과 죽음은 창조의 構造的 要因이고, 구원을 이루는데 不可缺한 要件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고난과 죽음, 곧 十字架는 창조와 진화에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다. 십자가는 창조의 진행이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진행되어 가서 事後에 취하게 된 신의 응급처방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宇宙論으로 이해하려는 것이고, 구속을 위한 신 자신의 고난을 말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서남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창조로부터 종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전체 역사경륜과 그것을 위한 하나님의 고통과 수난으로 이해한다. 그는 전통적 신학에서 십자가 사건을 오직 인간구원의 차원에서만 해석하는 것을 뛰어넘어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 즉 자연 나아가서 우주 전체의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 수난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영역을 넘어서 하나님의 수난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서남동의 성부수난설적 십자가 이해는 당시 그가 심취해 있던 샤르뎅의 “우주적 환경”(the cosmic Miliu)이라고 하는 지평과 함께 종교다원주의의 지평에서 파악할 수 있겠다. 이러한 수난사를 창조와 결합시킨 것은 물론 그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한국교회의 과도하게 협소화 되고 인간구원에만 국한시키는 십자가 이해의 객관설을 극복하자는 것에서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의 의미는 그의 민중신학과 생태학적 신학에서 보다 구체적 역사적이고 우주적 지평을 취한다.
 
3) 서남동의 세속화론 이해
서남동의 세속화론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1960년대 중반 유럽 특히 미국 등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본회퍼의 사상에 대한 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래서 서난동도 1965년도에 쓴 그의 논문 “福音의 傳達과 그 世俗的 解釋”에서 주로 오늘날의 상황의 변화과정들과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에 나타난 기독교의 세속적 해석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서남동은 오늘날의 세속화 상황 혹은 인류의 정신의 진보단계들을 주로 사회학자 꽁트(August Conte)의 이론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다. 꽁트에 의하면 인류의 정신적 진보단계는, 1)신학적(혹은 신화적) 단계 2)형이상학적 단계, 3) 실증과학적 단계를 거쳐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와서는 신학적 혹은 신화적 세계관이나 형이상학적 세계이해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세속화된 세계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서의 메시지를 세속적으로 해석하고 기독교를 비종교적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본회퍼가 말하는 이 세속화된 세계는 어떤 것이며 복음을 세속적으로 해석하고, 기독교를 비종교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본회퍼는 이 세계를 “成熟한 世界”(die mündige Welt)로 정의하고 있다. 성숙한 세계의 특징은 그에 의하면 무신의 세계 즉 인간 이성의 자율의 세계를 말한다. 무신의 세계라고 할 때 인간의 모든 삶과 역사를 주관하는 전통적 신은 죽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限界狀況(die Grenzesituation)에서 자기를 계시하여 도움을 준다던 복덕방망이로서의 신(Deus ex machina)도 필요 없고, 인간의 作業假說(Arbeitshypotase)의 신도 더 이상 요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들은 성숙해서 성서의 하나님도 앞서 언급한 신들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고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남동에 의하면 이러한 본회퍼의 주장을 “이성의 자율의 시대는 왔다. 실용적 가설로서의 신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성경의 신이 인간을 성숙시켰다”라는 논제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숙한 세계에서 종교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본회퍼가 제시하고 있는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이란 어떤 것인가? 본회퍼는 우선 인간에게 선험적 종교성(a priori)을 거부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칼 바르트 식의 계시신학 중심의 “계시실증주의”(Offenbarungspositivismus)도 비판하고 나선다.

우선 본회퍼는 종교를 “구원의 신화”로 규정해서 그것은 기독교와는 대립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흔히 종교에서 구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염려와 공포, 궁핍과 소원,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인데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사후에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종교가 사후의 피안에 대한 동경이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본회퍼는 종교의 차안성(Diesseitigkeit)를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종교(기독교)의 실존주의적 해석에서 제시되고 있는 “한계상황에서의 의존”도 거부한다. 그는 기독교의 메시지는 이러한 삶의 한계상황, 말하자면 인간의 삶 가운데서 맞이하게 되는 위기상황, 일상생활 밖에 변두리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지 않고 삶의 한가운데(In-der-Mitte-des Lebens), 즉 일상생활 그 자체를 문제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일상생활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며 일상생활에서 밀려난 사람들 즉 노인들, 사회적 약자들의 위안물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그는 강력하게 거부하고 나선다. 오늘날 대체로 서구에서는 기독교는 이러한 삶에서 밀려난 변두리 인생들을 돌보는 것이 종교의 과제로 되어 있다. 멀쩡한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본회퍼는 고민했다. 그래서 본회퍼는 그의 “윤리학”에서 “기독교가 주변실존들(Randexistenzen)을 위한 종교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세속화된 세계, 본회퍼의 개념을 빌리자면 “성숙한 세계”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서남동에 의하면, 아니 본회퍼에 의하면 이러한 성숙한 세계에서는 성서가 말하는 신의 로고스, 독생자라는 개념이나 고대교회가 그리스의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특히 형상과 질료)을 통한 그리스도 규정 즉 “그리스도는 참 신이며 참 인간”이라는 교리적 도식은 현대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오늘날의 언어,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회퍼의 도식에 따르면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 가운데서 만날 수 있고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해서 살았던 인간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Für-andere-da-sein)이다. 신앙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교회론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타자를 위한 인간들의 집단이다. 윤리는 타자를 위한 존재인 그리스도를 따라서 사는 것, 제자직(Nachfolge)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회퍼는 세속화론을 통해서 초대교회서부터 견지되어 왔던 모든 신학적 개념들을 ”형이상학적 이해“의 속박과 굴레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속화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본회퍼가 성서와 기독교 신앙을 세속적 해석을 통해서 새롭게 제시하는 동기를 서남동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본회퍼가 시도한 성서의 세속적 해석은 제자로서의 복종, 새 인간의 탄생이라고 하는 事件發生을 말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신의 존재는 신의 행동(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고, 복음전달은 그 사건의 재발생 - 이웃을 위한 봉사라고 하는 것이 본회퍼의 기독교 신앙이다.”

그러나 서남동은 본회퍼가 거부했던 종교적 아프리오리와 실존적 한계상황을 “율법과 복음, 질문과 응답”등의 도식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서남동은 영국신학의 전통이나 부룬너 혹은 파울 틸릭히의 자연관에 근거해서 자연신학을 보다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3. 서남동의 후기신학사상: 민중신학자로서 서남동
 
1). 민중신학의 胎動과 誕生
서남동은 한국의 민중신학의 창설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대표적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그 동안 서구에서 논의되던 성서신학과 교회사 그리고 조직신학으로 무장된 지식을 기초로 해서 민중신학을 탐구함으로써 한국이라는 현실, 특히 민중적 현실을 해석해 내는데 그 지식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사실상 그가 서구신학에서도 진보적 흐름 내지는 이단적 신학운동에 서서 신학을 연구한 결과가 필연적으로 민중신학을 잉태해 내는 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죽제가 창시자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는 이 “민중신학”을 간략하게 소개해 보자.
이 민중신학의 태동시기는 언제였는가? 필자는 ‘민중신학’이 태
동하게 된 시점을 대략 1970년대 초 좀더 정확히 말해서 1972-74년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민청학련 사건(1972년), 유신헌법(1974년)등을 통해서 그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서남동, 안병무, 문동환, 현영학 등이 향린교회에 자리잡고 있던 신학연구소에서 정기적으로 모여서 독서회를 가졌었는데, 필자도 당시 신학연구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서남동이 주로 읽어온 책들의 내용을 발표하곤 했다. 지금 필자가 기억하는 것으로서는 프랑스의 신약학자 카살리스의 책과 당시 創批그럽들의 글들을 읽고 발표했다. 필자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서남동이 한번은 천승세의 중편소설 “落月島”를 일고 발표한 일이 있다. 그후 필자도 그 책들을 직접 사서 직접 읽어본 일이 있다. 이 책은 한 적은 섬에서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의 갈등을 다룬 것으로서 당시 우리 사회상을 비유해서 잘 묘사한 것이었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서남동은 신동엽의 장시 “금강”등을 읽고 같이 토론했었다. 이러한 독서회를 통해서 후에 민중신학자들로 알려진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방향을 민중지향적인 곳으로 정초해 나갔던 것이다. 물론 이 모임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생각을 이끌어갔던 이는 안병무와 서남동이다.

그러나 서남동이 보다 본격적으로 그의 눈을 한국으로 돌리게 된 계기가 발생한다. 죽제는 1974년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수도 다레살람(Dar es Salaam)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위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이 주관하는 세미나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당시 거기서 성서연구를 맡았던 한스 베버(Hans R. Weber)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소개하고 또 김지하의 시 등을 소개하면서 성서연구를 진행해 나갔다. 성서연구가 끝나고 나서 참석자들은 서남동에게 한국의 현실, 특히 시인 김지하의 근항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했으나 그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우리 나라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 별로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서제에서” 서구 신학소개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깊은 자괴와 수치감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민중신학자들이 모인 독서회에서 토로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충격이 서남동으로 하여금 한국적 현실 특히 민중적 현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했으며 특히 시인 김지하를 신학적 논의의 파트너로 삼게 만들었다.
 
그런데 서남동에 의하면 이렇게 잉태된 민중신학적 사상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공적으로 탄생한 해는 1975년이라는 것이다. 1975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퇴수회에서 한 “예수와 民衆”이란 강연이 민중신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시점이라고 본다. 이러한 제목의 서남동의 강의는 수 차례 진행되다가 좀더 발전되어 “예수. 敎會史. 韓國敎會”라는 비교적 긴 글로 정리되어 ‘기독교 사상’ 1975년 2월 호에 실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같다. “예수는 민중과 자기를 동일화했고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며 소외된 민중을 해방한다는 것, 그런데 그 후 교회사에 있어서 제도적 교회는 그 민중을 저버렸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복음이 다시 민중의 종교로 될 수 있는 지평이 열렸다는 것, 그리고 한국교회는 민중의 소리를 듣고 대변해야 하며 또 대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金炯孝가 ‘文學思想’誌 4월 호에 “昏迷한 時代의 眞理에 대하여”란 글을 통해서 서남동을 비판하고 나선다. 그에 의하면 “민중개념이란 전혀 실질적 내용이 없는 추상적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서남동으로 하여금 “민중”문제를 보다 철저하게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김형효의 글은 태어나서 생동하고 있는 “민중”이라는 얘기를 내용이 없는 추상이라고 자극함으로써 민중신학의 어머니였던 서남동으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했다는 점에서 어느 면에서 김형효도 민중신학 발전에 거꾸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서남동은 “‘民衆’神學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답하는데 사실상 민중이란 개념에다 신학이란 말을 붙여서 하나의 神學運動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죽제는 여기서 “민중”이 추상적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실체일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사회의 변혁의 주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투쟁하던 집단들 예를 들면 학생들, 노동자들, 개신교 교수단들. 문인들, 가톨릭의 젊은 사제들로 구성된 정의구현사제단 등이 이러한 실체들이며 따라서 그 개념은 그들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민중”이라는 개념들은 대체로 선언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서남동에게 민중이라는 개념을 보다 내용을 담아서 소개해 준 이들은 무엇보다도 시인 김지하와 당시 “창작과 비평”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이다. 당시 김지하가 발표했던 “오적”등의 담시들과 주로 창작과 비평지에 실렸던 학자들과 문인들의 글을 통해서 서남동은 “민중”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서남동이 말하고 있는 민중은 누구들인가를 통해서 그들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밝히려고 한다. 그는 “민중신학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그해 3월 10일에 발표된 가톨릭 정의구현 사제단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 실체를 밝히고 있다. 그 선언문을 여기에 소개해 본다. “농민과 어민, 근로자, 실업자, 병사와 순경, 봉급생활자, 영세상인, 중소사업자 등을 포함하는 절대 다수의 민중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모멸과 문화적 소외 속에 신음하고 있다.....민중이 주체로서 참여하는 민주주의로서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건설될 수 있다.... 민생운동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민중의 조직확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민중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할 것이며, 민중의 눈물의 기록인 권리침해와 핍박은 우리의 교회에서 고발될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민중신학의 논의에서 서남동은 잠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죽재는 이른바 ‘명동사건’ 즉 긴급조치 위반으로 1976년 3월1일 체포되어 1977년 12월 31일 석방되기까지 약 22개월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석방되어 1979년 2월 기장 선교교육원장에 취임하고 나서도 민중신학에 대해서는 거의 1년 동안 손을 대지 못한다. 그는 1979년 봄에 들어 와서야 “두 이야기의 合流”라는 비교적 긴 글을 ‘신학사상’에 발표하면서 민중신학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된다. 이 글은 민중신학의 방법론을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민중의 실체를 밝히려고 한다. 그는 이 글에서 김지하의 글에 따라서 민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을 인용해 보자. “민중은 하느님과 땅의 계약의 상대(partner)이며, 창조와 역사에 있어서 하느님의 공의 회복의 담지자(bearer) 내지 작인(agent)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앞서 정의구현 사제단에 따른 민중의 정의보다 보다 더 좀더 신학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는 구약성서의 계약의 개념을 채택하여 민중은 하나님의 일차적 계약의 상대며 동시에 파괴된 계약관계의 회복자 즉 정의를 이루어 가는 계약의 담지자로 본다.

서남동은 1980년 송기득과의 대화에서 민중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서구의 사회과학적 역사발전 단계론에 근거해서 역사는 왕족의 시대로부터 시민의 시대를 거쳐서 민중의 시대로 발전해 간다는 역사인식을 통해서 오늘날은 바로 민중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중을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프로레타리아와 구별하고 있다. 우선 프로레타리아는 산업사회를 전제로 하고 산업노동자들을 말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이란 개념은 보다 그 폭이 넓어지게 된다. 그리고 일반 민중론자들처럼 민중을 물질적 생산관계에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이 계약의 파트너로 삼았던 모든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이들을 민중으로 보려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약의 상대자면서 담지자로서의 민중을 지시하는 성서적 전거를 그는 성서의 주요 텍스트들에서 본다. 첫째 전거는 희브리 민중(그들은 민족이 아니었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낸 것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출애굽기와 그 다음으로는 이 출애굽과 예언자의 전통을 이어서 민중을 편들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민중신학의 중심적 전거로 보고 있다. 이러한 전거 특히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전거로서 다룸에 있어서 서남동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성서적 전거의 사용에서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민중신학의 전거로서 출애굽사건이나 십자가 사건을 다룰 때 거기에서 중심적 주제는 민중이지 성서적 전거들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주제는 예수라기 보다는 민중이라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경우에는 예수가 민중을 바로 알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도구의 구실을 하는 것이지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의 구실을 민중개념이 하는 것이 아니다(후자가 전통적.기독론적 신학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성령론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 다음으로 서남동은 민중신학의 교회사적 전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초대교회에서 희브리의 종말론적 전통에서 벗어난 탈역사화된 형이상학적 전통으로부터 중세교회(엄격하게 말해서 BC. 313년부터) 묵시문학적인 지평을 상실하고 지배자의 도구가 된 정치화된 기독교 1000년을 거쳐서 종교개혁 이후에 부루좌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와 그 세력의 지원자로 변질된 교회와 신학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초대교회의 묵시문학적 종말론 사상을 담지해 오고 있던 12세기의 요아킴(Joachim)의 “성령신학”과 종교개혁 당시의 토마스 뮌쳐의 혁명신학 그리고 오늘날의 진보적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적 실천적 방향을 민중신학의 교회사적 전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한국의 진보적인 역사가들, 이기백과 강만길의 역사관에 나타난 “민중운동사적 전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역사학자들의 입장을 서남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위의 역사발전을 세 단계로 요약하자면 첫째, 오랜 기간 동안 민중은 지배세력의 지배대상이 되었을 뿐이라는 것, 둘째 반항을 통하여 민중은 자신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역사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려고 하였다는 것, 셋째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민중은 한 걸음씩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길을 닦아가고 있다는 것이다(천관우씨의 주장)”.
 
서남동은 이러한 성서와 교회사 그리고 한국의 민중전통들의 내용과 성격을 소개한 다음 “한국 민중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이 현재 한국교회의 ‘신의 선교’ 활동에서 합류하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서남동은 “合流”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성서나 교회사의 민중전통이 단순히 한국의 민중전통에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차원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사건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이 합류라는 방법론적 개념에서 서남동은 과거의 사건, 출애굽 사건이나 십자가의 사건이 우선하지 않고 현재의 사건 즉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우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과거의 출애굽사건과 십자가 사건에서 오늘날의 민중사건을 보고 해석하는 데서 합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민중사건을 출애굽 사건과 십자가 사건을 참고로 해서 해석하는 데서 합류가 가능하다. 그는 전자를 ‘기독론적.통시적 해석’(christological-diachronic interpretation)이라고 말하고 후자를 ‘성령론적.공시적 해석’(pneumatological-synchronic interpretation)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성령론적 해석학적 방법은 전통적으로 과거의 사건에 비추어서 현재의 사건을 해석하던 기독론적 해석방법과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서남동은 신중심의 종교다원주의를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성령중심의 역동적 자연신학 내지는 범신론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서남동의 새로운 해석학적 방법은 필연적으로 두 개의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첫째는 전통적 해석학에서 성서를 텍스트(Text)로 삼고 상황을 컨텍스트(Kontext)로 삼던 방식을 그는 역전시키는 것이다. 서남동의 성서해석학에서는 텍스트가 오늘날의 역사적 현실이고 컨텍스트가 성서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교과서가 현실적 상황이고 성서는 그것을 해석하는데 참고서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서를 지금의 참고서로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과거의 사건이 그대로 지금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지금 하느님의 뜻에 맞게 결단하려 할 때 모세는 어떻게 결단했고, 바울은 어떻게 결단했는가를 ‘참고’로 보자는 것입니다. 성령이란 항상 내재적이고 지금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거든요. 지금의 성령감동은 부차적이고 바울의 성령강림은 원초적이라면 하느님은 과거의 하느님이지, 지금의 하느님은 못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살아 계신 하느님입니다.”

이러한 성령론적 해석학의 추상성 내지는 비과학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남동은 성서해석에서 “사회경제사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방법은 물론 그의 독창적 방법은 아니며 서구의 진보적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방법이다. 그러나 서남동은 성서의 민중전통과 연관된 사건들 아니 엄격한 의미에서 성서 전체의 내용이 사회경제사적 틀 안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경제사적 방법이 아니고서는 해석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남동의 신념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프랑스의 성서학자 카살리스였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그의 생각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민중 메시야론이다. 민중의 현실을 텍스트로 보고 성서를 그것을 해석하는 참고서(Reference) 즉 컨텍스트로 보려는 서남동의 입장은 그후 민중신학을 둘로싸고 논쟁을 유발했던 ‘민중 메시야’론으로까지 나갔다. 그는 일본 신학자 다가와의 마가복음 주석을 참고해서 민중신학의 주체가 예수가 아니고 민중이라고 단언했다. 이 경우 예수는 민중이해를 위한 방편 즉 민중이 주체가 되고 예수는 객체로 이해된다. 동시에 구원론에 있어서 예수에 의한 타력구원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가 구원하는 이른바 自力救援論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십자가 이해와 관련된 형벌대상론을 무력화하는 행동주의적 주관론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남동은 “예수는 민중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오늘날의 구원은 ‘민중의 각성’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출애굽 사건의 모세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차이점을 말하면서 그의 입장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출애굽의 경우는 일회적 혁명인데 반해서 십자가 사건의 경우는 영구적 혁명을 겨냥한 둣 하다. 일회적 혁명의 경우에는 민중이 구원의 對象이 되고(타력적 구원), 영구적 혁명의 경우는 민중은 구원의 주체가 된다(자력적 구원). 모세는 민중의 소리(갈망)에 응답했지만 예수는 그 자신이 민중의 소리(갈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민중적이었고(민중을 위한 자가 아니었다), 바로 민중의 인격화, 민중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민중 메시야론 혹은 민중의 자력구원론 내지 신인협동설적 단초들은 가톨릭과 성공회 계통의 자연신학 혹은 범신론적 신학에 대한 서남동의 호의적 입장들에서도 이미 여러차례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가 존경했던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값싼 은혜”에 대한 고발에 동의하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 동안 개신교 특히 개혁교(장로교) 전통에서는 가톨릭의 “공로사상”에 기초한 면죄부 이론 등에 반대하기 위해서 강조되었던 루터의 “은총만”(sola fidei)이란 가르침을 과도하게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헐값에 팔아넘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서남동의 “한국 교회의 십자가 이해”를 다룰 때 소위 “형벌대상설” 아니 객관설에 대한 비판에서도 그와 같은 신학적 입장에 대한 단초를 보았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지나친 형벌대상설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강조하는 매우 이기주의적 신앙형태로 그리스도인들을 몰아가는 것이다.
 
4. 서남동의 윤리사상
1960년대 초반 서남동의 주된 관심 주로 역사와 종말론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는 이러한 신학적 주제를 윤리적 현실과 결합시키지 못했었다. 그는 이런 주제들을 통해 서구신학자들의 논의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그가 1960년대 중반부터 다루었던 “세속화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세속화론의 논의에서 그의 관심은 기껏해야 선교론을 맴돌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초기관심들에서 그 자신의 사상을 도출해 내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서남동은 1969년부터 1974년 사이에는 주로 과학과 생태학의 문제에 집중했었다. 그는 “신학은 언제나 그 시대의 언어를 매체로 해서 재해석하는 작업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이 시기에 그는 한국적 현실이 빚어내는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의 언어로 신학을 말하지 않고, 여전히 “신 죽음의 신학”, “희망의 신학”, “세속화 신학”등 서구신학의 물결에 떠밀리면서 이전의 실존주의적 관심에서부터 과학과 생태학의 관심으로 조심스럽게 넘어가고 있었다.
 
1) 과학기술의 인간화의 윤리
서남동은 1970-72년 사이에 과학기술에 대하여 3개의 논문들을 쓴다. 그는 “現代의 科學技術과 基督敎”라는 글에서 그 동안 “세속화론”에서 논의되었던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의 관계들을 해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비 콕스의 세속화이론에서 기독교 신앙의 탈미신화, 탈형이상학화 과정에서 기독교가 과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이론과 함께 과학이 신을 대치하고 신의 죽음을 선포하게 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화이트헤트의 신의 “진화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서남동이 과학기술 문제를 “윤리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글은 1970년도 기독교 사상에 발표한 “새 技術科學의 人間化”이다. 이 글에서는 허만 칸(Hermann Kahn), 안토니 위너(Anthony J. Wiener)의 사이버네틱스의 벌전 과정을 주로 소개하고, 테일러(G. Rattray Taylor)의 유전공학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동시에 이러한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비인간화의 실례들을 허만 칸과 안토니 비너 등의 이을 들어서 소개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신학자며 과학자인 엘룰(Jacgues Elull)의 비판도 같이 소개한다. 엘룰에 의하면 오늘날의 급속한 과학기술의 벌전이 가져다주는 비인간화의 예를 1) 물신숭배, 2) 인간의 통제기술의 확대 3) 과학기술의 윤리적 방향감각의 상실 등을 소개하고 있다.

서남동은 이 글의 결론에서 “기술의 인간화가 방금, 그리고 가까운 장래의 인간의 제일과제”라고 선언하면서 “새 기술과학은 인간과 기계의 소외를 극복하자는 노력이다. 현대의 기술사화에서의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는 길을 우리는 노동에서보다도, 어떠한 정신적, 종교적, 주체적 훈련에서보다도 바로 계획과 건설의 협력, 지성과 공학의 共働에서 기대한다”라고 매우 모호한 말로 결론짓고 있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계획과 건설의 협력, 지성과 공학의 共働이라는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며 불분명한 언어사용으로 끝나고 만다. 따라서 그는 과학기술의 문제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로 인해서 그가 윤리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인간화의 문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말았다.
서남동은 과학기술의 인간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밝히지 않고 그것의 긴급성과 당위성을 밝히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2) 생태학적 윤리
서남동은 과학기술의 인간화와 더불어 그것으로 야기되는 생태학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1975도 발표한 글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몇 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지구인류의 생태학적 위기에 관해서 말해왔다. 1980년에 들어서면 세계적으로 인구문제, 식량문제, 자연자원 그 중에서도 에너지 문제 등 그리고 핵무기, 생명과학의 발전도 있고 해서 지구에 묵시록적 종말이 더욱 역력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서남동은 이미 1972년에 발표한 글 “생태학적 윤리를 지향하여”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인류가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 현상들을 1) 인구의 폭발적 증가 2) 과도한 경제성장 3) 인간의 생활태도에서 본 그는 그것의 근본적 원인을 기독교와 결합된 진보사상에서 찾고 있는 화이트(Lynn White)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전통적 기독교의 성서 읽기 즉 “인간중심주의적” 성서 읽기를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글의 결론에서 이제까지의 전통사회에서의 윤리적 규범이라 할 수 있는 개인적 “양심”을 넘어서 제2의 윤리적 규범인 “사회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된 사회,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필요한 규범은 어떤 개인적 실존적 결단에 기초가 되는 양심이라는 전통적 규범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서남동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인류는 기술사회라고 하는 미증유의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고 있다. 그 ‘지구촌’(global village)적이며 동시적인 성격, 기술중심적 생활양식 등이 기술문명의 특징으로 드러난다. 인류의 외적 자연환경이 황폐되는 동시에 그 내적 정감이나 직관이 고갈되고 만다. 이제는 사회제도나 집단의 인간화 못지 않게, 인간성의 회복, 인간의 자연화가 절실하게 요망된다. 더 근본적으로는 기술과학의 횡포는 종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의 제일, 제이 규범에 더해서 제삼 규범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곧 ‘생명의 보존’(Survival of the Species)이라고 하겠다.

서남동은 사회정의라고 하는 집단들간의 화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통한 종(인간뿐만 아니라 생물의 종)의 보존을 오늘날 윤리의 제3의 규범으로 제창하고 있다. 이러한 서남동의 생태학적 윤리관은 서독의 철학자며 과학자인 봐이체커의 “핵시대의 평화는 삶의 조건이다”이다라는 명제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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