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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6 10:29
장공 김재준의 사회참여신학과 윤리사상
글쓴이 : 손규태
 

1. 서론적 고찰
長空 金在俊은 1901년 함경북도 경원지방에 있는 적은 산골 마을 창골에서 선비이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科擧에도 도전했던 한학자였으나 실패한 다음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으며 풍월을 벗삼아 시도 쓰고 아이들을 불러모아 글도 가르치며 농사를 짓던 분”이었다. 따라서 장공은 어린 시절부터 선비적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19세기말은 조선조 500년 말기로서 내적으로는 제반 모순들이 극에 달했던 때였고 또 외적으로는 서세동점과 더불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3대 강국들이 한반도의 세력권을 놓고 각축을 벌리던 때였다. 이 과정에서 내적 모순을 극복하려던 천도교 세력에 의해서 1895/6년 동학란이 일어났고 주변강대국들 사이의 세력 다툼의 결과 중일전쟁(1896년) 및 러일전쟁(1904년)이 발발한다. 한반도에 대해서 오래 동안 지배권을 행사해 오던 중국이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일본세력이 한반도를 조직적으로 식민지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일본의 대륙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러시아의 야망이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으로 발전되었으나 러시아의 패배로 한반도는 본격적으로 일제의 식민지화 과정에 들어다. 따라서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절망적이었다.

장공은 당시 모든 어린이들과 같이 5.6.세에 서당에 가서 千字文, 백수문, 통감, 동몽선섭 등을 띠고, 그의 나이 7.8세가 되어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소위 四書를 읽었다. 그의 말대로 라면 그는 그 책들을 읽고 이해했다기 보다 서당훈장의 가르침에 따라 줄줄 외웠다. 그는 이렇게 한학의 학습으로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신식교육을 받았던 그의 사촌형님의 도움으로 좀더 큰 지방도시인 경원으로 나와서 신식 교육을 받는다. 그는 신식 소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약 3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그 소학교를 마치고는 13-15세까지는 회령에 있는 2년 과정의 간이 농업학교를 다녔다. 이것이 장공이 어린 시절에 거쳤던 기초교육과정의 전부였다.

이러한 기초 교육을 마친 장공은 웅기라는 곳에서 금융조합 서기노릇을 했다. 이 기간에 그는 세속적 생활에 탐닉했고 돈도 좀 벌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생활 중에 그에게 예기치 않았던 召命이 왔다. 그것은 세속적 소명이었지만 장공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사건이기도 했다. 그의 삶을 새롭게 전환시킨 이 소명의 주인공은 서울 남대문교회의 전도사로 있던 晩宇 송창근이었다. 1919년 3.1운동 사건으로 6개월간의 옥살이를 한 다음 순회강연차 경흥 근처 웅상을 방문했던 만우가 장공을 찾아와서 새로운 삶을 권했다. “지금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웅기 구석에 금융조합 서기나 하면 무엇합니까? 서울 올라와 공부하십시오... 하루 속히 단행하십시오.”

이러한 만우의 “부름”으로 장공은 1920년 서울로 올라와서 약 3년간 서울에서 지냈다. 그는 이미 20이 넘은 청년이어서 일반 학교에는 들어갈 수 없어서 한 학기에 한 한년씩을 속성으로 가르치는 중등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그 무렵 숭동 예배당에서 장로교회 연합사경회가 열렸는데 거기에 金益斗 목사라는 유명한 강사가 초빙되었다. 김익두는 원래 깡패 두목이었고 장똘뱅이로 유명했던 인물이었으나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인다고 해서 장공도 호기심을 가지고 거기에 참석했다. 그는 마지막 날에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 옳다! 나도 믿겠다! 하고 결심하는 순간 정말 이상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성경 말씀이 꿀송이 같고 기도에 욕심쟁이가 됐다.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 塞翁之馬는 하늘의 복을 내게 심는 길닦이가 된 셈이다.”

이렇게 기독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장공은 당시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등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던 YMCA의 영어 전수과에 등록하여 1년 정도 다니면서 세계문제, 종교문제 그리고 민족문제 등에 대해서 눈이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의 틈새에서 발간되던 잡지들 예를 들면 學生界, 서울, 朝鮮之光 등을 통해서 장공은 왕성한 지식욕을 충족시키려고 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공의 학문에 대한 깊은 갈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장공의 삶이나 학문적 방향이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장공의 삶과 학문적 미래를 어느 정도 결정해 주는 계기가 된 것은 당시 그가 젊은 청년으로서 접하고 읽은 다음과 같은 책들이다. 이 때 장공은 톨스토이 십이경, 성 프랜시스의 傳記,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등의 책들을 읽고 특히 淸貧生活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이런 책들을 읽고 나서 자기의 미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길을 생각했었다. 1)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어서 남 못지 않게 살자. 2) 우선 돈을 벌어서 좋은 사업에 쓰자. 3) 애당초부터 돈을 멸시하고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청빈하게 살자. 그는 세 번째 길을 택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과 돈은 같이 섬길 수 없다”라는 성경말씀에 따라서 일생을 청빈 속에 살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그가 세속적 직업을 택하지 않고 신학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3년이 지난 1923년 세례를 받는다. 그후 그는 서울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낙향하여 거기서 소학교 교사생활을 한다. 그런데 다시 송창근이 그를 일본으로 불러들인다. 그는 일본으로 오라는 만우 송창근의 편지를 받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서 동경 아오야마(靑山學院)에서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한다. 그는 막노동과 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 신학공부를 했고 거기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독서생활을 하면서 지낸다. 그 때 아리지마 전집, 토스토엡스키 전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懺悔錄등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신학을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자기가 목사가 되어 교회에 충성하는 것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었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사람들을 일깨워서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게 하는 일 즉 교육하는 일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청산학원에서 공부하던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풍미하고 있었다. 대학에는 독서회와 같은 그룹들이 구성되었고 마르크스와 레닌 등의 저작집들이 탐독되었다. 신학생들 가운데도 공산주의를 노골적으로 선전하며 종교의 무용론, 종교의 阿片論 등을 선전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장공도 독서회 등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자신은 오히려 신학의 본격적 연구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주로 세계종교사 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당시 처음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변증법적 신학등 비교적 진보적 신학사상들을 공부했다. 이 학교에서는 당시 미국의 유니언 신학교의 학풍과 독일신학이 주로 강의되었었다.
 
 따라서 장공은 여기서 자유롭고 진보적 신학과 접하게 되었었다. 그는 청산확원 시절을 회상하면서 어떤 학문적 성과를 말하기보다는 거기서 경험했던 “자유”를 못 잊어 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느 학생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청산의 자유를 감사한다. 역시 학원은 자유여야 한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자유에서 창조 작업이 생겨나기 대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장공이 경험했던 “자유정신”이 일생동안 그의 확고한 가치관으로 확립되었던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다시 만우 송창근의 초청과 지원으로 미국유학의 길을 떠난다. 송창근은 함경도 웅기에서 금융서기로서 삶을 자리잡아가던 장공을 서울로 그 다음은 동경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미국으로 불러내서 신학을 공부하게 한다. 송창근은 그의 삶에서 결정적 길 안내자였다. 장공은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받게 된다. 그는 거기서 주로 매첸(Gresham Machen)등 정통주의 혹은 근본주의적 신학자들의 강의를 들었다. 왜냐하면 진보적 신학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메첸의 제자로서 그보다 먼저 공부했던 박형룡처럼 메첸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특정한 교수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공부했다. 그가 청산학원에서 얻었던 자유의 경험이 그를 어떤 교리나 신조나 신학적 이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일생을 살게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프린스톤에서 당시 학생으로 있던 김성락, 한경직 등과 같이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특히 김성락의 민족애에 찬 삶의 자세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한 학기를 프린스턴에서 지내고 그 다음 학기에는 송창근이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갔다. 그는 거기서 주로 구약성서를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희브리어를 잘해 희브리어 상까지 받았다.
 
그는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경제공황이 심각하던 1931년 귀국했다. 그는 귀국하여 얼마간의 방랑 끝에 평양에 있는 숭인 상업학교에 교사로 취직한다. 그러나 미국유학을 마친 장공에게 상업학교 교사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숭인상업학교의 교사생활을 하면서 남궁혁의 주선으로 “神學指南”의 편집일을 맡아서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 등과 함께 동인격의 기고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감리교회의 유형기 박사가 편수한 “단권 성경주석”이 장로교회에서 문제가 되어서 거기에 글을 집필했던 그도 더 이상 신학지남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1936년부터 일제에 의해서 모든 학교들에 강요되던 신사참배가 시작되던 때 그는 숭이상업학교를 사직하고 만주에 있는 용정으로 옮겨 거기서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순교자 열전”을 집필하고 그것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서 무언가 사람들에게 말하고 알려야 한다는 의식에서 “十字軍”이라는 잡지를 시작했다. 당시 만우 송창근은 부산에서 “聖貧”이란 잡지를 내고, 전영택은 서울에서 “새 사람”이란 잡지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십자군”과 같은 잡지를 내는 일이 물리적으로 용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쇄는 서울에서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이 점차 만주에까지 확대되면서 잡지활동을 하는 것도 그만 두게 되었다.

이 때 장공은 다시 만우의 부름을 받는다.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거부로 강제 폐쇄되었고 교역자 양성은 해야 할 형편인데 마침 김대현 장로란 분이 그 때 돈 1,500원을 내서 신학교를 시작할 예정인데 장공이 그 실무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우는 수양동우회(당시 국내의 흥사단) 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는 이미 만주사변이 터지고 선교사들은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한반도를 떠난 뒤였다. 따라서 이제는 선교사가 아닌 조선인이 신학교를 설립해서 성직자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학교 설립에 대해서 두 가지 대립되는 의견이 있었다. 첫째는 선교사파로서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떠나갔으니 조선 사람들도 그들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평양신학교 재개나 서울에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는 것은 선교사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 선봉장은 장공에게 세례를 주었던 김익두였다. 그 다음으로는 조선교회파로서 선교사 시대는 지나갔으니 조선교회는 조선 사람의 책임 하에 신학도 가르치고 교회도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사람들이다.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절대 다수였다.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은 김대현 장로였다. 그는 잠언 3장 1절을 인용하면서 “천하 만사가 기한이 있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그 후 한국에서의 신학형성과 교회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1936년 미국장로교 선교사 모펫이 한국선교 50주년 기념식에서 “선교사들이 전해 준 기독교 외에는 절대 다른 것을 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그 입장에 서려는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의 신봉자들과 새로운 세계적 신학동향과 운동을 받아들여 교회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개혁적 운동의 신봉자들 사이의 신학적 교회적 방향이 확연하게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서북지방(평안도 황해도)의 교권장악 음모에 대한 서울과 그 이남지방의 반발 등이 뒤얽혀서 서울에 조선신학교 설립은 많은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0년 3월 조선신학교의 인가가 떨어져 장로회 총회직영신학교가 되었다.
 
장공과 조선신학교는 해방과 더불어 사회적 교회적 혼란 가운데서 다시 한번 수난을 겪는다. 그것은 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공격이었는데 이러한 신학적 갈등은 사실상 교회정치적 권력욕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북한의 공산치하에서 남하한 근본주의자들이 남한에서 신학적 교회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학적 교회정치적 갈등은 1950년 이후 한국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전쟁 중 1951년 대구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는 장공 김재준을 총회와 신학교에서 추방하는 결의를 했다. 김재준의 신학사상을 지지하고 또 정치적으로 총회의 횡포에 반발했던 경기노회원들 특히 김세열, 이남규, 함태영, 김종대 등이 모여 새롭게 38총회를 소집하고 오늘의 기독교 장로회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기독교 장로교회의 출발과 더불어 그 직영신학교가 된 한국신학대학에서 장공은 비로소 자기의 신학사상을 거침없이 마음대로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장공이 한국신학대학에서 책임을 지고 신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던 기간은 약 10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61년 박정희가 구테타를 감행하고 권좌에 오르면서 강제로 교단에서 추방되었다. 장공은 1961년 9월 26일자로 만 60세가 되는 해에 한신대학의 학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는 그후부터 야인으로서 1962년부터 대한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또 “신문윤리위원”등으로 활동하면서 강연과 설교로 소일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무슨 소리라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제3일”이라는 잡지를 시작한다. 제3일은 예수가 부활한 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당시 암담하던 무덤 같은 한국의 민주주의의 현실이 다시 부활하기를 기대하는 뜻에서 부친 이름이었다.

그러던 중 그가 신학자로부터 사회운동의 기수로서 변신하게 되는 계기가 주어진 것은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논의 때부터이다. 그는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 문인들과 재향군인들 및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더불어 “굴욕적인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 투쟁에 선봉에 선다. 이렇게 시작한 사회운동은 그로 하여금 1969년부터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투쟁에 앞장서게 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부정선거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자 그 단체는 해체되고 만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국내에서의 활동도 어려워지자 그는 가나다로 건너간다.

가나다에서 십여 년 동안의 삶도 순탄하고 편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곳의 민주동지들은 그를 앞장 세워 해외에서의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는 북미주의 민주단체인 “국민연합”의 의장으로서 미주 전지역을 돌아다니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또 기독교인들로만 구성된 “민주동지”의 의장으로 북미와 독일 그리고 일본을 오가면서 국내의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그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발행이 중단된 “제3일”지를 계속함으로써 집필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1983년 다시 귀국하여 수유리 장막에 은거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정신적 지도자로 지내다가 1986년에 숙환으로 한양대학 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그리스도의 품에 안겼다.
 
2. 長空의 삶과 神學思想
장공 김재준은 자기 나름의 특별한 신학사상을 전개하지 않았다. 그가 신학자로서 그리고 한신대학의 교수와 살림꾼으로서 그리고 기독교장로회의 탄생의 주역으로 할동하게 된 그의 삶과 사상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그의 자서전을 자세히 검토하고 또 그의 살아가던 모습들을 회상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선 장공 김재준은 인간적으로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것은 이미 그가 청년시절에 읽은 독서의 방향과 거기에서 내린 결단들에서도 잘 반영된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이나 신학교를 둘러싼 교권투쟁에서 일생 동안 언제나 양보하고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어떤 지위나 권력이나 금력을 얻기 위해서 일한 적이 없었다. 둘째 장공은 자유정신의 신봉자였다. 그는 이미 일본 청산학원 유학시절을 회상하면서 거기에서 경험한 이 자유정신을 잊지 않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일생동안 삶의 가치로 알고 살아왔었다. 셋째로 그는 열렬한 진리의 증언자였다. 그는 장로교 안에서 전개되었던 추악한 교권 싸움과 한신대 내부의 싸움에서도 권력과 금력과 관련된 문제들에서는 몸을 뒤로 뺏지만 진실을 밝히고 말하는 일에서는 한보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리의 증언자였다. 넷째 장공 김재준은 진리의 증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탐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새로운 신학들과 자유롭고 풍부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의 다른 신학생들처럼 교권의 눈치를 보거나 자기의 출세를 고려하여 신학적 노선을 선택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1971년에 출간된 장공전집의 출판위원장을 맡았던 김정준은 그의 간행사에서 장공 김재준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 어느 하나에도 자기 발을 부치지 않는 진보적 보수주의, 보수적인 진보주의 사상을 글귀마다 펴나가는 폭 넓은 진리의 탐구자, 신앙과 윤리, 교회와 사회, 신학과 철학, 전통과 혁신의 테두리를 자유스럽게 넘나드는 자유의 탐구자, 이런 진리와 자유에서도 높고 깊고 폭넓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그의 생활과 사상이 높고 푸르고 깊은 창공같아, 사람들이 그를 長空 선생이라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공의 신학사상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1) 聖書學者로서 장공
 
장공은 일본과 미국 유학시절 성서연구, 특히 구약성서 연구에 많은 정열을 기울였다. 또 그는 조선신학교. 한국신학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는 동안 초기에는 주로 성서학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신구약 성서 해설들은 물론 열왕기서와 요한계시록 등을 주석하기도 했다.

장공은 성서학 연구에 있어서 현대적인 성서해석학 방법론을 최초로 한국에 소개한 진정한 의미에서 성서학자였다. 그는 당시 선교사들의 지배하에 있던 근본주의자들의 교리지상주의에 반대하여 성서학을 교리신학으로부터 해방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신학대학들에서 성서학이 제대로 강의되지 못하고 교리학이나 교권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50여 년 전 장공의 이러한 용기 있는 결단은 한국의 성서연구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성서개론과 성서신학에 관한 글들에서 “正經의 歷史”에 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다. 사실상 장공은 이러한 정경사를 독자적으로 연구했다기 보다 19세기 서구의 종교사학파 등의 연구에 의해서 해명된 학설들을 한국에 소개한 것이다. 그들은 성서의 책들이 1000여 년에 걸쳐서 형성된 과정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장공은 서구의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확인된바 성서의 책들이 역사적 저자들에 의해서 기록되고 교회의 共議會들을 통해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과정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동시에 장공은 신구약성서의 문서설들을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한 학자이다. 당시 여러 학자들이 이러한 성서의 문서설들을 공부했었지만 교권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어서 감히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제대로 알릴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공은 1940년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수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신학학설들”을 자유로이 소개하고 있다. 그는 예를 들면 구약성서 특히 5경의 구성요소인 J. E. P문서들의 존재를 밝히고 동시에 신약성서의 자료설 즉 Q등에 대한 현대성서 연구의 결과들을 남김 없이 소개하고 있다.

장공은 일본과 미국에서 연구를 마치고 돌아와서 1940년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1951년 기독교 장로교회를 창설하기까지 선교사들과 그 동맹세력인 보수정통주의자들과 투쟁할 때 제기되었던 가장 심각한 대립은 성서해석의 문제 특히 “축자영감설”을 둘러싼 성서의 권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1950년 십자군에 발표한 논문 “逐字 靈感說과 聖書 無誤說에 대하여”에서 성서 축자영감설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는 축자영감설을 부인하는 논거들로서 1)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신다. 2) 성서기자는 역사적 자료들을 취사선택하여 사용하였다. 3)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어떤 과학적 지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원하시는 뜻을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서는 어떤 역사적이고 과학적 지식을 전달한 것이 아니다. 장공에 의하면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을 배격하는 것은 성서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서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무오설을 입증해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차스럽게 그 학설을 고집한다는 것은 ‘경건한 기만’이다.”

장공이 이러한 “축자영감설”을 완강하게 거부한 것은 그의 비판적 성서해석학의 채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는 성서해석의 방법들, 즉 우의적 방법(allegorical method), 문자적 해석방법, 비판적 해석방법등을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이란 것은 성립되지도 않고 성립되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성서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무오의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한국 교회 안에서 지배하고 있던 선교사들과 그 동맹세력인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던 축자영감설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1950년 잡지 십자군 5월 호에 기고한 “聖書批判의 意義와 그 結果”란 글에서 본문비판, 언어비판, 문학적 비판, 역사적 비판 등을 소개하고 나서 성서비판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성서가 비판됨으로 말미암아 그 진리가 상실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종래의 불순한 塵埃가 일소되고 그 본질적인 것이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종래에는 사이비 신학자들이 자기가 抽象해낸 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편한 대로 성경을 왜곡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문학적-역사적 비판의 결과 그런 불경건을 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소위 우의적 해석이나 교리적 해석이니 하는 것 때문에 성서기자의 본의가 무시를 당하는 일 동 벗게 되었다. 성경인물이나 사건들이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 앞에 뚜렷이 서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진정한 모습이 그림같이 재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서 편찬설에 의하여 성서기록의 여러 가지 모순이 무리 없이 해결되며 점진적 계시라는 입장에서 지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 불완전성이 만족하게 해병되어 회의와 혼잡의 구실이 제거되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장공은 그 동안 성서가 우의적 해석을 통해서 자의적으로 왜곡되게 사용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우의적 해석은 초대교회의 다섯 교구들 가운데 하나요 그리스 사상의 중심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주로 사용하던 방법으로써 철학적 사상에 의한 성서의 자의적 해석과 함께 기독교의 헬라화를 단행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우의적 해석은 이미 한국교회에서도 등장했었고 그것이 기독교의 이단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서비판학의 사용에서 장공이 진정으로 문제삼았던 것은 성서의 교리적 해석이다. 이것은 중세기 카톨릭 교회가 성서의 해석권을 교황이 장악함으로써 성서를 교리나 교회의 시녀로 삼았었다. 이러한 성서의 교리적 해석 혹은 교황의 성서해석 독점권에 대항해서 루터는 “성서만”(sola scriptura)를 제창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에서도 정통주의자들 혹은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를 교회의 교리체계와 거기에 근거한 축자영감설이라는 고정된 틀에 가둠으로써 성서를 교리와 교회의 시녀로 삼는 것을 장공은 경계하였던 것이다. 장로교회가 금과옥조로 생각하고 있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도르트렉히트 신앙고백서가 비록 교회의 삶의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다해도 그것이 성서의 진리와 권위에 선행할 수 없다는 것이 종교혁전통이고 또 장공의 생각이었다. 사실상 축자영감설이라는 일종의 학설을 성서 자체의 진리에 선행시키는 것은 성서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바벨론의 포로로 만든다는 것이 장공의 생각이다.
 
장공은 이러한 성서비판적 연구방법을 택하여 성서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데서 우리가 성서학자로서의 그의 입지를 밝혀보자면 그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입장에 서서 성서를 해석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성서해설을 마감하는 글에서 그의 입장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구약의 展望圖에서 하나님의 救續史가 죄악적인 인간 역사 속에서 꾸준히 전개되고 있음을 보았다. 이제 신약성서에 이르러 우리는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 응결됨과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 또한 그 인격 안에 成肉하심을 본다. 그리하여 그 이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임과 동시에 인간 역사의 主로 좌정한다. 이 사건은 역사 밖에서 온 것이면서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어디까지나 ‘歷史的’ 사건들이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만 기록에 남을 수 있었으며 그러니 만치 (성서가) 完全無誤한 기록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하신 일의 의미를 증언하여 우리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성서학자로서 장공의 면모를 살펴보았지만 그는 위에서도 언급하대로 인격에서의 자유정신과 학문적 탐구정신이 그의 성서학 연구에도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자유정신에서 교조적 성서해석 방법 가운데 하나인 축자영감설을 거부했고 그의 탐구정신에서 성서학을 교리학의 시녀로 삼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장공의 자유정신과 탐구정신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良心”에 대한 신뢰이다. 그는 1952년 간행된 ‘계시와 증언“이라는 책에 수록된 “이단재판의 성서적 근거”이라는 논문에서도 교권이 성서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단지 교리나 전통에 근거해서 이단재판을 하는 것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모든 성경적 사실에서 볼 때 교회가 어떤 집단적 교권을 가지고 개인의 신앙양심을 법으로 심판한다는 것은 하등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같은 책에 실린 “양심의 성서적 위치”란 글에서 “인간이 만든 죽은 敎理敎條를 가지고 산 인격의 至聖所에서 불붙는 거룩한 생명의 불꽃을 짓밟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정통신학‘이니 ’정통교리‘니 하는 것을 우리 앞에 걸어 놓고 각 개인의 良心的 판단을 억압하여 이에 기계적, 일률적으로 복종케하고 이에 불복하는 자는 법으로 처단하려는 행동을 감히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율법시대에 타락한 바리새주의를 답습하는 것이어서 온전히 비복음적인 것이다.”

장공은 당시 한국 교회의 정통주의자들의 바리새적 교리주의, 사두개적 교권주의와 대항할 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증언과 함께 인간에게 본유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자연적 계시의 증언인 양심에 의지했었다. 이러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하나님의 내재적 양심이 장공을 교권주의자들의 온갖 위협과 추방에서 그를 지켜준 방패요 산성이 되었었다. 이런 점에서 장공은 성서적 진리를 교리적 족쇄에서 구해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교권의 전횡에서 구해낸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의 종교개혁자였다. 만일 한국교회 안에 장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한국교회는 무지와 몽매, 왜곡된 교회주의자와 교권주의자들의 籠城場이 되었을 것이다.
 
2) 宗敎學者로서 장공
장공은 유교적 가정에서 태어나서 유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 한학을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학문적 삶을 시작했었다. 따라서 젊은 시절 그의 삶과 사상을 지배한 것은 유교적 원리였다. 그의 삶과 사상에서 단지 기독교 정신 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특히 가족에 관한 한 유교적 원리들과 그 실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는 장공이 한국의 전통종교인 유교와 불교 그리고 재래의 종교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우선 장공은 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유교에 관한 윤리적 덕목들을 가르친바 있지만 그것이 체계적으로 다루어져서 책으로 출판된 것은 없다. 따라서 필자는 그의 몇 편 안 되는 논문들 그것도 매우 단편적이며 “가정”이라는 주제로 쓰여진 글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유교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자.

우선 장공에 의하면 유교의 삶의 출발점은 “집”이라는 테두리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이 집 혹은 가정이 유교 사회에서는 모든 것의 중심이요 출발점이다. 이 집 혹은 가정이란 개념은 유교에서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가정은 삶의 공동체며 여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전개된다. 이 가정은 남자 가장을 중심으로 하고 아내와 자녀들 혹은 손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교에서는 구약에서와는 달리 그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가족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가정은 장공에 의하면 “부계 동족 존비 질서와 이 모든 데에 배여 있는 권위주의가 또한 철저했다.” 장공은 이러한 유교적 가족제도는 가부장제 즉 가장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형으로 구형되어 있기 때문에 철두철미한 계층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층윤리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孝道다. 자녀들은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 부모의 지시를 따라야 하며 부모에게 모조건 복종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 특히 부친의 말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부부간의 관계는 유별하여서 아내도 남편의 말에 따라야 한다. 즉 여필종부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상호신뢰에 기초한 정절로 규정되지만 그것은 단지 아내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가장이나 집안의 남자들은 이런 정절을 꼭 지킬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가부장은 첩을 두기도 하고 외간 여자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 혹은 여인에게는 이런 일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여성은 후손을 낳아서 대를 낳아주는 기능과 함께 집안 일을 돌보는 것에 그 과제가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자식을 볼 수 없는 여인은 칠거지악에 해당되어 쫓겨나거나 아니면 시앗을 두어서 손을 잊게 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유교윤리는 남존여비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윤리가 확대된 것이 三綱五倫이다.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忠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국민 전체의 가장에 해당되는 임금에게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충효라고 하는 위계에 의한 복종윤리가 유교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붕우유신과 같은 동급의 사람들 즉 양반들 사이에 평행적 인간관계도 규정된다. 그렇지만 대체로 유교에서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원리는 상하의 계층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원리를 가리켜서 禮라고 했다.

장공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유교원리 혹은 유교윤리가 계층적이라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유교에서도 “天地之間 萬物之中 唯人最貴”라고 하는 사상이 있어서 휴매니즘적 사상을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유교의 기본적 원리들은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대신 계층적 원리에 의한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 윤리가 자리잡고 있는데 장공에 의하면 거기에 기초한 신분사회는 오늘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들 가운데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하지만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는 여성들이나 어린이 등 소위 아랫사람들은 인간으로서 받아야할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계층원리가 여전히 오늘날 한국 사회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장공은 이러한 유교윤리의 형식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부모에게 아침저녁 문안하는 일(昏定晨省)이라든지 들고날 때 부모에게 찾아 뵙고 인사하는 일(出必告 反必面)등은 장공에 의하면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형식적인 것이 될 때 그것은 “예의를 위한 예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주의적 행태는 당시 서당교육에서도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생도들에게 중국의 역사와 교훈을 그 의미를 따지거나 비판함이 없이 무조건 암송하게 함으로써 기계적 사고에 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공은 이러한 유교원리나 유교윤리는 인간의 창조성을 매몰시킨다는 것이다. 유교원리 혹은 유교윤리의 계층적이고 형식적인 실천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거기서는 비판정신에 기초한 창조성을 기대할 수 없다. 장공에 의하면 오늘날과 같은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유교적 원리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장공은 유교의 원리와 그 실천의 문제를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 정신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유교의 원리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내포된 인도주의적 원리들이나 효 사상을 현대적 의미에서 재해석함으로써 한국의 전통문화와 전통사상이 가진 귀중한 가치들을 통해서 더욱 풍부한 삶을 누려야 한다고 본다.
 
그 다음으로 장공의 불교와 타종교들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자. 장공은 1964년 思想界 12월 호에 실린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는 가능한가?”라는 논문을 통해서 타종교 특히 불교와의 대화가능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논문의 출발점은 이렇다. 모든 종교는 절대자 또는 절대자관계에서 성립됨으로 절대자 외에 여타의 것들 예를 들면 경전, 신조, 교리, 교직과 같은 것들은 그것이 절대자와 밀접한 관계 있다고 해도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출발점에서 장공은 기독교 역사에서 이교 혹은 이단척결의 역사를 소개한다. 이러한 이교 혹은 이단척결의 기원을 그는 바울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본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과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하리요”(고후 6, 14-16). 이러한 바울적 전통은 313년 이후 카톨릭 교회가 로마의 공식 종교로 채택된 이후 즉 기독교가 박해받던 종교로부터 벗어나자 여타의 종교를 박해하는 것에서부터 이어져 갔다는 것이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모든 다른 종교와 철학에 대해서 전투적 정복주의의 입장을 취했었고 이러한 경향은 16세기 종교개혁 때까지 계속되었다. 카톨릭교는 자기 주변에 있던 여타의 동방종교들을 정복하고 그리스 철학들도 이단시해서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폐지해버렸었다. 이러한 전투적 정복주의는 카톨릭에서만 관철된 것이 아니고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개신교회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2.3세기에 들어와서 활동했던 순교자 유스틴(Justinus)과 같은 변증적 신학자들이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하는 클레민스(Clement)나 오리겐(Origen) 같은 학자들은 그리스 사상을 하나님의 구속사의 빛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 예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로고스론이며 이 로고스인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그리스의 철학자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에도 계시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17세기의 카톨릭 신학자면 대주교였던 알폰소 데 그레고리 같은 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각이 한 기독교 종파들의 회원, 유대교와 회교의 공동사회, 그리고 비기독교적, 철학자 등등으로서 그들의 구원을 성취하고자 한 자 또는 성취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선한 믿음을 그들의 종파 안에서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시된 참되고 선한 교훈을 그들의 종파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장공에 의하면 이러한 종교들 간의 적대적 정복주의는 점차 약화되고 19세기에 와서는 카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도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대화가능성이 점차 성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변화에서 장공은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새로운 이해를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오늘날은 계몽주의를 거쳐서 성숙한 세계가 되었으므로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자기의 교리적 우월성을 내세워 무력으로 정복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교리적 우월성을 가지고 정복하는 일은 설득해 내기도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교리와 실천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무력의 수단을 동원해서 타종교를 정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5-6세기의 이슬람처럼 칼과 코란을 가지고 무신론자들이나 타종교인들을 정복했었다. 12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십자군을 통원해서 이슬람교도들의 개종을 시도했으나 수많은 살상자만을 남기고 후퇴하게 되었었다. 16세기 카톨릭교회는 칼럼버스의 안내를 받아서 남미에 도착 남미인들을 강제로 개종하게 하던 일이나 19세기의 기독교가 정복주의적 선교론을 통해서 타종교를 지배하고 점령하던 시기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절대자이지만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들은 상대적이다. 따라서 종교들은 겸손하게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을 내리고 나서 장공은 종교간의 “대화는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그 대화의 전제로서 장공은 1) 전통적 改宗主義 중지, 2) 敎理論爭의 중단, 3) 종교상호간의 존중을 들고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종교인들은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나 개종주의를 버릴 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장공은 이러한 대화가능성과 협력가능성을 한국의 경우 1919년 3.1운동의 경험에서 보고 있다. 장공에 의하면 어떤 국가적 공동과제나 사회적 봉사를 위해서 종교들은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고 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공은 한국의 전통종교, 유교와 불교 그리고 재래종교들에 대해서 가진 기독교, 특히 정통주의적 기독교의 배타적 자세와 정복주의적 선교론을 반성하고 나라의 발전과 사회적 봉사를 위해서 같이 대화하고 협조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공적으로 천명하고 있지 않지는 않고 있다. 또 그가 이 글을 쓸 때는 종교다원주의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그는 John Hick나 Paul Knitter등과 같이 신중심적 선교신학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라너(Karl Rahner)나 한스 큉(Hans Küng)과 같은 카톨릭 학자의 포괄주의적 패러다임에 머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것은 그의 “韓國의 在來宗敎와 그리스도교”란 글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민족의 전통과 자연적 경향에 영합하는 것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그 缺陷을 補充하며 진취적이요, 자유롭고, 실존적이며 세계적인 태도를 고취하여 전적인 한국의 救續社會化를 기도하여야 한다.”

3. 장공의 윤리사상의 방법론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2권에 실린 논문들은 주로 “기독교 윤리”에 관한 내용들이 주제가 되고 있다. 편집자들은 이 논문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편집했다. 첫 부분은 “생활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자유 혼”이라는 주제로 논문들을 모았다. 장공은 이 글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즉 윤리적 생활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장공의 다른 글들이 그러하듯이 여기에 실린 글들도 어떤 체계에 따라서 하나의 책을 목표로 전문적 학술논문들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외부의 요청에 따라서 단편적으로 쓰여진 글들이다. 따라서 이 글들에서 장공의 윤리사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장공의 글들이 아무런 일관성이나 연관성 없이 쓰여졌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글들을 꿰뚫고 흐르는 사상의 脈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장공이 뚫고 들어가서 찾고자 했던 신학 혹은 사상의 맥들을 몇 가지 틀로 나누어서 그의 윤리사상을 살펴보자.
 
1) 인식론적 방법으로서 시간과 공간
필자는 기독교 윤리학의 방법론을 논구함에 있어서 인식론적 준거으로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사실상 인식론적 준거로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은 신학이나 철학이 사용하기 전에 이미 형법학에서 사용되던 개념이다. 형법학에서는 범죄의 성립요건을 찾고자 할 때 범죄사건의 시간과 공간을 문제삼는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확인 없이 어떤 범죄도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론적 준거로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이는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과 공간 개념이 인식론적 준거로 사용된 것은 무엇보다도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구약성서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계시의 시간을 일정하게 선택하고 있다. 야훼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백성들을 새로운 삶으로 전환시킬 때 자기를 계시했다. 그는 아브라함으로 불러서 새로운 민족의 조상을 만들 때 그에게 나타났으며 그가 하나님에 대한 충성으로 자기 아들을 잡아서 제물로 삼으려 할 때 거기에 나타났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자기를 계시했다. 그는 좌절 가운데 평범한 목동으로 전락하여 호렙 산에서 양떼를 치고 있는 모세에게 나타나서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구해낼 것을 요구했다. 모세와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이 홍해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 그들은 탈출하게 한다.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신광야에서 굶주리고 목말라 할 때 그들에게 나타나서 물과 먹을 것을 준다.

하나님은 동시에 자기계시의 공간도 일정하게 택하고 있다. 그는 어떤 중성적 장소에 자기를 계시하지 않는다. 그는 모세의 궁전에 나타나지 않고 억압당하는 자들이 모세와 더불어 걸어가고 있는 광야에서 자기를 계시한다. 그는 위기에 처한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는 곳에 나타난다. 그는 북왕국의 착취에 대항해서 들고일어난 아모스에게 나타난다. 그는 힘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의 편에 선다(마태 25장)
 
장공의 삶과 신학사상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준거개념을 통해서 규정해 볼 때 그의 윤리사상의 내용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말을 좀더 쉽게 표현하자면 장공이 파란만장한 역사의 장, 다시 말하자면 숱한 사건들 가운데서 어디에 서 있었는가를 물을 때 우리는 그의 삶과 사상 특히 윤리사상을 보다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 장로교가 해방과 한국전쟁 사이에서 심각한 신학논쟁과 교권투쟁 한가운데 있을 때 장공은 어느 곳(locus)을 자기의 설자리로 선택했는가를 따져 볼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인물이고 어떤 사상을 가졌으며 어떤 실천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돈 있고 힘있던 선교사들이나 그들의 막강한 동맹세력이었던 정통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이 있는 곳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장공이 어디에 나타났고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어떤 사람들의 편에 섰는가 하는 것이 밝혀질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몇몇 교회지도자를 자칭하며 유명하다는 목사들이 박정희 궁전에서 호사스런 만찬을 즐기고 있을 때 그는 YMCA 지하 다방에서 민주화와 인권을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앞으로의 투쟁을 놓고 논의하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성서에서 외로운 투쟁을 전개했던 예언자들의 시간과 장소,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장소와 시간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인식론적 방법에서 시간과 공간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간규정과 위치설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시간과 장소”의 인식론적 준거가 장공의 윤리사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2) 실천적 방법으로서 “참여”
장공의 윤리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론적 준거를 사용해 보았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장공의 윤리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실천적 준거로서 “참여”(Participation)라는 개념에 주목하고자 한다. 장공의 삶과 사상, 즉 인식론과 실천론을 결합시키는 개념은 “참여”라는 개념이다. 장공은 이러한 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하나님의 성육신(Menschwerdung)에서 보고 있다. 이러한 성육신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역사참여는 일차적으로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현실을 긍정하는 행위는 참여가 아니라 동화(Assimilation)이다. 장공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의 배후에서 인간을 시켜서 구원하는 드라마를 연출하다가 어떤 비상시에 그 클라이막스에서 그만 하나님 자신이 무대 위에 뛰어들어 가장 비장한 주역을 맡아버렸다. 이것이 골고다의 그리스도였다. 동양 역사 가운데 殷王 成湯의 祈雨祭 이야기도 이런 사건의 비슷한 하나의 그림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해 들어온 사건으로서의 성육신과 죄의 역사 한가운데서 스스로고난의 삶을 살아오신 것 그리고 악의 세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제물이 됨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속한 사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참여”의 신학적 기초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장공에 의하면 기독교적 참여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참하는 것이며 죄악의 인간사를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참여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참여란 일면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타면에 대해서는 긍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곧 현재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십자가)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새로운 역사를 긍정하는 것(부활)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챤이 역사에 대하는 태도란 언제든지 구속사적 입장과 성경 안에서 이 현실의 역사를 비판해야 하며 동시에 그 역사로 하여금 구원의 목표를 지향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참여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자인 동시에 변혁자이다. 하나님의 역사경륜에 동참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숙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공은 한국과 한국교회의 안일함을 다음과 같이 질책하고 있다. “우리 한국의 크리스챤은 해방 이후 이상한 병에 걸렸다. 그것은 자유진영의 제 우방이 기독교 국이요 우리 나라에서도 대통령, 부통령이하 고위 지도자들 중에 신자가 무던히 많다는 것으로 해서 교회가 이 시대를 자기의 베개로 삼고 安眠하는 睡眠病이다. 불신자나 그 어느 누가 그 안면을 방해하면 노발대발하여 호통을 한다.... 우리 한국신자들은 아직 우리 한국역사에 공헌한 바도 미약하며 한국의 역사를 구속사에 맞추어 가려는 점에서도 아직 초보에 불과한 데다가 기독교 윤리를 역사에 조형해 가는 데는 거의 착념도 못하고 있으면서 벌써 우리 시대가 다 된 것같이 안면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장공에 의하면 신학은 다른 학문들 특히 철학과는 달리 현실을 해석하는 학문일 뿐만 아니라 현실을 변혁시키는 학문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신학은 성육신하여 역사의 한가운데 들어오시고 거기에서 수난을 당하는 자들과 같이 길을 가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박여 죽은 그리스도의 현실을 다루는 실천적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학문일 수 없다고 또 이러한 죄된 현실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장공의 윤리에서 실천적 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4. 장공의 倫理思想의 내용들
이제까지 장공의 윤리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에서 인식론적 논거로서 “시간과 공간”개념과 함께 실천적 논거로서 “참여”의 개념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장공의 윤리사상, 특히 그의 사회윤리 사상을 몇 가지 주요 항목들을 통해서 고찰해 보자.
 
1) 교회와 국가
장공은 그의 전 생애를 맴돌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교회와 국가의 문제였다. 여기서는 우선 국가와 민족문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참여문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저항권문제를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살펴보자.
 
(1) 국가와 민족문제
앞서도 언급했지만 장공은 일본과 미국의 유학할 때 선진국들의 상황들을 보면서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국가와 민족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의 자서전 3장 “해방과 6.25동란”, 4장 “폐허에서의 재건”, 5장 “한국교회의 각성과 사회 참여”등에서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물음은 이미 그가 웅기라고 하는 산골마을의 금융조합 서기의 직을 떠나서 서울로 공부하러 올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교회와 국가의 현실과 미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그 일에 투신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및 한국전쟁 이후의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장공은 해방되던 해인 1945년 8월 선린형제단 집회에서 한 강연 “基督敎의 建國理念 - 國家構成의 최고의 理想과 그 現實性”이란 상당히 긴 글을 발표한다. 그는 앞으로의 국가건설을 위한 현실적 요건들을 제시하는데 1) 온 민족이 단결해서 함께 국가건설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야 하며, 2) 사회주의자나 자본주의자나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국가건설에 매진해야 한다. 3) 모든 절차는 민주적이어야 한다. 4) 사리사욕을 버리고 재건에 동참해야 한다. 5) 약한 자들이 소외되지 않는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여기에서 장공은 특히 이념적 대결을 지양하고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피차의 장점을 존중하고 살려서 국가건설에 에너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문제는 “이념”을 다루는 데서 상세하게 논할 것이다.
 
그는 또 한국전쟁 이후 1953년 “啓示와 證言”이라는 잡지에서 “再建의 第一譜”, “再建의 第二譜”, “再建의 第三譜”라는 글들을 통해서 새로 시작할 국가형성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그는 재건의 제일보에서 구약성서의 학개서 1장 2-6절을 중심으로 해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는 일단의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50년간의 포로생활 끝에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페르샤 왕 고레스의 승인으로 고향 땅으로 귀환한다. 그들은 우선 하나님의 역사경륜에 놀란다. 철웅성 같던 바벨론이 붕괴되었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귀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폐허가 된 고국에 돌아와서 나라의 재건이라는 과제 앞에 서게 되었다. 사람들은 국가건설, 가정건설, 성전건설의 우선 순위를 놓고 서로 의견이 갈렸다. 그 때 학개는 나서서 하나님의 성전건설을 일차적으로 완수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온 민족이 그의 뜻을 따른다. 그들은 다른 모든 것을 재건하기 전에 그들의 정신적 중추가 되는 성전을 먼저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공은 또 17세기 청교도들이 매이 플라우어 호를 타고 미국을 건너가서 우선 교회당을 건설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소개한다. “재건의 제일보는 직접 하나님께 바쳐지는 성별의 사업이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재건, 성단을 다시 세우는 것, 예배처소를 아름답게 꾸며 봉헌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장공이 성전재건을 말하는 것은 “예배당 건축에만 열중하는 것이나 대교회주의에 狂奔하자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넘어서는 “精神의 世界”, 현실주의를 넘어선 “理想”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장공은 그의 글 “再建의 第二譜”에서 새로운 국가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人間像의 형성으로 보고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인간성 再建의 운동을 추진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적 性格의 조성, 크리스챤 魂의 誕生과 育成에 이바지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거듭난 혼, 영의 사람, 양심을 상품화하지 않는 인간, 육의 정욕에 종이 되어 짐승처럼 허덕이는 존재가 아닌 인간, 공의와 사랑에 주리고 목마름같이 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그것이 우리 재건의 제2보입니다.“ 장공은 “再建의 第三譜”라는 글에서 환경친화적 국토의 균형적 건설, 인간의 연대성에 기초한 사회건설, 크리스챤 정신에 기초한 문화건설을 말하고 있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장공이 꿈꾼 새로운 나라 건설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가치, 정신적 가치, 문화적 가치에 중점을 둔 새로운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나라건설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장공은 깊은 신앙과 나라사랑이 그의 사고와 삶 속에서 밀접하게 융합되어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장공은 국수주의적 의미에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1965냔 한일국교 정상화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을 몸으로 경험하면서 국가의 문제 혹은 민족문제를 보다 냉철하게 성찰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나 일본의 민족주의 등에서 왜곡된 민족애가 얼마나 해로운 것인가를 절실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福音과 民族主義”라는 글을 통해서 유대의 선민의식에 기초한 종교적 민족주의, 그리스의 문화적 민족주의, 로마의 정치적 민족주의 등을 뛰어넘는 진정한 그리스도 정신에 기초한 인류애를 제창하고 있다. 그는 국가에 의한 민족주의의 악용도, 교회에 의한 민족주의의 오용도 거부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주의 즉 에큐메니칼, 세계적 차원에서의 민족주의 정신에 기초한 박애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장공의 민족문제에 대한 시각이 1950년대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에서 세계성을 띤 민족의식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동시에 70년대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민족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점차 싻트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2) 정치와 종교의 문제
장공은 국가와 민족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총체적으로 운영해 가는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논문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학자로서가 아니라 신학자로서 정치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들 사이의 연관성 및 그것과 관련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성과 참여적 행동을 중심으로 문제들에 접근해 간다. 그는 1946년 “落穗 以後”라는 책에 발표한 “宗敎와 政治의 因緣”이란 글에서 최초로 정치와 기독교의 관계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종교가 거룩한 세계라면 정치는 가장 세속적인 세계다”라고 규정하면서 “그렇다고 기독교도가 이 인간생활의 거의 전면적 통제력을 가진 정치를 吾不關焉格으로 남의 일보듯이 할 수 없는 것이며 죄와 불의가 많으면 많을수록 거기 대한 의와 긍휼의 공급이 또한 많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장공은 분명하게 종교와 정치의 불가결의 연결관계를 밝히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라고 하는 현실에 관여할 때 가져야 할 태도를 다음 몇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1) 국민주권의 소재가 하나님에게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은 정권욕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된다. 3) 기독교 정치인은 무엇보다도 양심적이야 한다. 여기서 당시 장공의 정치에 대한 매우 소박한 견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공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정치와 기독교의 관계를 좀더 전진된 입장에서 해병하고 있다. 그는 1967년 기독교 사상에 발표한 “기독교인의 政治參與”라는 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하나님의 세계창조와 섭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왕권통치 사상에서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정치적 결단에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방향을 택할 것, 2) 국가와 민족의 통합을 지향할 것, 3) 인간의 도덕적 정신적 가치를 구현할 것 등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예언자적 역할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기독교 정당의 설립도 반대한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인이나 성직자들이 정치활동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지만 꼭 기독교 정당이 정권을 잡거나 기독교인이 정권쟁취에 몰두할 필요는 없다는 견해를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장공은 교회와 정치의 관계문제에 있어서 엄격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루터파 전통에 서지 않고 그리스도의 왕권통치(Königsherrschaft Christi)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행사를 주장하는 개혁교(장로교) 전통에 서고 있다. 그는 이러한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의 정치참여를 인정하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댜 한다고 보고 있다.
 
(3) 抵抗權 問題
장공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저항권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정권의 출현과 그에 의한 정치적 자유의 박탈과 인권탄압이 자의적으로 자행되자 그는 정치적 권력에 대한 저항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1967년도 思想界란 잡지에 게재한 “不義에 대한 鬪爭도 信仰이다”라는 글을 발표한다. 그는 이 글에서 저항권의 기원을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주전 8세기의 사회적 예언자들의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본다. 이들 예언자들이 추구했던 목표는 하나님의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장공은 “너희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고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않으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않는다”(사 1,23)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회적 불의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즉 사회적 불의란 권력자들이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례는 과거나 지금이나 다른바 없다는 것이 장공의 생각이다. 장공에 의하면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나 국가는 악의 세력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국토가 넓고, 돈이 많고 군대가 강해도 한 나라에서 정의가 사라지면 그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에 대해서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탁한 사명이다. “불의가 있을 경우에는 어느 편, 어느 누구의 소행이든 간에 우리는 이를 묵과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 땅에 의를 세우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공은 이러한 정치적 봉사 즉 불의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수의 삶과 사상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예수는 불의를 행하면서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하고 있다(마 23장). 예수는 불의와 악을 행하는 헤롯을 공공연히 비판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권은 당연한 처사라는 것이다.

장공은 그리스도인들의 저항권 행사에서 가장 유효한 수단을 “말씀”선포에서 찾고 있다. 예언자들의 심판선포, 요한의 광야의 외침, 예수 자신의 설교등이 바로 저항권 행사였고 그것의 유효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장공은 이러한 저항의 예로서 히틀러 치하에서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를 들고 있다. 니묄러 목사는 당시 히틀러의 독재와 폭정에 항거하던 사람들로 구성된 고백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예언자적 설교가 그를 오랜 기간동안의 감옥생활로 몰아넣었다. 그는 하나님과 정치적 권력 사이에서 결단해야 할 때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 그리스도인의 표본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칼이나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그는 반대한다. 정의를 위한 투쟁은 그것이 정의를 위한 것이니 만치 그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공은 정치적 권력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어서 책임적이어야 한다고 보고 따라서 권력은 지배수단이 아니라 봉사수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이 그 봉사의 기능을 포기하고 지배수단으로 전락할 때 “우리는 책임사회의 일원이라면 모든 종류의 권력사용에 정당성을 요구하고 그것을 감시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장공은 저항권을 성서적 전통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고 자연법적 이성에서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시민을 “책임사회의 일원”으로 파악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러한 책임성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장공은 그리스도인들과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책임사회를 위해서 힘을 합해서 협력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2) 이데올로기 문제
장공은 해방 이후 그의 생을 마칠 때까지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거기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것은 분단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모든 지성인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의 경험이기도 한다. 장공이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직후 “기독교와 건국이념”이른 글에서부터라고 생각된다. 그는 당시 건국의 방향을 둘러싸고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갈라서서 대립투쟁 할 때 이 글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최초로 천명한바 있다.
 
(1)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우리가 서론적 고찰에서도 살펴본 바이지만 장공은 인간의 “自由”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는 시민적 자유와 기독교 신앙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단 장공을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해방직후 즉 1945년 8월에 쓴 글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최상의 가능성으로 생각했지만 기독교적 영향이나 국민의 민도가 낮은 상태에서 기본적 자유들이 보장되는 국가형성을 다음과 같이 희망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신앙과 예배의 자유, 사상,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부만 수립되면 감사할 것이다. 이런 자유가 호상충돌 되는 때 각개의 경계선에 대한 호상경의를 강제하는 것은 정부의 할 일이다.”

그러나 장공은 한국전쟁 이후 1953년 5월 思想界에 기고한 글 “民主主義論”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본인의 신념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1) 개개인의 인격의 존엄성 보장, 2) 개인의 자유의 보장, 3) 인간성에 대한 신뢰, 4) 사회적 연대성, 5) 권위의 내재 등을 들고 있다. 여기서 장공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로서 네 번째 제시하고 있는 “사회적 연대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의 의하면 민주주의에서 주장되는 개인적 자유가 사회적 연대성을 거부하고 사리획득의 원리로만 사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장공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의 시장경제 원리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장공은 같은 글에서 민주주의의 “缺陷”에 대한 비판도 가하고 있다. 그는 우선 민주주의의 결함으로서 “經濟的 不均衡”을 들고 있다. 그는 개인적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 자본주의가 오늘날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부의 偏在와 그에 따르는 실직 무직자의 증대, 식민지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생산품의 덤핑(축적), 주기적으로 오는 恐慌, 이런 것을 다소 인위적으로 시정하며 가봉한다해도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통제경제정책을 강화하면 민심의 해이와 함께 독재와 강박을 강화하여 종당은 공산주의 정책과 다름없이 될 것이다. 그러노라면 인간성의 연한 촉수는 저절로 시들어버린다.” 특히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자본주의의 矛盾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기주의를 근거로 하고 자본을 萬能의 武器로 하여 인격을 機械化, 奴隸化 하며 불의의 策謀와 掠奪과 戰爭으로 시장을 獨占하여서 각자의 貪慾을 채우려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가득 찬 자본주의를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공은 민주주의의 결함으로서 여기에 참여해야 할 민중들의 無知, 無能 無關心으로 인해서 ‘국민의 정부’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결함은 그것이 종교를 떠나서 세속주의와 결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장공은 민주주의를 오늘날의 정치체제에서 가장 유효한 체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가 아니라 현실적인 차원에서 요청된다고 보고 그 당위성과 실천을 강조하는 다수의 글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한국 敎會와 民主參與”, “한국가정의 전통과 民主主義”, “民主主義는 피할 수 없다”, “民主主義는 가정에서부터”, “한국 民主主義를 위하여”, “民主한국을 위하여”, “民主主義 운동과 한국교회”, “民主原則은 준수되어야 한다” 등 민주주의의 고귀한 가치와 그것의 실현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 글들은 주로 한국의 권위주의적 현실과 여기에 대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장공은 이러한 (자유)민주주의가 가진 모순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민주주의를 제창하면서도 그것이 가진 모순들을 시정하는 길을 늘 모색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길의 모색을 사회주의에서 찾기보다는 기독교의 예언자들과 예수의 민중전통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2) 사회주의 문제
社會主義 혹은 共産主義 문제는 장공에게서나 우리 모두에게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장공은 이미 1920년대 중반 청산학원 유학시절 일본, 특히 일본대학들 안에서의 공산주의 운동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곳에서 대학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서회”와 같은 사회주의 학생단체들에 잠시 참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자기가 믿고 있던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탈퇴하고 만다.

장공이 사회주의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된 이후부터이다. 그는 1945년에 쓴 글 “基督敎의 建國理念”이란 글에서 사회주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여기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매우 객관적이고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공산주의 자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회과학적으로 경제기구의 실상을 검토하며 그 더 좋은 재건을 기도하는 점에 있어서 존경할 것이며 그것이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을 드러낸 것인 한 우리는 그것을 수락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신앙과 예배의 자유, 사상 및 언론, 출판의 자유, 개인양심의 자유를 인정한다면 “공산주의나 기타 여하한 정부라도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우선 감사히 수락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장공은 또 이렇게 말한다. “착취당하는 대중의 생활향상과 인간적 존엄을 위하여 경제와 정치기구의 가장 과학적인 개혁을 행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전연 비기독교적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공은 공산주의의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정신적 사상적 방면에 있어서 唯物論, 無神論的 견해를 전체에 강요하는 때 우리는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개인의 존엄을 위하여 감연히 거부할 것을 각오하여야 한다.” 그러나 장공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이러한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유물론, 무신론에 두고 있는 것에서보다는 기독교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실천적 적대행위에서 찾고 있다. “이 이론 방면보다도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沒理解한 敵對行動을 취하여 神을 冒瀆하며 聖域을 蹂躪하고 신자를 冒瀆殺害하여 悖倫의 道를 敢行하는 등 심히 불쾌한 인상을 남긴 것이 그 가장 큰 원인인줄 안다.”

장공이 공산주의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문을 쓴 것은 1953년도 8월호 사상계에서였다. 그는 이 글에서 아놀드 토인비와 사회학자 소로킨(Sorokin)의 이론을 들어서 서양문명의 발달사를 개괄하고 나서 서구 문화의 세기말적 상황에 등장한 공산주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현대문명의 死前에 생긴 최종의 발악으로서 자기몰락을 재촉하는 것이요 결코 새 시대 창건의 역군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단언한다.” 장공은 공산주의를 이렇게 규정한다. “전투적 무신론, 절대 현세적 과학만능 신봉, 유물적 인생관의 강화, 힘의 철학의 무자비한 응용, 철저한 전쟁윤리, 도덕의 상대성 등을 거쳐 광신적이라 할 만치 신봉하고 있다.”

그가 1945년의 입장과는 달리 이렇게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 동안의 한국전쟁의 경험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산주의가 제시하고 피압박자들의 해방,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 같은 이념하의 국제적 연대성, 경제정의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들이 과도한 선전물에 속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장공이 관심하는 것은 공산주의의가 가진 이런 경제정책이나 사회정책의 문제성 보다 그것이 가진 종교적 성격을 더 문제삼고 있다. 장공은 공산주의 철학이 가진 메시야주의의 고양, 공산주의 사상의 절대화, 그들의 사상서의 경전화, 레닌묘의 참배, 지도자의 신격화 등을 문제삼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을 통해서 경험적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공포, 숙청과 전연 자유가 거부된 그들 밑에서 자유인으로 어찌어찌 살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이다. 우리가 만일 인간이라는 의식이 있다면 무엇을 위하기 전에 벌써 질식해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고장이 그들의 傘下인 까닭이다.”

이러한 장공의 철저한 반공적 입장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다소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반공주의자가 됨으로써 무조건적으로 맹목적 자본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왕권통치라고 하는 관점에서 세상의 이데올로기들을 상대화하고&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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