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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6 10:25
일아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윤리사상
글쓴이 : 손규태
 
1. 서론적 고찰
 
一雅 변선환(1928-1995)은 평안남도 진남포의 유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당시 다른 어린이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에서 수학한 사촌 형님과 그에게서 얻어 읽은 책들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특히 그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은 세계의 4대 聖人들 즉 석가,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등에 관한 전기였다. 이러한 감수성이 예민하던 어린 시절의 감동이 그로 하여금 일상적 생활인을 위한 직업선택의 길로 나가지 않고 보다 심오한 철학적 진리, 종교적 진리를 향한 求道者의 길로 나가게 한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여러 성인들에 대한 관심이 그가 후에 기독교이라고 하는 종교적 정체성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성인들 특히 불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진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진남포에 새로 생긴 상공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인생의 궁극적 문제를 탐구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 즉 1946년 해방 직후였다. 이 때로 말하면 나라가 일본제국주의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갈등에 찬 시기였다. 해방 후 모든 것은 불확실했다. 나라는 분단위기에 처해 있었다. 각각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던 좌우익은 서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대립과 투쟁을 일삼고 있었다. 이렇게 현실이 불확실할수록 그리고 사회가 갈등으로 고통을 당할 수록 변선환은 더욱더 삶의 본질적 문제 즉 종교의 문제를 파고 들어갔었다.

이러한 갈등과 불확실성의 시기에 변선환을 그리스도인 아니 감리교인이 되게 한 이는 감리교회의 신석구목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석구 목사는 애국적 신앙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 신앙을 통한 민족구원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당시 그의 설교의 주제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라”는 것이었다. 젊은 변선환은 나라사랑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바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대개 삶의 궁극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과 동시에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서 찾았었다. 영혼구원을 얻고 천당에 가는 일, 종교적 관심은 그들에게는 부차적이고 이차적 문제였었다.

그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1948년 평양의 감리교 성화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성화신학교 시절 구약을 가르치던 박대선 박사와 신약학을 가르치던 김용옥 교수 그리고 조직신학을 가르치던 김용련교수등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들 교수들에게서 19세기 신학자들 특별히 슐라이엘마하와 릿츨등의 신학을 배울 수 있었고 이것이 후에 그로 하여금 장로교 계통의 신학자들처럼 계시신학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운 신학적 사고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도 한국전쟁과 더불어 부산으로 피난 온 변선환은 1951년도에 부산감리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한다. 그는 당시 홍현설로부터 니버를 공부했고 윤성범으로부터는 변증법적 신학자들 특히 칼 바르트의 신학과 접하게 된다. 부산시절 바르트나 니버나 모두 장로교 계통의 신정통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지 않다. 그는 감리교인으로서 오히려 죤 웨슬리의 신학을 좀더 파고들고 싶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신을 졸업한 그는 군목생활을 하면서 한신대학원에 입학하여 박봉랑으로부터 칼 바르트의 신학을 더욱 심층적으로 배우고 서남동교수로부터 파울 틸릭히의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1961년 웨슬레의 은총론, “웨슬레 신학에 나타난 선행적 은총(Ordo Salutis)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한신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한신대학 시절 주로 신정통주의에 근거하여 계시와 이성의 상거적 관계를 강조하던 분위기 속에서 영국적 전통 즉 계시와 이성 사이의 상관관계에서 출발하는 웨슬레의 선행적 은총론으로 학위논문을 쓴 것은 역시 감리교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한번 더 확실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웨슬레의 선행은총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한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이러한 아쉬움이 변선환으로 하여금 서남동이 강의하던 틸릭히의 신학에 더욱 관심을 갖게 했고 그의 신학적 지평에서 평생을 사고하게 만들었었다. 변선환은 또 그러한 아쉬움으로 인해서 미국에 있는 두루 대학 유학시절(1962-63;1966-67)에도 하이데거와 불트만 그리고 마이켈손 등으로 이어지는 실존론적 사상에 더욱 접근해 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이켈손의 “歷史的 信仰”이란 주제는 자연신학적 지평을 언제나 열고 있던 영국의 성공회나 감리교회 전통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두루 대학에서 “로마서 연구 2판에 근거한 죄렌 키엘케골과 바르트의 신학적 상관관계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Theological Correlation of Søren Kierkegaard and Karl Barth on 'Der Römerbrief‘. Zweite Auflage)이란 주제로 석사논문을 제출했다. 이 때 그는 실존론적 신학의 관점에서 바르트의 역사 초월적 계시신학을 비판하려 했다. 이것을 통해서 그는 바르트의 계시중심적 말씀의 신학으로부터 신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변선환은 1971년 다시 학문의 순례 길을 유럽을 향해서 떠난다. 그가 스위스의 바젤대학을 택하고 연구 파트너로서 프릿쯔 부리(Fritz Buri) 교수를 택한 것은 두루 대학 유학시절과 연관된다. 그는 유학당시 두루에 연구교수로 와 있던 부리를 만났으며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신학적 관심을 좀더 심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동시에 변선환은 마이켈슨의 실존론적 신학의 뿌리가 되는 하이데거와 불트만의 신학을 좀더 접근해서 연구하고 싶었다. 부리는 불트만 학파의 일원이었지만 비신화론 프로그람 자체를 비판하고 케리그마의 해체까지를 시도했던 그의 방법론이 변선환에게는 신선한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은 여전히 서구적 전통 특히 그리스 전통에 서있고 그가 말하는 역사성도 전적으로 서구의 역사만을 고려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구적 전통과 서구적 실존이해의 틀에 같혀 있는 불트만 신학은 전혀 다른 역사적 전통과 아시아적 혹은 한국적 실존을 가지고 복음에 접근하려는 변선환에게는 뭔가 낯선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변선환의 동양적 신학에로의 여정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 것은 1961년도 감신대학보를 통해서 윤성범과 유동식이 제기했던 토착화 논의였다. 당시 이들이 제기했던 토착화 논의에는 당시의 저명한 신학자들 대부분이 참여했으며 한국신학사상 가장 결실 있고 의미 있는 신학논쟁이었다. 토착화 논의에서 역시 장로교 계통의 학자들 특히 하나님의 계시말씀에 역점을 두고 인간의 문화와 종교들을 적대시하던 서구지향적 신학자들의 반격을 보면서 변선환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토착화 논의는 변선환으로 하여금 감리교의 신학적 전통, 즉 최병헌으로부터 시작되어 윤성범과 유동식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보다 심도있게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는 은퇴논문집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어떻게 동양종교의 컨텍스트 속에서 복음을 재해석할 것인가 라는 ‘한국적 신학형성’의 과제를 맡게 되는 신학자가 되도록 운명지어준 내 신학의 요람지이다.”

이 점에서 아시아적 전통과 실존에까지 문을 열고 대화를 시도하고 있던 푸리츠 부리는 변선환에게는 좋은 대화상대자였다. 그는 1971년 바젤로 건너가서 5년 동안의 연구 끝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바젤 대학에 제출한 박사논문 제목은 “기독교와 선불교와의 만남에서 본 그리스도의 긍극성 문제”(The Finality of Christ in the Perspective of Christian-Zen Encounter)였다. 그는 5년의 바젤 체류기간 동안 주로 불교연구에 집중했었다. 왜냐하면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에 나타난 그리스도 이해는 그리스 사상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선환은 엄격히 말해서 불트만과 마이켈손등의 실존론적 신학으로부터 프리즈 부리의 사상세계를 거치면서 그들의 비신화론과 비케리그마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궁극성의 문제를 아시아적 사상 특히 선불교 사상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희랍철학의 옷을 걸친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적 문화풍토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여기서 변선환은 서구의 실존론적 신학으로부터 불교와 대화라고 하는 토착화 신학의 논의로 그의 관심의 방향을 돌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실존론적 신학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와의 대화 역시 그에게는 실존적 신학논의의 장을 좀더 확대하고 정교화한 것이라고 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길에서 일본의 선불교 신학자 야기 세이찌(八木誠一)를 그가 대화 파트너로 삼은 것은 매우 독특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변선환은 스위스 유학시절 대승불교 사상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불교로 특징화할 수 있는 동양이라는 문화적 풍토에서 기독교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를 심각하게 질문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논문에서 미국 유학시절에 만났던 마이켈슨과 동양의 불교철학자 야기의 기독교 해석을 비교 분석하여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해명하려고 했다. 우선 야기의 선불교의 도식 “절대무”(sunyata)의 개념에 따르면 신이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신적 근거는 오히려 절대무와 상호 내재(mutual immanence)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무라고 하는 케노시스 사상을 통한 자아발견과 상호내재를 통한 신과의 인격적 통일성이 바로 예수의 성육신을 지칭하는 언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절대무를 통한 자아발견과 상호내재를 통한 신적 자아의 합일은 예수라는 특정 인물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야기의 생각이다. 이 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단지 예수라는 인물에게만 두려는 마이켈슨과 같은 학자들의 생각을 뛰어넘고 있다.
 
그러나 변선환은 야기의 이러한 절대무에서 그리스도의 신적 근거를 찾는 것이나 상호내재성에서 그와의 인격적 통일성을 찾는 일종의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 그리스도 해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야기의 장소적 기독론에서 기독교신앙은 형이상학적 토포스 속에,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리스도의 원리 속에 해소된다. 결국 실존의 존재론적 근거인 무의 장소에 의해서만 성립된다고 보는 야기는 인간실존의 무제약적 자유와 책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인의 세계에 사는 현대인은 존재의 모태에 매달려 있는 자연의 노예가 아니다. 마이켈슨과 야기의 신학적 아포리아를 해결해 준 이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唯一回的 종말론적 사건이나 絶對無로서의 장의 계시가 아니라 ‘인격적 책임성의 무제약성을 나타내는 신화적 표현’이라고 본 후릿츠 부리였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신화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진리, 책임적 자아와 책임적 공동체의 진리다. 그러기에 무제약적 책임성이 있는 곳, 사랑이 있는 곳 그 어디에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무제약적 책임성’이라는 이름밖에 천하 인간이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이 복음이 동방의 밝은 빛, ‘은자의 나라’ 한국의 빛이 되기를!”
 
여기서 우리는 변선환의 야기비판에서 후리츠 부리가 사용한 “인격적 책임의 무제약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수의 궁극성의 문제를 윤리적 범주에서 찾은 것은 알베르트 슈바이처나 트뢸치와 같은 신학자들의 동양관과 무관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일아 변선환은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라는 글에서 “교리적 차원 너머에 있는 보다 근원적인 실존적.존재론적 차원”에서 종교체험을 문제삼자고 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해 지는 것은 일아 변선환에게 있어서는 기독교의 핵심적 문제는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 종교체험”이며 따라서 다른 종교와의 대화도 바로 이러한 실존적 종교체험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2. 한국적 신학의 탐구
변선환은 “한국적 신학의 摸索”이라는 주제로 10여편의 논문들을 썻다. 이들 논문들에서 변선환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몇 가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교는 아시아라고 하는 다양한 고등종교들의 컨텍스트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수용되어야 한다. 2) 이 일을 위해서는 기독교 자체가 과거의 교조주의적이고 문화적대적인 프톨레메우스적 관점에서부터 종교대화적이고 문화개방적인 코페르니쿠스적 시점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해야 한다. 3) 이러한 페러다임 전환에서 얻어진 종교다원주의는 오늘날의 역사적 요청으로서 이미 세계교회협의회와 다수의 신학자들이 신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서 타종교들과 결실 있는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4)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한 타종교들과의 대화에서 공동의 기초는 “새로운 휴매니티”와 거기에 기초한 인류의 평화이다. 5) 오늘날의 기독교들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서구의 전통적 신학에 매달림으로써 새로운 선교지평의 개방은 물론 스스로 불관용과 자폐증에 결려서 그 생동력을 상실하고 있다.

여기서 변선환은 주로 기독교와 한국문화의 관계문제,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 한국전통종교들과 기독교와의 관계문제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3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변선환의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 한국기독교와 한국문화
변선환의 신학적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文化와 宗敎”의 문제다. 이 문제는 그가 종교간의 대화를 다룰 때나 토착화 문제를 다룰 때나 늘 등장하는 주제다. 그렇지만 그는 문화와 종교의 관계문제를 리챠드 니버(Richard Niebur)나 파울 틸릭히(Paul Tillich) 처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문화와 종교의 밀접한 상관성을 강조하여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는 틸릭히의 도식을 수용하고 있다. 그는 일차적으로 서구신학 특히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계시신학의 문화적대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변증법적 신학의 연장선상에서 리챠드 니버의 도식에 의한 기독교의 “文化變革論”도 비판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를 제3세계의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서구신학의 문화적대주뿐만 아니라 서구문화의 절대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변선환의 생각은 “서구 기독교의 교리주의와 문화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귀결한다.
 
 기독교가 팔레스틴의 유대적 문화권에서 출발해서 그리스-로마 문화를 거쳐서 희랍적 기독교, 비잔틴 기독교, 라틴적 기독교, 게르만적 기독교 등을 거쳐서 봉건적 중세기독교와 근세의 서구 자본주의적 기독교로 발전해 왔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한국 문화의 토양에서 한국적 기독교로 꽃피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는 서구의 특정 교리주의와 서구기독교 문화에 집착한 나머지 한국적 문화를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을 “한국인도 아니고 서양인도 아닌 경계인간(marginal man)으로서 문화적 고아로 전락했다”는 것이다.따라서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잘못된 선교신학을 극복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다.
변선환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 선교 도상에 서 계시는 그리스도는 문화적.종교적 제국주의자로서 군림하는 문화의 지배자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섬기려는 ‘문화의 종’(the servant of culture)으로 역사하고 있다.” 이것이 변선환이 문화, 특히 한국문화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 것 같다. 이 점에서 그는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신정통주의자들이 그렇게 염려했던 자유주의 신학, 특히 문화 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의 세계로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연과 은총의 상호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가톨릭 신학과도 쉽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문화개신교주의처럼 기독교 신앙을 문화 속에 해체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가 ”새로운 인간성“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서로 봉사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본회퍼와 몰트만의 생각을 따르는 것 같다.
 
변선환은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적 상황에서 등장한 정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과 문화신학으로서의 종교신학 사이의 상호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우선 한국의 민중신학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민중신학자들은 한국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정체성을 너무 사회경제사적 해석에만 배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때 비로소 문화를 일방성이 아니라 전체성에서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한국 문화에서 유리된 문화적 고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민중신학의) 사회전기의 신학은 문화전기로 전개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종교전기라는 심층과 만나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는 파울 틸릭히의 도식 즉“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고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다”라는 도식을 재확인하고 있다. 문화는 종교의 인식 근거이고 종교는 문화의 존재근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세계가 정치적 문제보다는 문화적 갈등으로 씨름하게 될 것을 전망하면서 문화에 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짓고 있다. “근동 아시아에서 신학하는 인도 신학자들과 극동 아시아에서 신학작업을 하는 민중신학자들 사이의 비록 신학적 거리가 양극화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고 하여도 앞으로 동양신학이라는 넓은 지평에서 토착화 중심적인 인도 신학자들이 형성한 우주적 기독론과 상황화 중심적인 극동의 민중신학의 정치적 기독론 곧 해방자 예수론은 우리 아시아 사람들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종교적.문화적 상황과 역사적.정치적 상황에 다 함께 성실한 포괄적인 문화선교 신학의 형성을 위하여서, 서로 무제약적인 개방성에서 대화하며 함께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2) 한국기독교와 토착화
변선환이 그 다음으로 심도 있게 다룬 주제는 “土着化” 문제였다. 변선환은 기독교의 토착화의 당위성을 일단 서양 2천년의 교회사의 발전과정에서 찾는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팔레스틴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문명 속에서 토착화되어 비잔틴적 기독교로 발전했고 그것은 그후 로마제국 안에서 라틴적이고 게르만적 기독교로 발전했던 것처럼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도 한국문화와 종교들과 대화하면서 거기에 뿌리박은 종교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바르트 등 문화적대적 신학과 선교학으로 인해서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아직도 서구적이고 이질적인 것으로 남아 있고 신자들은 문화적 경계인으로서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고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바벨론 포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우선 서구 교회 자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는 지적한다. 세계교회가 1938년 탐바람의 배타주의적 선교신학(1938)과 제2바티칸 공의회(1965)의 포괄주의적 선교신학을 뛰어넘어서 종교다원주의 모델의 선교신학을 향하여 신학적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선교신학적 이해의 파도는 60년대 초 스리랑카의 신학자 나일스(D.T. Niles)의 한국방문과 더불어 한국 땅에도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착화 문제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유동식과 윤성범이 감신학보에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를 공적으로 제기했던 때부터이다.

변선환은 이렇게 토착화의 당위성과 함께 그 역사적 발전과정들을 여러 곳에서 소개하면서 한국에서의 신학의 토착화 과정을 한말에 서세동점에 직면해서 제기되었던 논쟁들 즉 유교정통주의자들의 “衛正斥似論”, 개화파의 “變法自强論”, 개량적 개화파의 “東道西器論”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은 한국적인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위정척사론”이라고 한다면 민중신학운동은 변법자강론의 아들이고 감리교의 토착화 신학은 동도서기론의 아들로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선환의 개신교 수용에 관한 판단은 양태론적 입장에서 본 것이지 그것들의 이념지향성에서 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위정척사론은 그 양태에 있어서 한국의 보수정통주의와 궤를 같이 하지만 이념지향성에 있어서는 반서양적이다. 그리고 위정척사론은 전적으로 유교의 성리학 원리와 거기에 기초한 계급사회의 고수를 목표로 한다면 개신교 보수정통주의는 전적으로 서양의 신학사상 그것도 매우 특정한 입장만을 고수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변선환이 한국개신교의 신학적 정향과 그 성격을 이러한 양태론에서 분류해 본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최병헌으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에로의 준비론”에 기초한 토착화론에서부터 윤성범의 성의 신학, 유동식의 풍류신학 등 종교신학 및 정치적 토착화 신학으로서 민중신학 등 한국의 토착화신학의 과거와 현재를 다루고 나서 미래의 과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종교적 토착화론과 정치적 토착화론, 토착화 신학과 민중신학은 앞으로 계속 열려진 대화를 통하여 상호 변혁되고 상호 보충되면서 두 신학이 합류할 수 있지 않을까?”를 변선환은 묻는다. 그는 윤성범등의 토착화신학은 “역사의식에 투철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동시에 그는 민중신학은 한국종교와 문화에 대해서 등한시함으로써 이들 사이의 양자택일로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을 그는 희망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신학과 민중신학, 문화신학과 정치신학의 열려진 대화와 상호변혁과 상호보완은 그 지평을 더욱 넓혀서 포괄주의를 뛰어넘어서 종교다원주의로 나아감으로써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갈 것을 변선환은 전망하고 있다.

3. 불교와의 대화
변선환은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그의 박사논문을 제외하고도 10여편의 논문들을 썼다. 변선환은 이러한 입장에서 불교와의 대화를 심화시킨 비교적 긴 논문 “解放後 基督敎와 佛敎의 受容形態”라는 글을 쓴다. 이 글은 사실상 그가 불교학자 이기영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불교와의 대화의 핵심적 내용이 실려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서 얻은 변선환의 신학적 결론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스위스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포괄자적 불교이해”와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Toynbee)의 “통일된 인류의 관점”에서 동양사상 특히 불교이해를 소개하면서 서구 기독교 문명이 그 한계에서 도달해서 동양 사상에서 배우려는 노력들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에 그는 바르트류의 신정통주의의 말씀신학, 계시신학의 기독교 절대주의와 배타성을 이기영의 입장을 빌어서 다시 한번 비판하고 있다. 그는 동시에 한국 기독교의 폐쇄적이고 왜곡된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인간성”이라는 미래 인류의 공동 기반을 위해서 종교간의 진지한 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에서 중심적 주제를 기독론에서 잡고 시작한다. 그는 “불교의 절대무” 혹은 “空思想”과 그리스도의 “성육신”(空化=kenosis)을 기반으로 한 존재론적 접촉점과 함께 윤리적 기초를 추구한다. 이것은 이미 야기 세이찌와의 대화에서도 다루었지만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상호내재라는 개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데 변선환은 이러한 이제까지의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에서 폴 틸릭이나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와 같은 학자들은 가톨릭 신학자들이나 특히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dt)와 같이 성육신을 중심한 신의 신비에서 대화의 기반을 찾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키타모리 가조우(北森嘉藏)나 야기 세이지와 같이 십자가의 신학을 대승불교의 무아의 체험과 관련시키는 것을 지지하고 나선다. 그 이유는 이렇다. 즉 중세적 부정신학에 기초한 “신의 神秘”는 불교와의 대화의 유용한 기초가 되지만 그것은 오늘날 주변적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두 종교의 만나는 장이 신비주의적 요소에서보다는 윤리적 차원이 됨으로써 보다 유실한 선교신학적 결실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변선환 신학이 갖는 현실적합성을 발견하게 된다.

변선환이 두 종교의 대화의 장을 윤리적 지평에서 찾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한용운이나 고은 그리고 이기영 등에서 보듯이 대승불교의 “菩薩道 精神”이 가진 역사의식의 정신과 기독교의 “제자직”(Nachfolge)에서 “공동의 基礎”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휴매니티를 공동의 기초로 한 불교의 보살도와 기독교의 제자직 이론에서 우리는 상대를 “익명의 불교도”와 “익명으로 기독교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보살도와 기독교의 제자직은 만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요익중생”과 “弘益人間”이라는 공동의 목표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만남에서는 교리도 문화도 삶들을 갈라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4. 변선환의 윤리사상
변선환의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적 신학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타종교, 타문화들과의 대화와 협력의 문제를 단순히 이론적 측면에서 찾기보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가 “責任的 自我”라는 실존론적 범주로부터 “責任的 共同體”라는 윤리적 범주를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위한 이해범주로 사용한 것이나 “새로운 人間性”이라는 범주를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의 공통적 근거로 제시한 것은 이제까지의 그의 신학이 실존론적 테두리를 넘어서 보다 구체적 역사의 현장인 공동체를 그의 신학적 사고와 실천에 내포시키려고 하는 새로운 전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1982년도에 쓴 불교와의 대화에서 걸어가던 길 즉 “종교의 초월자 체험”이라고 하는 실존적 범주를 완전히 청산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윤리적 범주를 사용하면서도 여전히 “종교의 초월자 체험”, 혹은 “窮極的 關心”과 같은 실존적 범주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승리는 어느 종교가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어느 종교가 초월자 체험, 곧 ‘궁극적 관심’을 잘 나타내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따라서 변선환 신학에서는 실존론적 지평과 윤리적 지평이 항상 중첩되어 나타난다. 90년대에 들어와서 그의 신학적 사고의 지평이 실존론적 지평으로부터 윤리적 지평으로 전환되었다기 보다는 실존론적 지평이 윤리적 지평으로 확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지평은 변선환 신학사상에서 강조점 전이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변선환이 일생동안 추구하고자 했던 윤리적 사상은 어떤 것인가?
 
1) 대화의 윤리
변선환의 모든 글들에서 철저하게 거부되고 있는 것은 신학적 종교적 교조주의에 기초한 배타주의다. 그는 서구 기독교의 종교적 배타주의에 뿌리를 둔 정통주의자들의 교리적 배타주의, 신정통주의의 문화적 배타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다. 기독교와 서구문화를 모든 것의 祖型(archtype)으로 보려고 하는 것을 그는 거부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종교간의 대화, 토착화론 그리고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출발하고 있다. 모든 종교들 그리고 문화들은 영원 불변하는 조형이 아니라 단지 여러 개의 독특한 것들 가운데 하나인 原形(prototype)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경험의 조형을 반영한다고 하는 종교적 경험들도 사실 알고 보면 원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변선환의 생각이다.

변선환은 이러한 배타주의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종교며 그것은 종교사의 발전과정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잘 보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배타주의 특히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교회사를 볼 때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심각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의 종교적 배타성과 문화적 적대성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이 심각한 것이었다. 이것이 필자가 보기에는 변선환이 “對話의 神學” 아니 “對話의 倫理”를 제창하고 있는 이유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종교적 문화적 배타성은 인간을 통전적 존재로 만들지 않고 “경계선의 인간”(marginal man)으로 만든다는 것이 변선환의 생각이다. 한국이라는 문화와 역사적 현실 가운데 살면서도 서구 기독교 정통주의의 배타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그는 “文化的 孤兒”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계선에서 문화적 고아로 남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며 윤리적으로 대화불가능한 인간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잘못된 종교적 배타주의와 문화적 적대주의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을 서구 종교와 서구문화의 “바벨론 포수”에서 해방시켜서 그들을 대화적 인간으로 그리고 통전적 인간들로 삼는 것을 그는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물론 이러한 배타주의는 정치나 이데올로기들에서도 나타난다.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한 남북문단과 억압적 군사독재체제 하에서의 동서분단 그리고 왜곡된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가진 자들 갖지 못한 자들 사이의 대립이 이러한 배타주의를 강화해 오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개신교들 사이의 교리적 분열 그리고 교권다툼이 이러한 비판성을 다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종교인들에 의한 정신적 영적 분단은 한국인들을 전반적 정신분열자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모든 면에서 우리는 대화를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변선환은 이런 대화단절의 정신분열증적 사회현상을 가장 심화시키는 것이 종교적 배타성이라고 보고 있다. 종교가 사회적 갈등들을 해소시키고 사람들 사이의 화해와 사귐을 증진시키는 것이 그것이 가진 본래의 과제다. 그러나 한국의 종교 특히 개신교는 이러한 면에서 순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변선환은 우리 삶의 가장 심층적 조건들을 형성하고 있는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2) 평화윤리
변선환의 이러한 대화의 윤리는 종교와 종교들 그리고 문화와 문화들 따라서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 나아가서 전 인류의 평화로운 삶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가 타종교에 적대적이거나 한 문화가 다른 문화 위에 군림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체계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인간들 사이의 갈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종교의 배타적 독선주의나 문화제국주의를 가장 혐오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유럽 안에서의 갈등들과 전쟁들은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 그리고 개신교파들 사이의 갈등들에 의해서 야기되었다는 것을 간파한 화란의 법철학자 크로티우스(Crotius)처럼 변선환은 인간대 인간, 사회적 갈등들이 종교들에 의해서 해결되기보다는 그것들의 배타성과 적대성에 의해서 야기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크로티우스가 평화의 조건을 세속적 수단 즉 국제법적 계약체결에서 찾으려 한 반면 변선환은 여전히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서 찾으려고 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오늘날 진정으로 종교가 인간들 사이의 평화와 화해, 혹은 국제적 평화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북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교도들과 신교도들 사이의 해묵은 갈등, 유고에서의 정교회와 가톨릭 그리고 회교도들 사이의 갈등들을 고려한다면 여기에 대한 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오늘날 종교의 배타성은 평화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변선환에 의하면 종교가 과도하게 교조주의적 계율에 사로잡혀서 배타적으로 되거나 아니면 주술적이 되어서 기복적인 것으로 타락할 때 종교는 평화를 깨뜨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예를 들어봐도 한국전쟁 이후의 장로교회들간의 싸움은 교조주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7.80년대의 교회성장경쟁은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주술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교조주의는 바리새주의와 같아서 타인들, 타교파들 그리고 타종교들을 심판하고 저주하게 만들었다. 또 한국교회의 주술주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제약적 탐욕의 충족을 하나님의 축복과 혼동하는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두 가지 요소들은 심리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불안에 사로잡히게 했고 그래서 종교적 영성이나 도덕적 덕성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변선환에 의하면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왜곡들이 결과적으로는 종교공동체, 사회공동체를 파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의 인류공동체 형성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한국의 기독교가 스스로를 열고 포괄적 선교에 나서는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이렇게 볼 때 변선환의 노력들, 종교간의 대화, 토착화문제 등은 모두가 이러한 “사랑의 인류공동체”, 즉 평화를 궁극적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한스 큉의 “지구평화는 종교평화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논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스 큉이 포괄주의를 말하면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숨겨진 문화제국주의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인도학자들의 입장에 서서 변선환은 서구 신학의 보다 진일보한 페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그럴 때에만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와 그것을 통한 종교간의 평화를 통해서 인류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결단과 참여의 윤리
변선환은 단순히 이론적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종교간의 대화의 모임들에 열과 성의를 다해서 참석했다. 그는 말년에는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의 대화 보다 오히려 타종교, 타문화의 대화에 장에 더 열심히 참석했다. 그것은 그가 목표로 하는 인류공동체를 더불어 달성하기 위한 헌신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활동의 목표를 이렇게 쓰고 있다. “巨龍과 싸움에서의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한국의 소망이며 세계의 소망이다. 그분이야말로 인류를 하나되게 하고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룡 殺害者 그리스도라는 상징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책임적인 인류사회의 형성을 향하여 사랑에 사는 무제약적 책임성이 기독교 신앙만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 독점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변선환의 윤리는 결단의 윤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거용살해자 그리스도라고 하는 상징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기헌신과 결단 그리고 무제약적 책임성을 통한 행동적 참여를 말하고 있다.

민중신학자들이 정치 경제적 억압과 착취에 대항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투쟁했다면 변선환은 왜곡된 문화와 종교적 대립과 갈등에 대항해서 투쟁했다. 그가 자신이 속했던 감리교 종단의 종교적 배타성과 문화적 적대성을 문제삼았기 때문에 그의 투쟁은 밖을 향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안을 향했었다. 이러한 안을 향한 저항이 결국은 그를 안에서 밖으로 추방당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그는 말년에 “장외의 신학자”, 내지는 “반신학자”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교단에서 잃어버린 친구들을 타교단과 타종교에서 발견했다. 그는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명시적” 교리주의자들에 의해서 추방당하고 난 다음 밖에서 아니 타종교들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난다.

이러한 거룡살해라는 상징성에서 타종교, 타문화와의 대화와 평화 그리고 그것을 위한 결단과 실천을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면서 변선환은 스스로를 “創造的 異端者”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창조적 이단자로서 변선환은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 파괴하는 자“(렘 1,10)로서 그리고 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비판하는 자로서 그리고 그가 즐겨 사용하는 말 “사랑의 싸움”을 하는 자로서 평가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이러한 ”장조적 이단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이러한 결단의 기초를 불교의 보살정신과 기독교의 제자직 정신을 결합한 데서 보고 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단자로 낙인찍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자신의 ”창조적 이단자“로서의 운명을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은 창조적 이단자로서 “반교조주의”와 “반교권주의”를 그 투쟁의 일차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한국의 감리교회의 교권세력에서 가장 뼈저리게 경험했고 그가 수십 년 동안 몸담았던 감리교회로부터 추방당했다. 성공회로부터 추방당했던 감리교회가 그를 추방함으로써 과거의 잘못은 오늘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창조적 이단자”를 추방한 장본인들은 옛날 예언자들이 말했듯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심판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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